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망의 폐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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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폐허를 꿈에서 보았다. 균류에 침식되어 무너져가는 다리의 잔흔, 나를 망연자실케 하는 휘황한 불빛속의 허물어진 망루와 석벽을. 병상에서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는 내 눈에 그것들이 어른거렸다. 열병의 고통에 신음하고 숨을 몰아쉬며 기진맥진한 채로 나는 이를 애써 몰아내려 했으나, 끝내 착란상태에 이르러 그에 끌려가고 말았다. 환영은 어둡고 혼란한 잠속에서 더욱 생생해졌다. 나의 시각을 유린하고 희롱하는 현란한 빛깔들, 경면을 스치는 환상적인 반사광. 가장 끔찍한 착란 속에서나 볼법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정확히 언제부터 이를 보아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언제부터인가 - 최소한 이는 어느 시점 이후로 나타났으니 - 나는 그 섬뜩한 폐허를 보게 되었다. 단지 열병의 착란이나 잠재의식에 형성된 불온한 형상에 불과할지 모를 악몽이 내 정신을 피폐시켰다. 너무도 생생하고도 분명하게 뇌리에 각인된 인상, 빛이 작렬하는 허공으로 피어오르는 연기와 황폐한 도랑, 귓가를 맴도는 생경하고 두려운 이명. 그 음산한 광경들이 꿈속의 나를 미치도록 두렵게 만들었다. 극도로 나약하고 무기력해진 나는 작은 인기척에도 기겁할 정도로 움츠러들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은미한 살의를 품고 있었다.
불결하고 식은땀에 젖은 침상에서 눈을 뜨고서야, 나는 익히 알던 익숙한 세계로 다시 돌아왔음에 안도하였다. 나를 간호하는 이들이 보이고, 그들이 나를 어르며 물 적신 수건으로 내 이마를 닦아낼 때, 나는 빛 아래서 안도하다가도 순간 도로 끌려갈지 모른다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빠져들곤 했다.
잠의 어두운 심연에는 항상 공포가 도사렸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연유로 나를 두렵게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근원모를 비현실적인 빛과 열기, 자욱한 연기가 어째서 나를 그토록 겁에 질리게 하는가. 내가 아는 것은 단지 그 단순한 풍경이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병적으로 예민해진 신경은 더한 공포를 만들어내고, 지치고 피폐해진 육신은 열병에 시달렸다. 나는 달아날 길 없는 심신의 고통에 갇혀있었다.
나는 오래도록 병을 앓아왔다. 자나 깨나 온몸이 아프고, 의식이 혼미하여 병상에 고정되다시피 했다. 쇠약해진 몸은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언제 병에 걸렸고, 이후 얼마간 투병생활을 해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도 한때는 건강하고 활발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건 나로썬 회상하기 힘든 아득히 먼 이전의 일이다. 나는 실상 죽어가고 있다. 오직 고통만이 무한하고 유일무이했다.
아픔과 피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잠이 들면, 나는 매번 어김없이 그곳에 서있었다. 척박한 박토에 시들고 메마른 풀이 드문드문 자라난 습지위로 음험한 고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썩은 물이 괸 해자에서 부패의 악취가 물씬 풍기고, 습기를 머금은 열기가 내습해왔다. 나는 괴로워하면서도 불빛이 명멸하는 뜨거운 증기 속을 걸었다. 진흙은 내가 발을 디딜 때마다 우그러들고, 기형적으로 부풀었다가 질퍽이며 와해되었다. 안에서 일은 수많은 추상적 형상들이 떠올라 내 시야를 덮었다. 나는 압도적인 경관에 질린 채로 무아지경에 빠져 휘청댔다. 인접한 황무지에서 걸어온 나는 내 의지와는 별개로 인근을 방황했다. 낡고 오래된 고성을 축으로, 나는 지옥과도 같은 변방을 막연히 비척대며 맴돌았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고질적인 환영은 나를 서서히 잠식해갔다. 궁지에 몰린 나는 마침내 그 중심을 탐사하려는 자포자기적 시도를 결심했다. 그것이 나로서는 최후의 수단이었으며, 악몽의 근원을 살피려는 병적인 욕망이었다.
격렬한 두통과 고열, 타는 듯한 갈증 속에서 잠의 심연으로 반은 고통스럽게, 한편으론 부드럽게 흘러들면서 나는 해이해지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껏 나는 그 불길한 폐허의 초입밖에 보지 않은 셈이었다. 내가 본 것은 변두리에 불과했다. 그러니 그 중심, 내가 아직 들어가지 못한 성채는 얼마나 더 끔찍할 것인가. 그럼에도 나는 보아야만했다. 아비규환 가운데 자리한 성, 악몽의 핵심. 그 안에 숨겨진, 나를 그토록 괴롭혀온 것과 직면함으로서 그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식이 몽롱해지고 흐려진 어느 밤에, 나는 섬망에 접어들어 악몽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는 아픔을 견디면서 애써 결심을 굳혔다. 더는 변방을 괴로이 배회하지 않고, 폐허의 심장부로 곧바로 들어설 것이다.
나는 황무지에 있었다. 메마른 대지에서 염기성 먼지가 휘날리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 닥쳤다. 나는 가까스로 목적을 상기하며, 성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살을 태우는 열기와 매캐한 연기 사이로, 소름끼치는 환영을 애써 무시한 채 걸었다. 늪지에 들어서자 말라죽은 덩굴과 균류에 뒤덮인 석벽이 보이고, 괴괴한 들창은 꺼먼 눈으로 나를 공허하게 응시하였다. 악취 풍기는 해자에 걸친 다리를 건너며 나는 연기가 자욱한 뒤를 돌아보았다. 작렬하는 광열의 근원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빛은 창문에 반사되어 일대에 분산되고 있었다.
고딕풍의 석조물은 근접하여 볼수록 극히 음침한 모습이었다. 까마득한 옛 시대에 구워졌을 벽돌들마다 온통 이끼와 곰팡이가 슬어있었다. 역병이 든 덩굴식물이 바싹 말라붙고, 흙이 진득이 묻어난 외벽에서 병의 기운이 풍겨왔다. 성은 헤아릴 수 없이 먼 과거로부터 작금의 세기까지 견뎌왔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스러지지 않고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열과 전신이 좀먹어 드는 통각에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를 뿐이었다.
나는 두통에 머리를 움켜지고 계단에서 비틀거렸다. 뭐가 뭔지 모를 혼란과 현기증을 느끼는 와중에도 간신히 문고리를 잡아챘다. 오래도록 굳건히 잠겨있었을 성문도 세월의 흐름에 돌쩌귀가 녹슬고 삭았다. 나는 기어이 문짝을 반쯤 비틀어 열었고, 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 내가 거기서 무엇을 발견했는가. 내심 예상했던 그 어떤 무시무시한 흉물도 그곳엔 없었다. 형태를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를 괴롭혀온 모든 고통의 근원지가 이곳임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거대한 건축물의 내부는 불결한 기체로 가득 차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역겨운 병의 숨결이 끼쳐왔다. 나는 기겁하며 도로 문을 닫으려했으나, 잘못된 각도로 뒤틀린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역병환자의 뜨겁고 습한 날숨이 틈으로 새어나왔다. 죽음을 부르는 유해한 가스가 연기 자욱한 대기 중으로 펴져나갔다. 둔중한 굉음에 이어 성문이 완전히 뜯겨나가고 기반이 흔들렸다. 순간 사방이 일대고조에 이르렀다. 강렬한 섬광에 나는 눈이 반쯤 멀었다. 불길이 온몸을 태우고 연기가 폐에 들어찼다. 나는 돌바닥에 쓰러져 단말마의 고통에 경련하며 흐려진 눈으로 보았다. 치솟는 불길과 섬광사이 박살난 성의 잔해가 내 위로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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