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기지 사람들 - Epilogue

따르르릉

자명종 소리가 귓가에 따갑게 울린다. 왜인지 피곤해 몸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뭐 별수 있겠는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알람을 끄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제 딱히 늦게 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이리 피곤할까. 현재 시간은 8시. 부엌을 보니 라임 씨와 엘리스 씨는 이미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있다. 내가 침대 밖으로 나와 부엌으로 가려던 도중, 일어나는 잭과 마주쳤다. 나는 반갑게 인사를 했고, 그는 피곤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그는 감정표현에 서툰 것 같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을 다시 부엌으로 돌렸다.

부엌으로 가자, 라임 씨와 엘리스 씨는 이미 식사를 거의 끝낸 뒤였다. 둘은 빈 그릇들을 싱크대에 올려두곤 나를 보며 씩 웃어보였다. 내가 어제 가위바위보에서 졌기 때문에 오늘 설거지 당번은 나였다. 원체 집안일을 귀찮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계속 내기 같은 걸 했다간 이곳 집안일은 내가 다 할 것 같다. 내가 하루 중 유일하게 다른 사람에게 짜증을 내는 때는 이런 때뿐이다.
“…왜 이렇게 그릇을 많이 썼어요.”
라임 씨는 미안하다면서 나에게 조그만 초콜릿을 하나 주셨다. 단 것을 먹는 것은 내 하루의 유일한 낙이다. 나는 잭이 내 옆에 앉을 수 있도록 일부러 구석에 가서 앉았다. 잭은 자연스럽게 내 옆에 토스트를 들고 앉았다. 이젠 익숙하다. 나는 왠지 입맛이 돋아, 밥을 금세 먹어치우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로 가던 도중, 심슨 씨와 마주쳤다. 심슨 씨는 나에게 선물이 있다며 건물 뒤편으로 따라오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한 일중에 선물을 받을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지만, 심슨 씨가 이미 걸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얼른 그를 따라 나섰다.
“흠. 에반군. 내가 저번에 깼던 그 하얀색 화분 말이야.”
나는 기억을 더듬어 내가 옛날에 키우던 작은 선인장 화분을 심슨 씨가 깨트리고는 미안해했던 것을 생각해냈다.
“이게 대신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네.”
“어떤 건데요?”
“자, 가게에 있는 것 중에 제일 큰 걸로 사왔네.”
심슨 씨를 따라 간 건물 뒤편에 놓여 있던 건 커다란 파비안느 화분이었다.
“너무 커서 밖에다가 빼놨네. 앞으로 그냥 여기서 키우세.”

나는 심슨 씨의 선물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감사의 의미로 가볍게 인사를 하고 다시 건물로 돌아왔다. 단순한 화분이었지만, 나는 뭔가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심슨 씨가 화분을 깼을 때 아깝긴 했지만, 그걸 지금까지 신경 쓰고 계실 줄은 몰랐다. 건물 뒤에서 돌아오던 도중, 나는 밥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잭과 다시 마주쳤다. 나는 잭에게 밥은 잘 먹었느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가 너무 피곤해 보였기에 나는 인사를 속으로 집어넣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내 자리에 앉자, 새삼스레 내가 89기지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나는 이곳으로 온 뒤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던 캐리어를 꺼냈다. 캐리어 안에는 부모님 사진과 똑같은 여분의 액자가 하나 들어있었다. 나는 기지 사람들과 찍은 사진을 액자에 넣어 내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었다. 나는 북적북적한 사무실을 보았다. 내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서 이렇게 재밌게 지낼 줄 몰랐는데, 거기에 계속 있었다면 난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 하는 말을 속으로 곱씹으며 나는 숙소에서 나와 사무실로 향했다.

« 4 | 허브 »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에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