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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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5: 피안화가 피었다. 이 세계에서도 피안화는 피는구나. 여행을 시작한지 몇 년 째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찾아냈을까. 세계는 몇 번 멸망했을까. 책상 뒤의 메모는 언제나 같은 얘기를 했다. 너는 늦었으니, 다음 기회를 기다리라고. 그것은 세계가 내게 내리는 조롱이었다. 내 부질없는 발악을 킬킬대며 지켜보는 관객들과 같이. 그래도, 꽃은 피는구나. 꽃이 핀다면 그걸로 좋겠지.

20██/05/26: 냉장고 안에 데킬라가 있었다. 한 병 따서 마셨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영화와도 같이 사라지는 기억의 잔향을 맡으며 침대에 머리를 묻었다. 마지막 날인데, 어찌 즐기지 아니할텐가. 즐겨라, 나의 옛 동료들아. 롬멜, 앤디, 크리스, 그리고 수많은 내 빌어먹을 상급자와 멍청한 후배들이여. 롬..롬멜의 이름을 어떻게 썼지? 이렇게 쓰는게 맞나?

20██/06/08: 책상에 새 메모가 추가되었다. 알 게 뭐야.

20██/06/19: 알 게 뭐냐는 말을 취소하겠다. 상당히 흥미 있는 내용이었다. 이 일, 657만 있는게 아니고 부서진 신의 교단도 관련 있는 일이었다. 그래, 그 개체 말이다. SCP-059-KO. 단순한 안전 등급이 아니고 뭔가 숨겨져 있는게 틀림없다. 한국까지는 먼 길이고, 난 비행기는 물론 차도 겨우 몰지만 조사할 방도가 없는 건 아니지.

20██/07/10: 우선 입수 가능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 재단의 문서 보관소를 찾았다. 대부분의 서류 케이스는 열리지 않았고 그나마 열린 케이스들도 쓸데없는 문서 투성이었지만 성과는 어느정도 있었다.

일단 이 부분. 이 문서, 여긴 분명 미국일텐데 어째서 한국 지부의 개체가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는거지? 게다가 밈적 인자 비슷하게 인쇄된 표지도 있다. 어쩌다가 종이가 파손되어서 더 이상 기능하지 않지만. 조금 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동봉된 문서에는 한국에서의 격리 실패 보고가 있었다. 작성 일자는 3월 1일. 4개월 전이군.

20██/07/15: 며칠 전에 가장 큰 성과를 보였다. 종이 사이에 종이가 들어있었다.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실수로 접혀서 발견되었다는게 더 웃기다. 오늘부터 이 종이를 뒤적거릴 생각이다.

20██/07/16: 충격적이다. SCP-059-KO는 케테르 개체였다. 그들은 단지 자기 자신을 조립하는데 그치지 않고, 무언가 거대한 것을 만들려고 시도하려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걸 가속화시킨 건 재단 내의 격리 실패 사건이고. 실험 도중 개체가 지능을 가지고 스스로를 은폐, 몇 마리에 불과하지만 새어나갔다. 그리고, 맙소사. 5월 10일에 그 개미들이 만들던 무언가가 깨어났다고 한다.

20██/07/18: 서류가 사라졌다. 분명히 책상에 놓고 잤는데. 그 사이에 무슨 중대한 분기가 있었던 점이 틀림 없다. 곰곰히 고민해봐야겠다.

20██/07/20: 이틀동안 고민해본 결과 가만히 앉아서 고민해봐야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일부터 무엇이 일어난건지 찾아봐야겠다.

20██/08/07: 단서 하나를 찾아냈다. 서류 케이스에서 서류가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격리 문서 대신 부서진 신 교단에서 온 공문 하나가 있었고. 어쩌면 재단은 이미 멸망하고 부서진 신 교단만이 남아있는게 아닐까? 19기지라면 나름 큰 기지인데, 부서진 신 교단에서 온 통보가 있다면 무언가 재단에 큰 일이 생긴것이 틀림없다.

20██/08/18: 두 번째 단서. 그동안 체크하지 않았는데, 식단표에 이상한 구절이 추가되었다. 기억에 따르자면, 아마 부서진 교단의 기도문 같은데. 이 기지는 어쩌면 부서진 신 교단의 기지로 변질되었는지도 모른다. 자료가 필요하다. 아주 많이.

20██/09/19: 이걸로 확실해졌다. 재단은 부서진 교단의 사설 기지가 되었다. 내가 열 수 있던 서류 케이스, 복구할 수 있던 자료마다 SCP나 재단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가 없다. 대신 교단이 늘 지껄이는 특유의 헛소리들로 가득하다. 교단이 내가 찾아낸 그 케테르 개체로 완전히 전세를 뒤집은 모양이다.

20██/10/20: 분기가 발생했다. 식단표에 부서진 신 교단의 기도문이 없어졌다. 재단이 다시 회복한건가?

20██/10/25: 책상 뒤 메모에 격리 개체의 예언에 대한 언급이 없어졌다. 대신 '개미'에 대한 말들이 가득하다. 가만. 개미? 개미.. 그래, 그 서류가 있었지. 일기장이 없었으면 깜빡 잊어먹을 뻔 했다.

20██/10/26: 맨 처음 서류를 찾은 서류 케이스에는 새로운 서류가 있었다. 밈적 인자가 인쇄된 페이지에는 욕설로 덧칠이 되어있고, 케테르 서류에는 격리 실패의 통보, 그리고 기도문으로 가득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20██/11/13: 날이 거듭될수록 새로운 자료가 추가된다. 다 읽어보는것만으로도 벅차지만, 세상에. 개미들이 교단을 배신한것으로 추정된다. 시간대별로 개미에 대한 지칭이 "사도"에서 "적"으로 갈리는 것, 다른 지부의 붕괴 소식. 충격적인 일이다. 그들이 믿는 신은 그들을 버린 것일까.

20██/11/28: 이제는 퇴치법까지 기지에서 발견된다. 끔찍하군.

20██/12/03: 다시 분기가 발생했다. 개미에 대한 언급이 완전히 사라지고, 평소의 부서진 신 교단 기지로 돌아왔다. 5일 사이에 특수한 상황이 발생했는지, 아닌지는 조금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20██/12/15: 모든게 예전대로지만, 가끔 숨어있는 메모가 보인다. 메모의 내용이라고 해 봐야 인간들은 전부 멸망하고 산에 숨었다는 말 뿐이다. 메모가 종이에 쓰인 잉크라서 개미들이 발견하지 못한 걸까.

20██/12/28: 메모를 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레인메이커"로 지칭했다. 인간 레지스탕스의 일원 같다. 살아있는지는 불명.

20██/12/31: 레인메이커의 메모가 끊겼다.

20██/01/04: 레인메이커의 메모는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기지 어딘가. 조금 더 머리를 굴려봐야 할 것 같다.

20██/01/06: 버려진 연구동이었다! 옛날 일기를 몇 개 주워서 연구해봤더니 조금 명확해진다. 레인메이커 이전, 그러니까 부서진 신 교단 분기에서 몇번 언급된 연구동이다. 아마 유령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었지. 그 곳으로 가면 이 모든 일이 끝날 것만 같다.

20██/01/07: 빌어먹을.

20██/02/07: 계획 수정이다. 레인메이커 분기는 처음부터 없었다. 연구동에서 본 것이 맞다면, 웃기지만 세계는 이미 저 개미들에 의해서 점령된 상태다. 그리고 이곳에 갇힌 인간들을 가지고 놀았겠지. 빌어먹을. 하지만 난 너네가 생각하는것과는 달라. 난 차원을 계속해서 이동한다고.

20██/02/08: 시작이다. 우선 분기를 관찰하는 것에 집중했다. 부서진 신이 개미에게 파괴당하기 전으로 돌아가야한다. 이미 원래 세계와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 당초 목적, 그래. 그게 목적이었지. 그러니까 원래 내가 알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비슷한 환경을 조성하는게 중요할테니까.

20██/03/11: 실패했다. 몇 차례 분기가 바뀌기는 했지만, 결국 이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재단, 교단, 혼돈의 반란, 심지어는 UN에서 기지를 관리하기도 했지만.

20██/03/12: 어쩌면, 어쩌면 말이지. 이 모든게 사실 헛수고는 아닐까? 내 기억은 이미 조작되어있고, 난 사실 기지처럼 만든 조형물 안에 갇혀서 개미들의 즐거움을 주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만일 이 이론이 맞다면, 이 헛수고를 계속해서 웃음을 줄 이유는 없다. 긍지 있게 죽는 편이 낫겠지. 물론 내 목숨은 소중하니까 조금 더 자료를 찾아봐야겠다.

20██/03/29: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이제 남는 건 자살할 도구를 찾는 일 뿐이다. 빌어먹을 SCP 모형들은 실제로 위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 맙소사. 그래서 173이 아무런 짓도 안 했던 거군.

20██/05/14: 찾았다. 케이스 위에 친절한 메모도 있었다. "남는 약들은 이곳에 둔다. 재단에서 지급한 자살용 알약이다." 아무래도 개미새끼들이 제작한 예능 프로그램이 썩 잘 되지는 않는 모양이구나. 그래, 시청률이 떨어지면 주연은 죽어야겠지. 엿이나 먹어라, 개미새끼들아. 이제서야 동료들을 볼 수 있겠구나.

20██/05/15: 피안화가 피었다. 이 세계에서도 피안화는 피는구나. 어째서인지 많이 본 광경이다. 여행을 시작한지 몇 년 째인지는 모르겠고, 내가 무엇을 찾아냈는지도 모르겠다. 세계는 몇 번 멸망했을까. 내가 언제부터 날짜를 세지 않았는지 역시, 잘 모르겠다.

부록 451-██: Z████요원이 제안한 격리 절차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이 절차는 1년 단위의 대형 시나리오 수립을 그 골자로 하며, 이 시나리오를 사용해 대상의 자연스러운 A급 기억 소거제 섭취를 유도합니다. 이로써 대상은 1년마다 기억을 상실하며, 이는 안정적인 격리 절차라고 판단됩니다. 대상이 위화감을 감지하는 등의 돌발 상황에 대처할 시나리오 수립은 아직 완료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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