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 한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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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정복자의 피를 타고났어. 두 세계의 왕이 되어줘. 그리고 내 영웅이 되어줘."

"허억!"

백태양은 숨을 헐떡이며 잠에서 깼다. 온 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아…씨."

백태양은 투덜거리며 속옷을 벗어 세탁기에 집어넣고 샤워를 시작했다.

차가운 물이 육체에 닿고, 그 물은 백태양의 육체에게서 약간의 온기와 모든 찝찝함을 머금은 채로 씻겨져 내려간다.

그는 한참동안이나 그 감각을 즐겼다. 그 동안에는 잡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들이 생각들도 같이 씻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런 순간이 없었다면 결코 지난 한달을 버텨낼 수 없었을 터였다.

지난 한달간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다. 삼대천 피트니스의 사장으로 임명된 후 7년 만큼이나, 왕의 일족을 만난 후의 한달은 의미있었다.

왕의 일족. 그 처음 들어보는 단체가 자신의 유전자의 절반을 이루고, 낙하산으로 들어간 삼대천 피트니스의 사장직을 유지하는 것도 벅차던 그에게 삼대천 전체를 통합하라고 부추기는 여자가 둘이나 생겼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삼대천을 설령 통합하더라도, 자신을 둘러싼 진정한 진실을 알기 위해선, 회장님마저 두려워한 그 '재단'과 맞서야 할지도 몰랐다.

물론 백태양은 한번 결정한 사안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육체를 단련한다는 것은 엄청난 의지를 요한다. 그는 심성이 모질지 못하고 유유부단한 면이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지독할 정도로 고집스러웠다.

삼대천의 통합이라는 건 불가능한 목표에 가깝다. 지금의 삼대천 피트니스는 정통성과 인맥을 제외하면, 나머지 두 계열사-스포츠와 생활건강-의 일개 부서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규모에 불과했으니.

게다가 회장의 진짜 목표를 생각해 볼 때, 어쩌면 그와도 대적해야 할지 몰랐다. 설령 그것이 회장과 자신 모두가 바라지 않는 것일지라도.

그 모든 것을 고려하더라도 자신이 행동을 취하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 여기서 결론을 내린다면, 결코 그 결정을 번복할 일은 없을 터였다.

이럴 때 동전이 필요했다.

'삶은 곧 인력으로부터의 저항이다.'

백태양은 임한영의 말을 떠올리며 동전을 던졌다. 앞면이었다. 그는 한참동안 동전을 바라보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일단 체급부터 키우자."


"넌 또 뭔데?"

백태양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일주일에 PT일정이 없는 유일한 날에, 모처럼 마음을 다잡고 회장단을 구성하는 이사진과 접견을 하기로 계획이 잡았던 그였다.

특히 '그 사람'은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양복을 구김 하나 없이 다렸던 백태양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다림질했던 그 노력이 다 물거품되게 생겼다. 백태양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몸뚱아리는 다섯인데 살아있는 놈은 하나네?"

백태양은 자신을 둘러싼 존재들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다섯이 비슷한 존재로 보였다. 여성의 몸에, 면사포로 가려진 얼굴. 그러나 백태양은 오직 한 존재에게서만 심장박동을 들었다.

"무슨 볼일이지?"

면사포를 쓴 여인, 알레시아는 대답 없이 백태양의 주머니를 가르켰다. 백태양은 동전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러자 알레시아는 품 안에서 사슬을 꺼내며 달려들었다.

말은 없었지만 알기 쉬운 반응에 백태양은 피식 웃었다.

"가져갈 테면 가져가 봐."

백태양은 동전을 튕겼다. 어찌 보면 도박이었다. 여인이 무생물이었거나 동전을 이겨낼 정신력이 있다면 그로서는 큰 무기 하나를 잃는 것이었다.

알레시아는 반사적으로 동전을 잡았지만, 동전에 의해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무겁지? 가만히 있지 말고 움직여봐. 가져가고 싶다면서."

백태양은 버둥거리는 알레시아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한눈에 봐도 꽤나 강한 존재였지만, 결국 동전 하나 스스로 치우지 못했다.

동전은 힘이 강하다고 치울 수 있는게 아니었다. 설령 신과 같이 강하더라도 평생 한계를 넘기 위해 노력해본 적 없다면 결코 들 수 없고, 허약한 약골이라도 끊임없이 노력한 고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면 간단히 들 수 있다.

힘이 강할수록, 한번도 패배를 경험하지 않은 오만한 존재일수록, 이 동전은 더욱 무섭게 느껴질 터였다.

"위에 군림하는 것들은 언젠가 무너지지."

백태양은 쓰러진 알레시아를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읖조렸다.

"나머지는 사람이 아닌것 같은데…힘 조절 안해도 되니 잘됐지. 덤벼."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나머지 네 존재들이 백태양에게 달려들었다.

'강하다.'

백태양은 그들과 부딫히면서 직감적으로 느꼈다. 자신에게는 물리적 충격으로 인한 반작용이 고스란히 적용되지만, 상대는 물리법칙의 적용을 받지 않는 듯한 불함리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미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한달 전이었다면 그 이질감이 패배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백태양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고, 백태양의 육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실전에서 이걸 쓰는건 처음인데…혹시 원피스 봤나?"

대답은 없었다. 어차피 대답을 상정한 질문은 아니었다.

"왕의 일족의 비술들 말이지…자기들끼리는 엄청 폼 잡으면서 500년 된 전통이니 뭐니 이야기하는데 내가 느끼기에는 딱 원피스에 나오는 패기더라고. 그중에서도 이건 무장…우왓!"

알레시아의 분신들은 다양한 무기를 사용했다. 백태양은 아슬아슬하게 사슬을 피했다.

"말하는 중에 때리는게 어딨어? 됐다. 육신은 리의 지배를 받아 기로 채워지니…육신에 괴력난신이 끼어들 곳은 없으리라."

백태양은 짧은 구결은 외운 뒤, 주먹을 들어올렸다.

육안의 변화는 없었으나, 알레시아의 분신들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백태양의 상태변화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역시…멍청이는 아닌가 보네. 그럼 내가 가는 수밖에."

백태양은 전력으로 분신들을 가격했고, 알레시아의 분신들은 결국 하나씩 연기로 화했다.

모든 분신이 사라진 후, 백태양은 휘청거리면서도 알레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동전 아래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넌 강하지만…내가 찾는 사람은 아닌것 같다."

백태양은 발을 들어올렸다. 동전이 없어지면 무슨 수를 쓸지 몰랐기에, 사지를 뭉개놓을 생각이었다.

그때, 백태양의 귀에 공기를 찢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자신을 향한 암기를 잡은 그는,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으윽."

"전 베로니카라 합니다. 제 시종이 무례를 범한것에 사죄를 표합니다. 노여우시겠지만 부디 손속을 거두어 주시겠어요?"

우아한 몸짓을 하며 등장한 여자를 보며 백태양은 경계를 끌어올렸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얼핏 느껴지는 거짓된 과장됨이 백태양의 심기를 건들였다. 자신이 질 것 같지는 않지만, 너클도 없이 싸우면 부상을 당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미 미팅 시간은 늦어버렸다. '그 사람'은 오늘 백태양을 만나주지 않을 터였다. 설상가상으로 얼굴에 흉터까지 난다? 미팅이 언제까지 미뤄질지 모를 일이었다.

"덤빌 꺼면 빨리 덤벼."

짜증이 잔뜩 섞인 백태양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제 시종 알레시아가 귀하의 귀물을 다른 물건과 착각한 듯 합니다. 알레시아는 시력이 없는 아이라…오직 기운만으로 세상을 보거든요."

그 말에 백태양은 조금 머쓱해졌다. 하지만 완전히 분이 풀린 건 아니었기에 따지고 들었다.

"베리…"

"베로니카 입니다."

"그래요. 베로니카. 어쨌든 당신 부하가 다짜고짜 절 공격한 건 사실이고, 동전으로 제압했지만 풀어줬다가 또 공격할 수도 있는데 그냥 풀어달라는게 맞나?"

그 말에 베로니카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말로 모면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건 저희 국가에서 귀물로 여겨지는 물건입니다. 부디 사양 마시고 받아주시기를."

베로니카는 목함을 건넸다. 목함만 언뜻 보기에도 상당한 값어치가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또 혹시나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단 한번 도와드리겠습니다."

"허어."

백태양은 생각에 빠졌다. 베로니카라는 여인에게 느껴지는 힘은 명백히 자신보다 아래였다. 하지만 그녀의 공손하지만 자신감 있는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입은 피해가 없다면 지금은 적을 만들지 않는 것도 중요했다.

"성격 많이 죽었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백태양은 목함을 보더니 말했다.

"이 목갑에 힘을 불어넣으면 연락이 가능한가요?"

베로니카는 백태양의 말에 짜게 식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뇨? 톡디 줄 생각이었는데."

"아…하하. 톡디를 주실 생각이었구나."

'톡디가 뭐지.'

백태양은 톡디가 뭔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런 백태양을 바라보던 베로니카는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휴대폰은 있으시죠? 줘봐요. 연락처를 줄게요."

"아, 그러죠."

베로니카는 연락처를 건넨 후, 알레시아를 죽이지 않은 자비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고, 백태양은 고개를 저으며 동전을 간단히 들었다. 속박에서 풀려난 알레시아는 여전히 면사포를 쓴 채로 백태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이 안보인다는 걸 안 백태양은 괜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베로니카는 그런 백태양에게 미소를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휙! 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기한 사람들이네. 아 맞다. 그분을 만나려면…아, 또야?"

백태양은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양복이 완전히 찢어져 있었다.


서울시 효자동.

백태양은 한 양복점에서 새로 양복을 맞추려 했다. 피같은 돈이 아깝지만, 이사와의 미팅을 위해서는 기성 양복은 절대 불가능했다. 최대한의 타협의 결과가 바로 이곳이었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의상실. 백태양은 들어서기 전 고민했지만, 다른 양복점에 비해 압도적으로 싼 가격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거 참 죄송하네요. 이런 몸은 양복 맞추기가 힘드실 텐데."

"허허.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네. 중요한 건 몸의 크기가 아니니까."

백태양은 의아했지만, 굳이 반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자신의 몸 치수를 재고 있는 이 노인에게서 풍기는 기품은 분명히, 평생을 한 분야에 노력한 자만이 품을 수 있는 힘이었으니까.

백태양은 그런 자들을 언제나 존중했다. 반대로 말하면 그렇지 않은 자들을 오만하게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는 말이지만.

"그럼 잠시 기다리면 되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백태양의 말에 노인은 싱긋 웃었다. 노인이 떠나고, 백태양은 털썩 주저 앉아 의상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작지만 좁아보이지 않고, 고풍스럽지만 낡아보이지 않았다.

그때, 조그만 아이가 백태양의 눈 앞에 불쑥 나타났다.

"우와! 아저씨 짱 크다!"

"아저씨…"

백태양은 꼬마의 적의없는 아저씨란 말에 살짝 상처를 받았다.

하긴, 아저씨가 맞기는 했다. 10살때 입양한 애 둘이 이제 고등학생이니 빈말로도 아저씨가 아니라고 하긴 힘든 나이인 것이다.

그래도 상처받기는 받은 것이다.

"이런 곳에 왜 꼬맹이가 있어?"

"꼬맹이? 난 유진이라는 이름이 있어요!"

"너도 아저씨라고 했잖아. 나한테도 태양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안 물어보고 아저씨라고 했으면서."

"그, 그건. 으으."

유진은 쭈뼛쭈뼛하다가 배꼽에 손을 올리고 머리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태도에 오히려 당황한 건 백태양이었다.

"아냐 아냐, 그냥 장난친거야. 고개 들어. 미안해."

백태양의 말에 유진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유진. 예쁜 이름이네."

"히."

유진의 웃음은 때묻지 않아 백태양으로 하여금 아무 생각 없이 행복을 주게 만들었다.

'튼튼이랑 강열이 어릴 때 생각나네.'

백태양은 뭔가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아저씨가 재밌는거 보여줄게."

백태양은 동전을 들어 유진에게 보여줬다.

"이 동전은 그냥 평범한 동전이 아니야, 만약 이 동전을 뒤집으면, 아저씨가 소원 하나 들어줄게."

그 말에 유진은 눈을 반짝이며 동전을 만져보았다.

"평범해 보이는데…"

유진은 온 힘을 다해 동전을 뒤집으려 했지만, 동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끙끙거려도 동전이 움직일 기미는 없었다.

"어렵지?"

백태양은 웃으며 동전을 간단히 들어올렸다.

"너무 무겁잖아요."

"아냐, 이건 평범한 동전 무게야."

유진은 볼을 크게 부풀렸다.

"거짓말! 잠깐 기다려봐요!"

유진은 조심조심 저울을 들고 왔다.

"가벼운 무게도 잴 수 있는 정밀 저울이에요! 올려 봐요!"

백태양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래."

백태양은 동전을 올렸고, 유진의 얼굴이 경악이 번졌다.

"이십…오그램…이건 사기야!"

"사기 아니야. 온 힘을 다하면 누구라도 뒤집을 수 있어."

백태양은 그렇게 말했지만, 유진이 정말 동전을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죽을 각오를 하고 덤벼야만 들 수 있는 동전이다.

어린아이의 정신력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이 키운 튼튼이도 고등학생이 되어야 뒤집기에 처음 성공했으니까.

좀 짖궂긴 했지만 백태양은 그저 이 아이가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실제로 유진은 얼굴이 시뻘개질 때까지 동전을 드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동전은 전혀 들리지 않았고, 백태양은 씩씩대는 유진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조금만 더 해 볼게요."

유징은 이를 꽉 깨물었다. 할아버지한테 처음 바느질을 배웠을 때 이상으로 오기가 들었다.

그리고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유진이 동전을 살짝 들어낸 것이었다. 비록 아주 조그만 변화에 불과했고 금세 놓쳐 버렸지만, 백태양은 깜짝 놀랐다. 이 정도의 인내심과 정신력이 있는 아이가 있다니.

유진은 힘이 빠졌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히잉. 결국 못 뒤집었어."

"처음 하는데 들린 것도 정말 대단한 거야."

위로에도 유진은 시무룩했다. 백태양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 동전 줄까?"

"어…그래도 돼요?"

"꽤 귀한 거긴 한데…몇개 더 있으니까 괜찮아. 누가 훔쳐갈 리도 없고."

그 말에 유진은 금세 의욕이 되살아난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감사합니다."

"만약에 뒤집게 되면, 이 번호로 연락해. 소원 들어준다는 거 잊지 않고 있을 테니까."

백태양은 이 유진이라는 꼬마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 오기와 노력하려는 태도. 어린아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성장의 가능성이 보였다.

"네!"

태양이 웃으며 유진과 하이파이브를 하려는 순간, 유진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쪼그라들엇다.

"우에에엥."

"어?"

백태양은 너무나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당황한 건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가짜기 태양 아저띠가 커졌어."

"이, 이게 무슨…"

백태양이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사이, 노인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할 것 없네. 놀랍긴 하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우아! 할배도 커져써!"

유진이 신나서 재승에게 달려가는 찰나, 재승은 딱! 하는 소리로 손가락을 튕겼고 그 소리와 함께 유진은 쓰러져 재승의 품에 폭 안겼다.

"많이 놀라셨겠군요. 이 아이가 이렇게 힘을 다 소진한 건 처음인데…"

"그 아이…혹시 인간이 아닙니까?"

그 말에 재승은 답하지 않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백태양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너무 경솔하게 행동했네요. 죄송합니다."

"인간이 아니라는 것에는 놀라지 않는군요."

"예, 뭐. 그보다는…"

백태양은 말을 삼켰다. 왕의 일족의 힘. 그걸 발동시키면, 인간이 아닌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존재는 순식간에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 백태양은 그게 유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순간 우려했지만, 그건 의지를 가지고 발동시켜야만 하는 기술이었다. 그렇기에 백태양은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재승은 곤란에 빠진 백태양을 이해했는지, 대화의 화제를 자연스럽게 바꾸었다.

"일단 치수에 맞는 맞춤 양복 제작을 스케치하기는 했네. 헌데, 두벌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럴 경우에는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지라…"

"어, 두 벌이요?"

재승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나는 요청한 격렬한 움직임에도 튼튼한 업무용, 그리고 다른 하나는…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 입을 만한 옷이죠."

재승은 싱긋 웃었고, 백태양의 얼굴은 빨개졌다.

"사, 사랑이라뇨. 지현이랑은 아직 그런 관계가…"

"아, 총각이 사랑하는 이의 이름이 지현인가 보군? 전 독심술사는 아니라 사랑의 내용은 모르지만, 확실한 건 지금 총각에 마음에 확실한 사랑의 불씨가 피어올랐다는 거죠."

"으…"

"그걸 부끄러워하진 마세요. 그 불씨야말로 당신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니까요."

재승의 눈빛은 의미심장했다.

"제작에는 3일이 걸립니다."

"네."

재승은 떠나려는 백태양의 명함을 힐긋 보고는 그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삼대천이 총각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만약 사랑하는 이를 위한 양복만 주문하면 공짜로 해줄 생각이 있네만."

백태양은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삼대천을 아십니까?"

"그 조직은 잘 모르지만 조직의 성향은 보통 그 지도자의 것을 따르니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고 봐야겠죠?"

"회장님을 알고 계시는군요."

백태양은 순간 끌어올렸던 근육의 긴장을 풀었다.

"그분은…제가 본 모든 인간 준 가장 악했습니다. 제 존재마저 흔들릴 정도로요. 헌데, 총각은 다르더군요. 어떻게 그런 분 밑에서 일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요."

백태양은 아주 잠깐이지만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임한영 회장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감히 그의 본성에 선이니 악이니 하는 가치를 부여할 수 없었다.

"…영감님께서 회장님을 어떻게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분명 과거의 이야기이겠지요. 그때의 회장님은 악이었을지도 모르지만…분명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백태양은 감정을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눈빛에서 감정의 편린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재승의 태도는 한번 더 바뀌었다.

"하긴…사장이라면 처음 보는 늙은이의 말에 휘둘리지는 않겠지요. 워낙 젊기에 순간 안타까웠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확실히 삼대천은 악한 부분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그걸 고치기 위해서라도, 주문은 두 벌로 해야겠네요."

재승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늘자국하나 보이지 않게 만들어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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