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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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왔다.

아니야. 방금 그건 거짓말. 하늘은 맑았다, 으레 우리의 캠핑에서 그랬듯이.

그렇지만 비가 온다. 비가 온다.

사실은 비 같은 건 오지 않는다. 물방울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럼 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어디서 떨어지는 거지

어디서 떨어지는지는 알고 있다. 하늘보다 낮은 곳에서, 그러나 땅 위의 것에서.

아냐.

뭐가 아니야.

아니야.

알고 있는데.

아니라고.

비는 오지 않아.

비가 온다.

비가 온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비가 오고, 땅이 얼룩질 정도로 비가 온다. 비가 와서 그런지, 앞을 보기가 힘들다. 우산이라도 쓰면 좋을 텐데, 우산을 아무래도 잃어버린 거 같다. 비를 피할 지붕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어느 지붕 아래에서건 비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무것도 없다면 하다못해 비를 뚫고 달려갈 용기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한 걸음을 걸어나갈 용기조차 나지가 않는다.

비가 온다.

비가 운다.

비가 온다.

비가 점점 거세게 와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의 방향조차도 잃어버렸다.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로 향해야 할까, 어디로 가면 내가 찾는 것이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뿌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위로 젖힌 탓인지 빗물이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짜다.

아니 짜지 않나? 비는 짜지 않으니까. 비에는 아무 맛도 나지 않으니까. 비에는 맛도, 감정도 없으니까.

비가 와서, 나는 갈 길을 잃어버렸다.
비가 와서, 가방이 젖어서 무거워졌다.
비가 와서, 내 목소리는 앞을 향하지 못한다.

비가 온다. 자꾸자꾸 비가 온다.

빗속을 헤치고 간신히 한 걸음을 옮겼다. 비의 장막이 순간 거두어지고 내 눈앞이 밝아졌다. 아주, 정말 잠깐의 순간이었다. 그 잠깐의 순간에, 나는 억겁의 흐름을 겪었다.

아냐.

뭐가 아닌데?

아니라고.

봤잖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못 봤다. 그 잠깐의 순간에 뭘 봤겠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저 본 것이라면…본 것이라면…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나는 못봤어.

아냐.

아냐.

아냐.

메이…

메이…?

메이…

왜…

메이…

엄마…

숨이 막혀온다. 누군가 내 목구멍을 억지로 벌려 돌덩이를 가득 넣기라도 한 듯이. 아니 그게 차라리 나았을 만큼이나.

다시 비가 온다. 내 시야가 다시 가려진다.
우산도 없고 지붕도 없고 용기도 없이 그저 흘러내리는 비가, 나를 좀먹어 가고 있었다.

처참한 메이의 몸 앞에서, 나는 내 작은 세상에 비를 가득 내렸다. 비가 내려 내 세상을 씻어 내리고 있었다. 세상을 씻어 내리면 밝아야 할 터인데, 비가 지나간 내 세상은 점점 회색빛으로 물들 뿐이었다. 비가, 회색이라도 된 것처럼. 아니 검은색 재를 한가득 탄 빗물일 것이다.

그 검은 재가 내려앉은 세상은 빛을 잃어버렸고, 나는 다시 홀로 남겨졌다. 그랬어야 하는데, 그랬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는다.

세상에 검은색 말고도 아직 한 가지 색이 더 남아 있었다.

검은색. 검은색. 검은색. 검은색. 검은색. 그리고…검붉은색.

메이의 터져나간 입술, 뜯겨져 나간 손톱 밑 피투성이 살결. 손등의 화상 자국. 온몸 곳곳에 남아 있는 멍 자국.

검붉은색.

회색과 검은색의 세상에서 그 검붉은색은 내 심장에 내려앉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내 몸에 공급하는 것은 산소도, 생기도 아닌 검붉은색이었다. 그 검붉은색이 내 몸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심장에 내려앉으면 심장은 더더욱 무거워져 점점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

비가 온다.

비가 온다. 하늘이 붉게 보일 만큼 비가 오고, 땅이 붉게 얼룩질 정도로 비가 온다. 비가 와서 그런지, 앞을 보기가 힘들다. 우산이라도 쓰면 좋을 텐데, 우산조차도 붉은색에 푹 젖어 버렸다. 비를 피할 지붕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지붕 아래에 있은들 붉은색으로 젖어가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아무것도 없다면 하다못해 비를 뚫고 달려갈 용기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 용기는 이미 붉고 붉은 세상에 먹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명이 들려온다.

차라리 씻겨 내줘.

내 세상에는 비가 오는데, 왜 비가 오지 않는 것일까. 차라리 비가 내린다면, 차라리 비가 내려서 이 붉은색을 씻겨 내린다면, 비가 내린다면.

손이 덜덜 떨렸다.

손이 떨려오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손이 떨려와서 그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비는 오지 않았다.

비가 온다.

비는 오지 않는다.

내 전부는 바스러졌는데, 내 세상은 비에 쓸려나가고 있는데, 왜 세상은 그대로일까. 왜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걸까. 메이는, 나는 온 힘을 다해 모두를 도왔는데, 왜 세상은 우리에게 이리도 매몰찬 걸까.

세상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구나.
신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구나.

내가 받은 달콤함을 모두와 나누고 싶어 하는 건 그저 어리석음이었던가. 그 찬란한 화음을 남들에게도 들려주고자 하던건 그저 바보짓이었던가.

비가 온다.
붉고 검은 비가 온다.

그 붉고 검은 빗물은 흘러 강이 되었고, 나는 그 강 안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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