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처드학원 고등부: 학제・교양과목 『초상과학・초상기술사 기초 Ⅰ』 에서 발췌 - 근대화와 초상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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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기 초상기술사 기초 Ⅰ. 초상과학・초상기술사 기초 Ⅰ, 20██)

세계를 탐구하는 시도의 변천

오늘날, 장막의 이면에서는 수많은 초상단체가 초상과학과 초상기술을 이용하고 있고, 개중에는 정상성을 어지럽힐 목적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초상현상의 이용 시도 그 자체는 신화로 이야기되는 시대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그 사례는 하나하나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기적, 마술, 주술, 선도, 음양도, 연금술…. 하나같이 신, 또는 세계와의 합일 및 그 이해를 위한 탐구였다는 측면은, 현대의 초상과학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비효율적 행위였고, 본질적으로 그 방법론은 인식에 의해 세계를 개변시킬 수 있다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국가의 의례적 부분과 도시생활에서 기적과 마술이 쫓겨났고, 동중유럽을 계몽군주들이 석권했을 무렵, 이미 마술은 세계의 모습과 신의 위업을 이해하는 학문으로서의 주류적 지위를 근대과학에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마법의 제3원칙, 「재능 있는 를 필요로 한다」는 초상공동사회를 닫힌 세계로 바꾸었고, 낡은 상아탑의 문을 두드려오는 새로운 연구자의 방문도 끊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실용과 응용에 구애되면서, 근대과학의 발견을 외면했습니다. 부유층의 오락에서 파생된, 과학과 마술의 융합이라고 자칭되던 것은 과학의 산물 쪽이 주체였습니다. 변칙존재를 소재로 사용하여 인챈팅하는 아노말리스미스anomalysmith의 기교로써 창출된 근대의 공예품들은, 고대의 국가가 만든 의례용 검이나 희대의 명공의 손을 탄 현악기와 본질적으로 다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확실히 소수의 재능 있는 술자들은 큰 위협이었습니다. 하여 제6차 오컬트 대전이라는 재앙이 7년단 유럽과 중동에 참화를 가져왔던 것인데, 신비교단과 비밀조직들 사이의 싸움으로 시작된 제6차 오컬트 대전은 결국 각국 정부의 개입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주류과학의 진전과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에 의하여, 인류는 마술사나 영웅을 전보 한 통이면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파워밸런스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삼일천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과학적 방법으로써 오컬트는 재흥하였고, 장막에 의해 사람들의 눈에서 숨어 초상공동사회를 독점하게 된 것입니다.

장막과 기초초상과학의 확립

제6차 오컬트 대전이 종결하면서, 그 교전자였던 신비교단이나 비밀조직들은 새로이 나타난 국가초상기관정상성유지기관의 엄격한 감시에 노출되어 점차로 쇠미해져갔습니다. 그들이 초상공동사회의 중심에서 쫓겨남에 따라, 은비의 탐구는 표층사회에서 파급된 이학진흥의 열기를 띠고, 젊은 과학자들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6차대전 중에 독일 은비학자들이 집행한 의식으로, 고대 셈족의 신격으로서 기적술의 성질 그 자체를 조종하는 데미우르고스가 파괴되었고, 그 백래시가 전세계 사람들에게 마술이나 초능력을 각성시키거나, 초상현상의 다발을 야기한 것도 이런 추세를 가속시켰습니다. 1892년 프로메테우스 연구소가, 1913년 국제통일기적학연구센터가 설립되었고, 새로운 인물들이 이론적 연구방법으로 초상현상에 대한 이해를 급속히 심화시켜 기적학, 사이오닉스, 형이상학 같은 근대적 초상과학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특히 마술은 1913년 시점에서 큰 조류를 이룬 J. S. 카버의 근대기적학・통일기적학 성립의 시도가, 1927년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하면서 「관측은 세계를 변화시키다」는 이념과 접목됨을 거쳐 근대 기적학으로의 탈피를 달성했습니다. 이 때까지 마술사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근대서양과학이 지향해온, 그레이존을 백일하에 끌고 나와 자기들의 원래 있던 자리를 말소하는 시도의 신봉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에 생각보다 많은 그레이존이 있었음을 생각해 볼 때, (그동안의 오랜 역사와 비교해서) 거의 하룻밤 사이에 마술사들은 젊은 과학자 집단으로의 변모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사회・문화인류학의 지식도 수용하고, 사회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가 1936년 완성한 『황금가지』에서 주술의 성질에 대해 언급한 유감주술감염주술의 분류는 기적학의 삼대원리 중 앞의 두 원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현재 알려진 기적학의 기본원리, 「비슷함이 비슷함을 낳는다」, 「부분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관찰이 현실을 바꾼다」가 성립되었고, 마술은 물리학과 인류학의 융합으로써 과학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이 위대하지만 위험한 발견은 제6차 오컬트 대전의 참화를 목도했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장막에 가려지고,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은 보이지 않는 불안에 겁먹지 않고 매일 안심하여 잠들 수 있는 평화를 구가했습니다. 은비학의 전쟁이용은 정상성유지기관국가초상기관의 굳은 신념에 의해 제한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1914년-1918년) 중에는 협상국 간의 은비학 정보공유를 위해 성립된 연합 오컬트 동맹Allied Occult Coalition(AOC)이 국가초상기관들의 동맹체로서 은비학이 전쟁에서 공공연히 이용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 힘썼습니다. 1939년 제7차 오컬트 대전이 개전할 때까지, 인류는 전쟁에 이용된 은비학의 경이적 위력을 점차로 망각하게 됩니다.

초상기술의 활용

일련의 초상르네상스를 국가초상기관과 정상성유지기관은 처음에는 우려했으나, 초상기술의 확립과 그것이 장막정책 유지에 응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그들 역시 흐름에 합류했고, 심지어는 흐름을 가속하기에 이릅니다. 예를 들어, 실용기적학이나 밈공학・기아스 테크놀로지, 불완전한 기억소거 규약 등을 거론할 수 있습니다. 1929년 로버트 랭퍼드Robert Langford가 기아스 현상을 탐구했고, 1932년 아바 베리먼Ava Berryman이 그것을 일반화함으로써 구축된 베리먼 밈구조 이론의 성과는 곧바로 영국은비사무국에서 활용되었고, 1939년 두 사람은 인간 정신을 추상적 개념에 구속하는 기아스의 개발을 명령받았습니다. 베리먼-랭퍼드 밈적인자는 세계대전 중 사무국의 첩보원 고용에 사용되었고, 밈과 기아스 테크놀로지는 장막의 완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오늘날에도 폭넓게 이용되고 있습니다.

기존의 예술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예술가들이 초상과학의 관점에서 예술을 모색하여 변칙예술(아나트anart)의 창작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습니다. 1874년 파리에서 제1회 전람회 "Sommes-Nous Devenus Magnifiques?"가 개최된 이래 10년마다 개최된 이 전람회는, 1924년에는 마침내 프랑스 전역과 유럽, 그리고 미주와 동양 열국으로부터 변칙예술가(아나티스트anartist)와 관중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오늘날 요주의 단체로 등록된 「Are We Cool Yet?(AWCY?)」은 이 과정에서 파생된 일대 무브먼트였고, 그 조직형태가 지역마다 다양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북미에서는 과거 해부학의 열광시대에 무덤의 도굴을 일삼는 범죄조직이 생겼듯이, 법을 어기기를 마다하지 않는 연구자들로 인해 변칙물품의 위법매매에 종사하는 소규모 밀수조직들이 다수 생겨났습니다. 그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 구미세계의 초상공동사회에 세력을 떨친 것이 1885년 만들어진 시카고 스피릿입니다. 금주법 시대 초반에 정점에 달했던 스피릿의 확장은 초상사물・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초상범죄활동에 말미암은 것이었고, 그것을 유리하게 선점하기 위해 그들은 "길"(기적학 등으로 열 수 있는, 기저우주와 평행우주・주머니우주를 오갈 수 있는 통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여러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워프게이트)의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재단과 연방수사국 특이사건반(FBI-UIU)이 단호한 단속을 수행함으로써 1933년 두령 리처드 채플을 구속하자, 스피릿은 곧 와해되었습니다.

변칙박물학과 유물수집경쟁

초상르네상스 전기는 초상과학의 기초이론과 실험방법론 확립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이윽고 박물학의 세분화와 고고학의 근대화의 물결이 장막 이면에까지 미쳤고, 수많은 원정대가 파견되게 됩니다. 특히 유라시아대륙 중앙부에서의 기원전 1200년의 대재앙의 원인 탐구와, 사르킥교(낼캐)메카네교에 관한 조사의 결과는, 연구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의 열기는 변칙민속학과, 단편적이었으나 초상사학의 기초를 짧은 시간 안에 확립시켰고, 변칙생물학 등의 영역을 급속히 확대시켰습니다. 또한 변칙고고학・초상사학의 진전은 고대의 변칙신앙・초상신앙의 경전과 의례, 성유물을 재발견시켰고, 이 흐름은 부서진 신의 교회를 시작으로 하여 고대신앙의 맥락 위에 있는 종교단체들의 부흥까지 연결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치구상의 국소적인 초상현상의 체계적 문서화가 시도되었고, 또한 처음으로 다중우주의 목록화로의 진출이 행해졌습니다. 특히 존 카버 랜들 박사의 다중우주 탐색은 그의 조난으로 인한 랜들 카탈로그의 미완성이라는 결과로 끝났고, 아이테르 진동검출기의 발명자이자 현대다중우주이론의 아버지인 그를 잃은 프로메테우스 연구소는 이후 이렇게 지나치게 모험적인 시도를 삼가게 되었습니다. 대신, 다수의 초상연구기관 및 종교단체는 초상적인 유물 또는 아티팩트와 변칙존재의 수집에 열중했고, 수집경쟁의 가속화로 인해 드물지만 무력을 행사하는 집단도 있었습니다. 확보・격리・보호를 내세운 재단은 변칙박물학의 선구자로서, 초상르네상스의 선도자들 중 하나였지만, 이 경쟁은 재단의 활동을 크게 저해했고, 결과적으로 재단이 국제초상공동사회로부터 해리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지금의 재단 기동특무부대의 원형은 이 시절 은폐임무를 맡았던 부대들과, 스스로 무장할 필요성이 생긴 원정대・연구자집단이 지휘계통적으로 통합된 것입니다.

일본에 파급되는 초상르네상스

제6차 오컬트 대전 종식에 따른 초상르네상스가 국외가 들끓는 가운데, 일본 초상공동사회는 음양료의 해체 이후 세력판도를 다시 칠하는 상태였고, 대일본제국 이상사례조사국이 1차대전 중 교주만 조차지 전투 이후로 존재감을 강화하는 등, 혼란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조사국은 일본령 내의 이상사례나 그와 관련된 문서를 수집하는 백택계획을 1897년부터 이미 추진하고 있었고, 은비학의 군사이용에 따른 초상사물과 그 연구의 독점 가능성에 대하여 공동사회는 강한 경계감을 품었습니다. 또한 1차대전 이후의 이학진흥열과, 구미 초상르네상스의 파급은 공동사회 각층에 일본이 초상과학을 추격해야 한다는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타카미네高峰 죠키치譲吉국민과학연구소 구상을 기초했고, 이에 촉발되어 수집원의 개명파가 일본에서의 기반확대를 꾀하던 재단의 지원을 끌어들여, 연구자 및 수집원 관계자, 조사국을 위험시한 중소초상단체들이 공동으로 이외학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의 초상사물 연구, 초능력 연구 외에도 주술・음양도・신도・인술 등을 실용기적학에 연결시켜 이론화・체계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첫 시도는 스파게티 코드 같은 일본주술의 주변부를 분해하는 것에 그쳤을 뿐, 씨족 고유의 변칙성이나 일본 특유의 환경과 밀접한 관련 분야의 연구는 밈 기아스학변칙생물학, 변칙 등 새로운 지식이 도입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공업화의 진전에 탄력받아 토헤이조(이후의 토헤이중공)나 키사라기 공무점, 함정본부 대초상과 등의 아노말리스미스 기업・단체들도 발흥했습니다. 결국, 조사국은 1926년 재단 및 AOC와 협력관계를 맺고, 장막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조사국에 대한 재단의 우려는 적중했습니다. 1932년, 일본 세력권 내에서 최대의 초상조직이 된 조사국은 재단 등 국외 초상세력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AOC에서도 탈퇴했습니다. 일본 초상공동사회 내에서는 조사국의 패권 하에, 시호덴四方田 재벌토헤이조이외연산업단, 신흥세력인 마시바間芝 재벌아오미青海 재벌 등의 민간초상기술공급자와 초상연구기관이 군부 및 조사국의 식민지경영에 협력을 추진했고, 또한 초상연구기관은 외지에서의 초상과학 계몽도 담당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초상기술은 식산흥업의 분야에도 아낌없이 투입되어, 대만에서 1935년에 개최된 신이박람회에서는 그 성과가 화려하게 연출되었습니다.

다만, 이것은 신이박람회의 후원자였던 조사국이, 자신들의 실력을 선양하기 위해 개최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박람회를 위해 수집원에서 수집물을 빼앗거나, 초상사물을 압수하는 등, 조사국의 횡포한 행동은 내지・외지를 불문하고 초상공동사회에서 반감을 샀고, 군부에서도 그 무리함을 위험시했습니다. 또한, 당초에는 학술적인 면에서 평가되었던 백택계획도 후년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변칙존재를 일본적 해석에 끼워맞춤으로써 초상현상의 범위에서도 일본의 우위를 주장하는 시도로 변질되었습니다. 또한 조사국에 반감을 가진 수집원과, 독자적인 초상연구기관을 가지고 싶었던 육군 사이에서는 아시부네기관이나 특별의료부대, 삼천기관 같은 악명높은 조직들이 설립되었습니다. 더욱이 초상사회에서의 조사국에 대한 반발 및 항일운동으로서, 조선반도의 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 집단인 능사사가 테러조직 의열단과 협조해 조사국과 부호부대를 공격한 것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표층사회의 반체제운동이 내지・외지 양측에서 모두 쇠퇴함에 따라 해산되었지만, 그 혈맥은 반정상성유지기관(특히 세계오컬트연합에 대하여)사상 단체로서 적극노선을 취하는 능구렁이 손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장막주의와 “은비학의 대규모 군사전용 금지”의 불문율이 후퇴한 결과는 일본의 초상르네상스의 거듭된 진전으로 나타났고, 조사국을 적대시하면서도 이것은 기뻐하는 식자들이 적잖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이 성과는 최종적으로 파국적 대전쟁에 투입되어 주류과학의 열세를 뒤집을 수 있을 것으로 과대한 기대를 받았습니다. 확실히 이것들은 전쟁 중 추축국의 초상병기를 분석한 스파크스기관 출신으로 전후 일본을 시찰한 GHQ의 초상이 천박하게도 일본 초상연구 및 산업의 완전한 파괴를 주장하게 만들 정도로는 유효했습니다.

초상과학・초상기술사 기초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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