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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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이 한창일 당시 나는 재단의 외무부 소속으로서 미 육군 제3사단에서 활동했다. 많은 민주국가뿐만 아니라 재단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받은 UN군은 거침없이 북진했고, 당시 우리는 전쟁이 곧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곧 이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를 깨달았다. 한반도는 비록 작은 땅이었지만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고 소련과 중국은 북한을 포기할 수 없었다. 변칙적인 수단까지 사용하며 갑작스럽게 개입한 중공군의 공세에 UN군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는 원산이 중공군의 손에 넘어갔다. 우리는 영하 20도가 넘는 강추위 속에서 겨우 중공군의 공세를 뚫고 겨우겨우 흥남의 작전기지까지 철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곳 사정도 좋지는 않았다. 원산이 함락되면서 퇴로가 막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뱃길뿐이었고, 12월 9일 맥아더 원수의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처음 이 어둠 속에 떨어졌을 때,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 떴다. 한 여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아이넌 잘 이썸메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한국어라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 떴다. 새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수일에 걸쳐 병력과 장비가 흥남 부두를 떠났고, 22일에는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도착했다. 부두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피난민으로 아수라장이었지만 나는 저들을 걱정할 여력이 없었다. 당시 나는 지니고 있던 SCP가 중공군이 사용한 변칙적인 수단에 반응하여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나에게는 오직 지니고 있던 SCP와 함께 무사히 재단에 복귀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수없이 많은 피난민 사이에서 넘어져 밟히고 차이는 한 어머니는 내가 알아듣지도 못할 한국어로 무어라 말하며 나에게 자신의 아이를 힘겹게 내밀었다. 이 안쓰러운 여인의 눈빛은 마지막으로 내뱉은 뜻 모를 한국어를 지금까지도 또박또박 기억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아이 이러믄 바곈수라요. 우리 아이마니라도 지발, 꼭 쫌 살료주시오―

…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 떴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동양인 사이로 서양인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그 중 특히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마이클? 네가 어떻게 여기에…?"

― 아무리 애써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는 너덜너덜해진 군복을 입은 채 얼음과 피로 뒤덮인 이 남성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육군 제3소대에서 나와 함께 싸웠던 전우였다. 나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하는 그에게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 떴다. 새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알몬드 장군은 내가 지니고 있던 SCP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고, 후방을 맡기로 한 제3사단임에도 불구하고 홀로 먼저 승선할 수 있었다. 흥남에서 철수준비가 끝나고 내가 안심했을 무렵, 항해사들이 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새 명령이다! 배가 뒤집혀도 좋으니까 일단 실어!"

후방을 주시하던 제3사단도 승선할 준비를 시작하려던 바로 그 순간, 장비를 파기하고 피난민을 태우기로 했으니, 혼잡해지기 전에 서둘러 미리 승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같은 명령이 한 번 더 반복되었고, 그제야 제3사단으로부터 회신이 왔다.

"우리 먼저 철수하라고? 좆 까라 그래!"

제3사단에서 보내온 이 짧은 무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이름 모를 갓난아이를 한 손에 안고 있던 나는 고민했다. 나는 재단을 위해 일했다. 하나의 국가가 아닌 전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나는 한 명의 군인이었으며, 비록 표면적인 명분이었을지언정, 나의 조국의 의지에 따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다. 그동안 나와 함께했던 전우들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수만 명의 사람들의 뒤를 봐주기 위해 상부의 명령에 불복했고, 나는 도저히 배 안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나는 다녀올 데가 있으니 잠시 아이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후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예상보다 빨리 흥남에 도달했다. 명령대로 먼저 승선했다면 분명 아무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다행히 충분한 시간을 끌 수 있었다. 10만에 가까운 피난민이 배에 올랐다. 배에 가득 실린 유류는 물론, 내가 가지고 들어온 SCP 때문에 조그만 불씨에도 큰 재앙이 벌어질 수 있었던 위험천만한 항해였지만 다행히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고, 우리는 다섯이나 되는 아이의 탄생을 축복하며 무사히 항해를 마쳤다.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 떴다. 도무지 그의 이름이 기억나질 않았다. 피난민이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무사히 오를 수 있도록 뒤를 지켜주다 전사한 세 명의 제3사단 용사들의 이름을 나는 도무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오래전 일이니까'는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뜻도 모를 한국어는 그토록 선명하게 기억하면서,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작은 나라의 피난민을 지켜주기 위해 싸우다 전사한 전우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것일까? 머리가 아팠다. 나를 보며 반겨주는 전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 떴다. 방금 만났던 여인과 다시 만났다.

"우리 아이넌 잘 이찌요? 대답 쫌 해 주시라요. 혹 무선 이리라도 생깅 건 아니지요?"

나는 거제도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SCP와 아이를 맡겼던 항해사를 찾아다녔지만 결국은 찾지 못했었다. 나는 도저히 이 안쓰러운 어머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 내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았다.

어지러웠다. 떠오른 기억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장면들이 계속 떠올라 머리가 아팠다.

… 눈을 떴다.

"어떻게 날 잊을 수 있는 거지? 나를 죽인 건 너잖아!"

… 눈을 감았다.

그제야 기억났다. 나는 배에서 선원에게 SCP와 아이를 건네준 적이 없었다.

그때 나는 배에 있지도 않았다. 혼란 속에서 나는 먼저 승선할 기회를 잃었고, 마지못해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상황은 암울했다. 중공군의 수는 어마어마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는 우리를 포기하고 바로 출항할 준비를 시작했다. 절대 중공군에게 SCP가 넘어가서는 안 된다며, 당장 그 자리를 벗어나라는 재단의 지령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방법으로 내려졌다. 그 지령은 뒤에서 우리를 믿고 있는 피난민들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 사이의 균형을 깨뜨렸고, 재단을 위해, 이 세상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와 함께 충분히 살릴 수 있었던 전우를 버리고 도망쳤다.

기억 소거로 바뀐 기억과 진짜 기억이 뒤섞여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 눈을 떴다.

"거 날리통 쏘게서 우리 옌수를 데리간 게 아자씨가 아니요. 왜 아무 대답도 업싸요?"

… 눈을 감았다.

그제야 진짜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배에서 선원에게 SCP와 아이를 건네준 적이 없었다.

나는 수행원들과 함께 제3사단에서 빠져나와 후퇴하던 중 인파에 치여 위험에 처한 어머니를 만나 아이를 건네받았다. 하지만 배에 오른 직후, 아이에게서는 내가 지니고 있던 SCP에 노출된 징후가 나타났다. 적절한 격리 절차를 따르자면, 나는 더 늦기전에 이 아이를 죽여야만 했다. 그러고싶지 않았지만, 이 아이 하나를 살리기 위해 승선한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힘겹게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칼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나는 끔찍한 죄책감에 휩싸인 채로 아이를 배 밖으로 던졌다. 물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메러디스 빅토리호 아래에 수없이 밀려들었던 쪽배 중 하나에 떨어졌으리라 막연하게 생각하며 상관에게 SCP를 넘겨주기 위해 돌아섰다. 나는 아이를 맡긴 여인에게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야 말았고, 차마 그 아이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기억 소거로 바뀐 기억과 진짜 기억이 점점 심하게 뒤섞여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 눈을 감았다.

아이의 이름은 박연수라고 했다. 본인의 이름이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입고 있던 옷에 그렇게 수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소설에서나 나올 만한 우연과 기적 때문이었다.

흥남 철수 작전, 그중에서도 특히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기적은 대중에게도 아주 유명했다. 당시 피난민의 뒤를 봐준 우리 제3사단이 기념행사에 초대받아 나를 포함한 몇몇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바로 그 날, 나는 같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같은 비행기에 오른 연수를 다시 만났다. 당연하게도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 때문에 생겼을 목에서 귀 밑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흉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눈은 어머니의 것과 빼다 박은 듯이 꼭 닮아 있었다. 처음에는 귀신이라도 본 줄 알았다. 나는 홀린 듯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내와 딸로 보이는 듯한 두 명의 여자와 함께 있었다 ― 나는…

… 눈을 떴다.

"그래, 누군지도 모를 저 여자는 그렇게나 신경 쓰이고, 너 때문에 죽은 나는 안중에도 없다 그거지?"

아무리 고민해도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재단이니 인류니 하는 것은 그저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에서 그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핑계를 찾던 나에게 주어진 명분일 뿐, 나를 원망하는 전우가 이해할 만한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 아이를 잃은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겨우 길을 찾은 나는 또다시 길을 잃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 눈을 감았다.


한 의무 시설에 나이 지긋한 재단 외무부 요원이자,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미국 제8군 제1통신여단의 전직 간부 한 명이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었다. 병실 한구석에는 의사로 보이는 사람 두 명이 환자를 지켜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벌써 열흘째인데, 이러다 못 깨어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실험 계획도 없었는데 대체 어쩌다가 물린 거야?"

"뱀한테 술을 부어주다가 물렸다는군."

"그게 뭔 소리야?"

"625-KO 격리실에 찾아오더니, 한동안 뱀과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군.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아무도 말리지 못했어. 다들 가위눌린 것처럼 꼼짝을 못했거든. 격리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글쌔, 자기 수통에 들어있던 위스키를 뱀 앞에다가 부어주더라니까! 어휴, 귀신한테 술 주는건 또 어디서 배웠는지…"

"하, 별 미친 놈도 다 보겠네. 양놈이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가지고… "

"야, 야, 아무리 그래도 말이 좀 심하다. 한국 전쟁 참전 용사라는데, 그럴만도 하지 않아?"

"그래도 멍청한 건 멍청한 거야. 그건 그렇고, 오늘 점심 메뉴는 뭐래?"

두 남자는 곧 점심을 먹기 위해 병실을 떠났다.


… 한동안 눈을 감고 있던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끝없는 어둠 속을 헤매다 보니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기억마저도 뒤죽박죽이었고, 두통은 끊이질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웬 낯익은 여인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 "우리 아이넌 잘 이썸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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