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부와 사르킥과 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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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와 같은 미적지근한 오후였다. 에드윈은 곧 열릴 모임의 준비작업에서 잠시 풀려나 있었다. 그가 거의 주최하다시피 한 이번 모임은 기필코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경영보다 훨씬 공을 들이다 보니, 온몸이 뻐근했다. 하지만 설렁설렁 대충대충 할 수는 없다. 여기서 뭔갈 보여줘야만 한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외팔이였다고 업신여긴 그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현재는 솔직히 욕조에서 몸을 좀 담그고 싶은 마음밖엔 없었다. 누가 좀 차를 가져다주면 좋을 텐데.

모임. 사람들. 그리고 더 중요한 사람들.

이번에는 크로이 씨가 직접 오실지도 몰라. 에드윈은 그 생각만으로도 날아갈 듯 기뻐졌다. 이번엔 내가 엄청난 일을 해내리라.

에드윈 브란트 4세Edwin Brandt IV는 몸을 쭉 폈다. 시야에 늘 봐왔던 구성의 집안이 들어왔다. 누구든지 그가 가난하다고 한다면, 혹은 중산층이라고 한다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에드윈은 재력이 있었다. 에드윈은 재력이 있었고,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재력은 그에게 지성과 매력을 주었고, 에드윈의 삶을 더 위로 끌어올렸다. 부르주아란. 에드윈은 기라델리 초콜릿을 한 줌 크게 쥐어 입에 털어 넣었다. 언제나 즐거울 수밖에 없는 직함이지. 에드윈은 매번 자신의 부를 십분 활용했다. 거실에 걸린 이 그림 역시 그렇게 얻은 것이었다. 이온께서 사도를 거느리고 행진하시는 저 그림. 작가가 누구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으나, 그래도 에드윈 자신에게 푼푼한 느낌을 주는 것은 변치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이를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고매한 학자들과 이름 높은 젠드, 벌루타르 같은 이들이 그의 집에서 그림을 보곤 격찬했다. 그러고나면 덩달아 주인의 어깨도 으쓱해지곤 했다. 에드윈의 이름이 조금 알려진 이유도 저것에 기반한 것이었다. 효자가 따로 없다.

에드윈 브란트는 문득 시계를 보았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점심이 지났다.

"점심이 지났군."

그는 믿기지 않는 투로 말했다. 그는 한 번 더 말하려다가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에드윈은 얼굴에 의아한 빛을 내었다. 무슨 일이 있기에 에밀리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걸까? 그는 자그마한 유리 탁자에 서류를 내던졌다. 그 바람에 초콜렛이 사방으로 마구 튀었다. 에드윈 브란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처럼 잘 짜인 생활이 어느샌가 어긋나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목구멍의 살점이 하나하나 도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에밀리?"

에드윈은 자신이 젤의 검투 경기장에 내몰린 오로크가 된 것만 같았다. 이온Ion이시여, 내게 그의 힘의 반의반만이라도 주소서. 정적이 흘렀다. 에드윈은 무심결에 의식을 치르기 직전의 감정을 떠올렸다. 결코 익숙해지지 못할 이 침묵. 이방인의 침묵이다. 딸의 아버지는 서둘러 서랍에서 의수를 찾아 끼우고는 조심스레 서재를 걸었다. 순간적으로 각성회에서 줏어들은 많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집이 타올랐다… 아이 하나가 죽었다… 반-낼캐 감정… 낼캐 혐오자들… 내 아이가 납치당했네. 에드윈은 순간적으로 한 늙은 젠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앤 제 아비가 신이 됨을 위해 죽었으니 행복할테야… 하지만 에드윈은 아직 그렇게까지 마음을 먹고 싶지는 않다. 은연중에 느끼는 그러한 혐오의 대상처럼 되기는 아직 거부감이 크다. 무엇보다, 그는 에밀리를 사랑했으니까. 손발이 차가워졌다. 가정교사는 뭘 하는 거지?

머릿속에 수만 가지 끔찍한 미래가 펼쳐졌다. 내딛는 그 모든 발걸음 앞에 무한한 압정이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에드윈은 딸애의 이름을 불러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목이 바짝바짝 탔다. 그는 재빨리 옆방에 기거하고 있던 경호원 둘을 불러 딸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에드윈은 침대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눈동자를 발견했다.

"…누구시오?"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칩입자의 그 존재 자체도 이질적이었으나, 그의 외견 역시 평범과 동떨어져 있었다. 대충 걸쳐 입은 코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빠알간 코, 흰 분을 겹겹이 바른 얼굴은 입 주위에 그린 웃는 표정과는 정반대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의례용 흰 장갑을 낀 손이 꼼지락대었다.

아직 에드윈과 경호원들은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우선 저자가 어떤 작자인지도 모를뿐더러 에밀리의 안전도 장담하지 못하는 까닭에서이다.

광대가 고개를 꺾어 그들을 노려보곤, 헛기침을 한 번 하곤 입을 열었다.


광대

"휴스턴, 문제가 생겼다."

내가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지껄이자 집주인과 쫄다구들의 얼굴에 일순간 멍한 표정이 일었다.

캬, 저 멍청한 얼굴들 좀 보라지. 내 스승인 안젤리나 브론슨이 언제나 말했듯, "놀라움은 예술가의 가장 큰 무기"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난 그대로 했다. 글쎄, 내가 독심술사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저 치들은 내가 "딸아이를 살리고 싶거든…"으로 시작하는 진부한 협박 멘트를 날릴 거라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난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교훈도 없는데 뭘.

나는 자꾸만 이불에서 기어 나오려 애쓰는 꼬맹이의 이마를 조금 눌렀다. 아냐, 얘야, 네 존재는 지금 밝혀지기엔 너무 이르단다. 배역을 생각해! 물론 안 알려주긴 했지만. 그래도 요즘 아이들은 눈치가 없다. 나는 어벙한 트리오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이불에다 소곤소곤 중얼거렸다.

"잠깐만 있어, 삼촌이 풍선으로 포니 만들어 줄게."

"포니?"

"그래, 포니."

퍼런 이불이 들썩이며 반짝이는 눈동자가 일변 밖으로 보였다. 내 몸으로 가려져 다행이지, 하마터면 들킬 뻔했으리라. 나는 조심스레 녀석의 이마를 다시 눌러 들어가게 했다.

"약속?"

"그래, 약속. 또 약속."

꼬맹이는 그제야 안심한 듯이 몸을 둥글게 말고 새근새근 숨쉬기 시작했다. 나도 안심했다. 가장 큰 위협 요소를 제거했으니 말이다. 몸을 틀어 여전히 서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하고, 화나고, 불안한 표정이었다. 내가 딱 휘어잡기 좋은 심리 상태다. 쇼를 할 시간이다.

일순간 펑 소리를 내며 풍선 세 개가 그들 위로 떨어져 폭발했다. 흰 가루를 뒤집어쓴 그들이 혼비백산해 하자, 나는 낄낄거리며 다리를 흔들어 반동으로 일어났다. 그들 자신은, 이 흰 가루가 대체 뭐든 간에 일어나서 나를 때려눕혀야 한다고 생각하리라. 슬프게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나는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는 작은 왈츠에 맞춰 발재간을 부리며 대빵에게로 다가갔다. 브란트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려 애썼지만,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숙였다. 나는 그의 손목을 부여잡고 밖으로 나왔다. 두 경호원이 나를 잡으려 허우적대었다. 하지만 누구든, 고농축한 마비제 분말을 정통으로 맞고도 버틸 사람은 없다. 그들은 형편없이 허물어졌다. 반면에 브란트의 온몸에는 고농축 최면제 분말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성능은 비슷하지만, 사람의 정신에 장난질을 칠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강력하다.

터무니 없이 긴 복도를 인사불성이 된 떼쟁이 아저씨와 함께 걷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연번 처지는 주정뱅이를 부축하는 일, 정말 쉽지 않다. 내 위치에 대한 심도 높은 고찰이 필요했다. 내 행동에 대한 고찰도. 한 가지 중요한 건 내가 이 짓거리로 뭘 얻냐는… 에휴, 그만하자. 나는 이 부르주아를 마침내 소파에 던지고는 지껄였다.

"이 더러운 자본가 자식, 얼마나 처먹은 거야?"

다시 감정을 추슬렀다. 아직은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낼 상황이 아니다. 아무리 다 버리고 토껴버리고 싶은 마음이 일더라도 말이다. 쇼를 망쳐선 안 되지. 브란트가 급속도로 체내에 퍼지고 있을 최면제의 약발을 느끼고 있는지, 뭐라 웅얼대었다. 마치 코카인이나 합성 마약을 들이켠 듯한 얼굴이다. 멍청한 자식. 나는 최대한 경멸을 띄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의 옆에 앉았다. 집주인의 눈깔이 나를 노려보는 듯 마는 듯했다. 뭘 어쩌겠는가. 나는 빵끗 웃어주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안녕반가워요. 난 불법 칩입자고, 보다시피, 아주 원대한 야망을 가지고 이곳에 왔죠. 하긴 누군들 안 그러겠습니까, 누구나 원대한 야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죠. 그게 성취될지 안 될지는 미지수지만."

나는 말하다 말고 속주머니에서 긴 풍선 두 개를 꺼내 이리저리 꺾어 별 모양을 만들었다. 자연스레 브란트의 시선이 향했다. 약발이 생각 외로 빨리 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상관은 없다. 나야 좋은 일이다. 빨리 끝날 테니까. 브란트는 여전히 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능이 감퇴한 이들은 모두 별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나는 별을 허공에 띄워 빠르게 회전시키고는 그 뒤에 서서 말했다.

"요점은 이겁니다, 브란트 씨. 사회가 당신을 부르고 있어요. 물론 이건 나 개인이 사회의 허울을 불러오는 거지만, 당신이야 지금 생각이랄게 없으니."

브란트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혐오감이 일었다. 하지만 이 일을 온전히 성공시키려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이 작자의 심층의식에 내가 또라이라는 사실을 심어줘야 한다. 마음 같아선 그냥 냅두고 그림만 홀랑 가져가고 싶지만.

"사회 환원을 좀 하셔야 할 듯합니다."

나는 재빨리 장갑 낀 손으로 별을 꾹 눌렀다. 에드윈 브란트의 얼굴에 유아적 충격이 어렸다. 울음을 터트리진 않았으니 간식을 줘야 할까. 나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뒤를 가리켰다.

브란트는 내 손을 바라보았다.

젠장.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머리를 직접 돌렸다. 그의 시선이 뒤, 사르킥 종교화에 다다랐다.

"내가, 아니 사회가 저 그림을 원합니다. 금일…" 나는 잠시 시계를 보았다. "3시 10분에 담당자가 올 겁니다."

헛소리도 일이다. 내친김에 완전히 또라이가 되어보기로 했다. 다시 몸을 일으켜 주정뱅이 앞에 서서, 마임으로 벽을 두드리는 시늉을 한 뒤 문을 여는 동작을 했다.

"안녕하세요! 가져가겠습니다."

하지만 유일한 관객은 이미 개개 풀린 눈꺼풀을 이기지 못한 채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바로 이때가 중요하다. 렘수면에 돌입할 때 최면제는 가장 강력한 효과를 낸다. 나는 그림에서 멀어져 브란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림에는 바뀐 게 없어, 에디. 당신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겠지만, 구체적이진 않겠지. 딸애는 안전해. 그냥 전부… 낮잠을 잔 거야."

나는 코골이로 발전해가는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뒤로 돌았다. 아름다움이 그곳에 자리해 있다. 시각의 하나하나가 자극되고 있었다. 고양감이 느껴졌다. 라스푸틴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내 입꼬리가 느린 움직임으로 위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에드윈은 잠에서 깨어났다. 곧 열릴 모임의 준비작업에서 잠시 풀려나 있었던 탓에 낮잠을 잔 건지, 원. 그가 거의 주최하다시피 한 이번 모임에서는 기필코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시감이 들었다.

에드윈은 탁자 위에 놓인 기라델리 초콜릿을 한 줌 쥐어 입에 털어 넣었다. 양이 좀 적다. 머릿속 한 군데가 간지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머리를 긁적이다 못해 두개골 안쪽을 좀 긁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또 어쩌겠는가. 양이야 적을 때도 있고, 많을 때도 있는 법이다. 머리가 가려울 때도, 아닐 때도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그에겐 뭐든 만족할 수 있는 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뭐 별반 다를 것도 없으니. 에드윈은 졸린 눈을 비비며 그림을 응시했다. 그림은 여전히 건재히 자리해 있다. 여전히 어떤 의미로서 그곳에 작용하고 있다. 물론 그가 조금만 더 자세히, 편집증적으로 그림을 세세히 살폈다면 기이하게도 그림에 윤기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기까지 했다. 당연한 수순대로,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낮잠을 많이 잔 모양이었다. 시각은 어느새 점심과 저녁의 완전한 중간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묘하게 나른한 기분이 사방을 점거하고 있었다. 이야말로 평범한 주말의 오후이리라고 생각하며, 에드윈은 뚜벅이며 몇 시간 전만해도 사방팔방으로 정체불명의 흰 가루가 흩뿌려져 있던 문지방을 밟고 지나갔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가정교사가 그의 발걸음에 놀라 깨어났다. 브란트는 재빨리 '난 위엄 있고 넌 조심 좀 해라' 표정을 지어 보이며 밖으로 후다닥 걸어나가는 가정교사에게 눈인사했다.

딸애는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에드윈은 여전히 미약한 기시감을 느끼며 에밀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인지 딸애가 순간적으로 되게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던 것 같았다. 노파심에서 비롯된 환각일까? 그는 침대에 앉아 곰곰이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에드윈 브란트 4세는 오랜만에 깊은 사유를 했다. 그것은 딸을 위함은 아니요, 그렇다고 자기를 위함도 아닌, 사유 그 자체를 위한 사유였다. 평소엔 전혀 하지 않을 사유였으나, 강렬한 예술 작품을 보고 나면 으레 그러듯, 필연적으로 머리를 굴려야 한다는 생각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결론은 언제나 흐릿한 서커스의 일면에 다다랐다. 그는 한숨을 쉬곤 여전히 잠든 에밀리를 뒤로하고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그때 어떤 이미지가 에드윈 브란트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책상에 못 보던 풍선 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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