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떠나기 전 한 잔
평가: +4+x

수 년 간 모든 기쁨이 그녀를 떠나갔지만, 그래도 아직 위스키가 위더스 박사에게는 있었다. 소련 놈들이 그녀의 조국과 부모를 죽였다. 그녀의 남편을 앗아간 소총탄은 여전히 그녀의 다리 속에 박혀서 그 살갖 위의 흉터 조직과 끈끈하게 묶여 있다. 이제 지팡이는 별 도움도 되지 않는다. 큰아들은 죽었고, 막내애도 아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간 아들은 아마 자기 어머니를 “분서꾼”이라고 부르고 있을 터다. 검은 별들이 뜬 노란 하늘 아래서 춤을 추었던 것이 언제인지 너무 아련해 마치 전생의 일 같다. 그 신(神) 모양 구멍을 주시하지 않았다면 천 번이고 다시 춤을 출 수 있었으려만. 그녀는 스리포틀랜즈에서 잘 살았고, 또한 마음을 잃었다. 그녀는 이름이 힘을 갖고 있는 소림 속 오솔길에 발을 디뎠고, 자신의 순수를 잃었다.

하지만 위스키는? 위스키는 신경쓰지 않는다. 위스키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해준다. 위스키는 죽지도 않는다. 그녀는 플라스크를 한 번 더 벌컥이고 바의 문을 열었다. 문간의 남자가 한국어로 무어라 말하며 자신에게 무언가를 달라는 몸짓을 했다.

“내가 미성년자로 보이냐, 빡대가리야?” 위더스 박사는 그를 밀어내고 지나가려 했으나 남자는 팔로 그녀를 가로막고 먼젓번의 문장을 되풀이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계속 영어로 떠들었다. “난 올해 예순일곱 살이라고. 이놈의 나라에선 음주 가능 연령이 무슨 일흔 살이기라도 한 거야 뭐야? 내가 지금 술 한 잔 뚫어보겠다고 지랄하는 10대 얼라로 보여?” 문지기는 말이 없었으나, 자기 손가락만 재차 꿈틀거렸다. “좋아.”

위더스 박사는 외투를 뒤적여 여권을 끄집어냈다. 사십 몇 년 전이었으면 눈 한 번 깜빡해서 이런 짓은 그냥 생략할 수 있었던 터였다. 그녀는 여권의 자기 사진이 붙은 곳을 펼쳤다. 문지기가 여권사진을 보더니, 그녀를 보더니, 여권사진을 다시 보았다. 여권사진 속 여자는 좁은 갈색 눈썹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이 여자와의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그녀는 안경을 쓸 필요가 없었고, 머리카락도 서리가 앉으려면 아직 멀었고, 얼굴에는 그녀가 그렇게 싫어하는 흉측한 검버섯이 단 하나도 없었다.

“됐냐?” 위더스 박사가 여권을 주머니에 도로 넣고, 문지기가 팔을 바 안쪽을 향해 흔들었다. 그녀는 잘 안 들리게 투덜댔다. “예수님 맙소사. 난 분명히 남한이 덜 억압적인 쪽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바는 잠잠했다. 하지만 때는 8시 정각에 가까워져가는 화요일 밤이었다. 온갖 죽돌이들이 잡탕으로 뒤섞여 있는데, 그 중 특히 삐져나와 두드러진 무리가 있었다. 한 뚱뚱한 남자와 여자가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여자는 몸집이 남자의 절반도 안 되어 보였고, 뉴스보이캡을 쓴 채 냉정한 시선을 발하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뻘겋게 달아오른 손가락을 삿대질을 하며 무어라고 한국어로 소리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머리채를 붙잡아 바 목로에 그의 얼굴을 찍고 그의 팔을 등 뒤로 꺾어 버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남자가 고통으로 소리를 지를 때가 되어서야 여자는 팔을 풀어 준 뒤 주정뱅이가 출구를 향하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것을 보고 화난 한국어로 소리쳤다. 순간 두 여자의 눈이 마주쳤고, 위더스 박사는 공황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여, 클레어.” 좀전의 손님이 문 밖으로 철퍽 나가자빠지는 사이 여자가 영어로 말했다.

“안녕, 호야.” 위더스 박사가 절뚝거리며 목로를 향했다. 그녀의 지팡이의 나팔꼴 무쇠 끝이 목제 바닥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렸다. 그녀는 다리의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며 바스툴에 몸을 얹었다. 지팡이는 목로 가장자리에 걸었다. 이미 깔끔한 유리잔 가장자리를 행주로 문지르는 젊은 한국인 여자의 눈은 유심히 그녀를 계속 살피고 있었다.

“진정해. 타격조 부르려고 온 거 아니니까.” 위더스 박사가 말을 이었다. “고등사령부에 알리려는 것도 아니고, 아무한테도 안 말해. 그치들은 내가 지금 여기 있는 줄 알지도 못하거든. 그쪽에서 알기로 나는 지금 내 사무실에 앉아서 보안 향상을 위해 "길"을 전용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특별히 재미없는 학술논문을 읽고 있단 거지. 그리고 그건 사실이야.”

“기적술 실력이 좀 늘었나 보군.”

“사실 과학에 가까운 거지. 우리 쪽 쥐새끼 중 하나가 붙잡고 있는 프로젝트만 있으면 자네도 문자 그대로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게 만들 수 있을 걸. 대신 집중력도 반토막나는 게 문제지만. 내가 좀 산만하게 보인다면 용서 좀 해주길 바래.”

“나한테 널 용서하라고 말해오는 마지막 인간이 네가 될 줄이야.” 호야가 쏘아붙였다. “네가 그렇게 당당하게 여기 돌아온 것 정도야 별로 놀랍지도 않아. 그게 언제나 네 배짱이었자.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그 순간이동하는 의자는 이제 더 남은 게 없지만, 그래도 네가 불을 싸지를 만한 다른 것들은 어떻게 찾아볼 수 있지.”

“잠 못드게 하는 것들로부터 인류를 보호해 온 지 80년인데,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기억하는 건 그 씨발놈의 의자뿐이란 거지.” 위더스 박사는 애석해졌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플라스크를 홀짝였다. “뭐 하나 만들어줄 수 있겠어?”

“위스키 사워, 락으로?”

“그거면 딱 좋지.”

“아이고 미안해라 클레어,” 호야가 말했다. “지금 있는 게 100년 묵은 소주밖에 없네. 좀 섞어주긴 하겠다만 네 허술한 늙은 몸이 견뎌낼지 모르겠어.” 위더스는 자기 왼쪽에 앉은 손님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 손님이 홀짝이는 텀블러잔에는 얼음과 호박색 액체, 아마 잭다니엘이 가득했다.

“좋아.” 박사가 말하며 플라스크 뚜껑을 닫았다. “나도 말 좀 하자. 대신 널 귀찮게 하지는 않을게.”

“좌우간에 여긴 왜 온 거야?” 호야가 물었다. “온다는 말도 없었고, 네가 우연히 서울에 나타날 일도 없을 텐데.”

“오고 싶으니까 왔지.” 위더스가 말을 시작했다가,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심호흠을 내쉬고 입술을 오므렸다가, 마침내 생각을 끝냈다. “사과하고 싶었어.”

호야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닦는 척 하던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었으나, 그 시선은 노려봄에서 찌푸림 정도로 완화되었다.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위더스가 술에 취했다. “자네가 날 판단하거나 무슨 밈적 개똥같은 거시기를 나한테서 찾으려 들지 않아도, 나 지금 충분히 힘들거든.”

“아주 흔해빠진 불신이로군.” 호야가 대답했다. “그리고 너한테 사과 빚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텐데, 왜 나한테 온 거지?”

“내가 사과해야 할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으니까.” 위더스 박사가 말했다. 평소답지 않은 우울질의 기색과 함께. “죽지 않았으면 나하고 말을 하지 않으려 하거나. 피터가 죽은 뒤로 알렉시는 본 적도 없고 소식도 들은 게 없어.” 클레어 위더스는 그 이름들을 오랫동안 입밖에 꺼내지 않았었다. 두 여자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호야의 바 문이 비명소리를 내며 열리기 전까지.

“난 사과를 한다면 분서꾼들 쪽으로 배를 갈아탄 걸 사과한다는 줄 알았는데.”

“난 그 씨발놈의 별명 존나 싫어.” 위더스가 주정을 부렸다. “그 심장에서 피 흘리는, 나무박이 친구들도 설사 책이 자기들을 잡아먹으려 든다면 그 책을 불싸지르려 할 거라는 건 자네도 잘 알잖아. 하지만 난 오늘 여기 그걸로 토론하자고 온 게 아냐. 나는 몇 년간이나 거기 드나들었고, 거긴 내가 아직 못 마친 일들이 산더미로 있다고.

언제나 생각을 하기를, 만일 내가 단호하게 행동했다면, 내가 하는 행동을 내 스스로부터 완전히 믿었더라면, 내가 손에 있던 시절로 돌아갔던 것처럼 자문하고 생각에 잠기지 않았더라면, 임종을 맞아 한 무더기의 실수들만 돌아보고 있는 신세는 안 될 텐데, 하지만 우린 여기에 와 있네.

나는 후회로만 가득한 늙은 여자일 뿐이야, 호야.” 위더스가 말을 마쳤다. “용서 같은 건 바라지 않아. 그리고 아마 난 용서받을 자격이 없을 거야. 그러니 넌 아무 것도, 아무 말도 안 해도 돼. 다만 나는 내가 얼마나 죄스러운지 네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거야. 아담을 죽게 만든 것, 그 멍청한 책을 개정한 것, 그리고 내가 손을 떠나올 때 네게 했던 말들 —”

“날 ‘것(thing)’이라고 했었지, 클레어.” 호야가 말했다. 그녀는 양손에 주먹을 쥐고 옛 동료의 양편 목로를 망치처럼 내리쳤다. “감히 날 내 어머니하고 비교해? 우리는 각자의 부모가 되어가는 게 아냐! 만일 그랬거든 알렉시 위더스는 어깨에 대륙만한 감자칩을 올리고 다니며 거들먹거리는 똥덩어리가 되었겠지!”

“나도 알아!” 위더스 박사는 격통이 다리에 달리자 비로소 자신이 자리에서 일어섰음을 깨달았다. 바의 다른 세 명이 모두 그들을 바라보았고, 문간의 문지기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앉아, 등신아. 해치려는 게 아니니까.”

“괜찮아, 앉아.” 호야가 그에게 장담했다. “내가 알아서 해.” 그가 자리에 다시 앉았고, 호야도 목로에서 몸을 뺐다. 다시 침묵이 가라앉고, 손님 수가 두 명으로 줄었다.

“별로 자랑할 게 못 되는 일을 많이 해 왔고, 그런 말도 많이 해 왔지.” 위더스 박사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목로의 나무결에 붙박혀 있었다. “자네는 날 처음 뱀의 손에 받아준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또 재단이 잭을 데려가 버렸을 때 끝까지 날 지지해 준 사람들 중 한 명이었어. 자네한테 더 잘 했어야 했는데, 그래서 미안해.” 호야는 말이 없었다. 위더스 박사는 체중을 바꿔 실었고 의자에서 미끄러졌다.

“알렉시 아직 살아 있어.” 호야가 말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듣기로, 스리포틀랜즈에 가정을 꾸렸다더군. 마누라도 있고 애도 한 명이라던가. 언제 한번 찾아가 봐.”

“못 해.” 위더스 박사가 목로에 걸린 지팡이를 집으며 말했다. “내 죽을 자리는 내가 팠어. 그러니 나는 책임지고 거기서 죽어야지. 다시는 자네 문간에 그림자 드리울 일 없을 거야. 난 할 말 다 했어. 끝났다고. 알렉시 볼 일 있거든, 이 애미가 많이 그리워한다더라 그 말만 전해 줘.” 박사는 바텐더에게 등을 돌리고 문을 향해 힘든 걸음을 떼었다.

“클레어. 기다려.”

돌아보니 호야가 한쪽 팔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의 다른 손에는 조니워커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위더스 박사는 외투를 뒤져 플라스크를 꺼냈고, 호랑(狐娘)이 그것을 철철 넘치도록 채워 주었다.

“자. 길 떠나기 전 한 잔.” 호야가 뚜껑을 닫은 플라스크를 돌려주었다. “언제 또 보지.”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에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