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과 절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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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1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림역 7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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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날 자꾸 이런 음침한 곳으로만 몰아넣는 거야?"

"닥치고 걷기나 하라니까 그래도."

신림역 7번 출구를 나와 근처에 있던 쇼핑몰에 들어간 세검과 로레인은 이내 지하 주차장 구석의 낡은 철문 앞에서 멈춰섰다.

"어디 보자… 지금은 사실상 폐쇄된 곳이긴 할 텐데…"

세검은 손전등을 들어 문에 붙은 빈 명판을 비추었다. 흠집이 가득한 명판에 희미한 글자가 나타났다.

SCP 재단 관악 제724K관측소 및 안전가옥

KRSEGW-Post-724K

"맞게 왔네." 세검이 문 옆의 키패드를 잠시 만지작거리자, 모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의 잠금이 풀렸다. "먼저 들어가." 그러나, 로레인은 가만히 선 채로 묵묵부답이었다. "먼저 들어가라니까? 왜 말이 없어?"

"방금 머리에 구멍나기 싫으면 닥치고 있으라면서?" 로레인은 세검이 쏘아붙인 말을 그대로 맞받아쳤다.

"으으, 알겠어. 어차피 곧 도착할 사람들에게 널 인계할 때까지만 특별히 참아주고 있을게. 그러니까, 이왕 포로가 된 거 정보 제공에 좀 협조해 주지 않으련?" 세검이 뒷목을 잡으며 말했다.

"거 설득 한 번 참 못 하네. 뭐, 나도 입이 있으니 특별히 몇 마디 살짝 남겨 주지." 로레인은 세검을 지나쳐 문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복도를 따라가자, 재단 기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면담실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원본에 비해 조금 더 큰 크기와 잡다한 설비들이 늘어선 공간을 볼 수 있었다. 방의 모든 물건들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지만, 나름 어느 정도의 관리는 해 놓았는지 버려진 건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거미줄 같은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세검은 이미 자리를 잡은 로레인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조용히 당겨 먼지를 턴 후 앉았다. "자, 그렇다면 그 남길 말이라는 게 뭔지 좀 들어보자."

"일단 이것 좀 풀어주면 말 할게." 로레인이 찰랑거리는 수갑을 보이며 말했다.

"그래." 세검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로레인의 오른쪽 손목에 묶인 수갑을 풀었다.

"좋아. 이제 조금 말이 통하네." 로레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 손이 묶인 거지 입이 막힌 건 아니니까." 세검이 푼 수갑을 도로 의자의 왼쪽 팔걸이에 채우며 대답했다.

"야!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여기 있으니까 그 남긴다는 말이나 빨리 해 봐. 허튼 수작 부리면 머리에 바람구멍 뚫리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형체도 못 알아보게 짓이겨지는 수가 있으니까." 세검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착석하며 말했다.

"그래. 말해줄게. 첫 번째, 나는 '검은 여왕'이 아니야. 두 번째, 나는 재단에 어떠한 피해도 준 적이 없어. 전차 따위를 훔친 적은 더더욱 없고."

"그러시겠지. 계속해 봐." 세검은 예상했던 대답이라는 듯이 반응했다.

"셋째, 무엇보다도 나는 재단 인원이야."

로레인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세검은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헛소리 하지 마. 만약 진짜 니가 재단 인원이면, 어느 기지에서 일했는데? 어느 부서 사람인데?"

"작년까지 제21K기지 내부보안부에서 일했어."

"그렇다면, 내가 재단으로부터 직접 너를 추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건 어떻게 해명할 건데? 게다가, 나는 지금까지 내부보안부 사람들을 지겹도록 많이 만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 같은 놈은 본 적이 없어. 네 이름도, 흔적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걸 나는 똑똑히 기억해." 세검의 목소리가 점차 격양되어 갔다.

"일단 후자에 관해서부터 말해 보지." 로레인이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재단에서 꽤 일한 사람치고는 '기억한다'는 표현을 너무 쉽게 쓰는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세검은 자신이 기억소거제에 대해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퍼뜩 떠올렸다. "그럼 내가 기억소거를 당했다고 쳐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명할 건데?"

로레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 19기지에서 언제 현실조정자 관련 오리엔테이션을 받던 사람들에게 환각제를 먹였다는 사실 알고 있어?"

"그래. 환각제 먹이고서 환풍구로 해독제를 넣는 병 주고 약 주는 일이 있었다지."

"바로 그거야. 비슷한 방법으로 기억을 소거시킨 거지."

세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도 알 수 없게? 그게 가능한 거야? 재단에서?"

"일단 그 질문은 뒤로 미뤄두고, 이번엔 전자에 대해서 좀 말해 볼게." 로레인은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전자에 대한 건 잘 모르겠어. 내가 아는 건 어느 날 내가 퇴근길에 갑자기 재단 인원들의 추격을 받았고, 그날부터 제21K기지는 고사하고 집에조차 못 들어간 채로 거의 1년 동안이나 도망치며 살아왔다는 거야. 언제 21K기지에 몰래 들어가 본 적이 있긴 한데, 나에 대한 정보는 다 말소되어 있고 기억하는 사람도 없더라고." 로레인은 지쳤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는 말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생각한 바에 따르면 의심이 가는 사람이 한 명 있어."

"그게 누군데?"

"비슷한 시기에 기동특무부대 람다-92에 대한 정기 예산 감사가 있었어. 그때 내가 람다-92의 예산 기록이 겉보기에는 멀쩡했지만 특정 기간에 아주 크게 누락된 흔적이 있었다는 걸 발견했었는데, 람다-92의 기록에 그만큼 광범위한 수정을 가하고, 제21K기지 인원 모두의 기억을 소거할 수 있을 만큼 기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으로선 한 명밖에 없어."

그 순간, 세검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의장대를 연상시키는 각 잡힌 제복을 입은 그 모습을.

"슈판다우라니, 설마. 그렇게나 헌신적인 사람이 그런 짓을 하겠어…?"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일단 —"

로레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두 명의 남녀가 관측소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검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리더로 보이는 남자는 검은색의 비니를 쓰고 있었다. 여자로 보이는 다른 한 명은 검은색 아디다스 추리닝 차림에 커다란 더플백을 메고 있었다.

"누구야?" 로레인이 세검에게 물었다.

"람다-92에서 피의자 인계받으러 나왔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부턴 저희가 맡도록 하죠." 세검을 향한 남자의 말이 로레인의 질문에 대신 답변을 해 주었다.

"예? 어… 예." 세검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얼떨결에 답했다.

"이거 열쇠는 어디 있는 거죠?" 여자가 수갑이 채워진 로레인의 팔뚝을 들어 보이며 질문했다. "아… 그건…" 세검은 대답을 흐렸다.

"— 죄송하지만, 아직 피의자에 대해 질문할 점이 남아 있습니다. 시간도 아직 남아 있고요. 그러한 이유로 드릴 수 없습니다." 이내, 세검은 긴장을 풀고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말을 조금 잘못 전달했었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남자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저희가 맡도록 한다기보단, 저희가 맡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게 원래 뜻에 더 맞을 겁니다. 그러니 —"

"못한다고 말 했습니다."

세검이 단호한 태도로 말을 끊자, 남자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뭐, 그래도 저희 말대로 될 겁니다. 절단기 가져와."

비니 쓴 남자의 말에, 여자가 더플백에서 커다란 볼트 커터를 꺼내 남자에게 넘겨주었다.

"잠깐! 잠깐만 잠깐 잠깐 좀 제발 진정하고 가만히 있어 봐! 응?"

로레인의 당황함 가득한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남자는 말 없이 볼트 커터를 들고 로레인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저는 피의자와 현장에서 바로 면담을 할 권한을 포함해서 전권을 사령관에게 직접 —" 남자의 어깨를 잡은 세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는 볼트 커터를 휘둘러 세검의 복부를 후려쳤다.

"사령관님이 준 권한이니 사령관님이 뺏을 수도 있는 거죠, 안 그래요?" 고통에 쓰러진 세검의 귀에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야!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그렇게 하는 건 —" 로레인은 반쯤 일어나선 남자를 향해 소리치다 추리닝 입은 여자가 마취제에 흠뻑 젖은 흰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자 말을 잇지 못한 채 무력히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진짜였던 거야…?"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채 쓰러져 중얼대는 세검을 뒤로 하고, 두 명은 축 늘어진 로레인의 수갑을 끊고 들쳐업어 방문을 나섰다.

"저 개같은 망할 스벌 자식들을 아주 그냥 어떻게 해 버려야 진짜…" 세검은 바닥에 쓰러진 그 자세 그대로 리볼버를 뽑아 비니 쓴 남자를 겨누었다.

비니 쓴 남자도 똑같이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뽑아 세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남자가 조금 더 빨랐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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