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킥교의 인류학적 접근 - 사례연구 05: 한반도의 세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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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킥교의 인류학적 접근

An Anthropological Approach to Sarkicism

인류학부 이묘영 박사Dr. Myo-yŏng Yi

서문:
지난 수십 년 사이 사르킥교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는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새로이 얻어진 정보들은, 처음 가정되었던 단일한 교리 가설과는 매우 다른 다양성과 패러다임 전환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제 사르킥 종교의 다양한 종파들과 문화적 전통에 관한 보다 넓고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사르킥 종파들은 여러 개로 갈라진 해석들의 산물이며, 고대의 사르킥교와는 피상적인 유사성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특히 본인을 비롯한 사르킥교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이 종교의 설립자들이 자애로운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고 한다. 재단이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경구일 것이다. 비록 우리 사이에는 영겁의 세월이 있지만, 우리는 결국 같은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므로.

그리고 고대의 아뒤툼인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사르킥교 역시 괴물딱지들 천지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시아 대륙에서의 변칙 종교 발흥에 대한 연구에 정통한 이묘영 박사는 모국인 대한민국에서의 낼캐 신앙을 발견함으로써 이 프로젝트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이 보고서는 그가 수집한 자료들과 세을가 사람들과 섞여 살며 얻게 된 정보를 집대성한 문건이다.

- 역사학부 종교적 GoI 위협분석 책임자문관 주디스 로우 박사Dr. Judith Low

사례연구 05: 한반도의 세을가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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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하는 소을촌 주민.

한반도에서는 예로부터 산에 신령스러운 힘이 깃들었다고 믿어왔고, 그것은 이 땅에 정착한 세을가(世乙加)Se-ŭl-ga인들에게도 다름이 없었다. 소백산맥 깊숙한 산골짜기에 거주하고 있는 사르킥 공동체인 세을가 사람들은 상당수의 사르킥 종파와는 다르게, 낼캐 디아스포라로 흘러들어온 아뒤툼의 유민이 아닌 순수한 한반도인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

소을촌(瘙乙村)So-ŭl Hamlet은 현재 세을가인들이 거주하는 마을로, 일종의 외부차원에 속해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여타 농촌처럼 밭을 일구고 가축을 기르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소을촌의 현 종교적 지도자는 세을진인 명현(明玄)Myŏng-hyŏn이다.

역사:

기원전 1200년경-기원전 1000년경의 사르킥 디아스포라 이후 발흥한 여느 종파들과는 달리, 세을가는 해당 사건의 영향이 비교적 크지 않은 편이다. 인근 국가들에서 상당한 정도의 사르킥 교단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한반도 역시 디아스포라의 영향권 내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여러 문헌에서 암시되는 정황상 초기 세을가의 신자 중 한반도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을가의 역사는 처용(處容)Chŏ-yong이라는 이름의 존재가 879년 후기 신라 때 울산 개운포에 당도하면서 시작되었다. 비변칙 역사서인 『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에 따르면, 당시 신라의 군주였던 헌강왕이 개운포에 갔다가 구름과 안개 때문에 길을 잃었다. 천문을 담당하는 관리가 그것이 동해의 용이 일으킨 일이라고 이야기하자 왕은 용을 위해 절을 지었고, 이에 기뻐한 용은 자기의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들은 왕 앞에서 그의 덕을 칭송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와 춤을 추었는데, 이 중 아들 하나가 왕을 따라 신라의 수도로 갔다고 한다. 이 존재가 바로 처용이다. 왕은 처용에게 급간(級干) 벼슬을 주어 정사를 돕게 하였다.

역시 비변칙 세계에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왕이 처용의 마음을 얻기 위해 혼인을 주선했는데 아내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러자 역신(疫神)pox deity이 탐을 내어 사람으로 변신해 밤에 몰래 처용의 집에 들어가 간통했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누운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는데, 전자를 처용가라고 하며 후자를 처용무라고 한다. 이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 처용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앞으로는 처용의 얼굴이 그려진 곳만 보아도 그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뒤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신라인들은 전염병을 막기 위해 처용의 얼굴을 문에 그려붙이곤 했다.

세을가인들은 이렇게 비변칙 세계에 잘 알려진 인물인 처용이 세을가를 처음으로 전파한 교조라고 여긴다. 세을가 기록에 따르면 처용이 온 후로 세을가가 신라 내로 퍼지기 시작했다고 하며, 설화에서 암시되듯 왕실의 암묵적인 승인 아래 성장했다. 고려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성장세는 줄어들었지만, 이러한 시기에도 불교 국가였던 고려가 세을가를 불교의 아류로 인지한 탓에 탄압이나 박해 등의 피해는 적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세을가 마을이 기록에서 등장한다.

마을을 일구며 살아가는 부류와 세상을 떠돌며 비교적 비변칙적 사회에 가까이 살아가는 부류로 나뉜 세을가는 조선대에 들어서면서 이전보다 더 강력한 난관을 겪었다. 숭유억불 체제로 불교와 덩달아 차별을 입었던 이들은 불어도감1과 그 후신 이금위의 표적 중 하나가 되었다. 세을가 마을의 특성이기도 한 변칙적 방비는 바로 이 시기부터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세을가는 철저한 밀교가 되었고, 주로 하층민들 사이에서만 몰래 전파되는 양상을 취한다.

초상대응기관의 공격적 접근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었지만, 비변칙적인 부분의 문제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증가한 정권의 수탈과 부정으로 세을가인들 역시 당대 농민들이 겪던 여러 가지 고충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조선이 개항되고 사회가 격변하자 이러한 일도 잠시 줄어들었지만, 1910년의 경술국치와 1912년의 소을촌 침탈사건으로 세을가의 고난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이 당시 소을촌은 지리산 정상에 위치하며 SCP-3855SCP-3440과 유사하게, 특정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만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과밈성 결계, 방어용으로 육종된 SK BIO 생명체들, 디보쉬의 우르마와 유사한 인발 등의 변칙적 방비가 구축되어 있었다. 나아가 처용이 처음으로 건설했다는 마을이라는 점에서 이곳은 세을가인들에게는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자메아 문건에 따르면 1912년 4월 니카호 한노 소좌와 히라누마 신페이 소좌 휘하 5개 소대가 백택 계획 3호에 따라 이 마을을 습격하였고, 당시 소을촌의 진인이었던 파염播染을 포함한 주민 약간을 사살하였다. 이들에 의해 구속된 소을촌 주민 대다수는 이자메아 조선부 기지들로 끌려간 뒤 여러가지 생체 실험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을촌 내부에 있던 여러 성물과 유물 역시 빼앗기고 말았으며, 진압 과정에서 마을의 설비가 대다수 망가졌다. 이후 소을촌은 급속도로 황폐해지고 말았다. 이를 기점으로 세을가인들은 일제에 대한 철저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일부 세을가인은 조선의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행위를 취했다.

일제강점기 시기 다양한 고통 속에 놓였던 이들은 광복을 맞으며 다시 재건할 기회를 얻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수포로 돌아간다. 이때 대부분의 세을가 마을이 망했고, 한반도가 반으로 분단되면서 이북에 남아있던 세을가인들과는 연락이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세을가인들은 현재의 소을촌을 재건설하면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문화, 전통, 그리고 오개념:

“세을가”는 발음상 “사르킥”과 유사하게 들리지만, 사실 전혀 관련이 없다. “세을가”는 “낼캐”를 이두(吏讀)2로 옮긴 단어로, 이것이 이들 자체와 신앙적 지침의 명칭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세을가인들은 다른 종파를 지칭할 때에도 세을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들의 교리는 상당 부분 한국 불교에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자신들의 종교를 외부 사회에 위장하면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오염이 심한 부분은 이들의 법계로, 본래 사르킥 종파 간에 공유되는 계급명(카르시스트, 벌루타아르 등)은 세을가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법계의 구분은 엄격하지만 구체적인 권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법계들 사이의 관계는 마치 불교의 그것과 유사하다. 세을가인들의 법계는 다음과 같다.

  • 법우(法友)Dharma Brethren: 평신도. 타 종파의 오린, 젠드에 대응.
  • 대덕(大德)Bhadanta: 벌루타아르에 대응. 차기 진인이 되기 위해 수학하는 자들이 이 법계를 받지만, 모두가 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세을진인(世乙眞人)Se-ŭl-Jin-in: 카르시스트에 대응. 줄여서 “진인”이라고 한다.3
  • 존자(尊者)Arhat: 클라비가르에 대응.
  • 천인교사(天人教師)Śāstāmanusyānāṃ: 오즈르목에 대응.

세을가인들은 이온이 언젠가 재림하여 이 땅의 억조창생을 제도하고, 이쿠나안으로 이끌 것이라 믿는다. 현재 이온은 도솔천(兜率天)Tuṣita에 기거하며, 여섯 마라(魔羅)Māra4와 그 우두머리인 타화자재천왕(他化自在天王)Paranimmitavaśavatti 파순(波旬)Pāpīyās5과 끝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재림하여 이상향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미륵 사상6과 형태적 유사성을 보이는데, 실제로 한반도 내 정세가 좋지 않을 때마다 이온을 미륵(彌勒)Maitreya과 동일시하는 사상이 대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을가 주류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아니하며, 근래에 와서는 그저 역사 속에 존재하는 주장 하나로만 남아있다.

모든 존재는 이쿠나안에 갈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수도해야 한다는 것이 세을가의 중심 교리다. 모든 생명체에게는 이미 승천의 근본 요소가 충족되어 있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승천의 시작이라는 격언도 주목할 만한 사상이다. 이를 통해 누구나 이온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지만, 그것이 이온을 뛰어넘는 더 지덕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님을 경고하는 격언 역시 존재한다. 이러한 사상들은 세을가 소속 종족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을가에서는 요호성성이 등의 비인간 종족 역시 포용하고 신자로 받아들인다.

한편, 마지막 격언은 “지나침의 죄악”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 개념은 세을가 교리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로, 모든 지나침은 다시금 번뇌(煩惱)Klesa를 불러일으키며 이는 곧 죄악이라는 것이 해당 개념의 설명이다. 세을가인들은 이온 역시 이 지나침의 죄악을 범하였다고 본다. 제국을 건설하여 전쟁의 업화 속으로 민중을 몰아넣음은 그들이 보기에 그릇된 짓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세을가인들은 이온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번뇌와 죄악을 참회하기 위해 마라들과 끝없는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본다.

세을가와 타 사르킥 종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불멸에 대한 태도이다. 대부분의 사르킥 종파에서, 필멸은 소거되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을가 사람들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이들에게 불멸 역시 지나친 것으로 간주된다. 세을가 경전인 『세을유책언해』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지나친 욕망, 지나친 증오, 지나친 권력과 같이 지나친 고통은 죄악이다. 지나친 것은 썩기 마련이고 본래의 성질을 잃고 만다. 주어진 삶 이상의 것을 바라며 무리하게 제 육(肉)을 변형시키니, 본래의 정신마저 희미해지고 곧 마라와 같은 형상이 된다. 어찌 고통이 아니랴.”7

이에 대응하듯 세을가인들의 전통적인 육공예는 가축과 대인 의료에 특화되어 있다. 흔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사르킥 육공예가 발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정상사회에 관여치 않는 이들의 특성상 자주 쓰일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네 클라비가르와 오즈르목의 명칭에 대한 것 역시 시간이 지나며 달라졌다. 이는 그들의 이름을 이두로 음역했다가 한(漢)화하면서 발생한 일이다. 나독스는 내도지(奈度只), 오로크는 오을지(烏乙只), 로바타아르는 노아대을(魯阿大乙), 사아른은 사을은(沙乙隱)이라고 불린다. 이온의 이름 표기는 불분명하다. 세을가인들은 이온을 오직 천인교사나 세존 등의 존칭으로 부른다.

소을촌은 그 전체가 외부차원에 위치해 있으며, 소백산맥 어딘가의 통로로 드나들 수 있다. 이 마을의 소재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50년대 이후로 세을가는 재단과 세계 오컬트 연합 등 정상성 유지기관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전에 소을촌에 위치하고 있었던 지리산 근처를 수색했으나 당연하게도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가장 큰 발견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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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노 내래넨, 핀란드에서 1971년 촬영함.

1976년 『신민속학논총』 통권 제13호에 실린 라우노 내래넨 교수의 논문에는 세을가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져 있다. 내래넨 교수는 1974년 대학원생 시르카 뉘캐넨 2세와 함께 이곳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고 썼다. “소을촌 사람들은 순박하고 정이 많다. 바깥 사회에 휘몰아치는 현대화의 물결에도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옛 풍속을 지키며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외촌(外村)과 수확량이 크게 다르지 않다.” 내래넨 교수의 서술 덕에 세을가에 대한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소을촌으로 직결되는 입장권 역할을 해주지는 못했다.8 유일한 단서는 그가 세을가인들을 만난 곳으로 지목한 함평우시장이었다.

시장에서 세을가와 소을촌을 탐문하던 중, 이틀째 되던 날에 세을가인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을 박융朴融이라고 소개한 그 남자는 소을촌을 방문하게 해달라는 나의 요청을 약간의 고민 후에 받아들였다. 하루 뒤에 다시 오라고 한 그의 말을 수락했고, 다음 날 소을촌에서 왔다는 두 남자와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소을촌 토박이로, 축산업 종사자였다. 그들의 차를 타고 소을촌으로 갈 수 있었다. 이때 나는 GPS 등의 기기를 사용하여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재단에 전송하려고 하였으나, 어느 순간 기기가 전혀 작동하지 않았고, 이는 휴대전화나 노트북도 마찬가지였다. 휴대전화와 노트북은 마을 내로 진입하였을 때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위치 정보를 전송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소을촌에는 약 70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다른 농촌과는 달리 청년층 인구도 상당하다. 가업을 이어받아 소을촌에서 축산업을 하거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자리를 찾아 다른 도시로 떠나기 때문에 세을가인들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이들과 바깥 세상과의 관계는 상당히 놀라웠다. 교리상 세을가는 원사르킥에 해당하지만, 역사를 통틀어 바깥의 접촉이 없었던 시기가 있었던 시기보다 훨씬 적었다. 마을을 일구며 살아간 세을가인들조차 그 마을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흔히 외침(外侵) 때마다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역사 탓인지 현대의 세을가도 바깥과의 접촉을 금기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외부인이 소을촌에 진입하는 것은 경계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약 9일간 체류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소을촌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사르킥적 색채는 분류된 바 없는 SK-BIO 생물체들이 우경(牛耕)에 동원되는 모습이었다. 나를 마을로 데려다 준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해당 생물체들은 소(Bos taurus)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졌다고 했다. 소을촌 내에 비변칙적인 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9 이들이 부리는 SK-BIO는 비변칙적인 소를 그들의 육술로 변이시킨 생명체로, 이들이 새끼를 낳으면 그중 가장 약한 새끼를 성장시키면서 점차 SK-BIO 생물체로 변이시켜간다. 이렇게 만들어낸 생물체는 온순하고 고분고분하며, 능률이 매우 높다.

소을촌의 입구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 몽은사(朦誾寺)Mong-ŭn Temple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세을가 사찰인 이곳은 총 6개의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대웅전10, 대적광전11, 극락전12, 원통전13, 약사전14, 진인전15이다. 이 사찰은 마을 어린이들에게는 세을가 교리를 가르치는 학당 구실을 하며, 마을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연회장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몽은사에 거주하는 이는 진인과 그의 직계 제자들인 대덕들로 제한되어 있다. 현재 몽은사의 주민들은 진인 명현과 대덕 관조(觀照)Gwan-jo, 시명(是名)Si-myŏng이다.

진인의 말에 따르면 대웅전 전각은 명현 이전의 진인이었던 세을진인 원광(圓光)Wŏn-gwang의 육체로 빚어졌다. 대체로 진인이나 존경받는 이의 육체는 전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는 듯했다. 진인은 다른 전각들은 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로 빚어졌다고 덧붙였다. 전각 내에는 어떠한 현대적 설비도 없지만, 진인이 조작하면 창문이 열리고 실내가 밝아지는 것으로 보아 육공예로 그러한 기술을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들은 다른 종파의 SK-BIO 005형 사용례에서 관측된 것과는 달리, 생물학적으로 사망했다. 진인은 이에 대해 건축물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은 단적으로 “지나친 처사”임을 피력했다. 만일 자신의 몸을 공양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기다렸다가 임종 직전부터 시작한다. 완벽히 변형이 끝난 뒤에는 편히 사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가축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그 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만큼 진인 개개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지는 못한 편이다. 타 종파와 비교해 봤을 때, 세을가 진인들은 한 종파를 이끄는 수장이라기보다 한 절을 이끄는 주지 정도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만난 세을가인들 대다수는 진인을 공경하고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다음, 그리고 동시대에 존재하는 다른 진인에게도 보일 모습이라는 것에 자연스럽게 동의했다. 이러한 생각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며, 불충으로 해석되지도 않는다.

전통적인 재단의 시각에서 정의해볼 때, 세을가는 복수의 카르시스트들과 벌루타아르들이 집단지도하는 공동체 양상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미루어볼 때 세을진인 처용이 세을가를 이끄는 '유일한' 카르시스트이며 이외의 진인들은 사실상 벌루타아르에 해당된다는 의견이 제기된 적 있었다. 그러나 세을가의 카르시스트 계급인 진인과 벌루타아르 계급인 대덕의 차이는 완연하며, 소위 “대진인(大眞人)Greater Jin-in”이라고 불리며 주민들의 존경을 받는 교조 세을진인 처용과 다른 진인들의 종교적 위치에서의 차이 역시 두드러지지 않는다.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 처용의 역병신 설화와 관련된, 세을가 특유의 인발술art of sigil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설화에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인발술은 방어와 퇴척에 특화되었다.

세을가 인발술의 가장 기본적인 양태는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 첫째: 종이와 피, 붓을 준비한다. 이때 준비한 피는 어떠한 동물의 것이라도 상관없었다고 하는데, 주로 구사자 본인이나 소, 닭, 돼지 등의 피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종이에 처용의 얼굴을 피로 그린다. 이때 중요한 점은 처용의 얼굴을 그림에 있어 그의 얼굴이 지닌 상서로움을 제대로 구현해 냄이다. 현대어로 풀이해보자면 기적학적 벽사 알고리듬의 구현을 중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그려낸 종이를 문에다 붙인 후, 피로 그 상부를 칠한다.

현재 세간에 알려진 처용의 얼굴은 그 형태가 상당히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세을가인들이 구사한 인발술을 일반인이 독자적으로 따라 하려다가 변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공교롭게도 이 인발술은 혈술에 그 근간을 두고 있기에 오로지 세을가인만이 구사할 수 있다. 해당 인발술이 사용된 사례는 전근대에서도 관측된 바 있다. 조선에서 벌어진 가장 큰 기근인 1670년 경신대기근 당시 역병이 심하게 돌았는데, 이때 세을가인들이 민간에 처용의 진짜 초상화를 그려 붙이면서 역병을 물리치려고 시도했다는 사료가 다수 발견된다.

소을촌은 별도의 사르킥 세시를 지키지 않고, 한국 전통 명절을 쇤다. 단지 한 가지 명절이 더 추가되었을 뿐인데, 음력 5월 11일을 진인도래일(眞人到來日)이라고 한다. 구정, 추석과 더불어 세을가인들의 최대 명절인 이날은 처용이 신라에 처음으로 도달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세을가인들은 대략 일주일 전부터 이 명절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하고, 이 기간 동안 전국에 흩어져 있던 세을가인들이 귀향하는 모습도 보인다.22 나는 마침 준비가 시작된 지 하루 뒤에 소을촌에 오게 된 덕에 이 행사를 관찰할 수 있었다.

진인도래일의 행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이어진다. 아침부터 점심까지는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먹은 뒤 몽은사에서 실시하는 법회에 참석하게 된다. 이를 “진인도량(眞人道場)Jin-in Bodhimaṇḍa”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경전을 해설하는 내용이 주된다. 법회가 끝나면 다 같이 마을 중앙에 모여 갖가지 전통 행사를 즐긴다.

저녁을 먹고 나면 마을 사람들은 다시 몽은사에 모인다. 약 오후 7시부터 새벽 12시까지 진행되는 이 시간은 “수계법회”(受戒法會)Upasampadā Dharmasaṃgīti라고 불린다. 이 행사는 세을가인의 성인식이자 정식 신도로 인정받는 계기로, 주로 성인이 되는 세을가인들이 주축이 된다.

본래 수계법회의 끝은 이와 같지 않았다. 의식 집전자들은 처용무 시연 후 휴식을 취하고, 자정이 되었을 때 마을 밖으로 나가 배정된 각자의 구역에서 역병신을 사냥해야 했다. 그렇게 사냥한 역병신은 세을가에서 자체적으로 고안한 원시적 영혼 덫을 사용하여 마을로 끌고 왔고, 봉인하거나 아예 소멸케 하였다고 한다. 수계법회 행사의 마지막 절차가 생략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즈음이었다. 이미 1960년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천연두가 발생하지 않았고, 여러 전염병도 의료가 발달하면서 점차 줄어가는 추세에 있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역병신들 역시 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이들을 나서서 공격할 필요가 없었다. 근래에도 이따금 역병신 사냥을 즐기는 경우가 있지만, 빈번하지는 않다고 한다.

수계법회를 포함한 세을가 의식에 쓰이는 물품들을 보관하는 전각인 이물당에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그곳에서 마지막 절차 때 사용하던 무기를 관찰할 수 있었다. 사르킥 방식으로 생성하고 제련한 무기들은 단순한 환도뿐만 아니라 활, 편곤, 철퇴 등 그 종류가 다양했다. 수계법회의 절차에서 폐지된 지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비공식적으로 역병신 사냥은 시행되고 있다는 말을 뒷받침하듯, 이러한 물품들은 보관 상태가 매우 좋았다. 관리한 지 일주일이 채 넘지 않은 듯했다.

한편 세을가 마을에 머무르면서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설화를 수집할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어미 용과 일곱 아들」 설화다. 소을촌의 어린아이들이 주로 듣는 이 설화는 동화 형식으로 구전되고 있으며 세을가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설화로 보인다. 이들이 소장한 버전의 발크차론에서 이 설화가 처음으로 기록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현대 세을가인들이 알고 있는 설화와 비교했을 때 변이된 정도가 극히 적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아주 먼 옛날, 까마득한 하늘 위에 용 한 마리가 살았다. 용은 아주 오래 살았고, 거대했으며, 사악했다. 용은 지상 세계를 내려다보며 온종일 인간들을 어떻게 골려주고 잡아먹을지를 고민했다.

용에게는 일곱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맏이부터 여섯째까지는 그 어미를 닮아 아주 세고 강했다. 게다가 신묘한 재주를 부릴 수도 있었다. 성질은 더욱 제 어미를 꼭 빼닮아서, 이들 역시 인간들을 미워하고 잡아먹으려고 들었다.

일곱째는 유달리 약한 자식이었다. 물론 그 성질은 어미를 닮아서 역시 사악하고 인간들을 미워했지만, 제 형들과는 달리 지상에 내려가 그들에게 해코지를 할 수도 없었고, 무슨 모략을 꾸며내어 인간들 사이에 나쁜 마음을 심을 수도 없었다. 때문에 일곱째는 그저 하늘 위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일곱째는 아주 오랫동안 하늘 위에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랑하고, 늙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고통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도 보았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과, 서로 혐오하는 적들의 모습도 보았다. 삶과 늙음과 병과 죽음의 굴레도 보았다. 너무 오랫동안 그곳에서 사람들을 지켜보아서 세간에 나서지 못하자 용의 자식은 모두 여섯이라는 인식이 뿌리 박힐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사를 지켜보던 일곱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한 줄기 선한 생각이 깃든 것이었다. 인간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살고 싶다, 그 생명력과 같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아주 교묘하고 은밀히 깃들어, 일곱째 자신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느낌을 전혀 깨닫지 못할 정도로.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미 용이 갑자기 일곱째를 불렀다. 어미 용은 말했다. “네가 유약하여 내 곁에서 지낸 지 수백 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제는 너도 장성하여 스스로 인간 세상에서 악행을 일삼을 때가 되었구나. 자, 내 힘을 네게 주마. 지상으로 내려가거라.”

이는 일곱째 역시 바라던 바라, 일곱째는 아주 감사히 이를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일곱째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저어진 것이다. 어미 용은 격분하여 소리쳤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냐. 내 힘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지상으로 내려가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일곱째가 입을 열었다. 이때 일곱째의 정신은 어느새 몸집을 불린 선한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아니요, 어머니. 저는 지상으로 내려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악한 일은 저지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인간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일곱째는 자신이 본 것들을 말했다.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온갖 신묘한 것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희노애락애오욕의 감정들.

일곱째는 말하면서 더욱 강해지고, 활력이 넘치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지상 세계를 치어다보며 인간들을 골려주는 형제들을 부러워할 때의 그가 더이상 아님을 깨달았다. 일곱째는 진정으로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어미 용의 분노를 억누르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어미 용은 일곱째에게 주려던 바로 그 힘으로 일곱째를 밀쳐버렸고, 그는 하염없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침내 일곱째가 지상에 추락하자, 그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말았다.

용과 일곱 아들이 어떤 것의 메타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것이 처용랑망해사에 수록된 같은 존재들이라는 추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마을 주민들과 진인, 대덕들에게 질문했으나 대부분 모호하게 말하거나 대답을 피해버렸다.

결국 뚜렷한 답을 얻지 못하고 진인도래일 사흘 뒤에 약속한 기한에 맞추어 소을촌을 나가게 되었다. 아래의 면담은 그 중요성을 고려하여 보고서에 기입한다.

면담이 끝난 뒤 서울의 제21K기지로 돌아와서 갖가지 문건을 수집했다. 이 중 조선의 초상기관 이금위에서 간행한 이금록에서 유의미한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이금위 소속은 아니었으나 그 증손자가 해당 기관에서 임직을 수행했던 벽오 이시발(1569년-1626년†)이 남긴 문집, 『벽오유고』에는 지리산의 소을촌에 방문했던 이야기가 남겨져 있었다. 이시발은 그곳에 기거하던 친우를 만나러 그곳으로 향했고, 소을촌 주민의 안내를 받았다고 서술되었다.

그리고 그 주민의 이름은 박융이었다.

하단에 이금위에서 소을촌에 대해 서술한 서식을 첨부한다. 내용에 따르면 이들은 자체적으로 그곳에 침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것으로 추정된다.

패란(悖亂) 계미(癸未) 제(第) 이호(二號)

상(詳) 두류산 심곡(深谷)에 존재하는 이물(異物)들의 마을
당(當) 이금위(異禁衛) 감찰관(監察官) 비사대부(批士大夫) 노바(怒貌)
결(結) 패란사가 마을에 돌입하려 하였으나 실패
현(現) 비록(秘錄)에 기록 후 종결(終結)

선비가 말한다.

두류산이라고도 하는 지리산 심경(深境)에는 소을촌(瘙乙村)이라고 하는 고을이 하나 있다. 이 고을은 본디 선인(仙人)들의 마을, 청학동(靑鶴洞)으로 알려진 바가 있으나 실상은 살[肉]과 뼈[骨]를 다루며 빚어내는 이들이 모여 사는 부락(部落)이다. 마을의 거류민(居留民)들의 외양은 매우 기이하여, 일찍이 충익공(忠翼公) 이시발의 글에 따르면 혈맥(血脈)과 살가죽, 신체 부속기(附屬器)가 범인(凡人)의 것과 개수나 모양이 다르다 하였다. 마을에는 촌장과 비슷하거나 상위의 위치에 존재하는 직계(職階)가 있는데, 이를 세을진인(世乙眞人)이라 한다. 불가(佛加)에 관련이 있다는 점 이외엔 이 직계의 정확한 정체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마을로 들어가는 법은 알려지지 않았다.

[붙임] 패란사를 대동하여 이른 새벽부터 두류산을 등정하였다. 그렇게 꼬박 이틀을 돌아다녔으나 마을은커녕 민가 한 채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어느덧 패란사는 거진 피병장졸(疲病將卒)이 되고, 더는 주변 마을에 병식(兵食)을 의지할 수 없어 그만 중단하고 말았다.

소을촌을 떠나고 몇 달 후, SCP-████를 확보하기 위한 과정에서 ██산 중턱에 위치한 이전까지 보고되지 않았던 석굴의 존재가 보고되었다. 해당 석굴 내부에 진입하려는 시도는 SK-BIO 생명체로 추정되는 유기체들의 공격으로 실패하였고, 곧장 상부에 보고되었다. 해당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나는 제21K기지 연구원들과 함께 해당 장소에 답사할 계획을 세웠다.

자신을 박융으로 지칭했던 존재와의 면담에서 얻은 정보를 복기하자면, 필경 어딘가에 처용이 자신의 본성을 몰아내기 위해 기거하는 장소가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나는 그 장소가 분명 그러한 곳이라는 확신이 선다. 제01K기지의 허가를 받아 기동특무부대 을호-04("목구멍이 포도대장")과 함께 문제의 석굴로 향하기로 했다.

[데이터 말소]

[데이터 말소]

[데이터 말소]

사태 직후 탐사대원 중 기동특무부대 을호-04는 전원 사망, 연구원 두 명은 의식 불명 상태로 발견되었다. 나는 정신 착란을 일으킨 상태로 구출되었다. 해당 석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무슨 존재를 만났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는 기억난다. 그곳에 처용은 없었다. 그는 이미 그곳을 떠난 것이다.

어쩌면 박융을 만난 것이 그에 대한 경고였을지 모른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든 자신의 거처를 찾아낼 것을 예견했을 것이다. 내가 회복되지 않았을 때, 지속해서 횡설수설하며 “나는 모든 곳에 있다”는 문장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분열과 갈라짐. 나는 어쩌면 얄다바오트에게 공격당한 일곱째 아르콘의 상태를 같이 겪었던 게 아닐까.

문제의 석굴은 이후 자연적으로 함몰되어 소멸했다. 마치 제 역할을 다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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