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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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스페인의 햇살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심한 더위 때문에 제일 편한 옷으로 입고 왔는데도 땀 때문에 한 걸음 내놓기도 힘들었다. 나는 결국 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웅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그의 배낭에 달린 조개껍데기는 흔들렸다.

"야!"

웅이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왜? 지쳤어?" 웅이 나를 향해 다가오면서 물었다.

"잠깐만 쉬었다가 가자."

"체력도 없으면서 왜 갑자기 순례를 하자고 그러냐."

"네가 괴물인 거야, 곰탱아."

웅과 나는 길가에 있는 바위에 앉았다. 나는 배낭에서 물통을 꺼내 들이켰다.

"여기서 더 지체되면 또 노숙해야해."

"잘됐네, 별이나 보지 뭐."

웅은 피식 웃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 눈빛에 따라 나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왜 온 거냐 여기?"

"……"

"갑자기 뭔 바람이 불어서 순례를 하자고 하는 건데?"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봤다. 안타깝게도 솔직하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영업상 기밀."

"쯧, 그놈의 영업 기밀. 멋대로 이직해놓고 나한테는 무슨 일 하는지 제대로 설명도 안해주고. 그렇게 새 직장이 좋디?"

"응, 재밌더라."

안 좋은 일도 많다만…….


"들어오게."

O5의 사무실은 처음이었다. 의외로 그의 사무실은 내 사무실보다 더 낡아보였다. 어쩌면 그의 사무실만 이렇게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거기 앉게. 그래, 항상 우리 재단의 윤리를 위해서 힘써줘서 고맙네. 자네가 윤리위원회 인원들 중에서 반대표를 던진 사안이 가장 많다지?"

"제 신념에 맞게 행동할 뿐입니다."

"마음에 드는 말이군. 하지만 내가 자낼 왜 불렀는지 알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로 부터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그는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숨을 깊이 들이쉬고서 말했다.

"110-몬톡 절차를 승인하게."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고민했던 지난 며칠과 그동안 사망한 ████명들, 그 중에서도 이미 사망한 2명과 나머지 5명들을 생각했다.


길이 점점 어두워졌다. 달은 이미 몇 분 전에 떠있었고, 해는 오늘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웅은 노숙할 자리를 찾으면서 걸었고, 나는 그때의 일을 곱씹으며 심란한 채로 발소리와 배낭에 부딪치는 조개껍데기 소리에 집중하면서 걸었다.

110-몬톡절차에 대한 서류를 읽은 뒤, 나는 그 자리에서 서류를 집어 던졌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다른 인원들에게 소리쳤다. 그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지옥 같은 일주일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을 생각해 냈고, 그 모든 방법을 시뮬레이션 했다. 실패를 거듭할수록 희망의 자리를 절망이 채워가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기지 내에서 그녀에 대한 사태가 일어나 많은 이들이 죽고 기지가 파괴되었다.

마지막 시뮬레이션이 실패하고 나를 돕던 연구원들도 지쳐 떨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벙어리인 비서가 수화로 내게 말했다.

"'O5-█가 교수님을 뵙고 싶대요.'"

나는 조용히 눈물을 삼키고 결단을 내렸다.


"고맙네."

O5는 내 서명이 적힌 서류를 봉투에 집어넣고 누군가를 부르는 인터폰을 눌렀다. 단조로운 소리와 함께 O5가 나에게 말했다.

"결국엔 이렇게 되었군. 하지만 자네와 다른 연구원들이 일주일동안 한 시뮬레이션에 대해서는 잘했다고 말하고 싶네. 성공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나도 그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 누군가가 들어와 서류를 가져갔다. 짤막한 침묵 이후에 O5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수고했네. 뭐 원하는 것이라도 있나?"

"마지막까지 반대했는데도 들어주시겠다는 겁니까?"

"신념이 강한 자를 위한 상이지. 설마 없나?"

"딱 한 가지 있습니다." 나는 바로 말했다.

"뭔가?"

"휴가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결국, 아니 어쩌면 다행히도 노숙이었다.

대도시 근처도 아닌 이름도 알 수 없는 시골이기에 별들이 잘 보였다. 자리에 눕기 전에 나와 웅은 밖에 앉아 별들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 그런 얘기 많이 들었는데."

"무슨 얘기?"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이과에게 둘러싸여 살다보니 문과 감성이 폭발했냐."

"정말로 그렇다면 죽음도 나쁘진 않겠지?"

"그래. 별이 된다면 나쁘지 않는 죽음이겠지."

"그렇지? 그런 거지?"

재차 확인하듯이 물어봤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너 우냐?"

나는 울먹이면서 대답했다.

"한 번 쯤은 괜찮지 않냐?"

순례길 위에서, 수많은 영혼들 아래서, 나는 조용히 울었고, 콤포스텔라에는 도착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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