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거기에 아무도 없었다

빛에 늑대가 날뛰고, 뱀이 감싸던 이야기의 똬리를 풀고, 일몰 속에 색깔이 사라지면서 이제 검은 자들의 세계가 완성되려고 하던 그 찰나의 순간……

그 남자가 나타났다. 시계 초침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아닌 자는 휘파람을 불며 폐허 속을 걸었다. 흩날리는 폭발의 잔해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정장은 여전히 어두운 잿빛이었고 중절모는 정확히 기울어져 있었다. 새하얀 셔츠가 깔끔한 인상을 더했으며 검은색 넥타이가 그 마침표를 찍었다. '항상 검은색이야. 절대 초록이나 감청색이나 빨강이 아니란 말이지. 흐음.' 호기심에 찬 눈빛을 그림자 속에 감추고 바닥을 훑던 그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걸음을 서둘러서 도착한 곳에 그가 그토록 찾던 것이 놓여 있었다. 그는 짙은 먼지 속에서 깨끗한 하얀 손수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잡았다, 요놈."

그는 손바닥 위에 손수건을 올려놓고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앙증맞군." 첫인상은 그랬다. "전체적으로 훌륭하고 정갈한 손수건이야." 약간의 칭찬. "붙어있는 레이스는 약간 거추장스럽긴 하지만 말이지." 약간의 힐난.

"라이벌이라…… 세계를 이끌기엔 저 나름대로 괜찮은 소재였지." 손수건의 주인에게 전하는 총 심사평.

"미치광이. 좋은 시도였어. 문제는 손수건이라는 게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그럴듯해서 말이야. 결국은 자기 수에 자기가 걸려들었군그래. 너무 마음 쓰진 말고……."

까마귀 한 마리가 그와 호기심을 공유하고 싶은 듯 날아와서는 주변의 폐물 하나에 올라섰다. 아무도 아닌 자는 까마귀를 반기며 손수건을 들어 보여주었다.

"귀여운 친구지. 그렇지 않아?"

까마귀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약간 비틀었다. 그는 중절모의 챙을 들어올리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마음에 안 들어?" 남자가 손수건을 위로 들어 다른 각도에서 관찰했다. "너야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손수건에만 집중했다.

"어쨌든, 너도 수고했어. 열심히 했잖아. 그걸로 된 거지, 안 그래?"

까마귀는 세상을 이대로 끝내는 것이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가 널 구하고 모든 걸 무너뜨릴 뻔했지. 그렇게 둘 수야 없지 않았겠어?"

그가 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오해하지 말아주게. 내가 직접 하진 않았어. 그가 다급해져서 실수를 하고 만 거지. 잘못된 도박을 했다는 것." 재차 고개를 끄덕인다.

"항상, 그게 문제지. 도박의 여지를 남긴다는 거. 언제나 계획대로 이루어지도록 상황을 짤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까마귀는 아무도 아닌 자의 자화자찬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그는 중절모 아래로 미소 지으며 손수건을 접고 정장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걸로 됐어. 이번 세계도 이걸로 종료군."

아무도 아닌 자가 까마귀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지. 세계는 끝났지. 그래서 뭐?"

"그게 묻고 싶은 거지, 응?"

그가 스스로를 향해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등장인물은 제때 퇴장해야지. 실수하지 않도록 말이야."

남자의 품 안에서 꺼낸 손에는 이번엔 권총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이건 그의 후임의 총이지. 이 녀석도 시간 여행을 다녀왔어. 너도 기억할 수 있지?" 그가 그것을 가볍게 흔들었다. "작은 설정 하나 놓치지 말아야지."

"차선책이지만 너도 받아들일 거야, 그렇지? 다른 가능성은 생각하기 싫을 테니까."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그가 천천히 까마귀를 향해 권총을 조준했다. 뚫어지게 그 총구를 바라보던 까마귀가 드디어 사태를 깨달았다는 듯 울며 급히 날아올랐다.

그는 그것을 사용할 줄 알았다. 오, 사용할 줄 알고말고. 그걸 쓸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 어디 있겠어?

방아쇠가 당겨지면서 총이 발사됐다. 그 순간 시간이 완전히 멈췄다. 그의 눈앞에서 불빛이 꽃을 피웠고, 휘몰아치는 검은 부스러기가 세계를 가리며 시야 전체를 감돌았다. 정지 화상은 앨범 속에 잠자고 있는 기억의 한 조각처럼 어렴풋해 보였다. 까마귀가 총알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쪽이 아니었다. 총알을 격발시킨 권총의 은빛 공이치기가 이제 천천히 제 자리로 되돌아가면서, 시간도 함께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까마귀는 자신의 날개가 뒤집혀 퍼덕이는 것을 느꼈다. 불꽃이 총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누구의 것도 아닌 손가락이 다시 방아쇠에 힘을 걸었다. 일몰이 일출로 변했다. 뱀이 고개를 숙였다. 빛이 숨죽였다.

까마귀는 생각했다.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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