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잔! 평행 세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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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조각 같은 외모(그리고 질감)의 연구원이 강당 위에서 작별을 고했다. 이제 퇴장하기만 하면 되었으나 그는 자신이 얘기하는 동안 강당의 조명 시스템이 고장났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려나온 조명 감독 그림자 인간에게 그 사실에 대한 귀띔을 받았을 때,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허둥거리며 외쳤다.

"자, 이제 모두들 눈을 감으세요. 한 명도 빠짐없이! 눈을 감으란 말입니다!"

좌석에 앉아있는 얼간이들 전원이 눈을 감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연구원이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동안, 한 소녀가 늙은 연구원의 설명을 받으며 강당 밖으로 나왔다. 귀여운 금발 머리가 어울리는 소녀는 작은 카메라를 손에 꼭 쥔 채 곧장 기지 관리자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것은 최우수 점수를 받고 입사한 신입 직원에게 주어지는 특혜였다. 그녀는 이 평생 직장에 대한 꿈을 가득 안고 문을 두드렸다. 문 너머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곧이어 목소리가 그녀의 방문을 허락했다.

그녀가 문을 열자 검은 머리의 말쑥한 남성이 의자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일어난 그는 180cm를 훌쩍 넘기는 듯 했으며 커피색 피부는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왕자를 보는 듯 했다. 이마에 문신이 도드라져 보였으나 그것은 거부감과 공포심을 주기보다는 신비로워 보였다. 이 달의 우수 신입은 남자의 팔과 다리가 인공 보형물로 대체된 것을 보았다. 그녀는 어쩌면 이곳의 생활이 그리 순탄치는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소녀에게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아이리스 양, 만나서 반갑습니다. 카인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카인… 꺄악!"

아이리스는 자신의 상의가 힘없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하여 비명을 질렀다. 스웨터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리면서 소녀가 막 벗은 몸이 되려는 직전에, 카인은 침착하게 뻗은 팔을 접고 신사적으로 몸을 뒤로 돌렸다. 그는 자신의 책상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가 모서리에 접혀져있던 칸막이를 펼친 뒤, 그 뒤에서 큰 목소리로 비서를 불렀다.

"할머니!"

부르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사람의 팔들이 튀어나와 아이리스를 붙잡았다. 그녀는 다시금 경악하여 공포에 가득찬 비명을 질렀으나, 팔은 아랑곳 않고 그녀의 팔을 머리 위로 들게 만들고는 어디선가 가져온 가운을 뒤집어 씌웠다. 촉감으로 보건데 합성 수지였다.

"괜찮습니까, 아이리스 양?"

아이리스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팔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카인은 칸막이를 접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혹시 옷이 면 소재였나요?"

아이리스는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더니 미심쩍은 듯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은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가 복장에 대해서 미리 얘기해주지 않던가요?"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덧붙였다.

"아, 괜한 질문이었겠네요. 놀라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이 기지에서는 앞으로 식물성 소재로 된 옷은 입어서는 안됩니다. 스웨터 값은 추후에 변상해드리죠."

카인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이리스를 달래며 문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제부터 그녀와 이 기지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대략적인 견학을 시켜줄 예정이었다. 그는 아이리스를 잠시 복도에 세워두고, 급하게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할아범."

눈 깜짝할 새에 문 앞에서 얼굴이 쭈글쭈글한 늙은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상어를 연상시키는 검은 눈이 인상적이었다. 카인은 짐짓 화를 내며 말했다.

"분명 안내역은 당신이 아니었을 텐데."

늙은이는 히죽 웃을 뿐이었다. 카인은 그 차원 도약인지 뭔지만 아니었다면 한참 전에 유치장에 처넣어버렸을 남자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찍었습니까?"

검은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빌어먹을 색마 영감 같으니!

"한 번만 더 이러면 진짜 가만 안 둘 줄 아십시오."

늙은이는 반성의 기미를 보여주지 않은 채 그 말을 듣고는 다시 휙하고 사라졌다. 카인은 문을 향해 뒤돌아서면서 한 마디 더했다.

"부탁인데, 아니 부탁 아닙니다. 그런 취미 아벨하고 공유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요."

그렇지만 녀석의 '헌팅 목록'에 아이리스의 이름이 추가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많이 기다렸지요, 미안합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아이리스는 누군가와 대화 중이었다. 다행히 진정된 모양인지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카인은 한숨 돌리며 아이리스의 상대편을 바라보았다.

"이런, G."

기지의 상담 심리사였다.

"오, 카인! 자네를 찾아가던 참이었네."

카인이 'G'라고 부른 남자는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거두며 아이리스를 곁눈질하고는 그를 옆으로 따로 불러냈다. G의 얼굴은 어두워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이번 파견 작전 말이네. 자네도 알겠지만 COG 포획 작전 말일세. 위험하다는 데는 동의하지?"

"물론입니다."

"작전 현장 감독관에 누가 선정됬는지 아나?"

"아니오. 누굽니까?"

"미스 몬톡."

"아, 제기랄."

카인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신음했다. G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역시 그녀가 린치를 당하고 있는 것 같지."

"예, 누가 뭐래도 알 수 없지만… 이번 일은 너무 노골적이군요. 그녀는 무사히 귀환했습니까?"

"현장에서 바로 전치 12주 판정 받았네. 기지로 후송 중이라는 소식을 받았어. 이번 작전도 실패한 것 같더군."

카인이 다시 신음했다.

"책임자를 불러내서 확실히 조사해봐야겠군요. 작전 실패는 우선 그렇다 치고 말입니다."

그들은 잠시 이번 일의 처리 방안을 의논한 뒤에, 밝은 얼굴로 아이리스에게 돌아왔다. 마침 그녀는 지나가던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다가가자, 남자는 크게 미소지으며 아이리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벌써 한 명을 만난 모양이군요, 아이리스."

카인이 자상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자 아이리스는 새삼 화들짝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정말 재밌는 분이세요. 그런데 저 분은 누구죠?"

"SCP입니다. 안전 등급이라서 격리 정도가 비교적 자유롭지요."

아이리스는 역시 크게 놀랐다.

"저 사람이요?"

"별명은 '알토 클레프'라고 하더군."

G가 눈썹을 들어올리며 얘기했다. 아이리스는 클레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를 마주하고 물었다.

"근데 G가 무슨 뜻이에요?"

G는 유머러스하게 답했다.

"하하, 아가씨. 이래뵈도 이 몸은 신이라네. G. O. D.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게 내 업이지."

그들이 헤어지고 얼마 안 가 카인은 이렇게 말했다.

"귀신의 G입니다. 기지 예산을 빼돌리는 건 확실한데 연말 감사 때 귀신 같이 잘 빠져나가거든요."

아이리스는 그 착해보이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하다니, 하면서도 어른의 세계라는 것에 탄복하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들은 유리창 너머로 '라이츠'를 보고 있었다. 유클리드급인 그녀는 귀여운 것은 모조리 서랍 속에 쑤셔박는 기이한 인간이었다. 카인은 기계적으로 말했다.

"조심하세요, 당신이 여자라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라이츠에게는 이 쪽이 안 보일 터였지만, 아이리스는 몸이 절로 뒷걸음질을 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던져주는 굵직한 기둥 모양 인형을 할짝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케테르급 개체의 격리 장소를 보면 끝난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있다는 것을 발견헀다. 할 수 없이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데, 아래층에서 거친 숨으로 욕지기를 하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그들은 걸음을 빨리하여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거대한 괴수가 애처로울 정도로 몸에 끼는 듯한 연구원 가운을 입은 채 힘겹게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제기랄. 제기랄 계단들 같으니!"

"안녕하십니까, 개 선생."

개라고 불린 괴수는 그 호칭에 대한 반박을 몸으로 드러내보이기라도 하듯 거대한 몸집을 돌리며 번쩍이는 눈을 부라렸다. 이어서 구역질하는 소리를 하며 가래 끓는 목소리로 퉁명스레 답했다.

"흥, 관리자 양반인가."

"엘리베이터가 고장났더군요."

"빌어먹을! 말해줄 필요 없어, 그걸 몰랐다면 이 짓거리를 할 이유도 없었겠지."

"괜찮습니까?"

"아니, 내 골격은 계단을 내려가는데 너무 불리하거든."

괴수의 목소리로 보건데 아무래도 성대 역시 긴 대화를 나누는 데는 적합하지 않은 듯 싶었다.

"몸을 변형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괴수는 신경질을 부렸다.

"이 곳을 둘러싸고 있는 만능 격리 재료 망할 텔레킬 금속 때문에 그건 애초에 불가능해. 알았으면 놀려먹는 거 관두고 갈 길이나 가주겠나?"

"텔레킬 합금에 그런 기능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이런 빌어먹을!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걸 전 기지에 도배를 해놨으니 이제 그걸 보기만 해도 힘이 빠진다고. 없던 효력이 생겼단 말이야. 이제 제발 좀 꺼져주게."

징그럽다는 표정을 하며 카인을 바라보는 괴수의 모습은 상당히 처량했다. 그러나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괴수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걸걸거리는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참, 자네 상사가 아벨 일로 좀 보자더군."

"뭐라고요?"

카인에게서 이제껏 보지 못한 동요가 느껴졌다.

"누구, 말입니까?"

"누구 말하는지 알잖나. 자네 직속."

"관리자님의 상관이라면, O01을 말하는 건가요?"

아이리스가 성급하게 끼어들었다. 괴수는 그녀를 돌아보더니 바퀴벌레라도 본 양 질색을 하며 역겨워하는 기색을 굳이 숨기려들지 않고 말했다.

"신참이군."

아이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전 그 분을 뵐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가면 문을 열기도 전에 폭발할 텐데?"

"개 선생, 저번 일은 당신과 벌인 소동이 아닙니까. 당신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 머리에 '헌팅'하고 '헌팅'만 든 얼간이 자식이 싸움을 걸어온 걸 막지 못한 자네 탓이겠지. 안 그런가?"

카인은 오늘 들어 세 번째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관리자 양반, 자네 자질을 의심하는 건 아니네만, 쓰레기 같은 종족들은 역시 그 본성을 타고나는 법이지. 제어할 수가 없단 말이야. 물론 자네를 포함해서."

카인은 화난 듯 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괴수는 쇠가 긁히는 소리를 내며 킬킬거렸다. 아이리스는 잠자코 있었다.

"알아들었으면 이제 그 빌어먹을 꼬맹이를 데리고 앞서가지."

카인은 그 말대로 걸음을 빨리 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나쁜 사람… 음, 하여튼 그런 건 아닙니다."

"왜 저런 모습을 하고 있죠?"

"무슨 실험에 휘말려서… 영생의 대가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덕분에 온갖 위험한 일에는 다 불려갔습니다. 기지 내에서 가장 많이 다치는 연구원이라고 봐도 될 겁니다. 덕분에 귀신이 씌었는지 이제 무슨 짓을 해도 사사건건 다치는 일이 생기죠."

카인의 말과 동시에 위쪽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며 소름끼치는 포효가 들려왔다. 카인은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계속했다.

"이를테면 차량에 타면 무조건 차가 폭발한다는 성질이죠. 그것 때문에 성격이 저렇게 됬을 지도 모르겠지만, 제 기억에 그는 저렇게 되기 전에도 별 차이 없었습니다."

아이리스는 이 직장의 어두운 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인간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이 위기를 타파해보려 노력했으나, 불행하게도 신통치 않았다.

"왜 그 분을 '개 선생'이라고 부르죠?"

"아까 언급됬던 아벨-제 동생입니다-과의 싸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개 선생과 아벨과 아벨의 '그녀'가 연관된 사건이었는데, 하여튼 그녀의 능력이 폭주해서 기지는 핵탄두로 폭발하고 아벨은 석관 속에 갇히고 괴수는 개가 됐지요. 일시적이었지만. 이제 모두가 그를 개 선생으로 부릅니다."

아이리스는 몸서리가 쳐지는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 광경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는데, 카인은 상사에게 불려갈 일로 우울했고 아이리스는 출근 첫 날에 겪은 일들로 또한 그러했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이번 견학을 끝마치고 숙소를 안내받고 싶었다.

곧이어 마지막 층에 도달한 그들은 몇 개의 보안 절차를 거쳐서 주변과 동떨어진 철문 앞에 도달했다.

"보기만 해도 묵직한데요."

묵직한 불안을 짊어진 아이리스의 말이었다.

"케테르급 개체를 보여드리는 건 위험해서 불가능합니다만, 굳이 여기까지 내려온 것은 개체가 이런 식으로 철저한 보안 상태 아래에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카인은 옆에 있던 막대를 집어들어 철문을 퉁퉁 쳤다. 안쪽에서 기괴한 깩깩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리스는 머리털이 곤두섰다.

"안에는 브라이트라는 사악한 영혼이 갇혀있습니다. 일시적인 제압은 가능하지만 영혼 자체는 파괴가 불가능하고, 굉장히 흉폭하며 언제나 희생자를 찾아내죠. 이번 경우에는 다행히 오랑우탄이었습니다만. 우리는 이 끝없는 계단통에 그자를 밀어넣고 가두었습니다."

아이리스는 두려우면서도 SCP 재단에게 비로소 감탄했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우리들의 존재를 지켜가는 곳인 것이다. 그녀는 드디어 '이 달의 우수 신입'이라는 타이틀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리고 8초 뒤에, 계단통의 보안이 해제되었으며, 브라이트가 뛰쳐나왔고, 라이츠의 격리실이 부서졌고, 적색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고, 아벨이 도착했으며, 개 선생과 또 싸웠고, 기지가 부서졌고, G는 돈을 들고 튀었고, 조각상 같은 연구원은 여전히 강당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고, 클레프를 비롯한 SCP들이 모두 자취를 감췄다. 아이리스는 그냥 집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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