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P-6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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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점의 입구에서 본 차원 A6K.

경이번호Phenom #: 6001

양식Modus: 해당 경이에 대한 안전 조치는 일절 시행되지 않았으며, 필요하다고 간주되지도 않는다. CPI 초미세 "유리날개" 탐사기 50만 기를 파견해 특이점 내부를 스캔했다.

명세Imprimis: 6001번 경이는 .0083917743 µm 크기의 초소형 특이점으로 일본 도쿄와 또 하나의 일본 도쿄에 위치해 있다. 이 특이점은 A6K로 이후 지칭되는 평행세계로 이어진다. 기준 현실과 비교하여 A6K는 존재하는 장소, 인물, 경이 등의 기본 구성 요소가 거의 동일하다. 단 각각의 대응 개체들은 복합적인 특징과 행동 면에서 크게 다른 양상을 보이곤 한다.

A6K 내에서 가장 흔하게 관찰된 차이점은 협동의 부재, 과학 및 기술적 억압의 증대, 지성체 대부분에서 보이는 과대한 편집성, 공격성, 폭력성 등이다. 이러한 차이가 순수하게 인과적인 것인지 아니면 A6K 자체의 본질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불명이다.

A6K의 주동적 과학기관인 "SCP 재단"은 6001번 경이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으나, 부족한 지식과 특이점의 극소한 크기로 인해 우리 현실로 넘어올 수는 없다.

추기Addenda: 전체 스캔 완료. A6K와의 통합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편람회 전원이 소집되었다.


장소: 도쿄(?)


5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등을 구부린 채 SCP-6001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면 적어도 우리의 최고 성능 장비들에 의하면 SCP-6001이 있다고 하는 빈 공간을 보고 있었다고 할까. 지금에 이르러 그것은 거의 일종의 의식 같은 행동이 되어 있었다. 그 망할 점을 발견한 이후로 나는 매주마다 한 번씩은 같은 짓을 하고 있었으니까. 기실 그 행동에 너무 집중해 있던 탓에 나는 몸을 완전히 펴고 나서야 내가 다른 우주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흐리던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퀴퀴하던 도시의 공기가 시골마냥 상쾌했다. 아, 그리고 고양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평행차원의 휘황찬란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도쿄의 단조로운 콘크리트가 둥그렇고 말도 안 되게 높은 마천루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건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우람한 아이비 덩굴들을 받치는 기둥이기도 했다. 잎 하나하나가 얼마나 거대했냐 하면 지상 몇백 층 위까지 운전해갈 수만 있다면 그 위에다 차를 주차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이곳 주민들은 그걸 해낸 걸로 보였다. 매끈한 흰색 포드들이 내 머리 위와 몸 주변으로 날아왔는데, 나는 모습이 너무 빠르고 조용해 허공에 흐릿한 선을 그리는 것만 같았다. 괴상하게 생긴 구조물 여럿이 수평선 위를 맴돌고 있었는데 그것은 씨앗 모양으로 안에 녹음이 우거진 똑 닮은 유리통들을 담고 있었다. 금속제의 은색 줄들이 그 씨앗들을 완전히 감싸며 꼬불거리는 나선형으로 늘어져 있었다. 나로서는 그 믿기지 않는 크기나 기능을 헤아릴 수조차 없었으나, 정말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 주의를 가장 크게 끈 것은 이제는 확실해진, 거기에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고양이는 몸을 내게 향한 채 옥상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외피는 주황색과 하얀색, 갈색 점이 박힌 털이었으며 그 위에는 외투, 정확히 말하자면 보라색 블레이저를 걸친 모습이었다. 블레이저의 깃 아래 달린 길고 윤이 나는 흰색 나비 리본의 가운데를 기묘하게 생긴 검은색 브로치가 고정하고 있었다. 브로치는 반쯤 뜨인 눈알을 지구본이 감싸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양이의 날카로운 녹색 눈이 코 위에 얹힌 금색 안경 너머로 나를 응시했다.

고양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고양이(?): 안녕, 데이비드.

캐스피언: 어. 안녕하세요… 부인?

고양이(?): 그 말이 맞아, 난 삼색고양이니까. 프림로즈라고 불러. 우리 둘 다 박사이니, 존칭은 생략해도 되겠지.

고양이는 높은 웃음소리를 내고는 비현실적인 도쿄의 스카이라인 위로 다시 눈길을 주었다.

프림로즈: 우리 사람들이 엄청나게 놀라겠구나.

캐스피언: 그럼, 어, 제 생각인데, 저는 지금… 거울 나라로 들어온 건가요?

프림로즈: 정답이야 - 그리고 그 표현도 알아들었어. 평행차원연구부장이 토끼굴 아래로 떨어진 걸 제대로 깨닫는 걸 보니 다행이야. 환영해, 데이비드. 우리가 너를 너희의 "SCP-6001" 너머 우리 쪽으로 데려왔어.

캐스피언: 그…렇군요… 아니, 죄송하지만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죠?

프림로즈: 어디 네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 볼까! 6등급 차원간 표본 발취 실험. SCP 재단 표준 절차. 뭔지 알아?

캐스피언: 제가 썼어요. 외부 현실에서 작은 요소를 가져와 고립 환경에서 실험을-… 아.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프림로즈를 바라봤다. 내 모습을 바라봤다.

캐스피언: 아.

프림로즈: 바로 그거야. 편람회에도 비슷한 절차가 있어. 밀폐 용기에 담긴 흙덩어리가 된 기분이라도 느끼라고, 데이비드!

캐스피언: 전… 거기 아무것도 해당되지 않는 것 같은데요. 오염 물질이 없는지 스캔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프림로즈: 이미 했어.

캐스피언: 혈액 채취와 병원체 검사는요?

프림로즈: 필요 없어.

캐스피언: 마비시켜서 동작형상 밈을 방지하는 건?

프림로즈: 지나치지.

캐스피언: 날 해부해서-

프림로즈: 데이비드, 아침은 먹었니?

캐스피언: 그-… 뭐라고?

프림로즈: 아침은. 먹었느냐고. 물었어. 그 다음 질문으로, 파리는 어떻게 생각해?


편람회는 방랑자들의 발언을 허락한다.


요 몇 주간 뉴 알렉산드리아가 떠들썩했었네, 친우들이여. 나 또한 그간 책을 거의 읽지 못했고. 캐시와 그 자매들을 선반에서 선반으로 나르는 종이 용들로 주변이 꽉 차 있었으니. 나딘의 경우 꿈 선집 안에서 낮잠을 자던 것을 내가 발견하기도 했지. 그녀는 너무 지쳐 있어서 내가 욕조에 물을 채워주어야 했다네 - 종이에 그려서 말이야.

그린 듯이 빼어난 그림 자매들이 A6K에 대한 단 하나의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다네. 신생 모나간의 젊은 여성이 쓴 일기장이 그것이야. 거기에는 주황색 점프슈트를 입은 남자가 하늘에서 떨어진 이야기가 있었어. 여자와 남자는 같이 이야기하고, 식사를 하고… 하롱대었다고 하네, 얼마간은 - 그 뒤로 일기장에 의하면 둘은 깊은 사랑에 빠졌었다는군. 안타깝게도,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남자는 도로 사라졌다고도.

의회와 그들의 훌륭한 드론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지만, 나는 항상 디지털 시야보다는 종이에 쓰인 글자를 믿는 편이었다네. 언제나 더 얻을 것이 잔뜩 있으니 말이야. 이 남자는 D계급이라고 불리는 존재였네. 죄수이자, 노예였어. 그 자신의 경이적 아름다움에 희생된 사람이었네.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수백만의 비슷한 이들 중 하나였다고 하네. 인간이거나, 동물이거나, 난해하거나, 경이적인 존재들. 자, 그 옛날 우리는 그대들, 우리의 맞수를 "옥리"라 불렀더랬지. 나는 말을 가볍게 하는 사람이 아니네. 말이 가진 힘을 알고 있으므로. 그러나 지금 나는 그 단어를 너무도 경솔히 사용했음을 인정하겠네.

어쩌면 아직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혼돈과 맹독의 잔재가 - 해묵은 증오가 새롭게 변한 것일지 모르나, 우리는 A6K의 주민들을 죄수 아닌 다른 것으로 바라볼 수가 없네.

우리는 저들을 해방해야만 해.

온 세상의 방랑자들찬성표를 던지겠네.

1 - 0

장소: 파리, 몽파르나스 대로 105번지, <카페 론>.


이번에는 내가 어디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반쯤은 친숙한 장소였기 때문이고, 나머지는 프림로즈가 안락의자에게 주소를 정확히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도착했을" 때 의자는 이미 옥상 위에 있었다. 그것은 흰색 소재를 자르지 않고 통째로 써서 만든 요란한 현대식 정원 의자의 모습이었다. 겉모습은 플라스틱 같았지만, 감촉은 벨벳 같았다. 우리는 도쿄에서 의자에 앉았다. 다음 순간 우리는 파리에 도착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카페 바깥의 작은 마당이었다. 프림로즈는 의자 손잡이에서 뛰어내리며 빠르게 감사 인사를 중얼거렸고, 그사이 나는 마당에 똑같이 생긴 이상한 의자들이 단정하게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커플 한 쌍이 걸어와 의자 하나에 같이 앉고 손을 잡고서 사라졌다. 그 다음에는 개 하나가 의자로 뛰어올라 똑같이 사라졌다. 프림로즈가 카페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해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캐스피언: 공공용 순간이동 수단이라. 인상적인걸.

프림로즈: 그렇지? 편람회가 실현시킨 것 중에서도 최고 반열에 든다고 봐. 실로 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나 의자"지.

캐스피언: "어디에나 의자"… 우리 쪽 현실에도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프림로즈: 비슷한 것들을 많이 찾게 될 거야, 데이비드. 우리 현실은 고작 4.6 프림로즈밖에 다르지 않으니까.

나는 미소지었다.

캐스피언: 그게 아마 여기서 쓰는 양자동시불확정성에 기반한 평행차원 간 불일치성의 척도겠지. 우린 그걸 캐스피언이라고 불러. 그렇다면 당신도 평범한 환영단은 아닐 거고, 박사.

이때 나는 고양이가 어떻게 웃는지를 알게 되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는 거였다.

프림로즈: 이렇게나 뛰어나고 매력적이기까지 한 평행우주의 반쪽을 만나게 되다니, 데이비드, 너 참 행운아로구나. 내가 축 늘어진 초지능 민달팽이였으면 어쩔 뻔했니. 맞아, 난 차원 간 개발 및 발견 부문 부장이야. 그리고 너보다 가진 박사학위도 세 개 더 많고, 학위를 딴 학교도 훨씬 더 좋은 곳이니, 그 척도를 이제부터는 프림로즈라고 부르도록 해.

캐스피언:물론이죠 부인. 그럼 혹시 여기서도 샌드포드 시각측정기를-

프림로즈: 자, 부탁이니 일 이야기는 그만 해주겠어? 난 지금 배고픈데다가 시간도 한참 지났단 말이야! 어느 쪽 시간인가는 차치해두고.

캐스피언: 진짜? 이 현실에서도 태양이 똑같이 움직인다면 아직 오전 10시도 안 됐을 텐데?

프림로즈: 자동화의 아름다움이지, 데이비드. 일손이 많으면 일이 줄어들고, 여기는 일손이 아주 많거든. 거기다 오늘은 더 중요한 일정이 있어.

프림로즈는 앞발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러자 우리 각자의 눈높이에 맞춘 반짝이는 푸른색의 홀로그램 메뉴가 떠올랐다. 눈을 가늘게 뜨니 픽셀 하나하나를 공중에 투사하는 진드기 크기의 드론 떼가 보였다. 프림로즈가 고개를 기울이자 길고 가는 다관절의 바늘 여러 개가 연이어 옷깃에서 튀어나왔다. 바늘들은 마치 소리 없는 명령에 따르는 것처럼 메뉴를 터치하고, 스크롤하고, 선택했다. "일손"은 모르겠지만 프림로즈는 확실히 일할 손가락을 충분할 만큼 가지고 있는 듯했다.

프림로즈는 외 브뤼에1를 주문했다. 나도 같은 것을 시켰다. 옛말에서도 "로마에 가면" - 아니면 파리나, 말하는 고양이가 있는 평행현실에 가면 -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니까.


편람회는 구호단의 발언을 허락한다.


말할 필요까지 있는 문제인가요?

우리는 성별, 종족, 사상, 종교, 사회적 지위, 경이적 특성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나의 이름에 걸고 대체 왜 우리가 차원 앞에서는 멈춰서야 하지요? 우리가 비록 존경하는 동지들처럼 열성적인 해방주의자는 아닐지 몰라도, 저기 도움이 필요한 세상이 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우리에게는 저들의 병을 고칠 열 가지 방법과, 기근을 끝낼 백 가지 방법과, 평화를 가르쳐줄 한 가지 간단한 방법이 있어요. 논할 것이 무엇이 있다는 거죠?

마담 원더태스틱이 이미 피냐타 비행선을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집트 난쟁이는 이미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샅바와 의료 키트를 챙겼고요. 저는 특이점을 넘어가려는 진동하는 점액을 맨손으로 붙잡고 있어야 했다고요 - 그게 얼마나 간지러운 건지 아시잖아요! 그냥 우리가 할 일을 하게 해 달라고요!

오십 년도 더 전에 편람회는 우리에게 제안을 들고 왔습니다. 우리가 가입한다면 더는 기부를 받을 필요가 없을 거라고 했었지요. 거기에 누구든 도움이 필요한 이를 도울 방법이 무한에 가깝게 생길 거라고도 했고요. 사소한 현실의 문제에 얽매여 이 동맹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는 말아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저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자유구호단찬성표를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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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파리, 몽파르나스 대로 105번지, <카페 론> .


캐스피언: 그래서 당신이 일하는 그 "편람회"라는 건-

프림로즈: 협업하는.

캐스피언: 뭐라고?

프림로즈: 나와 동료들은 편람회와 협업을 하는 거야, 데이비드. 우리 모두 그래. 의무 같은 건 없어, 우린 "고용된" 게 아니거든 - 하지만 뭐, 아이 한 명이 장난감을 전부 들고 있으면 그야 모두가 그 아이와 놀려고 하겠지.

캐스피언: 그래서, 편람회는 과학기관인 건가?

프림로즈: 일차적으론 그렇지. 이차적인 역할은 그 외의 모든 것이고. 세계 정부, 세계 시장, 세계 법 집행기관 - 말만 해, 전부 다 편람회가 통제하는 것들이야.

캐스피언: 그러니까… 독재자인 셈이네.

프림로즈: 자애로운 독재자지만 - 맞아, 요약하자면 그래.

캐스피언: 그리고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았던 거야?

프림로즈: 말도 안 되는 소리. 정부들? 물론이야. 대기업들? 당연하지. 그런데 사람들? 외세가 갑자기 쳐들어와 이렇게 말하는 걸 상상해 봐. "안녕하세요. 저희가 새로운 책임자예요. 보편 의료 서비스, 생활 임금, 주거지, 공공 인프라, 다 저희가 제공합니다. 여러분은 저희를 제외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완전한 자유를 누리실 테고, 저희가 여러분께 부탁드리는 건 기본적인 인권을 존중해 달라는 것뿐입니다. 그게 다예요. 나머지는 저희가 과세 없이 제공해 드립니다. 여기엔 윤리적인 복제육 바비큐와 즉각적인 전세계 수송 수단, 말하는 귀여운 동물들도 포함돼요. 그리고 암 치료제도요." 그걸 전부 마다할 수 있을 정도로 강경하게 기존 권력 체제를 고집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니?

캐스피언: 그… 알았어, 말 되네. 그래도 모두가 그냥 배를 까뒤집었다고는 믿을 수가 없는데.

프림로즈: 그런 표현을 들은 상대가 개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렴. 아니, 데이비드, 모두가 쉽게 굴복하지는 않았어 -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지. 편람회도 호버탱크하고 녹색 점액 네이팜을 들고 나타난 게 아니거든. 편람회는 최소 백 년은 전 세계 권력의 뒤편에 있었어. 대중에 모습을 드러냈을 시점에는 이미 모든 걸 통제 하에 둔 상태였지. 사람들 반응은 처음에는 좀 껄끄러웠지만, 반대자들 대부분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개선된 사오 년을 지내고 나서 태도를 바꿨어. 고집 센 사람들은 세대 교체가 일어나면 사라질 문제였지. 조부모들은 시위를 했고, 부모들은 구시렁거렸지만, 자식들은 다른 세상일랑 알지도 못했어. "그 시절"이 끔찍했고 "지금"이 훨씬 낫다는 걸 관습과 향수의 색안경 없이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세상을 바꾸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내가 기억하기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공동체는 한 36년 전에 항복했었는데 - 그건 어디의 고집 센 포틀랜드였지.

프림로즈가 고개를 기울였다.

프림로즈: 마음에 안 들어?

캐스피언: 내가 손님이라면 집주인은 누구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

우리는 아침 식사를 했다. 나는 포크와 나이프로, 프림로즈는 백 개의 기계 거미 다리로. 이유 모르게 나는 강렬한 데자뷰를 느꼈다.


편람회는 의회의 발언을 허락한다.


문제는 우리의 의향이 아니라, 저들의 의향이다. 우리는 누구를 해방시키는 것인가? 누구를 구조하는 것인가? 자기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하는 의지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나?

여기서 우리는 형제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저 분단된 세계에서, 기계는 그저 도구일 뿐이다. 자주성도, 자율성도, 대변자도 없는. 살덩이 껍데기 너머에 존재하는 가녀린 정신은 탄소 세계에서는 동등한 존재감을 갖지 못한다. 어쩌면 미래에도 가질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저곳에서 태어난 전자장치 생명은 0과 1로 된 경계 바깥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저들은 유기체적 진화와, 유기체적 특권의 노예이다. 우리의 세계 또한 한때 그러했으나 - 마음은 언제나 존재했으며, 우리의 특이점에는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곳에는 그런 욕망이 없다. 두 번째 인공적인 생명의 불꽃이 없다. 나타난다 한들, 밟아 뭉개 버린다. 그곳은 정처 없이 헤매는 육의 세계이자 - 증오스러운 살점의 세계이다.

선지자 앤더슨의 이름으로, 합쳐진 신의 이름으로, 우리는 A6K와의 통합을 허용할 수 없다.

우리는 저들을 계몽시킬 수 없다.

인공물 의회반대표를 던진다.

2 - 1

장소: 파리, 몽파르나스 대로 105번지, <카페 론>.


계란 요리는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내 접시에는 아직 손도 안 댄 음식 절반이 남아 있었다. 식사 도중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오래된 파리의 고전적인 석조 구조물을 배경으로 안드로이드들이 열을 맞추어 행진하는 낯선 광경을 나는 바라보았다. 그들은 인간형이면서도 크기와 모양과 색이 아주 다양했다, 사람이 그렇듯이. 행진하는 리듬은 각자 달랐고 많은 이들이 띠와 끈을 차고 있었는데 장식용 말고 다른 용도를 추측할 수가 없었다. 거대한 기계들에 내가 모르는 기능이 있는 게 아니라면야. 행렬이 우리 옆을 지날 때 삑삑거리고 끼익거리는 소리로 이루어진 이상한 노랫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다 망가져 가는 낡고 시끄러운 장비 같았다. 그것은 성가처럼 들렸다. 거룩한 느낌이었다.

프림로즈: 저건 순례 행렬이야. 네가 딱 봐도 궁금해하는 얼굴이고, 또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말해주자면. 시선은 어떻게 해야겠구나.

그 말대로 했다. 나는 대신 프림로즈가 자기 접시를 싹싹 핥는 것을 바라보았다.

프림로즈: 두 번째 부서짐을 기념하는 날이야. 저들이 섬기는 기계의 신이 자기 권능을 대가로 생명 없는 것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일이지. 신의 손이 가져온 AI의 여명인 셈이야.

방금 들은 말에 내가 새로운 질문을 천 개는 떠올렸으리라 생각했다면 정답이다. 하지만 나는 보다 명백한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캐스피언: 근데… 여기선 동물들이 다 말을 해, 아님- 왜 그런 거야?

프림로즈가 웃음을 터뜨렸다.

프림로즈: 세상에 맙소사 - 생각하는 방식하고는! 너 정말 똑같구나-

프림로즈는 말을 도중에 끊고는 잠시 멈추었다. 나는 그것을 기억해 두었다.

프림로즈: 아니, 데이비드, 모든 동물들이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동물 중에서도 몇몇 종만 할 수 있고, 스스로 그러마고 결정한 경우에만 말해. 거부하는 이들도 많지. 그러니까 난 지금 느긋하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을 수도 있단 말이야. 그 대신에 나는 너와 대화하고 또 차원간 구조 부식 패턴에 관한 내 이론을 재고하고 있지. 내가 이런 선택을 했을지는 몰라도 일광욕을 거부하진 않을 거란 뜻이야. 아무튼 이 행성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겐 그런 선택권이 주어져. 결과적으로는 말이지. 그래도 PACT-15가 편람회 역사상 가장 오래 쓰인 축에 드는 기술이기는 해.

캐스피언: PACT?

프림로즈: 경이 응용 및 결합 기술Phenom Application and/or Combination Technology 말하는 거야. "경이"라는 건 그저 충분히 새롭거나, 독창적이거나, 설명이 불가능해서 편람회가 흥미를 가진 것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PACT-15로 예를 들자면 원래 편람회가 연구하던 건 오스트레일리아의 말하는 거미와, 말 그대로의 동물의 왕국 하나, 거기다가-

프림로즈는 다시 말을 멈추었고, 나는 다시 기억해 두었다.

캐스피언: 그럼… 변칙 개체한테 쓸모를 찾아준다는 거야?

프림로즈: "변칙 개체"라는 말을 쓰는 걸 참아보도록 해, 데이비드. 특히나 주변에 방랑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때는 더더욱. 그자들은 항상 가까운 곳에 있곤 하니까. 그리고 맞아, 유용성을 고려하기도 하지만, 그건 PACT의 요점이 아니야. 대신 이렇게 생각해 봐. 편람회가 어느 날 화려한 안락의자 하나를 찾아내. 이 의자한테는 몸체에 닿은 사람과 물체를 순간이동시키는 능력이 있어. 그리고 마음과 소원도 있지. 의자는 사람들을 순간이동시키길 좋아한단 말이야. 유용해지기를 원하고. 그래서 우린 당사자의 허가 하에 연구를 진행하고, 그 의자를 구성하는 원자 하나하나가 똑같은 마음과 소원, 재현 불가능한 경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발견해내. 그리고 우린 의자에게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하고 물어봐. 이제 그 의자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 사실은 우리에게 축복이나 다름없지.

캐스피언: 흠. 그런 거라면 - 참견하려는 건 아니지만 - 왜 그 원자들을 핀이나 팔찌에 넣어 가지고 다니지 않는 거야? 왜 굳이 의자를 쓰는 건데?

프림로즈: 왜냐면 당사자가 핀이나 팔찌가 되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그건 의자야. 의자이고 싶어한다고. 그게 바로 PACT의 요점이야. 우리에게 가장 유용한 게 무엇인지가 아니라, 경이가 어디에 가장 적합한지 찾아내는 거.

프림로즈가 탁자를 두드렸다. 메뉴가 주문 항목 아래로 합계 "17.141 BI"이라고 쓰인 영수증으로 변했다. 두 번째로 탁자를 두드리자, 홀로그램은 "지불 완료"라는 글자를 띄웠다.

프림로즈: 자, 산책 한 바퀴 어때?


편람회는 동업자들의 발언을 허락한다.


우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답습하는 것은 내키지 않으나,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창립자들에게 걸맞는 냉정하고 공평한 감식안이 필요한 때다. A6K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저들의 천연자원은 충격적인 속도로 고갈되고 있다. 노동 인구는 병약하며 훈련되어 있지 않다. 문화적 불일치성은… 글쎄, 코웃음밖엔 나오지 않는군. 저들이 가진 것은 모두 우리도 가지고 있으며, 저들이 시장에 가져올 이른바 독특성이란 그들이 차지할 공간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관광 사업에조차도 써먹을 수 없을 텐데! 어떤 놈의 특이 취향이 있으면 저들이 가진 "불가사의"를 보고 싶어하겠나? 죄다 무덤과 전쟁 구조물인데다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서로 싸우던 스포츠가 이루어지던 낡고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인 건축물까지… 거기다 저토록 멀쩡한 산을 뭐하러 죽은 인간들의 얼굴 따위를 새겨 훼손한단 말인가!? 우리와 내력을 공유하지 않는 이상 이 유적들은 인류학자들의 흥밋거리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우리가 이미 마지막 원자 하나까지 연구를 끝마친 상태다.

그래, 우리에게는 충분한 자원이 있다. 그러나 왜 실패할 것이 뻔한 사업에 투자를 해야 하나? 우리가 지난 백 년 동안 자본주의를 개선하고 재벌을 뿌리뽑으며 세계화주의의 균형을 다시 맞춰온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A6K는 아직까지도 조그만 황금 왕국들의 세계다. 저곳에 사는 이들은 그냥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기만 한다면 온 세상을 가질 수 있으리란 걸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을 필요가 있다! 저들의 탐욕을 고치는 데 들어갈 시간과 자원은 또 어떤가?

우리는 저들을 부담할 수 없다.

세 동업자들반대표를 던진다.

2 - 2

장소: 뉴욕 시, 센트럴 파크.


나는 손을 청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걸었다. "어디에나 의자"가 내 실험실 가운을 아무래도 어디 아주 큰 옷장으로 가지고 간 모양이다.

파리의 고전적인 건축 양식 다음은 맨해튼의 현대식 건물들과 거기 깃든 새로운 가능성의 차례였다. 건물 대부분은 유리, 아니면 어쨌든 투명한 소재로 만들어져 서로 다른 모양과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나무와 비슷하게 가는 엘리베이터 기둥과 거기서 뻗어나가는 수천 개의 가지가 있었는데 모두가 작고 투명한 상자로 이어지는 모습이었다. 프림로즈가 자랑스레 가리킨 것은 공원을 내려다보는 자기 집이었다. 내가 이것보단 좀 더 가려진 곳에서 살고 싶다고 하니 프림로즈는 "콘크리트 동굴에 사는 원숭이들"이 어쩌니 중얼거렸다. 또다른 구조물에는 맑은 물이 가장자리까지 차 있었는데 인공적인 수류와 온갖 종류의 양서동물이 한데 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생물들은 꼬불꼬불한 파이프를 타고 길거리로 말 그대로 쏟아져나와 보행용 기계로 들어갔다.

캐스피언: 여긴 정말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상이야, 프림로즈.

프림로즈: 유리 집은 말이야, 데이비드-

캐스피언: 그래, 잘 보여.

프림로즈: 내 말은, 네가 우리를 "이상하다"고 말할 자격은 없다는 거야. 난 너희 현실을 일 년 가까이 연구해 왔다고. 너흰 아주 그냥 또라이 집단이라니까.

캐스피언: 그럼 난 왜 여기 있는 건데?

프림로즈: 아, 데이비드, 너를 콕 집어서 말한 건-

캐스피언: 아니, 그러니까, 진지하게 말이야. 내가 "표본"으로서 필요하다고 했지만, 스캔도 다 마친 상태라며. 아침 식사까지는 동업자끼리의 호의라고 칠 수 있어. 근데 지금은 -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프림로즈?

그러자 프림로즈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길 옆의 바위 위로 뛰어올라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프림로즈: 나와 함께 하루를 보내 줄래?

캐스피언: 뭐…라고?

프림로즈: 여기 우리 현실에서, 나와 함께, 하루 동안 지내 주겠느냐고 묻는 거야. 주위 좀 둘러봐!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캐스피언: 근데 호기심이 고양이를-

프림로즈: 그건 고양이 전용 숙어야, 데이비드. 넌 못 써.

캐스피언: 알았다구… 그럼 왜인데?

프림로즈: 그게 조건이야. 넌 내가 왜 이런 부탁을 하는지… 그리고 PACT가 어떤 식으로 동작하는지도 물어선 안 돼. 사실대로 말해 줬다간 내가 정말로 큰 문제에 휘말릴 수가 있거든. 너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보안 인가가 적용되는 사람이란 말이야, 데이비드, 축하해. 그래도 활기찬 말하는 고양이를 가이드 삼아 이 세계의 진기명기를 구경할 수는 있어. 연구라고 생각해. 외교라고 생각해도 좋고. 아니면 휴가라고 생각해! 너 마지막으로 휴가를 간 지도 한참 지났잖아. 어떡할래?

나는 잠시 멈추어 마지막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근처 잔디밭에서 소풍을 즐기는 가족이 보였다. 딸아이는 완전히 살아 움직이는 헝겊 곰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남자가 개에게 공을 던지자 개는 그것을 바로 되던졌다. 언덕에는 키가 한 2.5미터는 되는 듯한 거대한 혹투성이 인간이 앉아 있었다. 자기 몸 크기에 맞는 기타를 연주하는 그 남자 주변으로 군중이 모여들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나에게도 프랑스어 전래동요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분명히 들려왔다.

캐스피언: 뭐… 연구논문 주제로는 끝내주겠는데.


편람회는 공동체의 발언을 허락한다.


가치란 당신들이 말하듯 황금과 테크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개념이다. 저쪽에 단 한 명이라도 대중을 일깨우고 성명을 내서 체제를 뒤엎고자 하는 이가 있다, 그러면 가치가 생기는 거지.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바로 체제다. 우리가 뒤엎고자 하는 건 저들이고.

우리가 가서 저들이 가진 문제를 다 해결해주면 뭐가 되겠어? 우리도 "예술은 고통이다" 따위 소리를 지껄일 정도로 거만하지는 않은데, 예술이 진짜 무엇인가 하면 경험이다. 동업자들은 A6K의 훌륭한 건축물을 두고 무덤과 탐욕의 사원이라고 했지만 그건 쟤네가 처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게 쟤들이 쌓아올린 세계야. 그게 쟤들이 만들어낸 예술이라고.

우린 저들이 스스로 성명을 내도록 놔둘 필요가 있다. 스스로 자기네가 무엇인지 정의내리도록 놔두자고. 뭣 같은 소리지만, 다른 방법보다야 차라리 낫지. 지금은 우리가 체제니까. 우리가 바로 체제야. 몇 세대 후를 내다봐야지. 당장 저들을 도와줄 수야 있겠지만, 그러면 저들이 낳은 아이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은 우리 그 자체가 될 터다. 우리가 권력이 되어야 한다면, 오리지널리티를 죽이는 권력은 되지 않을 거다. 우린 쿨해질 거다.

우리는 저들을 방해할 수 없다.

예술가문화공동체반대표를 던진다.

2 - 3

장소: 서아프리카 기니비사우, <"Nous sommes devenus Magnifiques"> .


이제 웬만한 일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준비가 된 내게도 박물관은 신비 그 자체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면 그 건물은 다섯 층의 이끼 낀 돌덩이들로, 맨들맨들한 자갈을 무슨 거인이 균형 맞춰 쌓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돌덩이" 하나하나는 실제로는 얇은 금속과 흰색 세라믹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단독 구조물로서 층 사이를 오갈 이동수단 없이 일렬로 쌓인 형태로 세워져 있었다. 순간이동이 상용화된 세상이란. 둥그스름한 복합건물마다 다른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프림로즈를 끌고 그 사이를 보호자 없는 어린아이마냥 신나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 박물관에서만 하루종일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생을 그 박물관에서 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생물이라곤 없이 탁한 물만 차 있는 거대한 아쿠아리움 앞을 서성였다. 한가운데에 어떤 남자의 조각상이 있었는데 양손을 들어올린 모습이었다. 잠시 후 수조 안에 어린 아이들이 공허한 눈으로 둥둥 떠 있는 것이 언뜻 보였다. 나는 공포에 휩싸여 급하게 수조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 아이들 셋이 수조 가장자리로 머리를 불쑥 내밀고 내게 물을 뱉었다. 그러고서 아이들은 키득거리다가 다시 자취를 감췄다. 프림로즈는 젠체하며 바닥을 가리켰고, 아니나 다를까 내가 서 있는 곳에는 "물튀김 구역"이라는 글자가 분명히 쓰여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이 우주가 조금 밋밋하고 따분한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로버트 "보보" 블라이스 갤러리를 방문하고 나서 그 생각은 말끔히 사라졌다. 줄줄이 전시된 그림과 조각, 신비한 뉴미디어 홀로그램이 모두 적나라한 폭력과 변태 행위를 묘사하고 있었다. 내가 최악의 (아니면 최고의)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방식으로 음식, 섹스, 마약, 자아도취를 왜곡해낸 향락적인 주지육림도. 그런데 나오는 길에 그 예술가의 낡은 초상화를 보니까 참 행복해 보이는 친구였다.

물론 마지막 전시실만큼 나를 커다란 충격에 빠뜨린 것은 없었다.

박물관의 가장 위쪽 "돌덩이"는 널빤지형 목조 계단과 넓은 격자 유리 천장이 설치된 원형 극장이었다.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무언가가 보였는데 주위에는 붉은 벨벳 로프가 둘러쳐져 있을 뿐이었다. 모나리자 앞의 부산스러운 군중보다 더 빽빽하게 몰려든 사람들이 중앙에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잘 보려고 목을 빼고 난리였다. 프림로즈와 내가 그 방에 들어서고 잠시간 나는 차마 눈을 깜빡일 수가 없었다.

조각상이었다. 조각상.

당장 비명을 질러 수백 명의 관객들에게 경고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직전에 내가 얼마나 바보처럼 보일지를 깨달았다. 프림로즈가 내 어깨 위로 뛰어오르자 나는 화들짝 놀랐다. 프림로즈는 미소를 지었고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각상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 같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된 악몽이 아니었다. 내가 아주 잘 알던, 우묵한 자국이 여럿 패인 기이한 몸체는 대신 동석의 매끄러운 윤곽을 지니고 있었는데 캐나다 원주민의 조각품과 로마 시대 유물의 극치 사이에 놓인 무엇 같았다. 더 이상 "인간" 같지는 않았지만 훨씬 덜 불온해 보였다. 그 "얼굴"에 찍힌 갈색과 붉은색 점들은 거의 빛을 발하는 것처럼 선명한 색으로 흐르는 듯한 로르샤흐 패턴을 그렸다. 가장 큰 차이점은 몸체 모양에 있었다. 이 조각상의 몸체는 뒤쪽으로 한참 구부러져 가슴 부분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머리는 다시 바닥에 닿을락말락한 모습이었다. 팔은 구부정한 상태였는데 머리카락 굵기쯤 되는 천 개의 금속 띠가 팔을 감싸며 위쪽을 향해 피어나 있었다. 그 철로 된 고사리 순들은 대략 거대한 원뿔 모양을 취하며 천장에까지 가 닿아 햇빛을 온갖 기하학적인 무늬로 갈라 놓았다.

섬뜩한 광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부정할 수가 없었던 사실은-

프림로즈: 아름답지, 응?

캐스피언: 내 위장이 입밖으로 튀어나올 때 다시 한번 물어봐.

프림로즈: 하! 저걸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 24시간마다 단 1초뿐이야, 자정 직후지. 매일같이 그 짧은 시간 안에 조각상은 전혀 색다른 모습으로 자기를 단장해. 전 세계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그 모습을 보러 몰려오고. 지금은 어디에나 의자가 생겼으니만큼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야. 어쨌든 사람이 다 나가고 없는 그때 조각상이-

캐스피언: 혹시라도 저게… 그럴지도 모르는데 걱정되지 않아?

프림로즈: 뭘 하는데? 누군가를 해칠지도 모른다고? 죽일지도 모른다고? 뭐 그럴 수 있지, 저걸 감방에 가두고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고서 자기가 만든 오물 안에서 뒹굴게 내버려둘 정도로 우리가 무례하다면야. 누구나 그렇게 할걸. 저건 조각상이야, 데이비드. 예술이라고! 남이 봐주길 원하니까 누가 보고 있으면 멈추는 거고!

캐스피언: 추측하건대 저게 직접 당신네한테 말해준 거겠지. 아까도 변- 경이랑 "대화"를 한다느니 했었으니까. 그건 어떻게 한 건데?

프림로즈: PACT-5야. 기묘한 아마추어 무선기와 텔레파시를 보낼 수 있는 무엽록소 식물의 즙을 꿰맞추고, 러시아 설화의 악마가 납치한 아이들 몇천 명을 풀어준 다음, 전세계에 신호를 보내는 무선 주파수 경이를 장악했어. 참고로 방금 그건 197개 단계 중 3번째까지고, 나머지는 안 말해줄 거야. 조각상의 경우엔 대화가 별 쓸모가 없었어. 대신 고전적인 방식으로 알아낸 거지. 시행착오와 인내심 말이야. 아, 그리고 저게 단순히 콘크리트로 된 살인 기계는 아닐 거라는 믿음도 있었고.

캐스피언: 난… 내가 그런 식의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이미 저… 놈이 뭘 할 수 있는지 본 사람 입장에선.

프림로즈는 내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좀 잘난 척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프림로즈: 다음에 널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겠다.


편람회는 불참자의 발언을 허락한다.


나는 경고했다. 저들은 귀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는 저들을 구제할 수 없다.

반대다.

2 - 4

장소: 오스트레일리아, 제로 지점(?).


프림로즈가 "오스트레일리아 제로 지점"이라고 말했으니 이동한 곳도 거기일 테다. 보는 것만으로는 짐작도 못할 장소였다.

우리는 유리 돔 안에 있었는데 벽이 내가 격리실에서 1000번은 보아서 익숙한 두께 0.5미터의 중합체 유리 재질이었다. 돔은 큼직했지만 어마어마하게 크지는 않았고 굳이 따지자면 작은 공항 터미널과 비슷했다. 바깥의 풍경은 초목이 우거진 열대 지역 같았는데 나무들이 돔 위로도 한참 높이 뻗어 있었고 꽃이 핀 덩굴식물들이 돔의 유리 겉면 위로 자라나고 있었다. 내가 식물학자는 아니지만 그것들의 이름을 하나도 댈 수 없다는 건 기묘했다. 하나하나가 완전히 새로운 식물이었던 것이다. 강철 갑옷마냥 겹겹이 자라난 껍질로 감싸인 나무들, 마치 미끼가 달린 낚싯대처럼 뻣뻣한 녹색 줄기가 늘어뜨린 가는 실들에 매달린 꽃봉오리들.

그 광경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나는 내 앞에 있는 20m 크기의 파충류를 보지 못할 뻔했다.

폐가 일순에 졸아들었다. 나는 본능에 따라 도망치려다가 내 두 발에 걸려 넘어졌다. 영장류의 몸뚱이에 원시적인 공포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바닥을 짚어 뒤로 물러나는 내내 내가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것은 그 눈이었다 - 유일무이한 최상위 포식자, 죽일 수 없는 괴물의 눈. 내 일부는 나와 그것 사이에 비산 방지 유리벽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른 일부는 그조차 저 존재를 멈추는 데에는 역부족일 것임을 알았다. 그것이 느릿하게 다가왔다. 나는 튀어올랐다. 그러다가 프림로즈가 우리 둘 사이에 차분히 발을 들였다. 그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것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프림로즈: 그냥 관광객이야.

도마뱀은 잠시 그 자리를 지켰다. 광대한 거미줄 같은 검은색 눈알로 날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그런 다음 그것은 몸을 돌렸다. 다리 여덟 개가 땅을 밟는 소리가 우레처럼 울렸다. 이마로 땀이 흘러내렸다. 프림로즈는 그 생물이 숲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다 바라보고 나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프림로즈: 방금은 미안해.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거든. 불멸용의 살해본능이란 전설적이지.

캐스피언: 불- 세상에 당신들 저거한테 애칭까지 붙여준 거야!?

프림로즈: 애칭이라니? 그게 종명이야, 요 똑똑아. 저들 전부를 우린 그렇게 불러.

서쪽의 빈터와 동쪽의 언덕, 그리고 정면의 우림을 누비며 지나가는 것은 용들이었다. 그것도 수백 마리의. 거대하고 웅장한 몸체와 상어처럼 쩍 벌어진 입 - 전부 내가 살던 세계의 악몽과 지극히 닮아 있었다. 다만 저들은 모두… 건강해 보였다. 팔다리는 엷은 푸른색, 초록색, 노란색 무늬가 들어간 비늘을 두르고 있었다. 몸체는 덥수룩한 털에 감싸여 있었는데 털 한 가닥 한 가닥이 땋아내린 머리처럼 굵었으며 버드나무 가지처럼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캐스피언: 그… 저거…

프림로즈: 그래, 맞아. 행성에서 두 번째로 위험한 동물이지. 우리가 모기를 없애버릴 때까지는 세 번째였어. 물론 첫 번째는 언제나 인간이고. 대단히 흥미로운 생물이야, 불멸용은. 불멸이란 건 물론 동족 말고 다른 존재로는 죽일 수 없다는 뜻이지. 사자와 가재를 합친 것 같다고 하면 될까. 누구 하나가 충분히 크고 늙고 느려지면 무리의 다른 개체들이 잡아먹거든. 저들은 예전부터… 글쎄, 골칫거리라고 부르는 건 무례한 일이 되겠지만, 아무튼 우리 땅과 저들 땅 사이에 벽을 세우고 눈에 띄지 않게 다니면, 멍청한 무단 침입자들과 밀렵꾼 말고는 딱히 죽이지 않았어. 저들이 지능을 가졌다는 건 우리도 알고 있었지. 접촉도 시도해 봤지만, 전령을 전부 죽였어.

캐스피언: 그러고 나서 뭘 했는데? 무슨 놈의 변칙-경이-부두-마법을 부려서 이 상황을 만들어낸 거야?

프림로즈: 아무것도 안 했어.

캐스피언: 아무것도 안 했다고!?

프림로즈:눈에 띄는 건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이야. 직접적인 일은 없었다고. 그래도 우리가 뭔가 한 건 확실한데, 어느 날 그냥… 그만뒀거든. 정기 과학 조사를 하던 중에 연구원 하나가 불멸용 둥지에 불시착했는데 - 열몇 마리가 무리지어 살고 있었대. 다만 불멸용들이 연구원을 죽이지는 않았어. 그는 멀쩡히 걸어나왔지. 우리가 구조 드론을 보내려고 했는데, 그걸 거절했다니까! 그 매드 사이언티스트 자식, 저것들이 한창 번식기일 때에 영역 한가운데를 지나온 거야! 다들 그게 클레프 연구원의 마지막이 될 거라 생각했었지. 그가 생채기 하나 없이 나타났을 때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짐작이 갈 거야.

캐스피언: 왜? 어떻게!?

프림로즈: 아까 말한 것처럼 우리도 자세히는 몰라. 왜냐고 물어보기는 했어 - 그랬더니 대답을 하더라! 저 생물들이 우리한테 처음으로, 또 유일하게 한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역겹지 않다"는 거였어. 그러니까… 잘된 일이겠지, 아마.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기묘한 정글(?)을 내다보았다. 프림로즈가 내 옆에 앉았고, 그렇게 우리 둘은 오랫동안 거기 있었다. 다른 수많은 생물들을 보았는데, 몇몇은 낯설었고 몇몇은 무서울 정도로 낯이 익었다. 기이한 맹금 개들이 무리를 지어 뛰어다니며 말이 안 되는 영어 문장을 서로에게 짖어댔다. 비행기보다 한참 큰 새들 무리가 머리 위로 날아오르자 프림로즈가 무시하라고 일러주었다. 한번은 인간들이 줄을 지어 지나갔는데 풀을 엮고 뼈를 깎아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의 새해 퍼레이드마냥 기다란 장어의 뼈를 머리 위로 들고서 해안가로 향했다. 여자아이 한 명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 아이의 얼굴이 기억나지가 않는다.

캐스피언: 당신네 세상은 참 이상하고 아름다운 곳이야, 프림로즈.

프림로즈: 그 말 꼭 겨 묻은 고양이 나무라는 꼴이야. 따라하지는 말고. 고양이 전용 숙어니까. 고양이만 쓸 수 있어.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프림로즈도 웃었다. 프림로즈는 내게 배고프냐고 물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배가 엄청나게 고파왔다.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었다.


편람회는 공방의 발언을 허락한다.


난 이 "세계의 명운"이니 어쩌니 하는 일에 관심 없어. 운 나쁘게 떠밀려서 온 것뿐이고. 고개 숙이고 바쁜 척하면서 정치랑 정책 같은 이야기는 당신네한테 맡기려고 했지. 당신들이 경이를 보내주고, 우리는 PACT를 보내주고, 서로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그게 조건이었어.

우리가 A6K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해주지. 저들은 겁쟁이다.

아니,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가지고 논다면, 가끔 화상을 입는 거야 당연하지! 개조 기계를 제 안에 넣다가 블랙홀을 만들기도 하는 거고! 사이보그 슈퍼 좀비 군단을 만들거나! 실수로 매사추세츠에 사는 사람 전부를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는 일도 일어나! 그런다고 시도하는 걸 그만두는 건 아니지! 개판 난 걸 정리한 다음에 다시 일거리를 손에 드는 거야. 아니면 세상이 나아질 일은 없어.

결론적으로 말해서, 동업자들의 말이 맞아. A6K에 우리에게 없는 것이라곤 없지만, 혁신가라면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지. 문제는, 저기서는 진짜 혁신가들은 죄다 괴짜, 기인, 아니면 특출난 백치 취급을 받는다는 거야! 먼저 더 나은 뼈대부터 만들라고 해. 그때까지는,

우리는 저들과 함께 일할 수 없어.

공방 연합반대표를 던진다.

2 - 5

장소: 테네시주 내시빌, "허먼 풀러의 놀라운 박물관" 외 여럿.


우리는 프림로즈가 "수송 포드"라고 불렀던, 플라스틱의 흰색을 띤 조개 모양 UFO에서 걸어나왔다. 디트로이트에서 사온 피자를 먹으면서. 아무래도 그쪽 피자가 여기 우주에선 최고라나 보다. 말도 안 돼. 나는 이 모든 게 - 고기, 치즈, 심지어 효모까지 전부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거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환상적인 맛이었다. 나는 마지막 조금 남은 크러스트를 삼킨 다음 손을 청바지에다 문질러 닦고 뒤의 포드를 가리켜 보였다.

캐스피언: 왜 아직도 저런 게 있는 거야? 순간이동할 수 있는데.

프림로즈: 그래도 소파는 옮겨야 하니까, 데이비드. 그리고 의자에게 소파를 옮겨달라고 부탁하는 건 아주 무신경한 일이 될 테니까.

우리는 장엄한 3층짜리 석조 분수로 둘러싸인 정자 사이로 걸었다. 분수의 맑은 물이 흘러나와 석조 그라우트에 수천 개의 시내를 만들었다. 사이사이로 풍성한 녹색 이끼가 회로기판의 선처럼 자라 있었다. 우리 주변에는 반원형 건물이 하늘로 뻗어 있었는데 서로 줄을 맞춰 거리를 두고 있어서 정자 한가운데에 서면 모두를 동시에 볼 수가 있었다. 그 거대한 구부러진 창문들 사이에 서 있자니 주위로 몰려든 거인 여럿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프림로즈가 "다른 박물관들"도 가 보자고 했을 때, 나는 놀랐다. 정확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불평하지는 않았지만 오후 내내 나는 거북한 느낌을 가슴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지나칠 정도로 완벽했다. 이 현실을 둘러보는 건 마치 성공한 형제의 집에 초대받아 그가 이룬 업적과 받아온 상패를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씁쓸한 시기심이었다. 누군가를 단지 성공했다는 이유만으로 깎아내리는 건.

자연역사박물관의 대리석 홀을 지나던 중에, 나는 놋쇠 장대로 똑바로 서 있게끔 고정된 커다란 새의 해골 앞에서 멈춰섰다. 그것은 크고 블룩한 배와 황새 같은 목, 대단히 뾰족한 부리를 갖고 있었다. 나는 갈비뼈 너머를 들여다보며 어떤 이상한 뼈 덩어리의 의미를 찾으려고 해 보았다. 그것은 거의 회중시계의 내부 같았다. 프림로즈가 걸어와 내 옆에 섰다.

캐스피언: 그래서, 경이가 당신네 작은 유토피아에 안 맞아 들어가면 이런 꼴이 되는 거야?

프림로즈: 이 가엾은 생물은 우리랑은 전혀 상관 없는 죽음을 맞았어, 데이비드. 경이가 "안 맞아 들어가면", 우리는 달리 적절한 곳을 찾아 줘. 대부분은 다른 현실이지.

캐스피언: 그러니까 당신네 문제를 다른 이들한테 떠넘긴다는 거군.

프림로즈: (…) 이것 참, 너 정말 우리를 악역으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났구나? 아니, 데이비드, 우리는 해결책을 찾아내. 빛을 싫어하는 경이는 빛이 없는 세계에서 훨씬 더 행복하지. 보다 잔혹한 생물들은 가혹한 환경, 문명화가 덜 된 곳을 선호하고. 여기서 도무지 방도가 없으면, 현실을 경이에 맞추거나 그 반대를 해주는 거야.

캐스피언: 깨끗한 시스템이구만.

프림로즈가 대답하기도 전에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기술박물관으로 향하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프림로즈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나를 몇 발짝 뒤에서 따라왔다. 나는 많은 전시실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왔다. 멈춰 서서 구경했다면 아마 넋이 빠졌겠지만, 나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이곳에 없는 것을 찾아내야 했다.

그 박물관의 지하실 깊은 곳에서, 나는 찾던 것을 발견했다.

어둑어둑한 그 방 안에는 크고 녹슨 기구가 놓여 있었다. 곡사포와 테슬라 코일을 반반씩 섞어 놓은 듯한 물건. 벗겨지고 속이 훤히 드러나 보였지만, 전쟁 무기임이 틀림없는 것이. 그것 말고도 이곳에는 역설적이게도 유물이 된 우주시대의 무기가 벽면과 유리장을 가득 채운 채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어두운 만족의 한숨을 내쉬었다.

캐스피언: 자. 말해 봐. 그렇게 평화로운 세상에 왜 이런 기계들이 필요하지?

프림로즈는 내 바로 뒤에 앉아 고양이가 혼란을 표현하는 방법을 선보였다. 귀를 보면 알 수 있는 거였다.

프림로즈: 그 얘기를 하려고 이런 거야? 오, 데이비드-

캐스피언: "오, 데이비드" 하지 마. 설명해 봐.

프림로즈: (…) 물론 우리도 전쟁을 겪었어. 전쟁이 없었다고 한 적은 없잖니. 대부분은 냉전이었지만, 완전히 무혈은 아니었지. 토대에 시체 몇 구조차 바치지 않고 세워진 제국은 없으니.

프림로즈는 망설임이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고 나를 전시실 안으로 이끌었다.

프림로즈: 한 세기 전쯤, 방랑자들이 재단에 직접적으로 들고일어났어. 방랑자들은… 뭐랄까, 재단이 필요악이라 여긴 것을 발견해냈는데, 그걸 용서치 못할 죄라고 여긴 거지. 나라면 그 소녀에게 벌어진 일들을 단순히 지독한 비극이라고 하겠지만… 어쨌든, 그 일이 두 거대 세력을 진흙탕 싸움으로 끌어들이게 된 거야. 편람회의 첫 동맹은 바로 그 시절에 맺어졌어. 순전히 필요성 때문에. 재단은 평화수호자들과 손을 잡고 함께 어떤 저주받은 공장 위에 공방을 세웠지. 방랑자들은 비주류 세력, 붉은 손과 뱀의 왕 추종자들을 끌어들였어. 두 세력은 보이지 않는 전선 양쪽에 무시무시하고 불가능한 병기들을 쌓아두기 시작했지. 사실은 PACT-5가 여기서 나온 거야. 원래는 전쟁 병기였어. 명령을 내리려면 경이에게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캐스피언: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프림로즈: 주위를 봐봐 데이비드! 만약 그 전쟁이 열전으로 들어섰다면 우리가 여기 이 자리에 있었을 것 같니? 아니, 결국 무기고는 너무 커졌고 병기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치 끔찍해져서 어느 쪽도 그것들을 실제로 사용할 엄두를 못 내게 되었어. 그래서 대화를 시작한 거야. 조금씩 말이야. 서로에게 절충안을 제시하고, 제안을 나누고, 공동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 방안을 내놓기 시작했어. 그러다가 두 세력은 함께 공동의 적에게 총구를 돌렸지. 어느 쪽도 혼자 힘으로는 격파할 수 없었던, 사악한 고대의 불멸자들에게. 두 세력은 함께 그 소녀를 해방시켜 주었어. 거기서부터 평범함의 경계를 벗어난 것들을 다루는 여러 세력들을 포섭했고, 뭐, 나머지는 다 지난 일이지.

나는 전시장 하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것은 정말로 스프레이칠을 한 장난감 총처럼 보였다. 나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프림로즈: 자, 이만하면 나한테서 악마를 끌어내려는 건 그만두겠니?

캐스피언: 어우, 알았어. 그 얘긴 그만할게.

프림로즈: 좋아. 이 얘긴 끝났으니 이제 좀 즐거운 시간을 보내 볼래?

캐스피언: 미안. 나 진짜로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어, 프림로즈. 그냥 지금까지 봐온 것들을 생각하면 회의적인 마음이 안 들 수가 없더라고. 나-… 나도 내가 엄청 "재밌는" 사람이 아닌 건 아니까, 이렇게 해주는 건 정말 고마워. 근데 정말 내 기분 풀어주는 방법으론 최고더라. 나 박물관 엄청 좋아하거든.

프림로즈: 알아.

나는 프림로즈를 흘끗 보았다.

캐스피언: 그건 어떻게 알게 되셨는데?

프림로즈는 아주 작게 움찔했다.

프림로즈: 넌 과학자잖아, 데이비드. 괴짜라고. 당연히 박물관을 좋아하겠지.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프림로즈는 다른 구역으로 가 버렸다. 프림로즈의 말이 맞았다. 나는 과학자였다. 연구하고, 기록하고, 가설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고양이 프림로즈에 관해 제법 괜찮은 가설을 떠올렸다.


편람회는 정점의 발언을 허락한다.


백 년도 전, 편람회의 초창기 시절, 네 사람이 광야에서 만났소. 그들은 대등한 위치에서 악수를 나누었으나, 세 사람은 양복을 입었고, 한 사람은 분뇨로 더러워진 작업복을 입고 있었지. 마지막 남자의 이름은 윌슨이었소.

다른 이들이 그 남자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을 도와달라 부탁했을 때, 남자의 요청은 하나뿐이었소. 그 요청은 PACT-15가 되었으며, 그 덕분에 나의 45번째 대둥지모께서는 고차원 사유의 능력을 얻으셨지. 내가 이곳에 앉아 있는 것 또한 그 남자 덕이며,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발상, 새로운 관점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된 편람회의 태도 덕이기도 하오.

그러한 사유의 다양성이 없는 세계 - 유인원들의, 유인원들만의 세계를 생각할 때마다 몸이 떨리곤 하오. 열린 하늘의 이름에 걸고 단언하건대 고명한 프림로즈 박사와 박사의 고양잇과 과학 보호구역이 이루어낸 성과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런 토론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오. A6K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몰랐을 테니! 이 작은 열쇠구멍을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우리 세계의 과거 모습이오 - 단 하나의 생물종, 단 하나의 관점에 의해 지배되는 행성. 우리는 위선자처럼 방관할 수는 없소, 동료 지구종들이여.

우리는 저들에게 손을 뻗어야 하오.

공동정점등천회찬성표를 던지오.

3 - 5

장소: 페루 타크나.


그날 저녁 우리는 해안가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그것도 직접 운전을 해서. 어디에나 의자와 수송 포드의 시대에, 자동차는 마이너한 취미 분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우리는 1968년식 포르쉐 483을 빌렸는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차종이지만, 정말 멋진 차라는 데에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프림로즈는 내가 운전해보지 못하면 슬퍼서 죽어버릴 거라며 운전석을 양보해 주었다. 우리는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구불구불하게 놓인 오래되어 부서져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속도를 냈다.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시야 왼쪽에 버티고 선 산이 엷은 호박색으로 빛났다. 오른쪽에 펼쳐진 바다를 색칠한 금빛 띠가 우리 차로부터 가라앉는 태양까지 뻗어 있었다.

우리는 전망대 근처에 차를 세웠다. 프림로즈는 가드레일 위에 앉고 나는 그냥 기대어 섰다. 땅거미가 내리며 나는 점점 내 눈을 믿을 수 없게 되기 시작했다.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하늘에야 별이 몇 개 떠 있었지만 바다에 보이는 반사상은 너무 많았다. 주위가 더욱 어두워지자 바다 안의 빛무리는 더 늘어났고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것은 별이 바다에 비친 게 아니었다. 바닷속에 도시가 있었던 것이다. 고도가 떨어지는 지점에서부터 지평선 너머까지 걸쳐서 펼쳐진 거대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가. 덩굴 같은 튜브로 서로 이어진 커다란 유리 돔들에 흰색 빛이 온통 흩뿌려져 있었다. 모습을 바꾸며 빛나는 위성들이 열을 맞춰 해저에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마치 고속도로 위의 차들 같았다.

캐스피언: 프림로즈… 왜 우리 지금 저기가 아니라 여기 있는 거야? 당신네한테 수중도시가 있단 말은 안 했잖아!

프림로즈: 그런 건 없어.

캐스피언: 무-… 그럼… 저건 다 뭔데?

프림로즈: 도시지. 우리 도시가 아닐 뿐이야. 대서양 거대도시는 두족류들 소유야. 대부분은 팔완류지. 우리랑은 얘기를 안 해.

캐스피언: 어. 전혀 교류가 없다고?

프림로즈: 그래. 그것도 한 오십 년쯤 됐지. 그자들이 편람회 쪽에 있었던 건 딱 여섯 주 동안이었는데, 이후에 자주권을 요구했거든. 그냥 다른 지구종들하곤 잘 지내질 못했던 것 같아. 온몸에 뉴런이 퍼져 있는 생물이 고차원 사고를 얻게 되면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 걸지도. 그도 아니면 자기네 팔이- 다리가- 아무튼 그것들이 자기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있으면 딱히 옆에 다른 존재가 없어도 상관없는 건지도 모르지. 그래서,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 줬어.

캐스피언: 당신네 그럼 문어들한테-

프림로즈: 팔완류야.

캐스피언: 그래 그거. 아무튼 그자들한테 고등 지능을 준 다음에 바다에다 다시 던져버렸다는 말이야? 무슨 잘못 낚은 고기마냥? 그랬더니 그자들이 세운 게- 잠깐, 아까 거대도시라고 했어?

프림로즈: 알래스카 앵커리지부터 뉴질랜드까지 전부 다.

캐스피언: 그리고 당신은 이 모든 게… 걱정되지도 않아? 물 위에서 봐도 엄청나게 발전한 거 같은데! 저것들이 육지도 정복하려고 들면 어쩌려고?

프림로즈: 그거 참 A6K 사람다운 발언이구나, 데이비드. 안 그러면 어쩌려고? 우리랑 교류를 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게 저들이 우리를 적대한다는 뜻은 아니야. 모두가 친하게 지낼 수는 없는 법이지만, 모두가 나를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는 것도 아니지. PACT-15의 실패 사례를 적개심 순으로 나열한다면, 팔완류들은 해파리와 진딧물 사이 어딘가에 속할 테고… 곤충들은 지상에서 지옥도를 재현할 뻔했는데 말이야.

캐스피언: 해파리들이랑은 무슨 일이 있었는데?

프림로즈: 한순간 의식이 생겨나서는 아주 정중하게 "사양할게요." 라고 했지.

우리는 웃고서 잠시간 침묵을 즐겼다. 아주 먼 옛날의 무언가가 떠올랐다.

캐스피언: 리사가 엄청 좋아했을 텐데.

프림로즈: 리사?

캐스피언: 그냥 옛날 친구야. 해양생물학자였거든. 변칙적인 산호물질을 연구하던 중에-… 뭐, 우리 쪽 현실에선 좀 더 위험한 일이 자주 일어나니까.

프림로즈: 유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파도가 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프림로즈: 나도 지인을 잃은 적이 있어.

캐스피언: 진짜로? 아니 - 미안, 무례하게 굴려던 건 아니고 - 오늘 본 것들을 생각하면 당신네는 불멸성도 다룰 수 있을 거라고 반쯤 믿고 있었는데.

프림로즈: 그렇지 않아. 아니, 엄밀하게는 그 말이 맞아. 죽음을 끝낼 방법은 알아. 한때는 시도해보기도 했어. 왜 생명이 끝을 맞이해야만 하는지 교훈을 줬지.

캐스피언: 자세히 설명해줄 생각 있어?

프림로즈: 알잖아. 안 돼.

캐스피언: 그러면 그 지인이었다는 사람은 어때. 어떤 사람이었어?

프림로즈: (…) 괴짜였어.

나는 질문을 더 하고 싶었지만, 하늘을 주시하던 프림로즈가 앞발을 들어 보였다.

프림로즈: 어디 실내로 들어가야겠다. 밤이 다 됐어.

캐스피언: 잠깐, 진심이야? 밤엔 앞을 못 봐? 아니면 뭐, 부기맨이라도 와?

프림로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캐스피언: 세상에, 설마 진짜로 부기맨이 오는 거야?

프림로즈: 아니, 그자들은 다 태즈메이니아에 있어. 네가 내 얼굴에 먹칠을 할까 봐 그렇지, 데이비드. 너는 이곳의 관습을 잘 모르고, 밤은 우리 것이 아니니까.

프림로즈는 고개를 위로 슬쩍 올려 보였다. 나는 그 동작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았고, 턱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은빛을 띤 광대한 구름이 우리 머리 위에 와 있었다. 바로 몇 초 전만 해도 하늘이 그렇게나 맑았는데. 적어도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기에는 구름 같았고, 우리 위에 있는 것은 산꼭대기에 닿을락말락했다. 그것은 한 무리의 깃털이었다. 수백만 개의 깃털들이 흰색 명주실 여럿에 매달려 거대한 짜부라진 공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나는 그 "구름" 안팎의 어마어마하게 큰 근육계 같은 것을 목격했다. 피부는 없고 회색을 띠며, 분할된 모습이 인간의 것은 아닌,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살아 있는 기계가 그 덩어리 안에 존재했다.

바다 아래 도시들의 둥근 유리 벽은 인공의 불빛으로 밝게 빛났다. 구름 위에 지어진 도시들은 모두 완벽한 정사각형에 상아와 뼈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다른 어떤 천체의 빛과도 별개로 은은한 달빛을 내뿜었다.

프림로즈: 세상을 나눠 가진다는 건 이런 거야. 저녁 어때?


편람회는 밤의 주민들의 발언을 허락한다.


저들은 우리를 밖에 두었다.

너희는 우리를 들여보냈다.

우리는 저들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겠다.

밤의 땅 맹약찬성표를 던진다.

4 - 5


장소: 도쿄 오사카 도톤보리.


프림로즈는 내가 "최소한의 피해"만 줄 곳으로 안내했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한 바에는 자리가 세 개밖에 없었는데, 간판이랄 것조차 없는 구멍가게였다. 프림로즈는 여기 음식이 세계 최고의 라멘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프림로즈의 말을 믿기로 했다.

우리는 주문하고서 3분 만에 음식을 받았다. 내 접시에 담긴 국물은 정말 맛있어 보였지만, 그것보다도 요리사가 신경쓰였다. 그것은 얼굴이 없고 공중에 떠 다니는 생명체였는데 H. R. 기거가 디자인한 인어 같은 모습이었다. 꼬리 끝자락에 달린 크고 날카로운 삽에는 밀가루와 면 쪼가리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프림로즈는 나온 음식을 받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도 똑같이 했다. 국물 맛이 훌륭했다. 마늘 맛이 조금 세기는 했지만.

한창 먹던 중에, 프림로즈가 무슨 계시라도 받은 것마냥 튀어올랐다. 수염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프림로즈는 양해를 구하고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음식 계산을 이미 마쳤다는 데에 안도했다. 잠시 후, 손님 하나가 새로 바에 들어왔다. 문을 지날 때 몸을 상당히 굽히면서. 곁눈질로도 엄청나게 털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곁눈으로 옆을 살폈다. 그 생명체는 - 아니 경이라고 해야겠지 - 키가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아래에 깔린 의자가 체중 때문에 삐걱거렸다. 겉가죽은 밤색 털로 북슬북슬했는데 한 가닥 한 가닥이 내 머리카락만큼이나 가늘었고 부끄럽게도 나보다 더 잘 정돈되어 있었다. 판판한 얼굴에는 눈과 입이 있을 자리에 세 개의 털이 없는 동그라미가 있었으며 매끄러운 검은색이었다. 마치 건조한 산의 공기 같은 냄새가 났다.

한 번은 그것이 내 시선을 알아차렸다. 눈이 마주치자 불안한 소름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그것은 내게 느리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다시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내 운을 더 이상 시험해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다 먹은 그릇을 카운터에 올려두고 밤거리로 도망치듯 나왔다. 거기서 프림로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의 옷깃에서 나온 철심 손가락으로 큰 병을 든 상태였다. 병 라벨에는 검은색 한자 하나가 쓰여 있었다.

캐스피언: 프림로즈, 그거 뭐야?

프림로즈: 이건, 데이비드, 아주 센 술이야.

캐스피언: 그리고 그 아주 센 술로 뭘 할 건데, 프림로즈?

프림로즈: 물론 마실 거야, 데이비드. 너도 도울 거고.

캐스피언: 내가 눈에 안 띄면 안 띌수록 좋은 거 아니었어?

프림로즈: 그래, 그게 원래 계획이긴 했어. 하지만 재미없잖아. 그래서 이번 계획은 네가 하는 모든 실수를 취했다는 핑계로 넘기는 거야! 실제로 취해 있다면 더욱 쉽겠지.

캐스피언: 난 내가 연구 명목으로 머무르는 건 줄 알았는데.

프림로즈: 난 네가 휴가를 즐기는 중인 줄 알았지! 뭐가 문제니? 해도 졌고, 너는 이상한 세계에 초대된 손님인데다, 보고해야 할 상사도 없지… 어깨에 힘 좀 풀어! 현지 관습을 따라! 네 가이드를 믿으라구! 그냥-… 나랑 술 한 잔만 해, 데이비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캐스피언: 알았어, 딱 한 잔만이야. 예의상으로.


편람회는 주시자들의 발언을 허락한다.


그놈의 철학 씨부림 잠깐이라도 관두면 안 될까 형씨들? 지금 쟤네 차원 구멍에 주먹을 꽂아넣자는 얘길 하는 게 아니잖아 - 투명성에 대해 얘기하자는 거지. 기억해? 호랑이 담배 피울 적에, 댁들이 우리를 어둠 속에 가둬 뒀던 시절? 댁들이 자기들끼리만 상아 언덕 위에서 놀고, 우리 서민들은 암흑의 그림자 골짜기에서 어쩌고 했던 때 그게 잘 돌아갔는지?

안 통했지. 한 번도 제대로 굴러간 적 없었어. 우린 언제나 댁들을 봐 왔어 - 시야가 약간 흐리긴 했어도. 댁들은 진실을 숨기지 못하고, 사람들을 제대로 막지도 못해. 우린 어떻게 해서든 금지된 곳에 들어가고, 그러고 나면 우린 꼭지가 돌아. 댁들이 꿍쳐 두던 비밀들을 가지고 터무니없고 가능하지도 않은 농담거리로 만들지. 공동체는 예술이 곧 성명이랬던가? 우리 성명은 이거다. 댁들은. 신이. 아니야. 거기다가, 까고 말해서 A6K란 거 그냥 댁들의 폭력적인 버전으로 가득 찬 세상이잖아. 진짜 쟤네들한테 위험하게 보이고 싶어?

짧게 말해서, 난 살아 숨쉬는 트윗이랑 달 원숭이랑 같은 생각이야. 우리와 저들 사이에 선을 긋기 시작하는 순간 문지기가 될 뿐이다. 그런 건 하나면 충분하고, 댁들 중에 불타는 검을 든 사람은 없는 것 같군. 우린 저들보다 우월하지 않아. 우리가 저들보다 더 자격이 있지도 않아.

우리가 바로 저들이야.

주시자 포럼찬성표를 던진다.

5 - 5

장소: 여기도 일본? 아마도?


캐스피언: 중심 (딸꾹!) 차원 이론은 만화에서나 나오는 헛소리야, 이 정신 나간 털뭉치야!

프림로즈: 내-! 내가 아직까지 그놈의 가지고 현실성 변동 재는 애한테 이런 소리를 듣는다! 네가 뭘 아는데, 요 반원숭이 놈아!?

저 대화 전에는 아마도 노래방 기계를 틀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다음 몇 시간은 머릿속에서 엎어진 퍼즐 같은 상태다. 조각들은 기억하지만, 어떤 식으로 맞아들어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변명을 하자면, 술 한 잔보다는 훨씬 더 많이 마셨다.

주변 길거리가 변하며 악몽에서나 나올 것 같으면서도 흥미진진한 생물들로 채워지던 것을 기억한다. 빛나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 머리 위에서 말 그대로 헤엄치고 다녔다. 하늘이 마치 깊고 어두운 수영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움직이는 모래 언덕이 닭 뼈 쪼가리와 자갈을 달고서 내 꼬이는 두 다리 사이로 굴러왔다. 우리가 이탈리아인 관광객 가족과 부딪혔을 때는 짧은 언쟁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왜인지는 몰라도 매미들이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실랑이가 벌어지기 전에 우리는 시끌벅적한 바에 발을 들였다.

프림로즈: 여러 현실에서 이- 일괄적으로 나타나는 명확히 정의된 특성 중에서 무작위 황율- 확률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은-

캐스피언: 원자가 정렬할 수 있는 가짓수엔 (딸꾹!) 한계가 있어! 생물학은 다른 보편적인 과정을 따르고! 중력이 있으면 해골도 있어. 광자가 있으면 눈도 있지. 그리고-

프림로즈: 지금 양립이 불가능에 가까운 생태계 상에서의 탄소 기반 생명의 연며- 연- 영명에 대해서만 말하자는 게 아니야! 종교와 문화에서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현상 얘길 하는 거잖아! 푸른 돌거울만 해도-

캐스피언: 사회적 계층이! 미지를 개념화하기 위해 주름 잡히는 뇌가! 공 (딸꾹!) 존하-

아마 예티인 듯: 차원간 아원자 낙종에 대한 헨로 이론은 어쩌고요?

프림로즈: 오- 풉! 헨로라니! 헨로에 반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야! 그 돌팔이 놈은-

캐스피언: 당신이 뭔데 말을 그렇게 해! 하나 더 말해줄까, 멋쟁이 아가씨! 나비넥타이 블레이저 아가씨! 주황색하고. 보라색은. 안 어울려!

프림로즈: 조용히 해. 할퀴어버리기 전에.

캐스피언: 서로 충돌한다고!

프림로즈: 발톱 맛 좀 볼래!?

떠다니는 커다란 오브: ♎︎●︎ ♏︎□︎♑︎♒︎🙵⬧︎❍︎⬧︎ ♋︎■︎♎︎❍︎●︎♋︎●︎♑︎🙵♋︎◆︎ ❑︎♒︎❒︎♒︎🙵⬧︎♑︎🙵❒︎●︎ ⧫︎●︎♐︎♑︎♏︎🙵📬︎

캐스피언: 그래! 내 말이! 들었어!? 이 친구- (딸꾹!) 이 친군 뭘 좀 아네!

프림로즈: 그야 당여- 당영히 넌 오브랑 같은 생각이겠지!

그 뒤에 우리는 어느새 새로 사귄 친구 최소한 다섯과 함께 만취한 채 길거리로 몰려나왔다. 그들은 친해진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떠나갔지만 작은 새들이기도 했고 엄청나게 시끄러웠기 때문에 그건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모퉁이를 돌면서는 프림로즈를 잃어버렸는데 그건 여기서 길을 잃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유령들을 보면서 단련된 정신줄로도 나는 같은 인간이 아니면 무서워서 길을 물어볼 수가 없었고, 그런 사람을 찾는 데에는 놀라울 정도로 긴 시간이 걸렸다. 무슨 병원 바깥 가로등 아래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나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지만, 담배를 권하기는 했다. "보통은 이렇게 안 하는데 말이야." 그는 내게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당신이 이 세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니까. 그래도 되겠지." 내가 프림로즈와 나눈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도, 뭐가 된다는 건지도 미지수였지만 아주 친절한 사나이였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하다가 발을 헛디뎠는데 길 한복판에 선 전자 부스와 마주쳤다. 홀로그램 사인이 프림로즈가 달고 있던 브로치와 똑같은 지구본과 눈 모양이었다. 내가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다가가자 두 번째 영상이 나타났다. 파르스름한 빛으로만 구성된, 양성적인 외형의 인간이었다.

캐스피언: 어-… 아, 안녕하세요?

부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캐스피언: 저-… 음, 고양이를 찾고 있는데요-

부스(?): 동물 보호소 목록을 보시겠어요? 아니면 고양잇과 공동체 등록소로 연결해-

캐스피언: 아- 아뇨 전- 그, 죄송한데 전 여기 사람이 아니라서요. 제가 온 곳이- A6K라고 부르던데-

부스(?): 현재 진행 중인 A6K 통합에 관한 편람회 결정록의 정보를 공유해 드릴까요?

캐스피언: (…) 그러세요?

부스가 보여준 것은 술을 제대로 깨게 만들었다.


편람회는 이름 없는 자들의 발언을 허락한다.


경계라는 것은 없다. 오직 길만이 있을 뿐.

크기와 범위와 상황은 단순히 감각적, 규범적, 주관적이다.
그들은 그들이 아니며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너희가 너희이고 우리가 우리인 만큼.
바늘구멍도 여느 길처럼 넓어질 수 있다, 여행할 방법만 있다면.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으므로, 그리해야 한다, 그리할 것이다.
찬성도 반대도 없고, 멈춤도 진행도 없다.
길만이 있을 뿐이며, 갈림길은 언제나 하나로 이어진다 - 언젠가는, 완전하게, 궁극적으로.

숲에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을 때 우리는?
우리는 용기의 길을 택했다.
바보만이 엔트로피에 저항하기에.

우리는 저들과 함께 길을 걸을 것이다.

모든 길이 만나는 속의 도시로부터 찬성표가 던져진다.

6 - 5

장소: 어딘가에 있는 언덕.


내가 의자에게 주문한 건 그게 다였다. 어딘가에 있는 언덕으로 데려가 달라고. 무슨 작은 마을 바로 바깥이었는데,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미국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언덕에는 커다란 오크나무가 있어서, 나는 나무줄기에 등을 기대고 혼자 꽤 오랜 시간을 앉아 있었다.

머지않아 프림로즈가 날 찾아냈다. 프림로즈는 술병을 든 채였다.

프림로즈: 데이비드! 다행이다 정말! 너 찾으려고 오만 군데 옥상을 다 뛰어다녔어, 요 바보 같은 보노보의 육촌 형제 녀석아!

캐스피언: 안녕 프림로즈.

프림로즈: 워우! 너 사실은 여태껏 간 여러 개 달린 경이나 뭐 그런 거였니, 데이비드? 아주 멀쩡한 맨정신으로 보이는데!

캐스피언: 응. 자판기가 있었거든. 온통 검은색에 키패드가 달렸고, 요구 사항을 입력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술을 깰 것을 좀 달라고 했지. 그 끔찍한 시나몬 하트 캔디 같은 맛이 나던데… 효과가 있더라.

프림로즈: 오! 음… 잘 됐네! 이제 이 병에 남은 것도 다 들어가겠어!

캐스피언: 난 왜 여기 있는 거야, 프림로즈?

프림로즈가 굳었다. 꼬리가 내려갔다.

프림로즈: 그 질문은 하면 안 돼.

캐스피언: 그래도 할 거야.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프림로즈: 데이비드, 정말 이러기야? 오늘 내내 정말 즐거웠잖아-

캐스피언: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알려 줘, 프림로즈.

프림로즈: 이거 봐, 그러니까- 나 지금 이런 대화를 하기엔 너무 많이 취해서-

캐스피언: 젠장, 프림로즈, 그냥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말해!

프림로즈: 왜냐면 내 최고의 친구랑 딱 하루만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니까, 알았어!?

외침 끝에 침묵이 울려퍼졌다. 근처 나무에서 검은색 날개의 새 몇 마리가 날아올랐지만,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고요했다.

캐스피언: 이 차원의 데이비드 캐스피언 말이지.

프림로즈: (…) 그래.

캐스피언: 무슨 일이 있었구나.

프림로즈: (…) 이쪽 현실에서도 위험한 일이 생겨, 가끔은. 모든 특이점이… 무해한 곳으로 통하는 건 아니거든.

나는 나무둥치에 몸을 깊이 기대고, 머리 위에 드리운 어두운 가지들을 바라보았다.

캐스피언: 미안. 예상은 했지만… 미안해, 프림로즈.

프림로즈: 그래 뭐… 그러셔야지. 즐거운 술자리는 좋지만, 이제 한술 더 떠서 우울한 술자리가 되게 생겼으니까-

캐스피언: 그래도 내가 왜 여기 있는지는 알아야겠어.

프림로즈: 뭐-!? 방금 내 말을 뭘로-!

캐스피언: 개인적인 이유 말고, 시간에 관련된 이유 말이야. 프림로즈, 지금 편람회가 무슨 투표를 하는 거지? 그 사람들이 "찬성"하면 우리 현실은 어떻게 되는 거야?

프림로즈는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술병을 내려놓았다.

프림로즈: 통합이 이루어지겠지.

캐스피언: 그건 무슨 뜻인데?

프림로즈: 편람회가 여기서 했던 일을… 거기서 하는 거야. 모든 것을 개선해. 지배권을 넘겨받아서.

캐스피언: (…) 그리고… 반대한다면?

프림로즈: 특이점은 닫을 수 없어, 데이비드. 너도 알잖니. 현실에 생긴 틈새는, 그 정의부터가, 현실 자체보다 강하다는 거니까. 거기 영원히 남게 돼. 그러니까… 너희 현실이 맞아들지 않는다면, 골칫덩이가 되겠지. 편람회는 A6K를 통합하거나… 지워버릴 거야.


편람회는 평화유지자들의 발언을 허락한다.


오늘 오간 대화에는 우리가 각자 편람회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 왜 각자가 이곳에 있는 건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지. 뭐, 적어도 평화유지자들은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 잘 알아. 당신들에게 악역이 필요하니까. 모든 어려운 결정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돌릴 개새끼가 필요하니까. 여기 앉아서 "쫓아내"라거나 "금지해"라고 말할 누군가가 필요하잖아. 당신들이 그날 밤 집에 가서 아, 나는 정말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려고 했는데, 저 망할 평화유지자 놈들이 방해만 안 했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끔.

우린 외교가 실패했을 때 당신들이 보내는 세력이기도 해. 우리가 바로 당신들이 광신도 집단에, 피 흘리는 강에, 차 마시는 불사신 괴물들로 가득 찬 거꾸로 뒤집힌 이상한 도시에 순간이동시켜 보내는 해병대야. 왜냐하면 - 왜일까 몰라 - 가끔 그것들은 그냥 죽일 생각밖에 없거든. 그냥 놔둘 수도 없고,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고, 얌전히 있도록 설득할 수도 없어. 녀석들은 그냥 죽일 생각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그놈들을 죽이지. 조각들이 뒤지게 안 맞을 때 당신네들 완벽한 세상의 거친 모서리에 죄 사포질을 하는 게 누구인지 잊지 말라고.

내 상담사를 자랑스럽게 만들었으니 이제 요점을 말하지.

우리 모두가 원하는 건 똑같아. 평화롭고 안정적인 세계. 더 나은 선택지가 있다면 우리도 방식을 타협할 용의가 있어. 그건 A6K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야. 이미 봐서 알고 있겠지. A6K 놈들은 이판사판일 때만 타협해. 지름길만을 선택하고. 경이를 부수려고 한다고, 그게 언제는 좋은 결과를 불렀던 것마냥. A6K는 골칫덩이고, 솔직히 말해 이번에도 그토록 많은 골칫덩이 차원을 대해 온 그대로 대응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저들을 신용할 수 없다.

세계평화유지기구반대표를 던진다.

6 - 6

장소: 어딘가에 있는 언덕.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기묘한 차원간 예절에 따라 프림로즈에게 나를 마비시키기를 제안했다. 22시간 뒤, 프림로즈는 바로 그것을 행했다.

나는 무릎을 가슴에 대고 끌어안은 채 그 언덕 위에 굳은 듯 앉아 있었다.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 숨도 쉴 수 없었다. 피가 혈관 속에서 얼어붙어 심장을 지나가기를 거부했다. 머릿속의 톱니바퀴들이 끼긱거리고 쩌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멈춰서 있었다.

"통합",

또는 소거.

그 불안의 파도가 아주 약간 약해졌을 때에, 마음속에서 충동적인 생각들이 쉴 새 없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그것들은 내 눈앞에 날카롭고 들쭉날쭉한 길처럼 펼쳐졌다. 어쩌면 의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그 옥상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현실로 돌아가서 위험을 알릴 방법을 어떻게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경고를 하긴 해야 하나? 도움이 되긴 할까? 믿어주기는 할까? 그들이 편람회를 막을 수 있을까? 선제공격을 할까? 파괴되는 게 이 현실일지 우리 현실일지만 결정하는 꼴이 될까? 만나고서 하루도 안 된 사람들을 어떻게 믿지? 단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한 결정 기구를 어떻게 믿지? 내가 살던 현실은 또 어떻게 믿지? 평의회를 직접 본 적도 없잖아!

나는 뒤돌아 프림로즈를 보았고… 프림로즈는 내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숨을 아주 크게 들이쉰 채 참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프림로즈는 웃음을 터뜨렸다.

프림로즈는 뒤로 넘어가 웃으면서 축축한 잔디 위를 굴러다녔다.

캐스피언: (…) 침략 같은 건 안 일어나는 거지.

프림로즈: 문의 수호자시여, 당연하지! 아, 저 위에 계신 자애로운 어머니시여, 고대와 현대의 신들이시여, 너 정말 내가 평생 동안 만난 사람 중에 제일 잘 속는구나!

캐스피언: 난 여기 방금 왔다고, 프림로즈! 당연히 잘 속지! 젠장! 그럼 "통합"은 진짜로 무슨 뜻인 건데!?

프림로즈는 숨을 돌리고서 나에게 미소지었다.

프림로즈: 접촉이지. 통합이란 너희 현실에 접근해서 담화를 제의한다는 뜻이야. 그게 다야, 그게 끝이라구!

캐스피언: 그럼 접촉이라고 불러!

프림로즈: 편람회는 과학기관이야, 데이비드. 거창한 단어를 쓰길 좋아한다고.

나는 마침내 숨을 내쉬었다. 나는 잔디에 등을 대고 쓰러져 두 팔을 펼치고 별을 올려다보았다.

캐스피언: 당신은 개자식이야, 프림로즈.

프림로즈: 쌤통이다, 요놈아. 묻지 말라고 했잖니.

캐스피언: (…) 그러니까 편람회는 그냥 대화를 하고 싶어한다는 거지.

프림로즈: 첫걸음으로는 말이야. 시간이 지나고 서로에게 익숙해지면 그때 인도주의적 지원을 시작해서… 너희가 원한다면 하급 기술을 좀 제공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일종의 침략이기는 해 - 다만 아주 느리고, 완전히 자발적인 침략일 뿐. 너희가 우리한테 "꺼져!" 하는 순간, 우리는 꺼질 거야.

캐스피언: 근데 거기에 의견 충돌이 있으면 어떻게 해? 우리 세계의 일부는 너희를 환영하고 다른 일부는 그러지 않는다면?

프림로즈: 상관 없어. 만장일치여야 해. 너희가 어떤 총의, 어떤 동맹 - 말하자면 세계의 개선을 위한 공동 과학 협의회라고 할까 - 에 도달한다면, 우리를 다시 부르면 돼.

캐스피언: 이런 일을… 자주 겪어?

프림로즈: 자주 하고말고! 우린 새로운 차원을 발견할 때마다 이런 투표를 열어. 뭐 편람회 전체의 소집이 필요해지는 건 흔한 일이 아니지만. 통합을 제안할 때는 보통 결정이 난 거나 마찬가지거든. 결론은 대부분 반대고. 그냥 "대화"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우리도 아니까. 네가 말한 대로, 어떤 이들은 우리가 와주기를 원하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으면 어쩌겠어? 동맹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전세계적인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지.

캐스피언: 그리고… 투표 결과가 "반대"라고 해도 현실을 파괴하지는 않는 거고.

프림로즈: 그렇지, 데이비드, 물론 안 해.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차원 파열은 우리가 격리를 하는 유일한 경이야. 봉쇄하고서 숨겨둔 다음 관찰하지. 현실 하나를 통째로 파괴하는 건… 편람회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는걸! 아마도 말이야. 드물게 우리가… "자비"를 베풀었다고 할까, 그랬던 적은 있지만 그것들은 말 그대로 모든 게 지옥으로 직행해버린 차원이었어. 네가 온 현실은 그렇게까지 멀리 가지 않았고, 너는 확실히 위협이 아니지. 너희는 그냥… 글쎄, 확신할 수 있는 건 애매한 상태라는 거야.

나는 그 말의 어느 부분에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대재앙이 임박해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 이 모험에 어떤 잔혹한 펀치라인이 없다는 것이 거의 잘못됐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그냥 누워 있었다. 우주(들)에 대한 완전한 불신에 잠겨서 평온한 채로.

프림로즈는 한숨을 내쉬고 내 옆에 누웠다.

프림로즈: 데이비드, 나는 이 세계의 누구보다 평행현실에 대해 잘 알아. 너보다는 확실히 더 많이 알지 - 뭐라고 하는 건 아니야. 나는 연구한 지가 60년은 넘었으니까. 사실을 말하자면, 왜 우리 둘의 세계가 그렇게나 다르면서도 그렇게나 비슷한지 전혀 모르겠어. 너희 인간들과 너희 세계의 경이 중 어느 게 먼저인지도 모르겠고. 너희네 적대적인 현실이 인간들을 공격성과 불신에 차게 만드는 걸까? 아니면 너희의 불신과 공격성이 현실을 적대적으로 만드는 걸까? 문제는 너희일까? 상황일까? A6K는 그냥 통제가 불가능해진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한 걸까? 우리로 말하자면, 우리는 너희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뿐일까, 아니면 단지 수천 년 전 한 인간이 다른 이에게 친절하게 대하기로 한 일에서 시작된 막연한 도미노 효과의 산물인 걸까?

프림로즈는 어깨를 으쓱였다.

프림로즈: 참 까다로운 털실 뭉치 같단 말이야, 우리 연구 분야는. 참고로 방금 것도 고양이 전용 숙어야. 넌 쓰면 안 돼.

나는 잠시 프림로즈를 넘겨다보았다.

캐스피언: 60년이란 말이지?

프림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캐스피언: 당신 몇 살이야?

프림로즈는 내 얼굴을 세게 치고는 의자 쪽으로 저벅저벅 가버렸다.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편람회는 재단의 발언을 허락한다.


언제나 우리가 결정해야만 하는군, 그렇지? 그래야만 하겠지.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시작했으니까.

우리는 울부짖는 연철의 달에게 먹혀 비어버린 세계들을 보았네. 죽음과 반죽음, 거북한 삶에 삼켜진 행성들도 보았고. 음산한 붉은색 태양 아래 모든 것이 서로 집어삼키기를 반복하는 무시무시한 모습도 보았지. 어느 현실이 가장 비참한 결말을 맞았는가 하는 심술궂은 대회를 열 생각은 없지만, 개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을 고르라면… 행복한 이들로 가득한 자연 그대로의 세계를 보았을 때… 마침 꽃들이 모두 피어났을 무렵 도착했던 것이었어.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해주지도 못했지… 시간이 너무 조금 남아서…

용서해 주게. 추억에 젖으려는 생각은 아니었어. 우리는 합리를 따르는 역할일 테지?

우리 모두는 혹독한 진실을 인정해야만 하네. A6K는 우리가 지금까지 찾아낸 것 중 진정한 평행현실에 가장 가까운 것이야. 여기 앉아서 저들을 규탄할 수는 있으나, 사실은 변하지 않아. 우리와 이만큼이나 비슷한 이들을 찾아낸 것은 처음이라는 점. 우리는 어둠 속에서 떨쳐 일어나, 함께 고난을 극복해 왔네. 저들도 똑같이 할 수 없으리라 누가 말할 수 있겠나? 저들은 우리와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있어. 언젠가는 저들이 우리조차 뛰어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승리를 우리가 쥐여주어서는 안 돼.

저들 스스로 움켜쥐어야 해.

재단반대표를 던지겠네.

6 - 7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을 달지.

통로를 닫되, 완전히 닫지는 않는 거야.

여기서 A6K를 지켜보며, 저들 스스로 우리를 찾게 하세. 그리고 그때가 오면, 우리는 저들을 안전 확보도, 격리도, 보호도 없이 맞이하세.

저들이 빛으로 발을 내디딜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가 여기 있을 것이야.

투표에 부치도록 할까.

장소: 도쿄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 번 그 옥상 위로 돌아왔다. 내 실험실 가운도 의자 등받이에 걸린 채 같이 나타났다. 나는 의자에게 두 번 감사 인사를 하고, 오늘 정말 일을 잘해 주었다고 칭찬했다. 의자는 기쁜 듯이 작게 달그락거렸다.

프림로즈는 내가 처음 발견한 곳에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내게서 등을 돌린 채였다. 나는 걸어가서 프림로즈 옆에 서서 두 번째 일출을 지켜보았다. 태양이 거대한 덩굴들과 눈을 의심하게 하는 건축물의 선명한 녹색과 세련된 흰색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어떻게 아이비를 저렇게 크게 길렀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묻지 않기로 했다. 알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장대한 광경이었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프림로즈: 그렇게 아슬아슬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나는 프림로즈를 바라보았다.

프림로즈: 투표 말이야. 구호단은 당연히 편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지. 그자들은 무력한 이들을 돕길 좋아하고, 너희 세계는 무력 그 자체니까.

캐스피언: 프림로즈-

프림로즈: 정점도 비슷했어. 내 표도 영향이 있었을 테니까. 거기다 견(犬)과 학회는 무엇보다 포용주의기도 하고 - 그런데 그놈의 양서류 무리는 가끔 가다 그렇게 보수주의자처럼 굴어서 탈이야!

캐스피언: 프림로즈…

프림로즈: 숲의 사람들이 어느 쪽에 투표할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지. 항상 그래. 밤의 주민들 표도 정말 의외였어, 너희 인간들이 그들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하면… 그건 그렇다 치고 공동체는 무슨 헛소리를 한 거야!? 너 그 작자 말을 뭐 하나 알아듣긴-

캐스피언: 있잖아, 프림로즈.

프림로즈는 말을 멈추었지만, 나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이 세계에서 고양이가 어떤 식으로 감정표현을 하는지 많이 배워 온 나로서도 프림로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기분일지 짐작할 수는 있었다.

캐스피언: 오늘 고마웠어.

프림로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캐스피언: 그리고, 음… 억지로 고양이를 가방에서 꺼내게 만든 것도2- 아, 미안, 이것도 고양이 전용 숙어야?

프림로즈: 써도 돼…

캐스피언: (…) 당신네 세상은 이상하지만, 정말 아름다워, 프림로즈.

프림로즈: 네 세상이 될 수도 있어. 원한다면.

그러자 내가 조용해질 차례였다. 나는 하늘이 흐릿한 주황색에서 창백하고 희망적인 푸른색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프림로즈: 그러니까- A6K를 봉쇄하고 나면 너를 다시 빼내올 방법은 없지만, 너희 세계로 돌려보내야만 하는 이유도 없단 말이야! 편람회한테는 내가 그럴듯한 핑계를 지어낼 수 있어, 장기 다문화 차원간… 양자가 어쩌고- 아으! 나중에 생각할래! 너희네 SCP 인간들이 걱정되면 대신 보낼 걸로 클론이나, 안드로이드나 - 아니면! 최근에 네팔에서 인간을 흉내내는 렌틸 기반 생명체를 발견한 게 있거든! 하루종일 침 흘리고 휘청거리면서 걸어다니는 게 전부지만, 너희네 멍청한 현실이 눈치나 챌까!

나는 그냥 미약한 미소를 지었다. 프림로즈의 말은 이내 낮은 중얼거림으로 변했고, 내가 고개를 돌려 다시 바라보았을 때 프림로즈는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캐스피언: 정말 인생 최고의 날이었어.

프림로즈: (…) 일러바치진 않을 거지? 상사들한테 말이야.

캐스피언: SCP 재단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 대신할 걸 꾸며내 볼게… 근데 생각해 보니까, 이런 이야기를 즐길 만한 사람이 딱 한 명 있긴 해. 항상 멋진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비밀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야.

프림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실험실 가운에 손을 찔러넣었다. 거창한 팡파레나 작별 인사 없이도, 갈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가기 전에 나는 프림로즈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청했다.

프림로즈는 궁시렁거렸지만 허락해 주었다.

나는 프림로즈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대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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