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기지 사람들 - 1

89기지는 내 생각보다 훨씬 외진 곳에 있었다. 벌써 버스를 몇 번이나 탔는지 모르겠다. 한참동안 걸어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칠 때쯤, 나는 89기지의 정문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런 곳이 재단의 기지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기지는 낡아있었다. 외벽의 페인트는 군데군데가 벗겨져있고, 문고리도 이미 빛을 바랜지 오래인 듯싶었다. 나는 오랜 이동으로 지쳐 한시라도 빨리 짐을 내려두고 싶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들은 곧 잦아들었다. 문을 가볍게 몇 번 두드리자, 푸근한 얼굴의 노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로 오셨수?”
“아… 저 20기지에서 발령받고 온 에반이라고 합니다만…”
“아! 이번에 온다던 신입이구만. 들어오게. 짐은 이리 주고.”
처음 보는 노인의 호의에 나는 당황했지만, 당황함보다는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사람하고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게 얼마만인가. 나는 처음으로 여기에 온 게 생각보다 나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89기지의 안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안에는 철제 파티션으로 구분 된 책상 5개와, 문이 하나 보였다. 아마도 저 문은 서장실의 문이리라. 헌데 어찌된 영문인지 의자에 사람은 한명도 앉아있지 않았다. 노인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곧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직원들이 전부 어딜 가서 안에 사람이 한명도 없구만, 대충 빈자리 중에 마음에 드는 자리 골라 앉게. 아,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안했구먼, 내 이름은 로버트 심슨일세, 편하게 심슨이라고 부르게.”
심슨 씨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생각 외로 큼직했고, 생각보다 거칠었다. 그와의 악수는 그동안 내가 여기오며 쓸데없이 했던 걱정들을 모두 녹이기에 충분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에게 사무실을 구경하라고 말한 뒤 바쁘게 건물을 빠져나갔다.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나는,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목재로 된 바닥에, 밋밋한 색의 벽지가 발라져있는 벽은, 사무실이라기 보단 식당을 연상시켰다. 사무실의 책상엔 빈자리가 2개 있었다. 나는 내 책상을 미리 정해둘까 했으나, 주변 사람들이 온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 때쯤에, 문소리가 들렸다. 낡은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편한 차림을 한 여자였다. 여자는 날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누군가 온다고 했던 얘기가 떠올랐는지,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 새로 오신다던 분이죠? 이름이 그… 에…”
“에반이라고 합니다.”
“아 맞다! 에반! 반가워요 에반, 전 엘리스라고 해요. 앞으로 잘 지내봐요.”
엘리스는 내가 그동안 봤던 여자들 중에서 가장 밝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밝은 기운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듯하였다.
“심슨 씨는 어디 가셨나요?”
“아, 아까 어딘가로 급하게 나가셨습니다.”
“그래요? 뭐지… 오늘 별다른 일 없을 텐데… 그런데 왜 짐을 다 들고 계세요? 방에다 짐 풀어두시지… 혹시 심슨 씨가 아무것도 안 알려주고 갔나요?”

그녀는 숙소를 알려준다며 따라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웬걸, 그녀가 향한 방향은 내가 서장실로 생각하고 있던 방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문을 열었고, 이윽고 내 눈에 보인 풍경은 그냥 평범한 자취방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익숙한 풍경이었다.
“잭! 아직도 자? 손님 왔어!”
그 말을 듣자 이제야 침대에 누워있는 한 사람이 보인다. 엘리스는 침대위에 누워있던 남자를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그는 엘리스의 닦달에 짜증나 죽겠다는 표정으로 일어났다. 그는 나를 보고는 무슨 일이냐고 묻듯이 엘리스를 멀뚱히 쳐다봤다.
“이번에 새로 한명 온다고 했잖아. 이름은 에반이야.”
그제야 그는 나를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딱딱한 그의 표정에 나는 나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에반, 여기는 잭이에요. 무뚝뚝해보여도 생각보다는 친절하니까 걱정 마세요.”
잭은 내가 온 것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듯 곧바로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 6개와 몇 개의 서랍장, 가운데 있는 TV, 그리고 구석에 조그맣게 마련 된 부엌이 방에 있는 것의 전부였다. 심각할 정도로 조촐했지만, 불편할거란 생각보다는 어쩐지 즐거운 생활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 중요한 걸 말을 안했네요. 잭은 말을 하지 못해요.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그녀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가 일어나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동안 장애인을 몇 명 만나본적은 없지만 적어도 말을 못하는 사람을 본 건 내 인생에 있어서 처음이다. 혹시라도 내가 여기서 생활하는 동안 그에게 폐라도 끼치지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침대는 저기 제일 안쪽에 왼쪽 걸로 쓰시면 되요. 짐 푸시는 거 도와드릴까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내가 사양하자, 그녀는 알았다고 대답한 뒤 갑자기 사라져 버린 심슨 씨의 불친절함에 대해 투덜대며 그녀의 침대에 누워 TV를 틀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엘리스 씨는 여자고 나는 남자인데, 한 방에서 생활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저… 그런데 여기에서 다 같이 지내셨던 건가요?”
“네! 뭐 불편한 거라도 있으세요?”
“아니.. 그…”
“네?”
“그… 남자하고 여자가 한 방에서 같이 자도 되는 건가 싶어서요…”
엘리스 씨는 겨우 그런 걸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깔깔대며 웃었다. 뭐가 그리 웃긴 건가. 내가 뭘 잘못 말했나 했지만, 그 짧은 말에 실수한 것이 있을 터가 없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 우리 기지에 여자가 둘이고 남자도 둘이에요. 한 명은 심슨 씨고, 또 한명은 방금 봤던 잭이죠. 그 둘쯤은 제가 이길 수 있거든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손으로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고, 별안간 다시 웃어댔다. 너무나 태연한 그녀의 반응에 나는 더 이상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웃음이 잦아들 때 즈음, 문소리가 또다시 들리고 심슨 씨와 처음 보는 여자 한명이 들어왔다. 아마도 아까 엘리스 씨가 말했던 다른 직원이리라. 심슨 씨는 양손에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문 앞으로 달려가 그의 짐을 받아들었다가 생각외의 무게에 휘청하였다. 내가 들기에도 약간 버거운 짐을 가뿐하게 들고 있던 심슨 씨는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고는 나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내 뒤를 이어 엘리스 씨도 새로 들어온 여자의 짐을 받아들고는 심슨 씨를 향해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냈다.
“심슨 씨, 어떻게 새로 온 신입을 아무것도 안 알려주고 놀러 나갈 수가 있어요?”
“아니… 이거 사러가야 된 다는 생각에 깜빡했네. 허허”
나는 그에게서 받아든 비닐봉지 안을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각종 음료수와 먹을 것이 가득했다.
“자자, 신입이 왔으니 기념파티를 해야지? 얼른 들어가세나!”
안에 들어가자 어느새 잭 씨도 나와서 침대에 앉아있었다. 심슨 씨는 차례로 비닐봉지와 부엌을 가리켰다. 잭 씨는 알았다는 듯 우리들과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좁아보였던 부엌은 사람들이 전부 들어오자 꽉꽉 들어찼다. 심슨 씨는 비닐봉지를 들어 식탁위에 통째로 부어놓았다. 갖가지 과자와 음료수, 그리고 술이 와르르 쏟아졌다.
“이런, 소개를 안했구만. 에반군, 여기 나랑 같이 들어온 사람은 라임 씨일세. 자, 인사들 하게.”
“아..안녕하세요. 에반이라고 합니다.”
“라임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그녀는 나를 향해 생긋이 웃어보였다. 안 그래도 부드러워 보이는 얼굴에 안경까지 쓴 그녀의 외모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성격도 나긋나긋했으면 좋겠는데.
“자자, 다들 멀뚱히 쳐다보지들 말고, 오늘은 신나게 놀자고!”
심슨 씨의 그 말을 시작으로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신나게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엔 약간 겉돌았지만,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준 덕분에 나도 금세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날 나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먹고 마시고 놀았다. 몇 년 만에 느껴보는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저녁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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