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서 한 달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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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연초의 겨울은 유난히 춥다. 창문 밖에 눈보라가 친다. 바깥에 흰 안개가 내려오는 것과 반대로 담배 연기가 위로 올라간다. 담배 연기 사이로 여러 시험관들이 보인다. 시험관 속에는 작은 존재들이, 5개월 전에서 1개월 전에 생긴 존재들이 플라스크 속에 들어있다.

한의 양 손에는 5개월 전에 온 편지와 1개월 전에 온 편지가 들려있다.

귀하와 계약한 변칙 존재의 수명이 다 된게 확인되었습니다.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 있으므로 새로운 변칙 개체를 보내주실 걸 요청하는 바입니다. 다만 이전에 온 개체는 인간적인 면이 너무 부족하다는 점으로 지적 받은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개체는 인간적인 감정을 조금 더 추가해 주기 바랍니다.
-허먼 풀러의 불온한 서커스-
████/8/25

귀하가 보내 주신 변칙 개체에 대한 관객들의 호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따라서 계약 기간을 조금 더 연장하고자 연락을 보냈습니다. 다만 최근에 받은 변칙 개체가 현재 탈출했음 또한 알려드립니다. 인간적 감정을 넣음에 따라 용이한 통제가 어려워진 것이 그 이유로 추측됩니다. 따라서 전에 보낸 요청은 무시하시고 감정을 제거한 변칙 개체를 보내 주기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허먼 풀러의 불온한 서커스-
████/12/25

계약이 끝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지만 마냥 괜찮은 일일까.

한이 다섯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플라스크 속 덩어리들이 연기에 가려져 사라진다. 맨 왼쪽의 덩어리는 거의 완성된 형태였다. 아마 다음 주 중엔 배송할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알고 있을까? 내가 만드는 저들은 과연 누구일까?

이 일로 나는 죄를 지은 걸까?

한은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려움? 짜증? 뭔진 모르겠지만 상당히 더러운 기분이었다. 요구 사항에 맞추느라 몇 주 더 밤을 새느라 그런가? 아니면—

그래, 난 저들을 어떤 이들로 보고 있지?

아들? 딸? 아니면 그 서커스 이들처럼 도구로 보고 있나?

어느새 한 개비가 다 타들어갔다. 여섯 개비 째의 불을 위해 라이터를 킨다.

차박

문쪽에서 소리가 났다. 누군가 물풍선으로 내리치는 소리.

한은 문을 열었다. 조금 앳되보이는 소년이 서있다. 눈과 입과 손에서 피와 같은 물감이 흘러나왔다. 흘끗 보니 아파트 복도에 온통 붉은 물감으로 장미꽃이 피어있었다. 소년의 상태는 심각해보였지만, 정작 소년은 웃고 있었다.

소년이 한을 밀치고 들어와 작업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한은 막지 않았다.

한과 소년은 서로 노려봤다. 한은 이 아이를 알고 있었다. 몸에 나오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아이. 자신이 팔려간 그해 크리스마스에 탈출한 아이. 나의 아이.

소년은 한에게서 눈을 떼고 작업대를 보았다. 네 명, 아니 네 개의 덩어리가 든 플라스크. 소년의 형제자매들이 거기에 있었다. 소년은 물감이 흐르는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모든 물감이 흘러내리고 나서 피눈물의 흔적만이 얼굴에 남았다.

소년은 작업대 위에 놓인 모든 플라스크를 작업대 밖으로 내던졌다.

플라스크의 챙그랑 소리, 살덩어리와 수용액의 철벅거리는 소리가 만들어내는 광경이 무언극처럼 한의 감각에 들어왔다.

한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 피어오르다 사라진다.

한은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몰랐다. 웃는 표정인가? 우는 표정인가? 아니면… 무표정인가?

소년은 계속 한을 바라보았다. 들어올 때처럼 웃는 얼굴이었다. 눈에서 흐르던 피와 같은 물감의 눈물이 소년의 볼 밑으로 방울져서 떨어졌다. 어느새 소년의 양손과 의자의 쿠션이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소년과 한은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소년의 피눈물 자국이 서서히 사라졌다. 소년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소년은 이제 잠자듯이 작업대에 엎드렸다. 물감은 더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한은 소년의 수명이 다했음을 깨달았다.

한은 소년의 옆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소년의 등에는 총알 구멍 여러 개가 나있었고, 오른쪽 팔뚝과 왼쪽 발목에 맹수의 이빨자국이 있었다. 다른 개체들보다 수명이 빠르게 소모되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한은 바지에 무언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 한은 그제서야 자신이 울고 있음을 알았다.

소년의 물감과 섞이는 눈물을 닦은 뒤, 한은 미처 피우지 못한 여섯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가 타들어가는 동안 한은 깨진 플라스크과 소년을 지켜봤다. 그리고 1달 동안 계속 고민했던 생각들을 곱씹었다.

난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 아이들은 누구인가?

사람이 만든 사람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질문들이 한의 머릿속을 흔들었다.

그리고 한은 엎드린 소년의 팔 밑에서 삐져나온 물감 자국을 발견했다.

한은 소년의 시체를 똑바로 앉혔다. 거기엔 붉은 물감이 그림이 아닌 글자를 이루고 있었다.

몇 번째일지도 모를 담배를 끄고 한은 한숨을 쉬며 한 달 전에 온 편지의 답장을 썼다. 계약을 해지하고 싶다는 내용의 답장을.

한은 수건을 들어 붉은 물감을 닦으려 했다. 하지만 물감은 닦이지 않았다. 어쩌면 물감이 아니라 소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흘린 피라서 새겨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Merry
Christmas


"이 인간들에게 감정을 더 많이 넣을 수 있나?"

한은 시험관에서 고개를 들었다. 응접실처럼 생긴 실험실 소파에 박사가 앉아있었다.

"왜 그러시죠?"

"왜라니? 인간과 비슷하게 만든 장난감이면, 인간과 완전히 똑같아야 사람들이 좋아하는 법이야. 어설프게 닮으면 오히려 반감이 드는 법이라네."

"장난감이라……. 결국 목적은 그거군요. 그럼 감정을 가지면서도 장난감이기 때문에 복종하는 정도가 강해야 겠군요."

"그렇지. 그래서 가능하긴 한 건가?"

"딱 잘라 말하죠. 불가능합니다. 감정을 넣으면 자연스레 복종하는 정도가 떨어져요. 생물을 만드는 일이니 돌연변이를 기대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애완동물 급으로 복종하는 정도까지는 못갑니다. 대량 생산도 할 수 없고요. 그리고—"

"그리고?"

"인간과 똑같은 인간을 만들면 언젠간 후회할 때가 오기 마련이더군요."

한은 여기까지 말하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박사도 더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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