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분(受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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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암꽃과 수꽃이 피는 시기가 다른 식물은 그 이외의 자가불화합성은 보이지 않지.”

“잠깐만요. 정말 이런 것들을 기른다고요? 어째서요?”

“설마 우리 농장에서 504처럼 평범하게 생긴 식물만 다룰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어쨌든, 역시 우리 추측이 맞았어. 얘네도 딱히 다른 자가불화합성을 보이지 않았어. 그러니 약간의 호르몬제의 도움을 받아 암꽃과 수꽃이 피는 시기를 비슷하게 맞춰주면, 짠! 인위적으로 자가수분시켜서 이 나무의 유전 연구의 초석을 쌓을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이 나무는 어쩌면 인류의 기원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줄지도 모르지.”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건 좀…”

신입은 계속 머뭇거리며 좀처럼 온실에 들어가질 못했다. 5등급 자료에는 신입의 안전을 99.9% 보장하는 증거가 담겨있었지만, 막상 현장에 직접 들어가자니 꺼려지나 보다. 하긴, 이 온실 내부의 모습은 썩 보기 좋은 광경도 아니고, 나도 익숙해지는 데에 꽤 오래 걸렸다.

“결국, 이 나무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것은 농부잖아? 잘나신 연구원님들께서는 4명의 사망자를 내고 영양제를 6번이나 새로 개발하면서도 새로운 개체를 얻는 데 실패했지만, 우리는 2년 만에 아무런 인명피해도 없이 성공했어. 연구원들에게는 없는, 농부만의 비결이 필요했던 거야. 많은 부분이 사람이지만 어쨌든 식물은 식물이란 뜻이지. 왜, 무슨 일 있을까봐 무섭냐?”

“아뇨. 추가 자료는 이미 열람했고, 전 확실히 안전할 것 같군요. 다만 제가 안전한 이유와 선배의 설명을 잘 조합해보니 오늘 할 일이 뭔지 감이 잡혀서요. 으…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은걸요.”

“그래? 그래도 구체적인 방법은 모를 테니 설명해 줄게. 쉬워. 수꽃이 달린 가지를 이쪽으로 잡고…”

내가 시범을 보이자 신입 녀석의 얼굴에는 거북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나요? 대체 이런 미친 생각은 어떤 정신병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겁니까?”

“미친 생각이라니? 이 녀석들은 여느 자식 가능한 타식성 식물과 마찬가지로 자가수분을 꺼려하고, 수꽃이 피어있을 때의 암꽃은 수분할 수 있는 상태가 유지되지 않아. 그래서 자가수분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게 암꽃이 정신을 잃을 만큼 ‘자극’을 줘서 ‘꽃가루’를 잘 넣어줘야 하지. 그건 내가 나중에 혼자 할 테니까, 넌 그냥 꽃가루만 받아주면 돼.”

“그래도… 으… 선배 혼자 하세요. 전 도저히 못하겠는걸요.”

“이 나무에 달린 ‘눈’은 장식이 아니야. 암꽃은 심지어 날 ‘유혹’할 때도 있어. 사람의 기준에는 맞지 않는 유혹이지만. 하지만 수꽃은… 남자가 취향에 맞지 않는건지, 내 손길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더라고. 건장한 남자한테도 힘든게 농사일인데 뭐하러 너처럼 여리여리한 여자애를 뽑았겠냐? 그리고 그 정신병자의 미친 생각 덕분에 이 묘목들이 널 강간하지 않게끔 조절할 수 있는거야. 이전에는 아무도 ‘욕구불만이 쌓이면 누구나 미쳐 날뛴다’라는 당연한 사실을 여기다가 적용시킬 생각을 못했다고. 일석이조 아냐? 나무도 얌전하게 만들고, 겸사겸사 유전 연구도 하고. 누가 이 나무랑 같이 자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꽃 좀 만져주고 꽃가루를 받으면 돼. 물론 이 꽃은 좀 만져주기 거북하고, ‘꽃가루’는 더 거북하겠지만.”

신입은 내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연설을 하는동안 이미 작업을 시작할 채비를 끝내고 있었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제가 이 일을 하는건 절대 비밀이에요. 남자친구한테도 어림없을 짓을 농장에서 나무에게 하게 되다니…”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본 것 같다. 처음 나와의 면담에서 그런 어설픈 모습을 보였던 것은 지나치게 긴장해서였던 걸까. 신입은 손바닥 나무도 온전히 식물로 받아들일만큼 식물을 사랑했고, 거북하더라도 이런 종류의 ‘농사일’을 감수할 만큼 식물을 가꾸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일도 해 내는데, 다른 농장 일은 더 볼 것도 없지. 경험이 적을 뿐, 그 마음만큼은 이미 농부였다.

“아, 그리고 그 미친 생각을 한 정신병자 있잖아? 그 사람, 네가 석사 딸 때 있던 지도 교수야.”

“아, 그렇다면 납득할 수 있겠는걸요. 그 인간이라면야, 이런 아이디어쯤은 아무것도 아니죠.”

신입은 아무렇지도 않게 잡담을 하며 꽃가루라 부르기도 애매한 것을 채취했다. 이미 마음을 먹은 일에 대해서는 전혀 거북함을 느끼지 않는 듯 보였다. 심지어 귀여워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냄새는 둘 모두에게 상당히 거슬려했지만, 우리의 후각은 금방 무뎌져서 더이상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아, 맞아, 선배. 있잖아요, 수꽃이 피어있는 것도 모를 만큼 정신을 빼앗아 암꽃을 여는 것이라면, 굳이 이렇게 꽃가루를 따로 받을 필요가 있나요?”

신입이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고 물었다.

“그냥 수꽃을 바로 넣… 아니, 좀 직접적으로 수분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하! 이 자식 이거 진짜 골 때리네. 정말이지 그 교수에 그 제자로군.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정신나간 말을 꺼내다니. 사실, 처음에는 우리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런데, ‘일’이 끝나면 수분은 되더라도 수정되기 전에 암꽃이 바로 져버리더라고. 아까도 말했지만, 이 나무에 달린 눈은 장식이 아닌 거지. 일이 끝나면 금방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파악하는 거야. 네가 받아 낸 꽃가루는 나무의 시야 밖으로 가지고 나간 후에 다시 들고 들어와서 이게 ‘나의 꽃가루’인 것처럼 넣어서 수분시켜야 해.”

“아, 그렇군요. 하긴, 재단씩이나 되는 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바보도 아니고, 쓸데없이 한번이면 될 일을 두번으로 늘릴 리가 없죠.”

신입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납득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 나의 설명이 내포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잡아내지 못한 것 같다. 한 방 먹여주려고 저렇게 티가 나게 설명했건만, 뭔가 허탈하다. 하긴, 이런 건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속 모르고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뒤늦게 알게 된다면 내 이미지도 말이 아니게 되겠지.

신입은 자신이 할 일을 계속했고, 이 시점에서 딱히 할 일이 없던 나는 신입에게 401을 통해 거둔 우리의 성과를 설명했다. 우리가 기르는 401은 모두 9 주. 특수 작물 농장에서 키워낸 9 주의 401 중 4 주의 개체는 식물과 동물, 더 나아가서는 식물과 인간 사이에 좀 더 직접적인 유전적 연결고리를 제시했다. 우리의 연구 실적은 동물과 식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한 SCP 상당수를 해명해내는 것에 성공하였으며 생명공학에 크게 이바지했다. 최근에는 2 주의 401이 매우 뛰어난 ‘의사소통 능력’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우리는 이번 연구를 통해 식물의 감정이나 동물과의 의사소통 능력은 사실 변칙성도, 도시전설이나 유사과학도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SCP의 번호 뒤에 ‘-EX’딱지를 붙여 줄 것이다. 남이 보기에 거북할 수도 있는 일이고, 나 역시 이런 작업이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우리는 이 일에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저기… 선배?”

나의 장황한 설명이 끝나고, 신입은 아주 힘들게 말을 꺼냈다. 저 어색하고 복잡미묘한 표정을 보니, 틀림없이 뭔가 눈치챈 모양이다. 그렇다면 정말 신입 보기가 무안해질 텐데…

“이 나무가 금방 사태를 파악하고 꽃을 떨어뜨릴 정도로 똑똑하다면, 어지간한 속임수로는 쉽게 속일 수 없지 않나요? 인간과 대화도 할 수 있다면서요. 그럼 혹시… 나중에 저 없을 때 혼자서 일을 마저 끝내신다는 것도 그렇고… 선배는 저 나무들이랑 정말로…”

젠장.

들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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