기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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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향인 순천에 내려가기 위해서 기차표를 사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고향을 떠나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공부했다. 고등학교 시절을 도시에서 보내면서 점점 도시가 익숙해졌고, 대학교도 고향으로부터 고등학교보다도 더 먼 곳으로 떠나게 됐기에, 대학을 끝마쳤을 무렵에는 이미 고향에 내려가지 않은 지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고향에는 부모님이 계셨고, 내 동생과 친구들도 여전히 있었지만, 다들 내가 고향으로 내려오는 것보다는 직접 도시에 찾아오고 싶어했기에 그 이후로도 내가 고향에 내려갈 일은 없었다. 그렇게 지내면서 동생도 고향을 떠나고, 부모님도 고향을 떠나고, 친구들도 모두 고향을 떠나면서, 내가 더 이상 고향에 갈 이유는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렇게 40년이 지났다. 나는 이제 50대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휴가를 얻은 나는 문득 나는 내가 고향에 가지 않은 지 40년이나 지났다는 걸 깨달았다. 마침 순천 근처에 있던 참이기에 나는 한 번 고향에 내려가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표를 구해 기차역으로 걸어가던 참이었다. 한 청년이 이렇게 물어보고 있었다.

"무진 가는 표 하나 주세요."

조금 웃음이 나왔다. 무진이라니, 소설에 나오는 곳을 진짜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대단한 문학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소설 속을 찾아가고 싶어하는 청년을 지나쳐 기차를 기다리기 위해 역에 들어서, 계단을 오르며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렸을 적 살았던 동네, 친구들과 같이 놀았던 공터, 중학생 시절 들렸던 곳들. 전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어렸을 적 내가 살았던 집에서는 커다란 책장이 있었는데 벽과 책장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있어서 그사이에 꼼지락대며 들어가서 책을 읽고는 했다. 친구들과 같이 놀았던 공터엔 조그만 시소가 있어서 누가 무거운지 겨뤄보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첫사랑이 있었다, 밝은 해가 비치는 여름날, 그 아래에서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과 뽀얀 얼굴이 정말로 예뻤었다.

그런 추억을 떠올리던 사이 기차가 역에 들어왔고 나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에 타고 자리에 앉자 옆자리의 앉게 된 사람은 다름 아닌 아까 전의 그 청년이었다. 청년을 보자 살짝 놀랍기도 했지만, 그보단 호기심이 더욱 앞서는 것이었다.

"이보게, 청년. 자네 혹시 무진까지 가나?" 나는 조용히 웃으면서 청년에게 물었다.

"아, 네. 무진까지 간답니다." 청년이 손에 쥐고 있던 기차표를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무진행.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살짝 놀랐다. 무진이라는 곳이 있었는지 생각해봤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무진은 단지 소설에 나오는 곳일 뿐이었다. 하지만 청년이 보여준 기차표에는 정확한 글씨로 무진행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러자 문득 소설에 나온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0년. 내가 고향을 떠난 것도 무려 40년이나 지난 일이다. 그 사이에 고향에도 여러가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어디까지 가시나요?"

"아, 나도 그렇다네." 나는 당황을 숨기며 말했다.

"선생님도 무진까지 가시나 보군요. 어쩐 일로 가시는지?"

"아, 이번에 오래간만에 고향에 내려가는걸세. 고향을 떠난 게 40년 전 일인데 세월도 참 빠르지."

"40년이라니, 저는 상상도 못 할 정도네요. 강산도 4번이나 바뀔 정도니까요."

"그렇고말고, 솔직히 내가 예전에 기억하던 모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기도 하네, 허허."

나는 조용히 웃었고, 청년도 조금 웃었다. 하지만 청년의 얼굴에 마치 고목을 쳐다보며 그 오랜 삶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이 얼핏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나저나, 그럼 자네는 어쩐 일로 가는가? 나처럼 40년 만에 고향 가는 길은 아닐 테고, 갖고 있는 짐도 적던 걸 보면 여행 가는 길도 아닌 거 같은데."

"아, 저도 고향에 가는 길입니다. 40년은 아니지만, 부모님도 계시는데 너무 오래 찾아뵙지 않은 것 같아서요. 이번 기회에 기차 여행도 할 겸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옆자리에 앉은 청년과 나는 몇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내가 어렸을 적 내가 살았던 동네의 이야기를 해줬다. 동네의 풍경과 가게들, 뛰어놀았던 공터, 중학교 이야기. 중학교 이야기를 끝낼 때쯤 마치 전래동화를 듣는 아이처럼 조용히 듣고 있던 청년은 문득 그 중학교가 무진중학교가 아니냐는 말을 꺼냈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무진중학교가 아니었지만, 청년이 해주는 말을 들어보니 내가 알던 곳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가는 길에 있는 언덕이나, 오래전부터 심겨 있던 소나무, 동상까지 내 기억 속에 있는 곳과 같았다. 그러나 어째선지 학교의 이름만은 달랐다.

"무진중학교라… 아마 지명을 바꾸면서 같이 학교명도 바꾼 모양이지. 내가 없던 사이에 정말 많은 게 바뀐 모양이야. 정말로 세월은 무서운 거지. 세상은 순식간에 바뀌는 법이니까"

그리고 문득 청년이 내 중학교를 알고 있을 정도로 근처에 살았다면 내가 살았던 곳 근처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내가 살던 곳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물었고, 청년은 내 질문 몇 가지에 정말로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내가 어릴 적 살았던 우리 동네, 자그만 집들이 오순도순 모여있고, 한 집에서 큰소리를 치면 옆옆집까지 깜짝 놀랐고, 골목마다 뛰어노는 아이들이 있었던 우리 동네는 이젠 철거돼서 아파트가 들어섰다고 한다. 내가 어릴 적 뛰어놀던 공터, 넓직한 흙바닥에 아이들이 모여서 뛰놀고, 숨바꼭질, 딱지치기하고 시소를 타던 공터에는 커다란 마트가 들어섰다고 한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 친구들과 하교하며 군것질을 하고 여름 햇볕 아래에서 운동장에서 뛰어놀았던 중학교는 이제 예전 건물은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세웠고, 하굣길의 가게는 문을 닫았다고 한다.

슬픈 일이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향이 이젠 정말로 기억 속에만 남아서 추억으로밖에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마치 오랜 친구를 잃은 듯한 기분이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는 것이 제일이라 하지만 추억을 추억으로만 남겨야만 한다면 그것은 괴로운 일일 따름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중 기차는 무진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우리 둘은 각자의 짐을 챙기고 역에서 내렸다. 그 안개 낀 역에 발을 디딘 순간 나는 이 역이 내가 40년 전 내 고향을 떠났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 내 동생이 나를 배웅했던 그 역인 걸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역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모든 구석 하나하나가 더 이상 과거의 그 시절과는 같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청년과 같이 역을 나선다고 해도 내가 가는 곳은 내 고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어렸을 적 기억은 이제 기억일 뿐이다.

그렇게 나는 청년과 헤어져 역의 의자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무진에 오기 전까지 난 이 역의 계단을 오르던 내 모습까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치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내 모든 기억이 희미하고 회색빛으로 물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젠 더 이상 내 고향을 찾을 수 없었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더 이상 어머니도 아버지도 동생도 친구들도, 그리고 고향조차 없는 안개 낀 무진일 뿐이다. 내 고향은 이제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는 애달픈 회한 속에서만 찾을 수 있을 곳이다.

안개 낀 무진의 기차역에서 의자에 앉아, 전부 변해버린 이곳에서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한 번의 숨을 쉬며, 내 안에서 추억을 내뱉고 안개를 들이마셨다. 내 안에서 기억을 내뱉고 무지를 들이마셨다. 내 안에서 고향을 내뱉고 무진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가 무진을 떠날 때 난 내가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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