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드 온 진도 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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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토요일 오후, 이림은 소파에 누워 누구보다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 밀려 있던 배달도 어제 마무리했고, 현재 예정된 배달도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항상 잔소리만 늘어놓던 누나가 외출하였기 때문에 이림은 매우 편안한 마음으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이 불안하게 진동하기 전까지는.

"으아아아아—! 제발! 토요일에는 좀 쉬게 냅두라고…"

상사의 문자 때문에 주말에도 일에 치인다는 직장인의 서러움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이림은 견딜 수 없는 현실에 공중으로 다리를 들어 허우적댔지만, 그런다고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대장이 자신을 다마스에 강제로 태울 때 미리 눈치채고 도망쳤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주말에 배달을 시키는 건 대체 무슨 심보냐고… 휴일을 따로 명시하든 해야지, 진짜."

이림은 온갖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느릿느릿 나무늘보처럼 바짓주머니에서 조그만 스마트폰을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 그 진동은 배달용 보이드 계정으로 온 메시지 알림이었다. 어플에 접속하자 프로필 사진 위로 메시지가 1건 도착했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 이림은 손을 떨면서 조심스럽게 화면을 터치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이림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혀 말했다.

"해산물? 음식물을 배달하는 건 처음인데… 고작 이거 배달 시키려고 주말에 연락한 거야?."

이림은 지난 몇 주 동안 정말 다양한 물건들을 배달해 왔다. 가끔은 살아있는 것을 — 그 중에는 '생물'이 아닌 것도 있었다. — 배달하기도 했었다. 배달비가 싸고 빠른 시간 안에 보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영업을 시작한 지 며칠 만에 의뢰가 파도처럼 밀려왔었다. 배달하느라 먼 타지로 날아가는 것은 일상이었고, 간혹 여분차원이나 아예 다른 차원까지 가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의뢰인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굉장히 놀라운 인물이었다. 메시지 하단에 적힌 발송처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우도로 173. 배송처는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망금산이었다. 지금까지 맡아온 가지각색 의뢰를 생각하면, 파격적으로 '평범한' 의뢰인 셈이었다.

"제주에서 진도라… 게다가 보내는 건 해산물이고. 무슨 식당이라도 여는 거야, 뭐야. 그냥 무시하고 자고 싶다아."

이림은 스마트폰 화면을 끄고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에 들어 이 사소한 의뢰를 못 본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돈이 쪼들렸다. 이번 달 맹비로 낼 돈의 액수가 머릿속을 스쳤다. 욕구와 당위 사이에서 머리 아프게 고민하던 이림은 부릅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 씨, 몰라! 그냥 빨리 끝내고 쉬어야지!"

이림은 갑작스러운 외침과 동시에 평소 배달을 갈 때 입는 짙은 초록색 재킷과 검은색 바지로 빠르게 갈아입고 차고로 달려갔다. 푸른색 윤기가 흐르는 다마스, 풍뎅이호가 당당하게 차고에 주차되어 있었다. 이림은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힘없이 앉았다. 좌석 아래의 오래된 스프링이 눌리면서 귀를 긁는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이림이 능숙하게 차키를 돌리고 변속기를 잡자 풍뎅이호가 엔진음을 내기 시작했고, 그 앞의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길"이 열렸다. 내비게이션은 이림에게 목적지의 주소를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침내 풍뎅이호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면서 오늘도 열심히 일하러 나갔다.


우도에서




"길"을 타고 가면 약간의 멀미를 동반하지만 어느 곳이든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너무 빈번하고 오랫동안 사용하면 사용자가 멀미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사용 시간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배달을 시작한 지 한 달 가까이 지난 시점에도, 이림은 "길"을 지나갈 때 차체의 흔들림을 여전히 완전하게 적응하기 못했다.

이림은 머리를 찌르는 두통을 가라앉히려고 창문을 열어 우도의 시원한 3월 공기를 들이마셨다. 차가 천천히 도로를 내달리면서 공기를 가르고, 바람을 일으켰다. 관광객들이 타는 ATV와 작은 마을 버스가 1차선 포장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리고, 이림은 주변을 둘러보고 적당한 곳에 차를 손쉽게 주차했다.

차문을 열고 차에서 나오는 순간, 도로 너머에 있는 2층짜리 허름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1층은 이 지역에서는 무척 흔한 청과물 가게였다. 가게는 무슨 이유로 문을 닫았는지 내부가 어두웠다. 주목할 만한 곳은 2층이었다. 그곳에는 간판이 없었지만, 창문 안에서 기다란 형광등이 빛나고 있었다.

이림은 주소를 확인한 후 도로를 넘어 건물의 입구에 다다랐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아 밀어서 열 수 있었다. 이림은 삐걱거리는 난간을 잡으며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르기 시작하였다. 내부를 둘러보나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건물이었다. 2층에 도착하자 불투명한 유리문 옆에 직사각형 모양의 간판이 걸려 있었다.

''JYD 에어세큐리티'라… 사무실일까?'

이림은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지만, 궁금증은 잠시 접어두고 유리문을 두 번 두드려 노크했다. 얼마 안 가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오더니 규칙적인 구두굽 소리가 서서히 문으로 다가왔다. 그후 편한 옷을 입은 여자가 문을 열고 이림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여자의 오른손에는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아까 배달 의뢰했었는데, 그쪽이 제이드 맞나요?"
"아, 네. 이림이라고 합니다. 배달할 물건은 어디에 있죠?"

이림은 의뢰인의 뒷쪽으로 시선을 돌려 내부를 간단히 둘러보았다. 그렇게 넓은 사무실은 아니었지만, 있을 만한 것은 다 있었다. 사무실에 책상이 하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하니 직원은 의뢰인 한 명 뿐인 것 같았다. 특이한 점은 여러 항공사의 승무원 복장이 옷걸이에 줄줄이 걸려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택배 상자나 아이스박스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저기 냉장고 안에 있어요. 일단 들어 오세요, 제가 꺼내드릴게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림은 의뢰인을 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고, 둘은 구석에 놓인 미니 냉장고 앞에 나란히 섰다. 냉장고 문이 열리면서 서늘한 냉기와 함께 하얀색 플라스틱으로 된 아이스 박스가 꺼내져 나왔다. 의뢰인은 천천히 뚜껑을 열어 그 내부를 이림에게 보여주었다. 우도 앞바다에서 갓 잡은 것 같은 싱싱한 전복, 보말, 소라 등 여러 해산물이 아이스박스 안에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전복 껍질이 오팔처럼 조화로운 빛을 내고 있었다.

"와아, 전복이 엄청 많은데요. 보말이랑 소라도 보이고…"
"오랜만에 친구한테 보내는 거라 신경을 좀 썼거든요. 메시지 보낼 때 같이 적은 주소로 배달해주시면 돼요."
"친구 분과 사이가 무척 좋으시나 보네요."
"실은 원래 제가 직접 가서 보내주고 했었는데, 매번 바쁜 나머지 가장 신선할 때 주지를 못했거든요. 그게 미안해서 올해는 다른 사람을 통해 보내려고 하던 중에 배달 서비스를 알게 된 거예요."
"아, 그랬군요."

이림은 고개를 끄덕이고 의뢰인에게서 아이스박스를 건네받았다. 아이스 박스가 생각보다 묵직하여 자칫 실수로 바닥에 쏟을 것 같았다. 이림은 배달할 때 행여 떨어뜨리거나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주의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혹시 배달하면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라도 있나요? 예를 들어, 받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말이에요."

의뢰인은 냉장고 문을 가볍게 닫고 이림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도착한 후에 "영등이 해산물을 보내왔다"라고 말하시면 저절로 나타날 거예요. 또 받는 사람 이름은 '황교'라고 해요. 나중에 이름 확인하신 후에 전달하시면 돼요. 그리고 이 편지도 함께 전해주실 수 있으세요?"
"예, 그럼요. 빠뜨리지 않고 전부 전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계좌 번호 좀 알려주실래요?"

의뢰인은 계좌 번호를 묻고 능숙하게 이림의 배달용 계좌로 배달비를 송금하였다. 그때 이림은 의뢰인의 굽힌 목에서 붉은색 실이 꿰매진 자국 같은 것을 스치듯이 보았다. 눈여겨 보지는 않아 자신이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 알 수는 없었다.

"송금했어요. 확인해보시겠어요?"
"아, 방금 스마트폰으로 송금됐다고 알람 울렸어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이림은 방금 전에 무엇도 보지 않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아이스박스를 들고 유리문으로 향했다. 박스가 커서 그의 시야가 가려졌기 때문에 박스를 살짝 옆으로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기울여진 박스 안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심해서 가세요!"

의뢰인은 맑은 목소리로 이림에게 인사했다. 이림은 팔로 문을 밀어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중에 그는 의뢰인의 말투가 어디서 들어본 것처럼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사무실을 둘러보니 옷걸이에 승무원 옷이 잔뜩 걸려 있던데, 승무원인가? 아니, 그냥 승무원 출신인 것 같긴 한데…'

1층으로 내려온 이림이 조수석에 아이스박스를 내려놓고 운전석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이 보았던 것을 문득 떠올랐다.

"그나저나 아까 목의 꿰매진 실은 또 뭐였던 걸까… 하아, 모르겠다. 그냥 문신이거나 그런 거겠지."

이림은 검은색 핸들에 머리를 대고 몇 초 동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피곤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엑셀을 힘차게 밟았다. 서둘러 배달을 끝내고 여유로운 일요일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풍뎅이호가 "길"로 넘어가고, 도로 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얼마 후, 거리는 평소처럼 관광객들의 신난 말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지나가듯이 그 광경을 본 사람도 있었지만,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벽파진에서




아직 해가 환히 빛나는 주말 오후였지만, 넓은 콘크리트 주차장에는 마을 주민들의 트럭 세 대와 풍뎅이호만 주차되어 있었다. 이림은 조수석에서 아이스박스를 조심히 꺼내고 발로 차문을 세게 닫았다. 가까이 있는 바닷가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림은 눈을 찡그리고 목적지인 망금산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그때 망금산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저 산인가 보네."

이림은 차 위에 박스를 올려놓고 스마트폰으로 의뢰인의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그후 고개를 들어 벽파진 뒤에 자리잡은 낮은 언덕을 응시했다. 언덕 위로 검은색 비석이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이림은 아무 망설임 없이 박스를 들고 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길이 비교적 평탄하여 오르기 쉬웠다. 그러나 벌써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가 이림의 등을 달구고 있었다. 아직 초봄이었지만, 금새 따뜻해진 햇빛 때문에 아이스박스의 내용물이 상할까봐 걱정이 들었다.

'주소가 산이니까 받는 사람도 평범한 사람은 아닐 테고… 거기에 박스를 놓을 냉장고가 있긴 하나?'

산의 정상에 오르자 나무가 거의 없는 평지와 하늘 위로 우람하게 솟아오른 비석이 있었다. 이림은 비석에 다가가 그 앞에 설치된 안내문을 들여다 보았다.

"충무공전첩비… 여기에 이런 비석이 다 있네. 휴우, 일단 여기가 산의 정상인 것 같은데, 그 '황교'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사람 사는 집은 안 보이는데."

이림은 곳곳을 둘러다니며 '황교'를 찾아봤지만, 사람의 흔적조차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림은 하는 수 없이 의뢰인이 알려준대로 해보기로 했다.

"황교 씨, 영등이 택배를 보내왔습니다. 해산물이에요. 택배 받아가세요!"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림이 몇 번 더 목청껏 소리쳐봤지만, 풀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무언가 쉬쉭— 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잠깐만, 이게 무슨 소리— 으아악!"

이림은 깜짝 놀라 그 소리의 근원이 무엇인지 눈으로 직접 보고 말았다. 그것은 노란색 구렁이 한 마리였다. 구렁이는 혀를 낼름거리며 조금씩 이림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림은 '능구렁이' 손의 일원이었지만, 정작 뱀은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누렁이가 나타나니 몸을 움츠러들며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훠이, 훠이! 너한테 줄 거 없다. 네가 전복을 좋아하기라도 해? 저리 가라고!"

구렁이는 아랑곳 않고 이림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이림은 수령인이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웬 구렁이가 나타난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이림은 몸을 반대로 돌고 다시 한 번 소리쳤다.

"황교 씨, 택배 받아가세요! 얼른요!"
"오, 벌써요?"

이림은 처음 듣는 목소리를 듣고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얇은 등산복 자켓을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 하얀 턱수염이 자라 있었다. 노인의 시선은 이림이 들고 있는 아이스박스로 향해 있었다.

"혹시 그쪽 이름이… '황교'인가요?"
"예. 황교 맞아요. 그거, 영등이 보내온 것 같은데. 맞죠?"
"어, 네. 여기요."

'황교'라는 이름의 노인은 해맑은 눈빛으로 박스를 어루만지다가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살펴봤다. 그는 전복을 하나 꺼내 이리저리 둘러봤다. 이윽고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뚜껑을 닫고 옆에 살포시 놓았다.

"설마 그 구렁이가 선생님이셨어요?"
"음? 으응.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내가 구렁이거든, 흐흐. 조금만 더 있으면 용이 될지도 모른다고."

황교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림은 그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 '구렁이'였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배달 가기 전에 의뢰인에게 조금 더 자세히 물어볼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황교는 이림이 했던 말을 이미 여러 번 들어봤는지 서운해 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다.

보이드의 개인 메시지로 의뢰인에게 배달 완료를 보고한 후, 이림은 문득 의뢰인이 건네준 편지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 '영등'이라는 분이 이 편지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편지까지? 이것까지 보낼 필요 없는데, 참. 내가 무안해지는구만."

황교는 천천히 봉투를 열어 편지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이림은 그가 편지를 다 읽으면 떠나기로 했다. 왠지 그도 자신이 전한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1년 만에 이렇게라도 소식을 알게 되니 다행인데… 흐음. 저기, 이 서천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압니까?"
"네? 서천이요?"
"예. 여기에 서천 컨트리클럽이라는 곳이 나와 있는데, 어떤 곳인지 궁금해져서 말이죠.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 같기도 하고…"

이림은 갑작스러운 황교의 질문 때문에 당혹감을 느꼈다. 예전에 그서천 컨트리클럽을 찾아가 본 적이 있긴 했었다. 물론 찾을 사람이 있어 동료들과 함께 찾아갔던 것일 뿐, 그곳에 오래 머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 보고 들은 것이 있긴 했다.

"저도 살짝만 들은 거지만, 그 서천이라는 곳은 여러 신들이 휴양하는 곳인가 봐요. 그러니까 일종의 리조트인 셈이죠, 네… 사실 저도 누구를 만나러 잠깐 가보기만 한 거지, 잘 알지는 못해요."
"아니에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영등이 나에게 서천에서 며칠 휴양을 즐겨보는 것은 어떻냐고 편지에 적어서요. 이 친구도 서천에서 오래 지냈었다는데, 꽤 좋은 곳인가 봅니다."
"네, 좋은 곳이에요. 시설도 좋더라구요."

황교는 언제부터인가 비석 옆의 벤치에 앉아 편지를 계속 읽고 있었다. 이림은 스마트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던 중 궁금한 것이 생각나 황교에게 대뜸 물었다.

"실례지만, 영등과 오랫동안 친구셨었나요? 해산물을 이렇게나 가득 넣어서 보내주는 걸 보니 굉장한 절친이신 것 같아서요."
"하하하. 그렇기는 하지만, 오래된 사이는 아닙니다. 한… 4년 전이었을 거예요. 거의 몇백 년 동안 이 산에서 여느 때처럼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오늘처럼 영등이 해산물을 잔뜩 가지고 찾아와줬죠. 알고보니 영등도 저처럼 일종의 수호신 같은 존재더군요."
"수호신?"

이림은 자신도 모르게 황교 옆에 앉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열심히 대화에 임하고 있었다.

"오래된 어촌마다 뱃일을 돕는 신이라고 제사를 지내곤 하잖아요? 저도 그런 신 중 하나에요. 오래 전에 큰 태풍이 불어닥칠 때 도와준 것으로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주기 시작해서 여기에 머물게 됐죠. 뭐, 그래봐야 마을 사람들이 도시로 나가거나 해서 아는 사람도 이젠 거의 없는 잡신이지만요. 듣자하니 영등은 제주 바다를 관리하는 신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아, 이제 기억나는 것 같아요. 전에 영등신 설화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예, 그 이야기에 나오는 영등신이 자신이라네요. 저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아무튼, 그후 영등이 매년 이맘때에 해산물을 저렇게 수북히 쌓아서 보내주고 있답니다. 그렇게 해오다가 올해는 이제 그쪽을 통해서 택배를 보낸 것이고요."
"아하."

황교는 오랜만에 즐거운 대화를 하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이림은 이야기로만 들어본 영등신이 자신의 고객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묘한 기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는 영등이 부러워요. 저처럼 한 곳에만 살지 않고 자유롭게 넓은 바다 위를 오가니까요. 분명 나이는 영등이 더 많은데, 어째 제가 더 늙은 것 같단 말이죠, 하하."

황교는 은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멋쩍게 웃었지만, 이림이 보기에는 그가 진심으로 웃겨서 웃는 것 같지 않았다. 이림은 고개를 들어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 자리를 뜨면 눈치가 보일 것 같아 갑자기 대화를 끊을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아 지금 떠나도 싶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저를 보살펴 주는 것은 정말 고마워요. 저도 그 보답을 하고 싶어서 여기에 있는 것이고요.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이라도 망금산을 떠나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녀보고 싶어요. 벽파진 말고도 이 세상에는 바다가 넘쳐나잖아요? 뭐, 그래봐야 상상에 불과하지만요."
"그럼, 이번에는 선생님이 영등을 찾아가보시는 건 어떤가요?"
"예? 제가요?"

황교가 눈을 크게 뜨고 이림에게 당황한 듯 되물었다.

"서천에서 머문 적이 있는 사람이 서천을 더 잘 알지 않겠어요? 또, 이번 기회에 산을 벗어나는 것도 연습할 수 있잖아요. 일단 한 번 도전해보자는 말이죠."
"글쎄요… 정말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는데요."
"해봐야 아는 거죠.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음… 알겠습니다. 한 번 시도해보죠. 그나저나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 오랜만에 신나는 기분이 드네요, 하하하."

이림은 이제 할 말이 끝난 것 같아 벤치에서 일어서고 뒤를 돌아 벽파진의 바다를 둘러보았다. 어둑어둑한 하늘 위로 석양이 바다를 자신과 똑같은 색으로 칠하고 있었다. 파도를 따라 일렁이는 햇빛이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비록 오늘 원하는 휴식은 제대로 즐기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림은 이유 모를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성공하기를 바랄게요."
"아! 잠깐만요. 받기만 해서 너무 미안한데, 가기 전에 이거 받아가고 가세요."
"이거요?"

황교가 급하게 등산복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바스락 소리가 나는 얇은 무언가를 꺼냈다. 자세히 보니 구렁이의 허물을 말린 것이었다. 황교가 허물을 꽉 잡고 있었지만, 갈라지거나 찢어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거, 뱀 허물이잖아요?"
"이 허물이 배달할 때 안전 운전을 기원하는 부적이 되어줄 겁니다.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돼요."
"하하하…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림은 차마 거절할 수 없어 허물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집어 손바닥 위에 놓았다. 처음 느끼는 이상한 감촉 때문에 손바닥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이림은 일단 허물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동안 황교는 아이스박스를 들고 이림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야기 들어줘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이림은 손을 들어 답인사를 하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잠시 멈춰서고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다는 듯이. 이림은 미소를 짓고 신나는 발걸음으로 길을 걸어갔다.




서천에서




"… 그 젊은 친구가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올 용기가 나지 않았을 거야."
"다행이네. 사실 그 사람이 자네 말동무가 되어줬으면 바랐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나 보네."
"그러게…"

영등과 황교는 따스한 정오의 햇빛을 쬐며 나란히 긴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아침부터 열심히 격구에 매진한 탓에 온 몸이 뻐근했다. 황교는 에너지 음료수 병의 뚜껑을 간신히 돌려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의 짧은 은색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었다.

"하나 더 있는데, 줄까?"
"아냐, 아냐. 아까부터 목이 좀 아파서. 하아, 어떻게 하면 이 통증이 가라앉을지 모르겠어."
"실밥이 좀 풀린 거 아냐? 의사 선생과 만나봤어?"
"만나봤지. 근데 별 수가 없는 것 같아. 그래도, 아까 너무 무리해서 아픈 것 같으니까 잠시 쉬면 나을 거야."
"아이고…"

영등은 자신의 목을 둘러싸는 붉은 실을 어루만지며 통증이 얼른 사라지기를 바랐다. 요즘 들어서 실이 꿰매진 자국에서 시도때도 없이 찌릿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영등은 한동안 무리한 운동은 삼가야 할 것 같다고 속마음으로 중얼거렸다. 황교는 그가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여기 머물면서 의지할 수 있는 벗도 여럿 사귀고, 주기적으로 상태를 검사받을 수 있게 된 거지. 혼자 지냈을 때는 그냥 무작정 견뎌야만 했으니까…"

영등은 고독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랐다. 배가 드문드문 보이는 바다 위로 홀로 다니며 거의 매일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기만 했다. 어느 순간, 영등은 자신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떻게든 이 무기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리저리 방법을 찾다가, 한 무당의 도움으로 서천에 올 수 있었다. 황교에게 있어서 이림처럼, 그 무당이 없었더라면 영등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수많은 신 중 하나가 됐을지도 몰랐다.

"예전의 우리처럼 외로운 신이 또 어딘가에 있겠지?"
"그럴 걸. 당장 여기에 지내는 숙박객 대부분이 그런 존재이니."
"… 그럼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황교가 주먹을 쥐고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영등은 그런 황교의 열정적인 모습을 처음 보고 놀라 말했다.

"어떻게? 우리가 직접 그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해보자는 거야?"
"그렇지! 받은 만큼 돌려줄 줄 알아야 하잖아. 제2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기도 하고."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우리 둘끼리만 하기에는 벅차지 않을까?"

영등은 통증이 조금 잦아들자 옆에 놓인 음료수 병을 들고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셨다. 황교는 곰곰히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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