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한 빗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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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금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 날의 기억은 수채화와도 같다. 비가 올 때마다 기억은 번져갔다. 아무리 캔버스 속에 잘 말려 놓아도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면 이내 그림들은 생명을 얻고 살아숨쉬며 머릿속에서 번졌다. 그렇게 풀려나온 물감이 내 발목을 적실 때가 되면, 나는 내가 곧 대면하게 될 하얀 웃음을 피해 수면제를 닥치는대로 집어삼키고는 했다. 약기운으로 쓰린 속의 도움을 받아 이어폰을 귀에 틀어박은 채 빗소리를 외면하는게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2.

아침의 평안함은 늘 알람이라는 존재에 의해 파괴되기 마련이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대충 꺼놓고 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공기를 끌어안은 물방울은 그 투명함을 왜곡하고 훼손했다. 안개에 점령당한 공기의 신음소리는 내 시신경을 끊임없이 괴롭혔지만 나는 바깥으로 나가야만 했다. 어찌되었건 사람이 월급을 받기 위해서는 출근을 해야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듯, 받는 스트레스가 있어야 그걸 풀 돈도 떨어지는게 세상이었다.

"아, 진짜 전근을 요청하던가 해야지. 요즘 시대에 연구원을 이렇게 험하게 굴리는게 어디 있어?"

신입 연구원이라는 직책은 정말로 슬픈 일이다. 재단의 본부도 아닌 한국 지역사령부, 그 중에서도 서울도 아니고 무진시.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D계급 사람들을 제외하면 가장, 가장 끝자락에 나는 서 있었다. 누군가 내게 취업 전선을 돌파한 전쟁영웅으로서의 영광을 찾는다면 그는 그 대신 PTSD에 시달리는 퇴역군인을 찾게 될 것이다.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TV의 전원을 켜자 아나운서가 중얼중얼 말하기 시작했다. 오후 한 때 비가 올 수도 있으니 우산을 챙기세요. 30초에 달하는 장황한 연설 끝에 얻은 결론은 저 단순한 한 마디였다. 물론, 나는 그걸 따르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동안 햇반의 존재를 완전히 까먹은 것보다 훨씬 더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어차피 재단 건물 안에서 하루종일 있을 건데. 굳이 우산 안 챙겨도 되겠지.."

신발장에서 구두를 신고 우산을 일별하며 나는 혼잣말을 했다. 만일, 내가 어떠한 이유에서라던지 그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반드시 우산을 가지고 갈 것이다. 조금은 웃긴 일이지만, 아직도 나는 그 때 우산을 챙겨가지 않은 것이 내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실수라면, 재단의 정문으로 들어간 것 정도일까. 만약 후문으로 갔다면 조금 젖더라도 잠은 편하게 잤을 텐데. 나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재단까지는 어림잡아 20분. 교외에 살고 있는 덕분에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는 길이었다.

3.

모든 만남은 우연에서 시작한다. 마음 속 바람의 세기와 하루가 흘러가는 경향, 그리고 걸음걸이의 빠르기가 엮어내는 한 폭의 혼돈 앞에서 인간의 저항이란 세상을 향해 울부짖고 통곡하는 개미의 저주와 다름이 없다. 장마의 끝자락인 7월 29일 아침 아홉시에 그녀는 천천히 걷고 있었고, 나는 우산을 들고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방금 주차한 차의 주인에게 하나의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우산 안 가져오셨죠? 일기예보는 별로 믿을 게 못되지만 오늘은 안 틀렸네요. 아, 오후에 내린다고 했으니까 틀린게 맞나.."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였다. 나이는 모르겠다. 외견상으로 보기에는 20살 근처였지만, 나는 그녀의 나이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차에서 막 내린 내게 우산을 내밀었고, 나는 멋쩍게 대답하면서 우산을 받았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 일기예보를 잘 안 봐서요."

받아든 우산은 왠지 모르게 가벼웠다. 우산의 손잡이는 무진에서 보기 힘든, 하늘의 색이었다. 짙게 낀 안개는 땅에 발 묶인 사람이 하늘을 동경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기분이 상당히 나아진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녀는 나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차장에서 정문까지 가는 동안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처음 뵈는걸 보니 오래 계시진 않으셨나봐요?"

"네. 사실 저번달에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아, 이번에 들어오셨다던 신입 연구원이시군요! 잘 부탁드려요."

"예? 예.. 근데 어떻게.."

"이것저것 훔쳐들으면 얻는 정보가 많지요. 저는 한미은이에요. 잘 부탁해요."

그녀가 직책을 밝히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였고, 나는 곧 그 이유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원피스에 달린 명찰에는 일련번호가 써져 있었다. D-137845. 아, D계급 인원이구나. 그래. 우리 기지에도 몇 명 있었지.. 신입 연구원인 나는 D계급이 관련된 일에는 낄 자격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녀와의 만남이 바로 내 첫 D계급 인원과의 접촉이었다.

"음, 저도 잘 부탁드려요."

"네, 그럼 나중에 다시 봐요!"

정문에 들어서서 나는 그녀와 헤어졌다. 나는 건물 안으로, 그녀는 다시 주차장 쪽으로. 내리는 비와 하늘색 우산, 검은 원피스와 연두빛 장화가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밝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헤어지기 전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쪽으로 오게 된 걸까, 하고 물어보려다가 포기했다. 이미 과거를 청산하고 살고 있는 마당에 굳이 옛날 일을 건드릴 필요는 없겠지. 내 머릿속 우선 순위에는 일이 가장 높게 자리잡고 있었기에 오다가 잠깐 만난 D계급의 친절이 많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4.

"최산혁 연구원, 호출이야. 가서 관리자님 보고 오게."

"네."

호출은 하루에도 몇 번 있는 일이었다. 기지의 인원수가 부족했기에 실험의 준비나 뒷처리에 일손이 많이 필요했고, D계급 인원으로는 아무래도 손이 부치기에 연구원들이 가끔 불려나갔다. 그래서 나는 별 생각 없이 자리를 나서 기지 관리자를 보러 갔다.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평소처럼 인자한 미소가 아닌 좀 굳은 얼굴로 있었고, 그걸 본 나는 살짝 긴장한 상태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산혁씨가 오늘 참관하셔야 할 게 하나 있어요. 힘든 일이라서 직접 하게 시키지는 않을 거에요. 가능하죠?"

"아, 예. 참관이잖아요. 나중에 저도 하게 될 일인데 지금 미리 봐 두면 좋겠죠."

"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관리자는 이내 박사 한 명을 호출했다. 의료 관련 박사라는 직함이지만 사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줄곧 메인 건물에서 연구를 했기 때문에 딱히 다른 건물의 양호실에 갈 일이 없었으니까. 불려온 박사는 냉막해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생계에 떠밀려 범죄를 저지르면 저런 표정을 짓게 될까. 굶주린 배를 채우지 못해 남의 음식을 뺏어먹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관리자는 준엄한 표정을 지닌 채 내게 말했다.

"여기, 김선호 박사가 일을 할 거에요. 지켜보도록 해요. 익숙해져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복도를 걸어가는동안 나는 어째서 그 두명이 그런 표정을 짓는지 궁금해했다. 그 의문은 김선호 박사가 나를 다른 건물로 안내할 때 까지 지속되었다.

5.

건물 안에는 경비 요원 두명이 있었다. 그들 역시 울적한 표정을 지은 채 김선호 박사에게 인사를 했다. 대상의 태도는 매우 양호합니다. 이미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가서 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 가까스로 의식을 붙잡은 끝에 들린 말이었다. 멀어지는 그들에게서 욕지거리 또한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내가 무엇을 참관할 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묶여 있었다. 침대에, 혹시 모를 발작이나 저항을 방해하기 위해 팔부터 다리까지 구속되어 있었다. 나는 이 시점에서 극심하게 혼란이 왔고 김선호 박사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이 사람.. D계급 인원 아니고 SCP였습니까? 오늘 아침에 만났는데. 원래 이게 이 SCP를 위한 격리 절차인가요?"

박사의 얼굴은 더욱 더 찌푸려졌다.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아가리 닥치고 있어. 그는 내게 무언의 협박을 했고, 나는 금세 풀이 죽어버렸다. 나와 박사는 우울함의 끝자락을 각기 다른 이유로 붙잡고 있었지만 방 안에 남은 한 사람은 달랐다. 그녀는 발작적으로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웃음소리가 방 안을 메아리쳤다.

"와, 진짜 행복하다. 요 근래 이렇게 웃어본 적이 없는 거 같아요. 배 아파."

웃음은 가볍게 빛났다. 웃음이 짙어질 수록 박사의 얼굴은 그 기괴함을 더해 곧 울기라도 할 것처럼 되었다. 박사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기에 방 안에서 주사기를 하나 가져왔다. 주사기에는 투명한 액체가 반쯤 차 있었다. 그녀는 이내 그걸 깨달았는지 박사에게 말했다. 그리고 사실, 나도 그 주사기 안에 든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너무 죄책감 가지지 마세요. 어쩔 수 없는 일인걸요."

"얼마.. 안.. 걸릴 겁니다.."

박사의 말 끝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 진동에 맞춰 내 머릿속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 다음은. 그 다음은? 편안하게 가십시오? 죄송합니다? 난 뭘 하고 있지? 살인? 살인 방조? 왜? 내가? 재단이? 이거 그냥 내버려 둬도 되는 일이야? 나 이제 지옥 가는건가? 어떻게든 막을 수 없나? 내 눈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아, 들켰네."

내 얼굴 역시 박사의 그것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치가 빨랐고, 정말로 미안해했다. 눈에 감정을 담아둘 수 없게 되기 전에 그녀는 내게 말했다.

"괜찮아요. 정말 미안해요. 마지막까지 속이려고 했는데. 좋은 분 같아서. 아무 걱정 하지 마세요."

생각의 끈은 끊어져버렸다. 나는 내 정신을 필사적으로 죽이면서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고, 박사가 초침을 바라보는 동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상당히 눈치가 좋았던 것 같다. 보통 자신의 죽음을 관람하러 온 사람에게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는 않으니까.

"잘 지내요, 그럼. 그동안 고마웠어요 박사님. 저, 그러고보니 이름도 모르네. 신입 연구원 분도 오늘 아침 즐거웠어요. 아, 그리고 방금 전도. 음.. 어차피 못 할 테니까, 두분께 미리 말할게요. 자, 해피 추석, 메리 크리스마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그리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올라간 입꼬리는 주사가 그녀의 팔을 파고들 때도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고, 11초가 지나고 박사가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목소리로 죽음을 선고할 때에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검은 원피스와 강한 대비를 이루는 하얀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바라보던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왜.."

"D계급 인원이 일반직과 과도하게 친해지면 위급 상황에 적절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네. 그래서.."

조금의 용기가 있었다면 소리를 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런 용기가 없었다. 떨어지는 잎사귀의 무력감을 느끼며 나는 돌아갔고, 하루 내내 일을 손에 잡지 않다 퇴근했다. 퇴근길에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비는 밤새 내렸다. 빗방울이 땅을 한번 칠 때마다 나는 그녀의 인사를 들었다. 그녀가 내릴 수 있었던 최악의 형벌을 반복해서 재생하는 빗소리는 나를 끊임없이 저주했으며 나는 마음이 빗방울을 뿌려 지면에 부딪히는 소리에 고통을 느꼈다. 이어폰을 귀 속에 끼고 노래를 틀으며 영원히 오지 않을 잠을 청했지만, 빗소리는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섞여 커져만 갔고 드럼페달의 박자는 목수가 작업하듯 세심하게 내 마음에 못을 박았다. 나는 끊임없이 사과했다. 정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6.

나는 살아오면서 저 빗방울의 숫자많큼 많은 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오직 이 기억만이 나를 내 죄악에서 도망치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미소가 내게 분노나 증오가 아닌 평안함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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