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들의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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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계는 그렇게 끝났다.

그의 눈앞에서 현실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현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며 조각조각 났다. 반대로 말하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만이 남게 되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이야기라고 한다면, 지금 나의 이야기는 프롤로그일 것이다.

그것도 프롤로그들의 프롤로그로써 존재할 것이다.

아무도 아닌 자는, 공허 속에 홀로 서있었다.

항상 입고 있었던 회색 양복과 중절모는 세계와 함께 사라졌다.

현실의 종말과 함께 사라진 내 옷들이 그리워진다. 이번 세계에서 내가 제일 처음 산 옷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내는 가만히 허공에 서서 생각했다. 재단은 이러한 일을 CK 등급 재구성 시나리오라 불렀고, 세계 오컬트 연합은 암호명 옐로우-감마-카타스트로피, 부서진 신의 교단은 신의 징벌이라 불렀었다. 다른 곳에서는 뭐라 했는지 그는 잊어버렸지만, 원더테인먼트 박사가 말한 것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판매 시장의 붕괴'라고 했었다.

불사조는 수명이 다하면 스스로 몸을 불태워 재가 된다. 그리곤 그 재 속에서 새롭게 탄생한다.

그리고 그건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이내 하나의 점이 생겨났다.

작은 점은 이내 물질이 되었고, 파동이 되었으며, 빛이 되고, 어둠이 되며, 모든 것이 되고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는 세계가 재구축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몇 번 세계가 멸망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론 몇 번이나 재구축 되었는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모든 것이 끝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멸망을 겪었고, 셀 수 없이 많은 세계의 재구축 또한 겪었다.

처음 몇 번은 끔찍했던 것으로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알고 지냈던 이들은 그를 처음 보는 것이었고, 겪었던 일들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곧 익숙해졌다.

그건 마치 비디오 게임의 엔딩을 본 다음 저장을 하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깨야하는 것 같았다.

유일한 차이점은 비디오 게임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지만, 이 경우는 이미 일어났고, 지금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것이 세계의 종말이니까.

모든 이야기에는 그것이 열린 결말이라고 해도 어떤 형식이든 간에 결말이 존재하고, 모든 노래에는 그 끝이 존재한다.

이는 세계의 법칙이고, 불변의 진리이며, 아무도 아니라 해도 지킬 수밖에 없는 게임의 룰이었다.

언뜻 발밑을 바라보자 항성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항성의 붉은빛에 눈이 부셨다.

항상 붉은색을 보면 칠리소스가 생각난다.

난 칠리가 싫었다.

서서히 재구축되고 있는 세계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사내는 여전히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어느샌가 한 손에 시계를 들고 있었다.

시곗바늘은 거꾸로 돌고 있었다.

시계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그는 시계 뚜껑을 닫았다.

아무도 아닌 자로 살기는 쉽지 않다.
처음에는 나도 아무도 아니지 않았다. 친구가 있었고, 가족이 있었으며, 친밀한 유대 관계를 쌓은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날 모른다는 듯한 얼굴로 볼 때 상처받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관계를 만들지 않는 것이 낫다.

그는 다시 한 번 시계 뚜껑을 열었다.

시곗바늘은 여전히 거꾸로 돌고 있었지만, 그 속도는 이전보다 느려져 있었다.

사내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회색 코트를 쳐다보곤 한숨을 쉬었다.

이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자신의 옷을 다시 만들어보지만, 언제나 돈 주고 사는 쪽이 더 나았다.

어쩌면 그렇기에 온갖 추악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인간을 미워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옷을 입고, 그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다시 한 번 시계를 열었다.

시곗바늘은 거의 멈춘 것이나 다름없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때가 되었다.

이번 세계는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멸망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게 얼마나 남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 세계는 지금 막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인간으로 치자면 이제 걸음마를 떼려고 혼자서 서 있으려 노력하는 아기와 같았다.

내 아들 티모시는 총 7번 태어났고, 매번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세계가 멸망했다.

그리고 8번째 세계부터 난 결혼하지 않았다.

사내는 마지막으로 시계를 보았다. 시곗바늘은 멈춰있었다.

그는 심호흡하고, 옷깃을 바로 한 뒤 모자를 똑바로 했다. 다시 항상 하곤 했던 일들을 시작하기 전에 옷부터 살 생각이었다.

허공을 향해 한 발을 내밀었다.

그 때 시곗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계는 그렇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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