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기지 사람들 - 2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날이 샌 뒤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깨어난 건 나밖에 없는 듯 했다. 엘리스 씨와 라임 씨는 같은 침대에 널브러져 자고 있고, 심슨 씨는 배를 내놓고 코를 골며 세상모르게 자고 있다. 그때 갑자기 벌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잭과 눈이 마주쳤다. 잭은 어제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나는 습관처럼 시계를 바라봤다. 10시 20분. 잭이 일찍 깬 게 아니라 내가 늦게 깬 거였다. 잭은 침대 사이를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깨우기 시작했고,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샤워를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라임 씨가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자는데 불편한건 없으셨죠?”
“아, 예… 뭐. 그런데 원래는 몇 시정도에 일과가 시작되나요?”
“일과요? 어…”
라임 씨는 당황스럽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고,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심슨 씨를 빤히 쳐다봤다. 심슨 씨는 알겠다는 듯한 표시로 가볍게 윙크를 한 뒤, 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사실, 여기 89기지에서는 딱히 일과라고 할 게 없다네.”
“네? 그게 대체 무슨…”
“여기는 재단에서 대기발령소 같은 곳이라네. 오갈 데 없는 골칫거리들을 모아둔 곳이지. 뭔가 사고를 치거나, 일을 못하거나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서, 재단에서 여기로 가끔 넘어오는 일들은 딱히 급한 게 아닌 간단한 자료 정리나 사무적인 일들뿐일세. 그러니까 다들 딱히 일과라고 할 건 없네. 그냥 하고 싶을 때 해도 상관없을 정도의 사소한 일이거든.”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이곳에 사람이 적었던 이유와 기지가 외진 곳에 있었던 이유까지 모두 설명이 된다. 나는 사실상 해고를 당한 것이었구나. 왠지 여기에 내 뼈를 묻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여기 계시는 분들 전부 뭔가 사고를 치셔서 여기 오시게 된 건가요?”
“흠… 다는 아닐세. 잭 씨는 다른 연구원들하고 소통이 힘들어서, 나는 컴퓨터를 못 다뤄서, 엘리스 씨는 그냥 일을 못해서 여기 오게 됐네.”
“라임 씨는 어떻게 오게 됐나요?”
내가 질문을 하자 심슨 씨는 라임 씨를 힐끗 쳐다보았다. 라임 씨는 무언가 말해선 안 될 것이 있었는지, 연신 고개를 저으며 팔로 엑스 자를 그려댔다. 심슨 씨는 또 한 번 윙크를 한 뒤, 나에게 그 일은 비밀이라고 말한 뒤 씻으러 들어가 버렸다. 마침 엘리스가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엘리스 씨에게 라임 씨의 과거에 대해서 물어봤다. 라임 씨는 심슨 씨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저었으나, 엘리스 씨에게 그 정도의 눈치는 없었는지 곧바로 말해주었다.
“라임, 술 먹고 상사 때려서 여기로 왔어요.”

라임 씨는 갑자기 얼굴이 토마토마냥 빨개졌다. 엘리스 씨는 라임 씨의 그런 표정이 어지간히 웃겼는지 또 깔깔대며 웃었다. 라임 씨는 말을 더듬어 대며 나에게 그때의 일을 정당화 시키려 변명을 해댔는데, 나도 라임 씨의 그 표정이 퍽 웃겨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하고 터져 나왔다. 내가 웃자 라임 씨는 한숨을 쉬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술만 마시면 저도 모르게 과격해져서 그래요… 그래서 어제도 제가 제일 먼저 잤잖아요.”
라고 말했지만, 나는 어제 맥주 2캔을 연거푸 마신 이후론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더 이상 뭔가 물어봤다간 라임 씨가 곤란해 할 거란 생각에 나는 라임 씨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 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11시가 돼서야 부서내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을 시작했다. 일이라고 해봤자 재단에서 넘겨진 몇몇 자료를 정리하는 것뿐이었고, 그 자료들이란 것들도 대부분 별 볼일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미 이런 일이 익숙한지, 다들 별말 없이 업무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곳은 업무를 하던 중간에도 볼일이 있으면 자유롭게 나갔다 올수 있는 분위기라서, 다른 사람들(특히 엘리스 씨)은 중간 중간에 볼일을 보러 어딘가로 갔다 오고들 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빈자리라고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는 잭 씨의 자리였다. 원래 자리에 컴퓨터를 제외하고는 뭘 두는 성격이 아니라고 한다. 부서에서 내 자리는 심슨 씨와 잭 씨의 가운데 자리이다. 심슨 씨는 부서장이었지만, 20기지에서의 부서장과는 달리 상당히 대하기 편하고 사람 좋은 성격이어서 그와의 대화는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마치 고향에 있는 부모님과 대화를 하는 기분도 들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다들 일을 멈추고 오늘 점심에 어떤 식당에 갈지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 장소를 정하지 못하고 빙빙 돌던 말들은, 곧 신입인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있는 가게로 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그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트로프를 먹으러 갔다. 우리들은 바로 옆 건물인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후덕한 인상의 동양계 아주머니가 모두를 반겼다. 아주머니의 영어발음은 약간 어눌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아주머니는 한국에서 유학을 온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함께 여기로 왔다가, 아들이 졸업한 뒤에도 아예 여기에 눌러 살아 가게를 열었다고 한다.
“아이고, 오래간만이네! 근데 여기는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 온 사람인가?”
“아, 네 이번에 옆 건물에 새로 온 에반이라고 합니다.”
엘리스 씨가 갑자기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나에게 당부했다.
“여기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사우스 샤이엔 포인트 소속의 직원으로 알고 있어요. 말할 때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요.”
나는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내가 당황할 정도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어디서 왔는지 같은 간단한 질문이 몇 개 이어졌다.

“그래, 그런데 에반 군은 나이가 어떻게 되나?”
아주머니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다른 사람들은 일제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에 만났는데 나이를 물어보는 아주머니의 질문에 약간 불쾌할 뻔도 했지만, 딱히 숨길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내 나이를 말했다.
“올해로 26입니다.”
내 대답에 가장 놀란 건 엘리스 씨였다.
“에~에? 에반, 생각보다 나이 적네요? 저보다 나이 많을 줄 알았는데.”
“……”
“헛, 말이 좀 심했나? 미안해요. 저는 올해로 29이에요.”
엘리스 씨의 말에 나도 적잖게 놀랐다. 얼굴만 보고서 나랑 동갑이거나 나보다 어릴 줄 알았는데.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보니, 엘리스 씨가 보기에 내가 최소 30은 되어보였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우울해졌다.
내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본 아주머니는, 무안했는지 주방 안으로 들어갔고, 우리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다시 나오지 않으셨다. 나는 계산을 할 때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려 했지만, 타이밍을 놓쳐서 말하지 못했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서는 다시 자료 정리. 새삼스럽지만, 여기서 하는 일은 정말 간단한 일들뿐이었다. 시간표에는 저녁 6시까지 업무를 하는 것으로 되어있었지만, 20기지에서는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게 기본이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여기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6시가 되자, 숙소 안에서 자명종이 울렸고, 부서의 사람들은 일제히 일을 멈췄고, 다들 숙소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어안이 벙벙하여 잠시 동안 멍하게 있자, 잭 씨가 나에게 와서 내 어깨를 두드리며 숙소를 가리켰다. 나는 오늘 여기의 업무 분위기를 다시 한 번 파악하게 되었다. 일은 좀 지루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피곤한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적어도 없을 것 같다.

일주일 뒤의 아침, 나는 미리 맞춰놓은 알람에 8시에 잠에서 깼다. 오늘도 역시나 잭 씨가 미리 일어나 있었고, 나에게 다시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잭 씨는 대체 몇 시에 깨는 걸까. 다들 모여 아침을 간단하게 먹은 뒤, 다시 일을 하러 가기 위해 사무실의 내 자리로 가던 중, 나는 심슨 씨의 자리에서 전화기가 울리는 것을 들었다.
“이번엔 또 무슨 전화지?”
심슨 씨는 전화를 받고나서, 곧바로 우리들을 바라보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왠지 그 표정에서 뭔가 귀찮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묘한 불안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심슨 씨는 우리들을 바라보며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간만에 우리 부서에 할 일이 생겼네!”
내 불안감은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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