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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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130미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소박한 복도 끝에 견고한 문이, 보안 장치 여럿으로 잠긴 채로 있었다. 남자는 문의 입력장치에 비밀번호 몇 개를 입력하고는 문을 열었다. 스산한 방 한가운데 정보단말기 하나, 그리고 봉투가 보였다.

시선을 느낀다. 붉은 시선을.

남자는 서둘러 손에 든 서류를 봉투에다 쑤셔넣고, 필요한 데이터를 입력한 다음 컴퓨터를 홱 닫았다. 자기 앞의 봉투를 뜯어야 할 일이 다시는 없길 바라며. 문득 남자는 자기 발밑이 젖었음을 깨달았다. 지하수가 방으로 스며들었는지 순간 불안해졌지만, 이 걱정은 기우였다. 발치에 고인 액체는 두말할 것 없이 자기가 흘린 피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다쳤겠지만 기억은 아무래도 나지 않았다. 피웅덩이를 들여다본다. 붉고 이상한 빛을 띠었다.

시선을 느낀다. 피웅덩이 속에서.

남자는 방구석으로 가 앉아 작은 파우치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안전장치를 풀고, 노리쇠를 당기고, 공이치기를 세웠다. 총구를 관자놀이에 갖다대니 금속의 차가운 감촉 덕분에 시원했다.

시선을 느낀다. 시선의 주인이 바로 그곳으로 바싹 다가왔다.

남자는 바랐다. 부디 이곳이 자신과 녀석이 영원히 잠드는 무덤이 되기를. 아무도 자신이 죽은 것 따위 모르는, 좋은 세상이 이어지기를. 남자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마지막 먹이는 사라졌다.
 


 
9월, 나는 재단 연구기지에서 어떤 개체의 실험을 감독하던 중이었다. 강화유리 칸막이 너머 옆 실험실에서 오른손 검지를 잃어버린 D계급 인원이 의료진의 손으로 실려나왔다. 몇 분 전까지 극심한 공황 상태였는데, 진정제를 투여받고 지금은 아주 얌전해졌다. 나는 D계급이 바깥으로 실려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강화유리 너머의 광경으로 눈이 돌아갔다. 하얀색을 바탕으로 한 소박한 실험실. 한쪽 벽에 크고 난잡한 글자로 기묘한 "문장" 하나가 쓰여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폐허 애호가를 자칭하는 한 동호회가 어떤 버려진 시설을 발견했을 때였다. 시설은 꽤나 새로 된 편이었지만 인기척은 없었고, 유리창 몇 장이 깨지고 파편 조각이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시설을 탐사해 보다가 기묘한 문장을 적은 종잇조각 하나를 찾았다. 그리고 이를 갖고 있던 휴대전화로 촬영한 뒤 SNS에다 "폐허에서 발견한 수수께끼의 시"라는 제목으로 사진을 올렸다.

붉은 너울 밤을 버히는 주홍빛 새여 풀을 먹어 뿌리 먹어 기를 피어라
あかしけやなげ ひいろのとりよ くさはみねはみ けをのばせ

도도이츠(都都逸) 같은 데 쓰는 것과 같은 7775조 음수율. 소리내 노래하고 싶어지는, 독특한 리듬이 있는 문장이었다.

"원인 불명의 정보재해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돌연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날뛴다"라는 사안 때문에 내가 불려나왔을 때가 그 사진이 올라간 다음날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대책팀은 피해자들의 공통점으로 미루어보아 변칙성의 발단은 이 사진이라고 추측하고, 해당 사진을 회수 및 삭제했다. 몇 차례 실험을 거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보재해의 원인은 사진 자체가 아니라 사진 속의 "문장"임을 판명해 냈다. 이런 사안에 재단 각 부문은 익숙하게 대응했고, 관계자 기억소거 처리 및 역정포 유포 이후 머지않아 재단은 이 변칙적 "문장"의 확보 및 격리를 선언했다.

며칠 뒤 나는 이 소동의 원흉인 "문장"의 연구를 맡았다. 연구라곤 하지만 개체의 성질은 소동 덕분에 일찌감치 어느 정도 밝혀진 참이었다. 소리내 읽을 때 효과가 발동하는 정보재해. 조사할 필요가 있는 구석이라면 변칙성을 일으키는 자세한 조건, 예외로 발생하는 패턴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 덕분에 크게 문제없이 실험은 순조롭게 나아갔다. 그날까지는.

다시 돌아가서. 나는 관찰실에서 나와서, 유리 너머로 보던 옆의 실험실로 들어갔다. 벽에 쓴 "문장"을 가까이서 보니 그 존재감이 더욱 섬뜩하다. 실험실에는 벌써 연구원 한 명이 들어와서 실험보고서에 쓸 사진을 찍는 참이었다.

"끔찍한 광경이네요."

카메라를 든 채로 연구원이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자기 손가락을 물어뜯어 잘라내고 그 피로 글자를 쓰다니. 그만큼이나 무서운 내용일까요, 새한테 계속 잡아먹힌다는 저 환각이."

이 문장의 변칙성 중에 하나가 "소리내 읽으면 환각세계에 빠진다"였다. 피험자의 말로는 그 세계는 온통 다 붉은 황야가 펼쳐진 곳인데, 거기서 거대한 붉은 새가 나타나 자기를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잡아먹는다고 한다.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이야기다. 하지만 말했을 때나 그럴 뿐. 그런다고 세상이 멸망하거나 하지도 않으니 별것도 아니었다. 이곳 재단은 원래 그런 식으로 판단을 내리는 곳이고.

"뭐 아무튼, 실험이나 다시 시작해야겠네요."

연구원은 한숨을 내쉬고, 그렇게 투덜거리며 실험실을 나섰다.

환각세계에 빠진 피험자는 대상과 똑같은 문장을 현실세계에서 쓰면 환각에서 깨어나게 된다. 때문에 이번 실험은 "현실세계의 피험자에게 필기구를 주지 않고 환각에 쭉 묶어두는 경우", 즉 피험자가 환각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는 목적이었다. 영원히 환각에 빠진 상태로 남는지. 아니면 다른 탈출 방법이 있는지. 혹시 예상치 못했던 다른 일이 생길는지.

하지만 막상 이번 실험은 그 답을 확인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피험자 D계급은 구속구를 우두둑 뜯어내고는 기어코 문장을 쓰고 말았다. 실험실에 필기구는 하나도 없었다. 대신 피험자는 자기 손가락을 물어뜯은 다음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로 글씨를 썼다. 감시 카메라 영상에서 벽에다 글씨를 쓰는 피험자의 모습이 보였다. 절규하면서도, 반쯤 미쳤으면서도 죽을힘으로 글씨를 써내려가는 그 모습이.

다른 직원은 벌써 나가버리고, 실험실에는 나 하나만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벽에 쓰인 "문장"에다 눈을 돌렸다. 피로 쓴 글씨는 혈액의 성분이 공기와 접촉하면서, 실험 종료 직후의 붉은색에서 어두운 갈색으로 바뀌어 갔다.

붉은 너울 밤을 버히는 주홍빛 새여 풀을 먹어 뿌리 먹어 기를 피어라

대체 무슨 뜻일까. 이 기묘한 문장은 어떤 경위로 생겨났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시선을 느꼈다.

나는 주변에 누가 있나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봤지만, 실험실에는 나 자신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강화유리 너머로도 내 쪽을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은 안 보였다.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 이쪽을 보는 듯했다.

문득 시야 가장자리에서 붉은 무언가가 언뜻 비쳤다. 눈을 돌려보니, 실험 중에 D계급이 썼던 그 "문장"이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암갈색이었던 글씨가 마치 갓 쓴 듯이, 또는 그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환한 붉은색으로 바뀌어 갔다.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기분 탓인가 하고 어설프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틀림없이 나를 인식하고 응시하는 듯했다. 어쨌거나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통신 단말기를 꺼내 다른 연구원에게 연락하려 했다. 그 순간, 내 시야를 붉은색이 집어삼켰다.
 


 

akashikeyanage.jpg
그 황야는 분명 우리 인류의 원풍경이었겠지. 녀석이 모두를 먹어들 치우고 새빨갛게 물들였을 리는 없을 테니.

 

 
 
다시 깨어났다.

지독한 두통이 엄습했다. 몸의 갖가지 부위가 몹시 아팠다. 무슨 일이 있었지? 아무래도 내가 실험실에서 쓰러진 채로 있었던 듯하다. 탈수 증상이라도 일어나서 그런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제대로 일어서기조차 힘들었다. 벽에다 손을 뻗어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때, 미끈거리는 어떤 액체가 손에 잡혔다. 손바닥을 보니 끈적이는 시뻘건 피가 한껏 묻은 모습이었다. 생생한 붉은색이었다. 그 순간, 모두 생각났다. 생각나 버리고 말았다.

그 새의 날카로운 부리가 내 배를 꿰뚫던 그 감각이. 그 예리한 발톱에다 찢기던 기억이. 그 발가락에 짓밟혀 깔아뭉개지던 고통이. 그 눈알에 비쳤던 굳어버린 내 얼굴이. 갈가리 찢어진 사지, 홱 벗겨진 살갗, 드러나 버린 뼈, 등뼈에서 축 늘어져 나온 신경, 구멍 뚫려 오므라진 내장, 경련하는 살들, 그 모두가 삼켜져 산과 효소에 녹아가던 그 상실감이. 함몰된 두개골에서 줄줄 새어나오던 뇌척수액의 온기가. 텅 빈 아랫배에 불어오던 바람의 냉기가. 공중으로 떨어지며 이상해져 버린 평형감각이. 짜부라진 관절에서 들려오던 둔탁한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피맛이. 콧속을 꽉 채우던 철 냄새가. 터져버린 내장에서 피어나오던 악취가. 빠개지는 심장이 내뿜던 그 피의 색깔이. 그렇게 수천 번을 맛본 죽음이. 머릿속을 한가득 메운 그 죽음들이. 만상을 지배한 그 죽음이. 황야를 부는 바람을 타고 들려온, 귀청 떨어지는 그 울음소리가. 어딘가 남의 일처럼까지 들리던 나 자신의 비명이. 내 사고를 전부 잠식했던 그 공포가. 설득도 교섭도 거절도 무의미한 그 불합리가. 식도 안에서 보이던 새빨간 하늘이. 내 피를 흠뻑 머금은 황야의 붉은 풀이. 노을보다 더 붉었던 그 풍경이. 그 무엇보다도 더 붉었던, 저 주홍빛 새가. 그들이 내게, 다시 생각나 버렸다.

문득, 붉은 무언가가 시야 가장자리에서 언뜻 비쳤다. 비명을 지르면서 나는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사람이 그쪽에 있었다.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엎드린 채로. 초점 흐리멍덩했던 눈을 추스르고 자세히 보니, 아무래도 실험실 사진을 찍던 그 연구원 같았다. 가까이에 카메라가 부서진 채로 떨어져 있었다. 누가 이렇게나 세게 때렸을까. 연구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이 사람은 왜 여기서 쓰러졌고? 이 사람 살아 있어? 아무것도 모르겠다. 상황을 분석할 건덕지가 없었다. 생각을 좀 해보려고 해도, 그 기억이 떠오르며 금세 생각을 흩어버린다.

기억. 그래, 이 기억이야. 이 기억만 없어진다면. 나는 생각했다. 원인은 모르지만 나는 저 "문장"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렇다면 기억소거가 효용이 있겠지. 그랬으니까 저 개체도 발견하고 나서 사후처리가 순조롭게 나아갔다, 만은.

나는 천천히 일어서려 노력했다. 이 공포 속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기억소거제가 있는 방은 실험실을 나서서 왼쪽으로 쭉 가면 나왔다. 거기까지 가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여전히 다리에는 힘이 들어갈 줄 몰랐다. 게다가 무릎이 후들거려서 발을 디디기조차 영 어려워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바닥을 기어서 움직이기로 했다. 그러다가, 땅바닥에 푹 엎드린 연구원과 눈이 마주쳤다. 생기라곤 없는, 텅 빈 눈이었다. 나는 환각 속에서 본 새의 눈이 떠올라, 공포 때문에 다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눈 또한 텅 빈 눈이었기에. 그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동안 못 움직이고 쓰러진 채로 있다가, 바닥으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쾅쿵쾅. 아무래도 한두 명이 아닌 모양이다. 이야기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아니, 이야기라기보단 일방으로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흠칫 놀랐다. 기동특무부대가 왔다고? 적어도 내가 이런 상태로 널브러졌던 참이라면,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만은 아주 분명했다. 이런 사안에 맨 먼저 대응하는 이라면 언제나 기특대였고. 나는 최대한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있어요! 도와주세요!"

목이 쉬어서 나도 아마 못 알아들었을 소리가 나왔지만, 그래도 이럭저럭 누군가의 귀에 닿은 듯하다. 이쪽으로 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곧 실험실 문이 열렸다. 문밖에 어마어마하게 장비들을 착용한 남자들이 서 있었다.

"괜찮습니까? 상황을 설명할 수 있나요?"

한 남자가 말한다. 뒤에서는 무전기로 다른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전달한다. "생존자를 확인했다" 같은 말을 하면서. 나는 지금까지 겪은 상황들을 설명하려 애썼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입을 열어도 공포감 때문에 이만 딱딱 부딪히며 아무 말도 도저히 안 나왔다. 한시라도 빨리 기억소거 처리를 해 달라는 말조차 나오지 못했다. 하다못해 내가 이렇게 된 원인이라도 알려줄 생각으로, 나는 실험실 안의 벽에 적힌 "문장"을 가리켰다. 기특대원 한 명이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역시 저것의 영향입니까?"

그랬다가, 대원은 다시 말을 이었다.

"기지 밖에 의료진이 대기 중입니다. 거기까지만 참으시면 돼요. 힘내서 갑시다."

대원은 부하 한 명에게 나를 기지 밖까지 옮겨 달라고 지시했다. "기지 밖"이란 말을 들으니, 싫은 예감이 들어맞는 듯했다. 기지 안에도 당연히 의무실이 있다. 하지만 지금 그곳이 기능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어쩌면 기지 하나 규모로 영향을 미치는 "뭔가"가 일어난 상황일지도 몰랐다. 기지 전체의 기능을 정지시킨 "뭔가"가.

상사의 지시대로 한 대원이 내가 일어나도록 도움을 주려던 때였다. 등 뒤에서 대원 한 명이, 제일 처음에 말을 걸어준 그 사람이 뭔가 혼잣말을 중얼중얼했다. 무전기를 들었던 대원이 그 사람에게 말했다.

"대장님? 무슨 일입니까?"

대장으로 불린 그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쳐다보니 대장은, 두려운 눈빛으로 벽에 쓰인 "문장"을 바라보며 "붉다, 붉다"라고 중얼거린다.

"대장님?"

나를 도와주던 대원도 말을 걸었지만, 그래도 대답은 없었다.

"대장님! 무슨 일 있습니까? 대답해주세요!"

무전기 대원이 대장의 어깨에 손을 얹은 순간이었다.

"으와아아아아아아!!"

대장은 어깨의 손을 절규하며 뿌리치고는, 그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대장님! 정신 차리세요! 대장님!"

무전기 대원이 외쳤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개체의 영향은 아닐까"라고. 기특대 대장은 움직일 줄 몰랐다. 혼수상태에 빠진 듯했다. 나를 도와주던 대원은 "죄송합니다"라고 나한테 말하고는, 나를 두고 대장 쪽으로 갔다.

이게 개체의 영향이라 해도, 어째서 대장이 그 영향에 노출됐을까? 멀리서 대원들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대장은 저 글을 소리내 읽은 적 없었다. 내가 "문장"을 가리킬 때, 대장은 "역시"라고 말했다. 그러면 기특대를 파견한 윗선은, 저 개체가 지금 일어나는 "뭔가"의 원인이라고 얼마간 추측은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기특대 대원들은 "개체를 읽으면 안 된다"라는 최소한의 지식을 사전에 전달받았을 테다. 아니, 개체를 읽지 않았다는 점은 나도 똑같다. 개체의 성질이 바뀌었나? 그럼 그 새로운 발현 조건은 뭐지?

한창 두서없이 생각하다가, 한 가지가 불현듯 떠올랐다. 개체의 또 다른 성질이. 피험자가 환각세계에 사로잡힌 사이에 일어나는 "현실세계 속의" 행동이.

환각세계에 사로잡힌 피험자가 환각 속에서 그 새한테 잡아먹힐 때, 현실세계 속 피험자는 행동이 폭주하면서 주위를 무차별 공격한다. 예전에 실험 중에 D계급을 노출시켰을 때 부상자가 몇 명씩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미친 사람은 이렇게 무섭구나, 하고 놀랐더란다. 그때 D계급은 그냥 맨몸이었는데도 그 행동을 꽉 붙잡아두는 데 몇 명이나 필요했다.

"붉은 새다. 붉은 새가 온다."

대장은 혼수상태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공포를 나는 안다. 나도 경험한 공포이기에 잘 안다. 몇 번을, 몇백 몇천 번씩 그 감각이 머릿속에 새겨졌기에 너무도 잘 안다. 그 공포는 저 새한테서 나온다. 까마득히 먼 곳에서 그 그림자를 알아차릴 때쯤이면, 이미 모두 늦은 순간이다. 저 새는 환각세계 속 대장을 포착한 참이다. 2, 3분도 되기 전에 틀림없이 저 새는 대장을 붙잡아 포식하겠지. 그리고 그때 현실세계에서는───

나는 깨달았다. 위험하다. 개체의 영향에 빠진, 눈앞에 쓰러진 사람은 기동특무부대 대원이다. 육체도 단련한데다가 또한 총이라는 강력한 무기도 가진 사람이다. 저 대장이 폭주해서 저걸 난사한다면. 적어도 나는 확실히 죽겠지. 이대로는 죽는다. 죽고 말 거야.

나는 죽을힘으로 일어났다. 후들거리는 무릎은 아직 여전했다. 그러나 여기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여기서 안 벗어나면, 이번엔 환각 속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확실히 죽어버린다. 죽음이 무엇인지는 이미 안다. 그 자아가 흩어져가는 공포는 벌써 몇천 번은 겪었다. 다시는 그런 감각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

한 대원이 나를 보고 말했다.

"조금만 더 거기서 기다려 주세요. 금방 다른 대원이 도착할 테니까 그때까지───"
 
그때였다. 대장의 손이 살짝 꿈틀거렸다. 먹혀버린 것이다. 이제는 상황을 설명해 줄 시간조차 없었다.

나는 모깃소리로 "미안해요"라고 한 마다 웅얼거렸다가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그리고 대원이 대장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바로, 절규와 총성이 들렸다. 대장이 혼수상태에서 잠깐 풀려났겠지. 나는 달렸다. 이제는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남들 보기에 내 모습은 무지 웃겼을지도 모르겠다. 탈수증이 도진데다, 힘이 안 들어가는 다리로는 도저히 땅을 박차고 달려지지가 않았다. 나는 중력에 몸을 맡겨서, 앞으로 쓰러지려 하는 상체가 내려갈 때마다 먼저 다리를 내팽개치듯이 하면서 나아갔다. 살아남으려고 죽을힘을 다 썼다. 언제 뒤에서 총탄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공포가, 온몸의 통증을 못 견디고 그 자리에 픽 쓰러지는 상황을 막아줬다.

실험동에서 나오는 통로까지 다다랐을 때, 벌렁 쓰러진 한 연구원이 보였다. 그녀의 흰옷은 검붉게 변색되고, 그 옆에는 다른 연구원이 피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옆구리에 가느다란 뭔가가, 펜 같은 물건이 꽂힌 채로. 틀림없이 나랑 같이 저 개체를 연구하던 직원들이었다. 열심히 도망치느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건물 곳곳마다 깨진 유리조각들이 흩어진 모습이 보였다. 뭔가 질질 끌린 듯한 피 자취도, 피웅덩이도 보였다. 이 이상한 광경을 멍하니 보다가, 내가 있던 방 옆의 탈의실에서 누군가 절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벽에 뭔가 부딪히는 소리, 총소리, 절규소리, 유리 깨지는 소리, 부츠 발소리, 고함소리. 주의해서 들어보면 다양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나는 달렸다. 정문으로 나가는 길은 그쪽 방향에서 총성이 들려와 포기했다. 2층에 비상구가 있었지. 거기라면 안전하게 바깥으로 도망칠 길이 돼줄지도 모른다. 나는 계단을 기어가다시피 하며 올라갔다. 그러다가, 층계참에 쓰인 낙서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붉은 너울 밤을 버히는 주홍빛 새여 풀을 먹어 뿌리 먹어 기를 피어라

그 "문장"이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이 개체는 소리내 읽지만 않으면 안전했다. 이제는 아니었다.

아무 생각도 할 겨를 없이 나는 거기서 도망쳤다.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또다시 저 세계로 끌려가 버린다면?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공포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달렸다. 달리지 않으면 저 새가 또 나를 잡아채갈 것만 같았다.

계단을 다 올라가서 모퉁이를 꺾으니, 앞에 비상구가, 밖으로 나가는 문이 드디어 보였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저기까지만 도착하면 일단 탈출이었다. 기특대 일부가 기다리겠지. 나는 이제 거의 다 빠져버린 힘을 쥐어짜 달렸다. 문까지 20미터. 10미터. 5미터… 간신히 출구까지 도착하고, 문에 손을 갖다대고, 보안 카드로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머리에 충격이 느껴졌다. 뇌가 흔들린다. 아픔보다도 먼저 의식이 아득해진다. 닫혀 가는 눈에, 탈의실 가까이서 봤던 연구원의 한 부분이 비친다. 이 사람도 역시 개체의 영향을 받았겠지. 핏발이 선 두 눈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기지 여기저기 있던 소화기로 날 친 모양이었다. 옆구리에는 여전히 뭔가 깊숙이 꽂혔지만, 그게 뭔지 보기도 전에 나는 의식을 잃고, 비상구와 지상을 잇는 계단을 굴러내려갔다.
 


 
지하 130미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소박한 복도에는 핏자국이 띄엄띄엄 묻었고, 그 끝에 견고한 문이, 보안 장치 여럿으로 잠긴 채로 있었다. 나는 문의 입력장치에 비밀번호 몇 개를 입력하고는 문을 열었다. 스산한 방 한가운데 정보단말기 하나, 그리고 봉투가, 그리고 방 한쪽에는 머리가 날아간 채로 나뒹구는 남자의 시신이 보였다.

나는 필요한 정보를 단말기에 입력하고, 정보가 뜨기를 기다렸다.

[444-out break 상황의 발동을 확인…]
[프로토콜 "분서"의 발동을 확인…]
[SCP-444-JP의 정보를 표시합니다 Thank you See you]

화면에 뜬 정보를 주욱 훑어보고, 봉투 속을 확인해본 다음, 나는 봉투를 가져왔던 서류가방에다 넣었다.

나는 방을 나온다. 거기 있던 시체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적어도, 내가 여기까지 오는 상황을 저 남자가 바라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올라타고는 통신 단말기를 꺼냈다. 몇 초도 안 돼서 상대가 응답했다. 나는 현재 밝혀진 만큼 이상의 정보는 회수한 자료에 없었던 점, 그리고 자료 맨 마지막에 시체의 주인이 적어둔 메시지를 보고했다. 몇 분 침묵이 이어졌다가, 단말기 너머 상대는 유감스럽다고 대답하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고는 통화를 끊었다.

내가 그 기지에서 탈출한 데에는 행운이 따랐다. 소화기에 얻어맞고 내가 비상계단 밑에 쓰러진 모습을, 밖에서 기다리던 기특대가 우연히도 발견했던 모양이다. 그때쯤 벌써 기지는 괴멸 상태가 되어 돌입한 대원들은 채 반도 못 남기고 연락이 끊어져 버렸다고 한다. 나를 때렸던 그 연구원은 쫓아가려고 계단을 뛰어내려가던 도중에 넘어져 숨이 끊어졌다. 갖은 우연들이 겹쳤다. 덕분에 나는 살아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지상에 도착한 듯하다. 나는 서류가방을 들고 밖으로 가는 복도를 걸었다. 발소리가 울린다. 막힌 벽에서 오른쪽으로 돌자 위장해 둔 시설 출구가 보였다. 이 시설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

바깥으로 나온다. 아직은 늦더위가 푹푹 찌는 계절이지만, 오늘은 바람도 좀 더 많고 시원하다. 조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들은 앞으로 할 일을 되새겨보면, 뭐라 말 못할 체념과도 비슷한 웃음이 터져나온다. 나는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질녘은 아직 이른 오후 한창. 구름 하나 없는 9월의 저 하늘은,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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