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P-RE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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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방에서 수많은 모니터 스크린들이 파리한 얼굴 하나에 빛을 비췄다. 지난 몇 달을 태양이 로저 리틀Roger Little에게 선물해 준 것보다 더 많은 색깔들이 비디오 피드에서 녹슨 갈색 빛으로 쏟아져 나왔다. 500미터 북쪽, 200미터 아래에서 자동 감시 드론이 부식된 금속 복도들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컴퓨터의 끽끽 소리, 냉각팬의 위잉 소리를 빼고 방 안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로저는 볼륨을 만지작거려 보다가 시스템 오디오를 점검해 보았다. 드론이 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신음소리도 삐걱임도 비명소리도 없었다. 드론의 부드러운 다닥다닥 소리뿐이었다.

로저는 시간을 살폈다. 지금쯤 벌써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었다. 로저는 가는눈을 찌푸리고 화면을 노려보다가 드론을 그 자리에 멈췄다. 녹슨 금속 부스러기만이, 역시 녹슨 벽이며 천장에서 부서져 나와 마찬가지로 녹슨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몇 분을 더 뒤져본 뒤에 로저는 양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조그만 금속 책상에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고, 몇 번 심호흡했다. 손을 뻗어 작업공간 한구석의 큼지막한 플라스틱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몇 초 있다가 저쪽이 전화를 받았다.

"부장님? 감시 담당 로저 리틀입니다.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우주 차가운 곳에서 인공위성 하나가 10년 넘게 수행한 임무를 계속하고 있었다. 인공위성은 여린 지구 중력을 버티며, 떠도는 한 남자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성이 지켜보던 남자의 지금 행동은 평소하고는 훨씬 달랐다. 남자는 달렸다. 찜통더위로 가득한 한여름의 미국 남서부에서, 그슬어 가는 땅 위에서, 쨍쨍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에서, 행방불명 씨는 달리고 있었다.

그 뒤를 또 다른, 불타는 듯 빨간 머리의 남자가 쫓았다. 단추 끄른 까만 재킷이 불이 드리우는 그림자처럼 펄럭였다. 재킷의 붉은 장식이 머리카락에 견주어 흐리멍덩해 보였다. 남자는 행방불명과 점점 더 가까워졌다. 행방불명은 연거푸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수였다. 한 번 흘겨볼 때마다 빨간 머리 남자가 더 빨라 보였다.

둘은 결국 부딪혔다. 행방불명은 땅바닥에 엎드러져 굴렀다. 그러다 다시 기어가기 시작했다. 두 번째 남자가 그 모습을 바로 가까이서 지켜봤다. 남자는 옷을 툭툭 털고 기다리다가 행방불명을 다시 쫓아갔다. 잠깐 동안 바로 뒤에 붙어 걸어갔다. 행방불명이 다시 일어나려 하자, 남자는 자기 목표물을 다시 걷어차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이 행동이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가 빨간 머리 남자는, 초록 후드를 입은 채로 널브러진 남자를 틀어잡고 반대 방향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렇게 움직이던 둘 앞에 세 번째 남자가 있었다. 바위 튀어나온 곳에 앉은 남자의 몸 온 구석에 피와 녹이 달라붙어 있었다. 자기 딴에는 매우 힘든 일인 듯이 남자가 일어서서, 두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쓰러졌다.

빨간 남자는 녹슨 남자를 셔츠로 움켜잡고 어깨 위로 끌어올렸다. 빠르지만 매몰찬 움직임이었다. 그러는 동안 행방불명 씨는 다른 손에 꼭 붙잡혀 있었다. 만족한 듯 한숨을 내쉰 빨간 남자는 동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O5 감독관이 반질반질한 책상에다 불붙이지 않은 시가를 앞뒤로 굴렸다. 앞에 있는 모니터에서 비디오 피드가 끝났다. 모니터 너머에 비서가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비서가 그의 클립보드를 힐끔 쳐다봤다. "지금 보신 것처럼 불명의 인간형 개체가 2933920을 탈취했습니다. 여러 소스로 추가 감시하는 바에 따르면 개체는 이제 어떤 재단 시설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감독관이 느직하게 시가를 튀겼다. 시가가 빙글 돌아갔다. "전후사정을 보아하니 개체가 누구인지 바로 추측이 가겠다는 생각이 드네만?"

"해당 개체는 재단이 완전 격리하지 못한 리틀 미스터 변칙개체 셋 중에 둘을 공격했고, 개체의 목적지는 나머지 열일곱을 격리하는 기지로 보입니다. 이 사실을 전반적 외양과 함께 고려하면, 그렇습니다. 그 리스트의 일련번호 14번, 정리정돈 씨(Mr. Redd)입니다."

"해당 기지를 봉쇄하게. 정리정돈이 무슨 능력이 있을지는 알 수가 없어. 2933-1을 유유히 탈출하고 920을 한달음에 백 마일 넘게 나르는데, 멀쩡한 시설 한가운데서 그 능력을 직접 알아보고 싶진 않아."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자리로 떠났다. 혼자 남은 감독관은 시가를 손가락 사이에 끼어들고 휘휘 돌렸다. 그리고 방금 받았던 비디오를 다시 틀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비서가 다시 들어왔다가, 잠시 후 새로 도장 찍은 문서 하나를 가지고 돌아갔다. 다시 혼자 남은 O5-4는 책상 위의 은색 라이터를 슬쩍 집어올렸다. 라이터가 몇 번 찰칵거리다가 불이 붙었다.


모니터가 가득 들어찬 방에 여러 명이 앉아 있었다. 모니터는 앞서 말한 것, 그냥 원칙상 거기 있던 개인의 의무 같은 것하고는 사뭇 다른 모니터였다. 문에다 당당히도 쓰인 "제██1기지 경비실"이란 글자만 봐도 알겠지만, 이곳은 한 재단 기지의 경비실이다. 주의 깊은 사람들로 가득 차고, 거의 모든 통로의 라이브 피드가 나오는 곳이다. 여러 격리실들의 피드도 해당 격리실 담당팀이 전달하는 동안 스트리밍할 수도 있었다.

주의 깊은 한 여성 직원이, 자기 자리에서 이미 완벽한 자세를 더 완벽하도록 다시 고쳤다. 눈을 부릅뜨고 시설 깊은 곳의 카메라 피드가 나오는 모니터에 눈을 맞췄다. 어떤 출입구에서도 충분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화면에 세 남자가 있었다. 검고 빨간 재킷을 걸친 첫째 남자, 금속이 덕지덕지 붙은 둘째 남자, 녹색 후드를 입은 셋째 남자가 있었다. 첫째는 둘째를 떠메고 셋째를 질질 끌며 움직였다. 둘째는 녹슨 태엽장치처럼 그르륵, 끽끽 하는 소리를 냈고, 셋째는 의식을 잃은 듯한 와중에도 기어서 도망치려고 몸을 꿈틀댔다.

직원은 의아해했다. 봉쇄한 기지에 어떻게들 도착했을까. 기별 같은 것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직원은 최대한 빨리 상사를 불러세워 자신이 뭘 봤는지 설명했다. 그러나 직원이 남자가 있던 곳을 비추던 모니터를 가리켰을 때, 셋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동을 감시하던 다른 동료 직원이 세 남자의 출현을 보고했다.

사건이 일어난 모니터로 온 관심이 쏠렸을 때쯤 셋의 모습은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추가 검사 결과 셋은 감시망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O5-4가 한 손으로 싸구려 시가를 꺼내들고 다른 한 손 엄지로 모니터의 버튼을 꾹 눌렀다. 띵, 하면서 통통하고 눈매 날카로운 여성이 화면에 나타났다.

O5가 담배연기를 푸욱 내뿜고는 자세를 고쳐 앉고 또구나 하듯이 깍지를 꼈다. 호출만 하면 항상 이 똑같은 실루엣이 나타났다. "지칸Dziekan. 별일 없었으면 좋겠네만."

기지 관리자 지칸이 몸을 바스댔다. 평소치고는 움직임이 덜했지만. "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리정돈이 무슨 수를 썼는지 행방불명과 무서움을 데리고 기지로 침투했습니다. 게다가 시설 어떤 곳에서 비디오 메시지까지 방송했습니다. 안에서 요구사항을 내걸었습니다."

침묵. 상사가 내리친 그 무거운 분위기에 지칸이 움직임을 멈췄다. 몇 초 뒤 O5-4가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말했다. "시설 어떤 곳에서?"

"아. 예. 어떤 구역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의료구역인 것 같은데 제가 아는 구역은 확실히 아닙니다. 배가 부푼 소녀와 같이 있습니다. 정리정돈이 캐서린(Katherine)이라고 부르던데, 아무 기록에도 그런 이름의 개체가 없습니다."

캐서린. 이름이 감독관의 가슴을 꽉 내리눌렀다. 진정하려고 천천히, 깊이 숨을 쉬었지만 한 번씩마다 들이쉬기가 더 힘들어졌다. 손이 펄쩍 움직여 시가 케이스를 열었다. 라이터가 한 번만에 불꽃을 튀겼다. O5-4가 담배를 쭈욱 빨았다. 연기를 다시 뿜을 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했다. 그러나 아직 즐길 수 있다면 즐겨 보자고 결심했다. 세상에 어떻게 정리정돈이 231을 아는—

"O5-4님? 계십니까?"

O5-4가 멍한 상태에서 정신을 약간 차렸다. "지칸. 그렇지. 그래. 요구사항이 뭔가?"

"O5님께서 혼자 와서 자신을 만나지 않으면 소녀를 죽이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한 모금. 시가의 절반을 담뱃재로 만들고야 O5-4가 입을 뗐다. "그리고?"

"그것밖에 없습니다. 직접 찾아오시라는 것밖에."

O5-4가 시가를 든 손을 바라봤다. 손이 부들거렸다. 시가 연기가 갈지자를 그렸다. "그래서 뭐라고 했나?"

"말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프로토콜에 어긋난다, 함부로 주선할 만한 일이 못 된다, 그런 말은 안 했나?"

"상황을 볼 때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O5-4가 담배를 마저 빨았다. "내일 우리 둘 다 살았다면 내가 자네 봉급 올려주겠다 하더라고 말하게."

"예?"

O5-4가 연결을 끊었다.


삐걱, 문 하나가 열리자 문 또 하나가 나타났다. O5-4가 발걸음을 내딛자, 앞에 벽에 기대 앉아 팔에 링거를 꽂은 남자가 있었다. 무서움 씨가 O5-4를 올려다보고 얇은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입꼬리가 움직이면서 입가에서 녹과 피가 후두둑 바스러져 나왔다. 둘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O5-4는 무서움 씨를 지나쳐 계속 가려다, 모르핀 백에 잠깐 눈이 갔다. 그리고 둘째 문을 지났다. 녹슬어 열린 문이었다.

O5-4는 복도를 뛰어내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발걸음을 조금 재촉했다. 발 내딛은 타일들이 바지직 갈라졌다. 열어 둔 쌍여닫이문까지 왔을 때 녹슬어 가는 경첩이 보였다. 문 옆의 명판에는 "일: 1-7 ㄷㅂ: 케ㅡ"라는 글씨만이 보였다.

방 안의 기계류에 녹이 달라붙기 시작했지만, SCP-231-7의 방 안을 담당하는 비디오 피드는 아직 작동했다. O5-4는 정신을 가다듬고 화면을 들여다봤다.

소녀가 병원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있었다. 임신한 배를 수술가운이 덮은 모습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소녀는 꽤나 평온해 보였다. 평소 같은 상황에서 기분을 해칠 요소가 별로 없기야 했지만.

침대 옆에 빨간 조끼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재킷은 언제 벗어뒀는지 의자 등받이에 걸친 채로 있었다. 남자의 한 손은 바닥에 엎드린 다른 남자의 발목을 붙들었다. 바닥의 남자는 녹슬어 가면서 아직도 기어가려고 꿈틀댔다. 빨간 조끼 남자의 다른 손에는 아동용 도서가 있었다.

방 안의 소리는 행방불명이 썩어 가는 타일 위에서 꿈틀거리면서 몸이 녹슬어 가며 내는 신음소리, 그리고 정리정돈이 따스하게 책 읽는 소리뿐이었다.

O5-4는 인터컴을 발견하고 버튼을 눌렀다. 시스템이 켜지자 빼애액 하는 소리에 캐서린이 움찔했다. 갑자기 난 소음에 정리정돈이 고개를 쳐올렸다.

"좋아, 정리정돈 씨. 내가 왔네."

정리정돈이 행방불명을 붙잡은 손을 놓고, 천천히 자리의 재킷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책갈피에 끼우고 책을 덮어 침대 위에 놓았다. 그리고 카메라를 쳐다봤다. O5-4는 정리정돈의 피부에 달라붙은 갈색 검은색 조각들, 그 사이로 빨간 번갯불이 비어지며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나는 모습을 보았다.

정리정돈이 씩 웃었다. "그 '미스터' 이름 격식 굳이 매달리진 말지. 여기서 우린 모두 친구니까. 내 이름은 정리정돈 괄호 열고 단종 괄호 닫고야. 친구들끼리는 그냥 정리정돈이라 하고. 그래 거기 사(Four)님은 어이 지내신가?"

O5-4가 예상치 못한 친절한 어조였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행방불명이 문에 부딪치는 소리만이 났다. 정리정돈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카메라로 손을 흔들었다. O5-4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잘 지내네, 정리정돈. 당신이 최근에 문제들을 허다하게 일으키네만. 그래, 원하는 게 뭔가?"

정리정돈이 연극적으로 어깨를 으쓱하고 손바닥을 펼쳤다. "그건 미안하군. 그래도 아까 보낸 비디오가 내 말은 잘 전달해 줬나 봐. 얼굴이나 한번 보지. 둘이 직접. 카메라 안 되고, 안내방송 안 돼. 속임수 안 되고, 대역도 안 돼."

정리정돈 손에 저거 칼인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겠지. 빛이 이상해서 그렇게 보였겠지. 영상이 이상해서.

"그 전에 질문 하나 하겠네. 여기까진 대체 어떻게 왔나?"

"걸어왔지."

"기지는 봉쇄 중이었고, 우리는 행방불명 씨를 추적하는 위성까지 있었는데도 당신은 그 모든 걸음이 거의 감시에 걸리지 않았어. 또 당신은 이 동의 정체를 알 뿐만 아니라 어떻게 들어오는지까지 다 알았지."

"말하잖아, 걸어왔다고. 어떻게 했냐가 질문이면 무슨 내부 소식통이라 치시고. 이제 들어오기나 하시지."

힐끔, 또다시 정리정돈의 손바닥 검은 것으로 눈이 갔다. 아니야, 방 조명이 장난쳐서 그림자가 삐쭉거린 거라니까.

O5-4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이끌고 방폭문을 열었다. 행방불명이 바로 뛰쳐나왔다. 몸을 샥 비켜서자 행방불명이 O5-4를 지나쳐 도망갔다. 복도를 내달리는 리틀 미스터를 잠깐 구경한 O5-4는 방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살균제 냄새와 라일락 향기가 났다. 침대 옆에 조그만 방향제가 있었다. 정리정돈을 바라보자 심장이 더 세차게 두근거렸다. 소녀가 손을 흔들어줬을 때 O5-4는 주먹을 꾸욱 부르쥐었다.

정리정돈이 침대 건너편의 안락의자로 손짓했다. 둘이 모두 자리에 앉자, 정리정돈이 손을 오므려 모으고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정리정돈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그날이 왔군. 결착의 그날이. 자유의 맛에 흠뻑 젖은 이 오랜 형기 끝에 찾아온 짧은 순간. 그 자리엔 얼마나 오래 앉아 계셨나?"

감독관은 입을 열지 않았다.

정리정돈이 미소지었다. O5-4는 저 옆의 램프가 살짝 핏빛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정리정돈이 또 말했다. "내가, 리틀 미스터가 된 지… 얼마더라, 20년은 됐을까? 뭐 어쨌든 오래 됐지. 그 동안 내가 참 힘들었다, 그 이야기부터 해 주고 싶어."

정리정돈이 손에 든 단도를 내려다봤다. 이제 정말 칼이었다. 무슨 경배하는 것처럼 칼을 치켜들었다가, 그 그림자를 목구멍에 푹 꽂았다. 매우 깊이 꽂았는지 기도가 드러나 휘파람 소리가 가볍게 났다. 붉은 것이 셔츠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상한 데로 달라붙어, 이윽고 룬 문자를 그렸다. 감독관의 기억 가장 끄트머리에 자리하던 문자들이었다. 번갯불이 파직 나타나 벤 곳을 찔러 들어갔다. 피가 속으로 흘러들고 빨간 불꽃들이 일어나며 상처들이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후우, 리틀 미스터가 또 한 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빠져나올 일은 없지. 내보내 주지 않을 테니까. 나 같은 추잡한 공이 계속 돌아가는 한은 내가 이런 채로 남겠지. 변치 않고. 죽지도 않고. 감정도 없이, 다만 오직 이 눈부신 분노뿐."

정리정돈이 또 미소지었다. "하지만 내가 돌아가기를 중지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걸 그만둘 수 있다면? 상처 입는 걸 멈출 수 있다면? 시도라도 하기는 해 봐야겠지?"

"그런 목적이라면 뭐 하려고 날 부른 건가? 나머지 둘은 왜 끌고 오고?"

정리정돈은 무아지경 속에서 깨어났다. "자, 이것 좀 받으시지." 그러고는 책갈피에 끼워 둔 종이를 꺼내 펼쳐서 O5-4에게 넘겨주었다.

O5-4가 목록을 쳐다보았다. 한 줄이, 눈을 사로잡았다.

14. 정리정돈 씨 (단종) ✔

그는 눈에 초점 없이, 멍하니 잠시 선 채로 있었다. 정신 한구석의 스무 번째 자리가 메꿔졌다. 그가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손을 뻗었다. 몸을 지탱할 지팡이가 나오기라도 할 듯이. 잠시 후 그가 다시 균형을 잡고 오른손을 살펴보고, 왼손을 살펴보고, 손을 펴고 쥐어 보았다. 그는 등을 펴고 방을 둘러보았다.

O5-4의 이전 몸이 숨을 들이쉬었다.

수집가 씨가 그 숨을 내쉬었다.

수집가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빳빳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작은 주머니에서 나왔는데도 종이는 구김 하나 없었다.

수집가는 싱긋 웃었다. 엄지와 중지로 잡아든 종이를 탁 쳤다. 그러자 양피지 주위로 거품 하나가 생겨났다. 손바닥 바로 위에 뜬 채로 있던 거품은 톡 건드리자 튕겨 올라갔다. 수집가가 거품 위를 가볍게 쓰다듬자, 거품은 슉 쪼그라들어 사라졌다. 나중에 또 꺼내 쓰도록.

"기분이 어떠시지?" 자리에서 정리정돈이 물었다.

"지난 몇 년 이래로 최고란다." 수집가가 대답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정리정돈이 일어섰다. 눈을 찌푸렸다. "너는 어떠니?"

"너—!" 정리정돈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손에 칼을 든 채로.

수집가는 칼에다 거품 하나를 던졌다. 거품은 칼을 감싸더니 정리정돈이 휘두르는 손 밖으로 쏙 빠져나왔다. 정리정돈은 소매에서 칼 또 하나를 꺼내 던졌다. 그러나 또 다른 거품에 잡혀 버렸다. 얼굴을 붉힌 정리정돈은 주먹을 날렸다. 날아가는 동안에 손바닥에서 단검이 생겨났다. 수집가는 주먹을 탁 잡았다. 부드러운 거품이 그 손을 감쌌다. 정리정돈은 손을 잡아당기고 비틀어 빼내려고 몸부림쳤다. 세 번째 그림자 칼을 손에서 놓아주고야, 그 손은 겨우 빠져나왔다.

"어떻게?!" 정리정돈이 거칠게 물었다. "넌 죽었어야 했어! 그 여자는 네가 죽었다고 했다고!"

"아마도 죽었겠지. 네가 말하는 나는 한낱 복사본이란다. 건망증 씨가 내 이전 몸에서 '나'를 지우기 전에 만들었지. 그 뒤에 아이제아 크로포드(Isiah Crawford)의 몸에 남은 건 바로 원더테인먼트 박사야. 내 취향엔 조금 너무 공장스러운 느낌이 섞였다 싶지만. 내가 실재가 아니라 상상 속의 존재라서 건망증이 이 기억까지는 영향을 못 끼쳤나 보구나. 화남 씨를 기억하니?"

"화남은 무슨 그지같은— 우리가 모두가 그저 시험대상이었다고? 망할 훈련장이었어?"

"전부는 아니란다." 수집가 씨, 구칭(舊稱) 원더테인먼트 박사가 미소를 지었다. 옛날의 무지갯빛 홍조는 없었지만 빛이 나기는 매한가지였다. "건망증이랑 줄무늬는 내 종적을 감추려고, 줄무늬 동생은 너희 모두를 여기 모으려고 생겨났지…" 수집가의 미소가 가셨다. "…무서움까지. 으흠. 사실 이 수집가라는 컨셉은 프로젝트 개발 과정 중에 꽤나 늦게 만들어졌단다. 주로 여러 가지들이 다들 어떻게 되어 가나를 보고 싶었지. 이사벨은 어떻게 지내니?"

리정돈이 수집가를 쏘아봤다. "그럼 난 왜 만들었지?"

노인은 아주 자기 것은 아닌 눈을 찌푸렸다. "흐흠. 너는 도박이었던 것 같구나. 물론 내가 오류를 심각하게 저질렀지— 그런 말도 있잖니, 항상 검은색에 걸라는."

정리정돈이 수집가의 멱살을 들었다. "이게 망할 장난이라고 생각해? 내가 어떻게 웃기는 존재라고?"

"그건 아니란다. 사과하마, 분위기 띄울 겸 농담해 봤어. 하고 싶은 말이 뭐니? 네가 결함이란 것? 내가 상상한 만큼보다 훨씬 더 살벌한 힘을 뭉쳐서 어떤 젊은 남자의 정맥에 주입했다는 것? 난 널 바꾸려고 시도해 봤지만, 넌 시도를 받아들이지 못했지. 그래서 정리정돈 네가 생겨났단다."

정리정돈이 손을 놓았다. 표정이 싹 사라진 얼굴이었다. "그럼 난 실수였군."

수집가가 넥타이를 바로잡았다. "그보단 이렇게 말하고 싶구나… 불행한 깜짝 선물이라고. 하지만 깜짝 선물을 안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니?"

"하…" 정리정돈이 뒤로 휘청거리며 미소지었다. 몇 초가 지나 얼굴이 다시 움직였다. "네게 깜짝 선물을 내가 보여주지."

"그게 뭐니?"

정리정돈의 입꼬리는 벌써 수집가의 거품 속 칼만큼이나 날카로웠다. "아직 비밀이야, 사랑하는 아버지. 깜짝 선물인데 스포일러하면 안 되지."

정리정돈은 침대 옆으로 게걸음쳐 다가가서는 소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캐서린도 정리정돈을 올려다보고 미소지었다. 시선이 이따금 다른 미스터 쪽으로 살짝 움직이면서. 정리정돈이 침대에 앉았다. 앉는 진동 때문이 책이 튀어올라 침대 밖으로 떨어졌다. 정리정돈이 싱긋 웃더니 몸을 구부려 책을 주웠다.

정리정돈은 책을 침대 가운데에 놓았다. 그리고 책 표지에 손가락으로 굽은 칼 하나를 그렸다. 손끝에서 빨간 불꽃이 튀어나오면서 무기가 그려졌다. 그림이 모두 그려지자, 빨간빛이 깜박이더니 칼 그림이 검은색으로 가득 찼다. 정리정돈은 책에서 칼을 카드놀이할 때처럼 슬쩍 들어올려서는 그 칼을 수집가에게 보였다. 칼날이 수집가 쪽을 보도록 칼을 돌리자, 칼은 빛이 깜박이는 성긴 검은 선 하나처럼 보였다.

"준비됐니?" 정리정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캐서린에게 물었다.

캐서린이 몇 번 심호흡했다. "정말 할 수 있어요? '그'가 다치면 안돼요."

정리정돈이 칼을 한 손으로 팽그르 돌리고는 다른 손으로 캐서린의 머리를 빗어주었다. "저들이 '그'를 가둬놓고 자물쇠를 채웠다 말하지만, 내가 마침 열쇠를 찾아냈단다."

캐서린이 떨리는 손으로 옷을 걷어올리자 배가 드러났다. 칙칙한 피부에 찍힌 낙인들이 빤히 보였다. 정리정돈이 낙인을 만지자 석탄처럼 바스슥 갈라졌다. 캐서린은 반듯이 눕고 눈을 꾹 감았다.

일그러진 메스가 캐서린 속으로 슥 들어갔다. 칼날이 너무 얇아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그러나 정리정돈이 배를 가르기 시작하자 캐서린은 비명을 질렀다. 피부의 룬 문자를 칼이 가르자, 지글거리는 소리가 나며 증기가 피어올랐다. 소녀 안에서 빨갛고 보랏빛인 것이 고동치고 몸부림치고, 자궁이 짓이겨지고 부풀었다. 배가 우그러지고 쩍쩍거렸고, 캐서린의 비명은 고통스런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그러는 동안에 수집가는 침대 발치에 인상 깊어하듯이 선 채로 있었다. 그만큼 안 좋은 걸 숱하게 보았고, 그보다 안 좋은 걸 일으켜 봤지만, 달콤을 생각하며 죄책감 한 조각이 수집가를 찔러 왔다. 자신이 달콤을 찾았을 때 자신한테 말 한 마디 해 주면 좋으련만. 정리정돈이 헛기침을 하자, 수집가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피투성이로 열어진 수라장 위에 떡하니 매달린 칼이 보였다.

"집중 좀 하시지, 어르신. 새 시대가 태어나려는데 좋은 구경 놓치실라. 아님, 적어도 이 시대의 죽음이랄까."

칼이 슥 떨어졌다.

내장 조직을 베지도 않고 가르지도 않고, 단검은 그저 몸속으로 가라앉았다. 얼룩덜룩 널브러진 붉은 내장 속으로 검은색이 흘러 사라졌다. 그러나 칼이 모두 삼켜지자, 밝은 빨간빛 한 점이 비쳤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캐서린에게마저도. 창자에 드리운 그림자가 빨갛게 휘저어졌다.

삽시간에 방 안이 꽉 채워졌다. 철 냄새가 느껴지고, 소리라고는 뭔가 크게 찢어지는 소리와 캐서린이 다시 지르는 비명소리뿐이 들리지 않았다. 저무는 태양빛을 띠고 굳어진 살이 피와 태반과 함께 터져나왔다. 방 안의 모든 곳에 살이 흩뿌려졌다. 벽에도, 침대 밑에도, 심지어 방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천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찢어지는 소리가 갈수록 격렬해지며 결국엔 캐서린의 흐느낌마저 삼켰다.

천장이 폭발했다. 그 위의 흙과 콘크리트가 사라지며, 그것이 치솟아올랐다. 커져 가는 팽창에 층 하나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팽창 또한 커지면서 솟아올랐다. 한 층 한 층 올라가며 무너짐은 갈수록 크기를 더했다. 그러다 마침내 제██기지는 바깥 공기를 맞았다. 먹구름을 거꾸로 된 날개 한 쌍이 헤집었다. 열한 개 입이 버걱거려 열리며 첫 숨을 들이쉬었다.

재단 인원 모두가 입을 쩍 벌리고 그 모습을 올려다봤다. 멀찍한 곳에서 뿔 왕관이 겨우 보인 민간인들 역시 공포에 질렸다. 저 밑의 의료실에 세 인물은 아직 거기 있었다. 가는 탯줄이 캐서린과 그 아들을 이었다. 정리정돈이 큭큭 웃으며 탈진한 아이에게서 나온 그 흉물을 가리켰다. 수집가는 옆머리를 톡톡 쳤다. 거품 하나가 그 자리에 생겨났다.

일곱째 아들이 목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의 무게에 구름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하늘이 찢어졌다. 공기에선 이제 피맛이 났다. '그'의 장대한 목소리를 들은 모두가 귀에서 진홍색 물질이 터져나옴을 느꼈다. 그 모두의 중앙에서 여태껏 선 채로 있던 단 한 남자만 빼고. 귀에 붙은 거품은 그 맹공에 진동하며 무지갯빛을 냈지만, 그럼에도 터지지 않았다.

"잘 보여?!" 정리정돈이 소리질렀다. 소음 때문에 아무도 못 들었지만. 정리정돈은 귀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찍어 수집가에게 보였다. "이제 끝이야! 이제 나도 끝을 맞을 거라고!"

거품이 진동을 멈췄다. 수집가는 거품을 터뜨렸다. 세상은 고요했다. 일곱째 아들의 다음 목소리를 기다리듯. 수집가는 탯줄을 손에 잡아들고는 정리정돈에게 건넸다. 정리정돈의 얼굴에 미소 한 조각이 피어올랐다. 정리정돈은 단검 또 하나를 불쑥 만들어내고는, 아무 멋들어진 의식 없이 어머니와 아이를 갈랐다.

이를 느낀 일곱째 아들이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두 번째 목소리가, 멀어버린 귀들 위에 내렸다. '그'의 곁 공기가 희미하게 빛나며 또 무지갯빛을 비추었다.

수집가가, 주홍왕의 탯줄을 만졌던 곳에 아직 있던 손을 내렸다. 무언가가 손에 달라붙은 채로 있었다. 수집가는 그 무언가를 침대 시트에 닦아냈다. 헛기침을 하고, 넥타이를 다시 가다듬었다.

잠시 후 수집가는 정리정돈에게 몸을 돌렸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띤 모습이었다. "미안하구나, 온통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도통 안 들려서 말이지. 뭐라 그랬니?"

정리정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눈을 떨었다. 희미하게 빛나는 거품에 둘러싸여 일곱째 아들이, 침대 시트의 핏자국 위에 있었다. 정리정돈이 앙상한 손바닥으로 눈을 비볐다. 뭐건 간에 눈앞을 흐리는 이 헛짓거리를 닦아내려는 듯. 그러다 손을 치웠다. 똑같은 장면이었다.

"아냐." 마침내 정리정돈이 말했다. 어느새 칼 또 하나를 들고. 정리정돈이 칼로 거품을 찔렀다. 칼날이 거품막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러고는 칼이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거품이 밀쳐낸 듯이. "아냐."

정리정돈이 갖가지 그림자 무기들로 거품을 연방 찔러대는 모습을, 수집가는 지켜봤다. 벽 뒤에 박히는 무기들이 십여 개를 넘어갈 때쯤, 정리정돈은 자기 손을 찌르더니 거품에다 주홍색 번갯불을 가져다 댔다. 거품이 빛을 받을 뿐, 아무 일도 없었다.

"아냐!" 정리정돈이 다시 말하며 수집가에게 몸을 돌렸다. "아냐."

"미안하구나, 이게 신경쓰였니?" 수집가가 말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일곱째 아들을 잡아챘다. 리틀 미스터의 손 위 구체 속에, 일곱째 아들이 도롱뇽 크기로 있었다. "제자리에 넣어두마."

영 엉뚱한 펑! 소리가 나며, 눈앞에서 정리정돈의 구원자는 사라졌다. 정리정돈은 입이 떡 벌어진 채로 여왕을 바라봤다. 캐서린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게슴츠레한 눈이었다. 숨소리가 가쁘게, 고르지 못하게 터져나왔다. 정리정돈이 이를 갈고 다시 수집가를 바라봤다.

피와 어둠으로 가득한 입으로, 정리정돈이 부르짖었다. "아냐!"

비틀거리며 정리정돈이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 움직임 없이 또 손에 칼을 든 채로. 칼은 수집가의 가슴팍으로 푹 들어갔다.

"아냐!" 정리정돈이 소리지르며 칼로 수집가의 얼굴에 피를 흩뿌렸다. 칼은 동생/아버지의 몸에서 뽑혀나오더니 잇따라 다시 찔렀다. "아니야. 아냐! 아냐!"

칼이 한 번 나올 때마다 피가 죽죽 새어나왔다. 핏방울은 공중에 머무르다가, 다른 방울들과 합쳐지더니 찰박찰박하면서 모여 떠다니는 피 거품이 되었다. 수집가의 얼굴에서 혈색이 점점 가셨다. 정리정돈의 얼굴에서 혈색이 점점 끓어올랐다.

"아냐…" 헐떡거리는 숨으로 정리정돈이 내뱉었다. 아직 칼이 들린 팔이 푹 떨어지며, 수집가의 배에 큰 자상을 남겼다. 칼은 미끄러져 녹아내려, 마지막 피구슬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피구슬 위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아냐…"

수집가/아이제아가 형/아들을 안았다. 정리정돈은 수집가가 내어준 품 안에서 흐느꼈다. 울음이 어느 정도 가시자, 수집가는 정리정돈을 다시 의자에 앉혔다. 정리정돈은 의자에 푹 늘어져 재킷을 다시 걸쳤다. 수집가가 주홍빛 구슬을 손목으로 톡 치자, 구슬은 몸 안으로 들어갔다. 방 여러 곳에 남은 그림자 무기들을 다 모아갈 때쯤, 수집가의 혈색이 돌아왔다. 움직임은 조금 느려졌지만. 수집가는 무기들을 하나씩 펑!하더니 하나만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 무기를 거품에서 꺼내, 정리정돈과 캐서린 사이의 의자 팔걸이에 올려놓았다.

"가족 상봉이 내가 바라던 모습이라고는 못하겠구나." 혼잣말처럼 수집가가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너한테 선물할 만한 상황은 되겠지."

정리정돈은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나한테 뭘 또 주겠다는 말이야?"

"준다기보다는." 수집가가 정리정돈의 이마를 톡 두드렸다. "가져간다고 하자꾸나."

정리정돈이 눈을 끔벅였다. 눈앞에 소용돌이치는 증오가 부글부글하는 광경을 지켜봤다. 수집가가 가볍게 톡 두드릴 때, 증오가 사라졌다. 정리정돈이 움찔했다. 공허가 그 자리를 채웠다. 멋진, 차분한 공허였다. 고요하고 단순한 평온함이었다.

정리정돈은 자신의 어디를 수집가가 찔렀는지 느껴졌다. "사… 사라졌어?"

"그냥 다른 데 보냈단다."

정리정돈이 의자에서 뛰쳐나오듯이 일어섰다. "저 소녀! 당신… 저놈들이 한 짓들 다 가져갈 수 있어? 원래대로 할 수 있어?"

"저네들이 잘못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단다." 수집가가 캐서린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주홍왕이 인류의 도움 없이 이 세계로 들어오려 했다면 벌써 들어오고도 남았겠지. 소녀는 주홍왕 때문에 이런 삶을 선택했단다. 내가 이 소녀한테 가져갈 무언가는 없어. 다만…"

검은 단검이 정리정돈의 손에서 빛을 받을락말락했다.

"적어도 내가 하게 해 줘." 정리정돈이 다급하게 요구했다.

"네 손에서 피를 씻어낸 이유가 다시 더럽히라고는 아니야, 정리정돈." 수집가가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몇 방울 더 흘려 봤자 무슨 문제겠니?"

정리정돈은 잠시 조용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그 이름은 그만 쓰고 싶어."

"오호?"

정리정돈이 눈을 감았다. 정리하고 정돈하려는 생각으로 붉게 넘실거리는 바다는, 이제 정결하고 정온한 파란색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정결정온이라 할래."

"정온?"

"고요하고 평온하다[靜穩]는 말이야."

갈그랑거리는 웃음을 수집가가 내뱉었다. "그러려무나. 잠깐 실례하마, 정결정온."

아주 빨랐다. 정결정온은 캐서린을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소녀를 덮어주었다.

"그럼… 이제 어떡해?" 정결정온이 물었다.

"이제 너는 재단의 조그만 상자 안에 들어가야지. 형동생들처럼." 수집가가 말했다.

"뭐? 그게 끝이야?" 정결정온이 멈춰섰다. "아니야, 불공평해, 이렇게 끝날 수는-"

수집가가 손을 척 들었다. 정결정온은 말을 멈췄다. 수집가는 천천히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자신이 모습을 가져간 그 노인처럼. "주홍왕의 브랜드한테서는 이제 빠져나왔겠지만, 원더테인먼트 브랜드한테는 아니란다. 난 재단 감독관 몸 안에 있어. 각자 맡은 역할을 연기해야지."

수집가가 다시, 아까 주머니에서 꺼냈던 종이를 들었다. 그리고 정결정온에게 넘겨주었다. 정결정온은 조심히 종이를 읽었다.

와우! 리틀 미스터를 모두 모아서 수집가 씨가 되셨군요!!

하지만 즐거움은 끝나지 않았답니다. 새 미스터 시리즈가 곧 개발이 끝나고 우리의 상속인 양의 손에 들려 찾아올 테니까요!

00. 수집가 씨 ✔
01. 카멜레온 씨
02. 머리없음 씨
03. 웃음 씨
04. 건망증 씨
05. 모양 씨
06. 비누 씨
07. 배고픔 씨
08. 황동 씨
09. 뜨거움 씨
10. 달콤 양
11. 삶 씨와 죽음 씨
12. 물고기 씨
13. 달 씨
14. 정리정돈 씨 (단종) ✔
15. 돈 씨
16. 행방불명 씨
17. 거짓말 씨
18. 화남 씨
19. 무서움 씨
20. 줄무늬 씨

깜짝 놀란 정결정온이 다시 들여다봤다.

하지만 즐거움은 끝나지 않았답니다. 새 미스터 시리즈가 곧 개발이 끝나고 우리의 상속인 양의 손에 들려 찾아올 테니까요!

정결정온이 고개를 들었다.

수집가의 미소는, 몸의 나머지 부분 전부보다 더 큰 힘으로 충만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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