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평가: +14+x

“저, 그럼 쯔산씨나 킬리씨께선 계속 여기 계시는 거네요?”
“응, 뭐 그렇게 됐어.”

그가 블랙버드와 함께 짐을 옮기면서, 위원과 면담에서 한 얘기를 해줬다. 물론, ‘내부 보안부’에 대한 얘기는 뺐다.

“정말 잘 됐어요! 하마터면 실험실로 날아갈 뻔 했네요.”
“이런 곳에서 계속 일하게 됐다는 게 좋은 것인지는 조금 의문이 들긴 하는데.”
“에이 뭐, 그래도 그 몸 갖고는 어디 밖으로는 못 나가잖아요.”
“그런가. 역시 그러겠지?”
“네, 당연하죠. 음? 여기 사진이 있는데요? 옛날에 찍은 건가요?”
“음? 어디 한번 줘봐.”

그는 연구원에게 사진을 받으면서 보더니 싱긋 웃는다. 자신이 재단에 처음 들어왔을 때 사진이다. 사진 안에서는 그와 동기들의 모습이 얼굴이 굳은 채로 찍혀져 있었다. 그 사진은 요원으로서 훈련을 받고 나서 찍은 것이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3,40명 넘게 있었는데, 지금은 자기 말고는 남은 사람이 별로 없다. 몇몇은 개체 탈출해서 썰리고, 몇몇은 실험 중에 폭주해서 죽고, 몇몇은… 딴 놈들한테 총 맞아서 죽었고.

“세월 참 빠르네…. 지금 남는 사람이…. 어디 보자, 나하고 다해서 5명 남짓? 걔네들은 잘살려나.”
“그 나머지 네 분들은 전부 다른 곳에서 일하시죠? 쯔산씨 소식은 들었을까요?”
“아마 그러겠지. 이번 일로 내 이름 정도는 언급은 되지 않았을까?”

그는 사진을 보면서 자기가 걸어왔던 걸음을 생각해봤다. 시골 출신으로 폭발사고에 휘말려서 재단에 들어온 기억, 처음 훈련 때 고생했던 기억,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주변 애들이 곤죽으로 변한 걸 눈앞에서 본 기억, 한동안 병원에서 안 빠져나오려고 애쓴 기억, 그때부터 땡땡이치다가 된통 당할 뻔 했던 기억, 그리고 지금….

“나 이번에는 어떻게 살까.”
“네?”
“너도 알다시피 여기 재단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던 적이 허다해. 하루가 지나면 10명은 우습게 저세상으로 날아갔지. 난 여기서 일하면서 그런 죽음을 수없이 지켜봤고 바로 곁에서 동료 목이 날아가는 모습도 봤었어. 그 때문인지 지금, 아니 정확히 내가 어려지기 직전에는 여유가 생기고 그랬지만 아주 예전에는 일을 그것도 조금이라도, 죽게 될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피해 다녔어. 정말 어쩔 수 없으면 정보를 있는 대로 끌어 모아서 안 죽으려고 애쓰고. 어찌어찌 해서 이젠 그 일을 직접 안 해도 될 곳 까지 올라갔었지만.”
“….”
“그렇게 해서 오늘까지 어떻게 살아왔었는데. 이번 일을 겪어 보니 이런 생각도 들기도 했어. ‘이왕 겪는 거 제대로 휘말려 보는 건 어떨까. 물론 위험하지만 그걸 겪는 것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닌 것도 같다.’ 미친 생각이지. 미친 생각이야. 하지만 여기서 일하는 거 다들 미쳐가는 거 아니겠냐? 이번에 제대로 한번 미쳐볼까 하고.”
“하지만, 이렇게 된 몸으로 어떻게 하시려고요.”
“하, 여기 어떤 박사는 죽었는데 오랑우탄으로 환생해서 지금도 잘살고 있어. 나는 축복받은 편이지. 어떻게 보면 이제야 재단의 일원이 된 셈이야.”
“헤….”
“너도 뭐 슬슬 뛰어보는 게 어때? 물론 죽지 않을 정도로. 아 뭐 상관없겠네, 너한텐 사랑스러운 새 ‘하피’가 있었지? 큭.”
“…쯔산씨 제발요.”
“그리고 지금부터 호칭을 정리하는 게 어때? …블랙버드씨? 이제부터 전 당신한테 존댓말로 써야 하는데 어떤가요?”
“에, 에?”

연구원은 그의 아무렇지도 않게 변한 제법 점잖은 말투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이, 이러지 마요. 갑자기 왜 저한테 존대를 쓰시는 거예요. 그냥 평소대로 대하세요. 전 그냥 쯔산씨한테 계속 높임말 쓸 거예요.”
“헤헷. 그런 건가―요? 히힛. 좋아, 그럼 댁은 그냥 가는 거다. 불만 없지, 다크버드?”
“…네, 다 좋은데 제발 이름만은 제대로 불러줘요.”

그는 연구원의 퉁명스런 요청을 들은 건지 만 건지, 그저 큭큭 웃어댔다.

“뭐가 이리 즐거운 거에요?”
“오, 왔네요. 킬리씨?”

그의 작고도 나름 호탕한 웃음은 작고 가냘파 보이는 듯하나 눈매가 살짝 올라가 차가워 보이는 소녀의 문 여는 소리에 의해 멈춰졌다. 그녀는 아무리 어려진들 전의 모습하고는 이미지가 변한 게 없었다.

“둘이 참 볼만하네요. 짐은 어떻게 다 정리하신 건가요?”
“아, 네. 지금 책상 위만 정리하면 돼요.”
“그런가요. 근데…. 이젠 말 놔도 되지 않나요. 이제 저보다 나이가 더 많아졌는데.”
“아―뇨. 전 그냥 킬리씨한테 계속 말 높이려고요. 이게 더 편해요. 킬리씬 그냥 저한테 말 놔도 돼요.”
“그런가요. 그럼 전 지금부터 너한테…. 말 논다? 괜찮지?”
“와, 빠르시다.”
“다크버드 너도야. 나머지는 차근차근 정리해야겠다.”
“…킬리씨는 왜 또 저한테 그러시는 겁니까.”

둘을 별 생각 없이 보던 그는 그녀의 공격에 제대로 한 방 먹은 듯 축 처졌다. 쯔산은 그런 그를 보고 큭큭 하고 들리지 않게 웃었다. 그녀도 살짝 미소를 띤다.

“자 그럼, 저희 둘이 새로 태어난 기념으로 자기소개를 해보죠. 먼저 킬리씨부터?”
“뭐? 왜 그런 걸…. 아 뭐 좋아. 흠흠. 소개하죠. 저는 이번에 승진하여 4등급으로 올라오게 된 킬리 박사입니다.”

그녀는 조금 쑥스러운 듯 하면서 자기소개를 막힘없이 끝내었다. 이제 그의 차례다. 그는 싱긋 웃으면서 자기 머릿속의 단어를 정리할 생각 따위 없이 그냥 내뱉기로 했다. 허나 그의 말은 제법 들을만했다.

“그럼 저도 다시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이번에 킬리씨 비서로 다시 들어오게 된 쯔산 요원입니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에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