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유령을 위한 파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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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비가 많이 왔다. 봉안당에 가는 길에 버스를 두 번 갈아탔다. 중간에 난 버스 사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경미한 사고여서 다친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아귀에 씐 상태로 자신이 얼마나 병약한 유리조각인지 증명하려는 수많은 살갗의 장벽을 눈앞에 둔 채 버스 기사는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나는 조용히 교통카드를 리더기에 대고 내려 그 아귀도를 빠져나왔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도시는 활기차게 움직였다. 사시사철 안개와 마주 보고 사는 무진의 시민들에게 습기란 늘 찾아오는 손님과 다를 게 없다. 만발한 우산의 정원을 산책하며 나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작은 건물 앞에 섰다.

무진 A 봉안당.

가벼운 이름이었다. 그 안에 담긴 기억을 외면하려는 듯 봉안당의 간판은 하늘로 날아올라 갈 듯 솟아오른 그 몸뚱어리를 내게 빛냈다. 나는 잠시 그 이름 앞에 서서, 떨어지는 비를 감상했다. 날 비참하게 덮은 우산은 무진의 하늘을 메운 구름과 비교하기도 싫을 정도로 작았다. 미처 우산으로 막지 못한 빗방울은 내게 그 존재를 알려왔다. 온도로, 감촉으로, 혹은 그 안에 비친 나 자신으로. 계단에 부딪혀 수천수만 개로 분열된 내 과거는 이내 땅에 부딪혀 사라졌다. 피 대신 튀긴 습기는 내 신발을 천천히 물들였다. 그렇게 한 몇 분 서 있었을까, 핸드폰이 차분히 울렸다.

고마워, 모리스. 빨리 들어와. 춥겠다.
      2013/04/01 11:35 에릭

핸드폰의 진동은 허락의 뜻을 내게 보내주었다. 나는 우산을 접어 물기를 털어낸 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운동화의 물기는 카운터 앞에 깔린 카펫에 그 자취를 점점이 새기고 있었다. 카운터의 직원이 내게 권태가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질문했다.

"자주 뵙네요. 오늘도 3관 방문하시러 오신 겁니까?"

"네."

"수고하십시오. 차후 나가실 때 다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직원은 더는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산을 옆에 비치된 비닐봉지 안에 넣고 복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 안은 어둠과 적막이 가득했다. 조금 늦은 아침. 햇빛을 거부한 도시가 줄 수 있는 밝기도, 예산이 부족한 시청이 줄 수 있는 전기도 한정된 이 건물 안에서 11시에 불을 밝히는 일은 없었다. 복도 안에 늘 거주하는 한탄과 눈물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으며 나는 잠시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오기 시작한 지도 3년 가까이 되어가는구나. 3년 동안 나도, 에릭도 서로에게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는 없었구나. 우리는 실로 연극을 하고 있었다. 3년째 이어가는 종막. 가면을 쓴 채 끝없이 부르는 듀엣이었다. 3년 전에 끝났어야 할 이 연극은 언제 시작할지 아무도 모르는 에필로그를 기다리며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옥상에서 에릭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부터.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처음 만난 건 인터넷이었다. 나는 '모리스'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에 일기를 연재했고, '에릭'은 내 일기의 4명뿐인 구독자 중 한 명이었다. 이내 내 일기의 구독자 네 명은 댓글의 형태를 빌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모니터에서 전해지는 전자파로 서로를 안았고 키보드의 압박으로 응원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나자 남은 건 나와 에릭뿐이었다. 루크는 어느 순간부터 들어오지 않았고, 리처드는 유학을 갔다. 나는 혼자 남아준 에릭에게 점점 더 마음을 열어갔다. 그녀는 이제 내 가장 친한 친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때까지 그녀에 대해 알았던 점은 단지 오페라의 유령의 열성적인 팬이라는 것뿐이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에릭을 현실에서 만났던 때도 그때였다. 점심이면 쓰던 일기를 에릭이 우연히 발견했고, 그녀는 내 사물함에 작게 "안녕, 모리스."라는 말과 함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써 놓았다. 그렇게 우리는 인터넷이 아닌 핸드폰으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좀 더 깊은 고민을 토로했다. 예를 들자면, 그녀는 곧 이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막연하게 위로를 했지만 그렇게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한 듯싶었다.

입학하고 이 년이 막 지났을 때 나는 핸드폰으로 문자를 하나 받았다.

옥상에 올라와 줘.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2010/02/26 14:10 에릭

옥상의 문은 잠겨 있었지만 내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나는 학생회 자격으로 교무실에서 간단하게 열쇠를 빌려 옥상을 열어, 내 눈 앞에 펼쳐진 악몽을 보았다. 문 바로 앞에는 에릭이 편히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왼손목에서 흘러나온 피는 천천히 옥상 바닥에 안개가 되어 깔렸다. 나는 한 차례 비명을 내지르고 교무실에 달려갔다. 그 후로 3일간 나는 침대에 갇혀 눈이 붉어지도록 울었다. 내가 왜 그녀를 신경 쓰지 못했는지에 대해 자학하며 한탄했다. 하지만 정신이 내지르는 비명은 현실이라는 벽 앞에 덧없이 사라졌다. 3일이 지나자 부모님은 내 등을 떠밀어 학교에 보냈고 나는 다시 학습지를 펼쳤다. 나는 에릭의 죽음에 대한 벌을 나 자신에게 내리기 시작했다.

며칠 안 되어 내 왼손 손목은 붉은 상처로 가득 찼다. 친구들은 만류하다 지쳐 하나둘 떠나가 버렸지만 나는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때는 내게 좀 더 합당한 벌을 내리기 위한 고민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으니까. 손목의 상처가 거미줄이 되어가기 직전, 나는 에릭의 첫 번째 문자를 받았다.

아파. 그만해. 제발. 이제 그런 짓은 하지 마.
          2010/03/15 17:08 에릭

나는 그걸 악의에 찬 장난 문자로 간주했다. 그 문자를 보낸 사람에게 진심에 찬 비난을 한 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지만, 문자는 하루에도 여러 번 왔다. 수신 거부도 소용이 없었다. 더는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나는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그렇게 해서, 에릭의 문자를 따라 이 건물에 오기 시작한 게 3년 전 5월이다. 지금 내가 마주 보고 선 이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며 나는 이 지겨운 악몽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떨어지기 시작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는 이불에서 깨는 거야. 에릭을 만나서, 어떻게든 그녀를 막고,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는 거야. 물론 상상은 현실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반쯤 낡은 엘리베이터는 지금이나 3년 전이나 나를 3관으로 착실하게 운반했다.

엘리베이터가 정지했다. 차가운 강철의 문이 좌우로 열리자 복도의 창문에 빗방울이 몸을 문대었다. 창에 묻은 빗물의 시체는 매우 참혹했다. 나는 그 시체의 회랑을 천천히 걸어가 왼쪽으로 꺾어 3관의 입구에 도착했다. 3관 14호실 B 열 47번. 에릭의 집이었다.

오늘 날씨 진짜 안 좋다. 오는데 별일 없었지?
         2013/04/01 11:38 에릭

"아, 별일 없었어. 무진에서 비는 안개만큼 많은 일이잖아."

입구에서 잠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한 나는 혼잣말을 했다. 누군가 곁에 있었다면 이상하게 쳐다볼만한 일이지만 아침 11시에 봉안당에 들리는 사람은 없다. 발걸음을 옮겨 14호실로 들어서자 나열된 납골함이 보였다. 손쉽게 B 열 47번 자리를 찾은 나는 서서 그 작은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지현. 2010년 2월 26일 소천. 납골함을 제외하면 놓여 있는 건 내가 가져다 놓은 오페라의 유령 대본뿐. 에릭의 자리는 3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았다.

"도착. 잘 지냈어?"

매일 오면서 뭘 새삼스럽게. 잘 지냈지.
      2013/04/01 11:39 에릭

"다행이네. 늘 궁금하긴 하지만, 그쪽 세상은 어때? 사람들 많아?"

안 알려줘. 알려주면 오려고 할 거잖아. 난 이렇게 대화하는 게 훨씬 편하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
                                 2013/04/01 11:39 에릭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왜 에릭만 나와 대화할 수 있을까. 이 봉안당, 하다못해 이 14호실 안에만 해도 죽은 사람들이 20명 가까이 있는데 왜 나는 에릭의 문자만 받고 있을까. 그런 의문은 자연히 옛날 생각을 하게 만들고, 나는 다시 현실이 아닌 과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에릭이 웃고 있었다. 내가 늘 '흐드러지게 웃는다'고 말하던 그 미소로. 벚나무 아래에서. 왜 벚나무 아래였지? 아, 그래. 우리 벚꽃 축제에 갔었구나. 기분 전환하자고 한번 나갔었지. 그래서 우리는 같이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고. 기억의 바다에서 나를 인양한 건 다정하게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이었다.

무슨 생각해? 또 눈동자가 멍해졌어.
     2013/04/01 11:39 에릭

"별 일 아냐. 그냥."

뭐야. 진짜 무슨 일 있었어? 걱정된다.
     2013/04/01 11:40 에릭

"진짜 없었어. 그냥 옛날 생각 잠깐 했던 거야."

흐응. 그런 거였구만. 언제 일인데? 내가 모르는 일?
            2013/04/01 11:40 에릭

아니, 네가 아는 일. 이야기하면 우리 둘 다 조금은 비참해지겠지만. 다시 갈 수 없는 장소를 상상하며 추억을 곱씹는 건 씁쓸하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비밀이야."

에에. 알려줘. 빼애애액. 난리 칠 거야.
     2013/04/01 11:40 에릭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거기서 인터넷도 돼?"

나도 비밀이지. 자, 이걸로 1대1. 경기 상황은 동점이 되었습니다.
                  2013/04/01 11:40 에릭

"나빠…."

복수야, 복수. 아아, 복수의 뒷맛은 달콤하나니.
          2013/04/01 11:41 에릭

"이런 거로 복수하다니. 치졸하다."

대화는 계속되었다. 대화의 주제는 어제도 오늘도 참을 수 없게 가벼웠다. 나는 의도적으로 일상적인 질문을 피해가고, 에릭은 의도적으로 일상적인 질문만을 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엔 우리는 너무 가까웠다. 우리는 조금 우리 자신이 비참해지더라도 상처를 돌아보는 일을 거부했다. 현재가 없는 사람과 현재가 있는 사람의 대화는 달라야 하니까. 미처 물어보지 못한 질문들은 조금의 불편함만을 주었다. 피아노곡에 낀 잡음처럼.

나는 그 영원의 멜로디 안에 끝없이 서 있고 싶었다. 하지만 핸드폰 화면 오른쪽 위의 시간은 계속해서 올라만 갔다. 12시가 지나고 12시 10분이 되자 에릭은 더 이야기하는 걸 거부했다. 그녀는 내가 12시 반이면 다시 수업을 듣기 위해 가야 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에릭은 내 등을 단호하게 밀어내었고, 나는 그 손의 온기를 마음속으로나마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집어 제자리에 돌려놓고 오는 동안 콘크리트 바닥에 내 걸음이 울렸다. 마지막으로 14호실에 들려 짧게 인사를 했다. 잘 지내. 내일 다시 올게.

있잖아,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2013/04/01 12:17 에릭

내가 몸을 돌리기 전에 에릭이 내게 물어왔다. 나는 작게 미소 지어주었다. 내가 오랫동안 숨겨왔던 질문이었고, 오늘도 물어보기 포기했던 말이었다. 언제까지 나는 과거 안에서 살 수 있을까. 대답하지 못한 질문을 뒤로하고 나오는 길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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