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평가: +8+x

ramb1da 2018/3/09 (금) 23:09:04 #5869845


내가 고등학교를 다녔을 적에 있었던 일이다.

대략 십 년도 더 전, 나는 고등학교 1학년으로서 모교에 입학했다. 나는 원체 성격이 내성적이고 남에게 정도 잘 못 붙일 뿐더러 원래 다니던 남중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남녀공학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입학한 지 네 달이 넘도록 뚜렷이 친해진 학생도 없었다. 쉬는 시간마다 하는 것이라곤 자습을 하거나, 교실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던 도중 당시 교실에서 좀 까부는 애들이 내 공책을 서랍에서 꺼내는 일이 있었다. 으레 학창 시절에 그림을 그려 봤던 이들이 그렇듯이, 내 그림을 남이 본다는 것은 (그 그림이 어떻든 간에) 퍽 수치심을 자아내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충 상황을 눈치채고 그 애들에게 공책을 돌려달라며 달려갔다. 안타깝게도 나는 또래에 비해 키도 작고 마른 편이라 영 애들의 장난에 대항하지를 못했고 결국 공책 속 그림은 전 교실 학생들이 전부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인생에서 처음 겪은, 최대의 수치였다. 나는 그 직후 교실을 뛰쳐나갔다.

ramb1da 2018/3/09 (금) 23:11:44 #5869845


도저히 급우들은 꼴도 보기 싫어, 그때부터는 항상 도서실을 찾았다. 그때도 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억지삼아 읽다보면 어느새 점심 시간은 훌쩍 지나가곤 했다. 이러기를 또 몇 주가 지나고 거의 나밖에 없던 도서실에 처음 보는 얼굴이 하나 더 생겼다. 고등학교 3학년 누나, 선배님이었다. 나는 처음 본 사람이였지만 사서 선생님과도 친근하게 대화하는 것을 보면 오랫동안 도서실을 이용하던 선배인듯 했다. 기억상으로 아주 아름다운 선배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호감이 갔다. 아마 첫인상부터. 선생님과 대화하는 명랑한 목소리며 얇은 안경테까지, 어린 나는 그 선배를 보고 꼭 드라마 여주인공을 연기하는 배우 같다고 생각했던 것도 기억난다. 나는 그 선배에게 한 번 말을 걸어보려고 부단히 노력해 보았다. 없는 잔머리를 굴리면서 온갖 수를 생각하는 것이 거의 하루 일과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말은 선배가 먼저 걸었다. 그쪽도 말없이 책만 보는 나를 신기하게 여긴 모양이였던 것 같다. 처음 선배가 말을 걸었을 때 난 책을 집중깨나 하며 읽고 있었으니, 누가 어깨를 건드리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세히 보니 선배였다. 선배는 내게 어떤 책을 좋아하냐는 등 질문을 건넸다. 다행히 나는 그런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는 수준의 책에 대한 소양은 가지고 있었으니 대화는 무리없이 이어졌다. 그날부터 나와 그 선배는 친해지기 시작했다.

ramb1da 2018/3/09 (금) 23:15:40 #5869845


우리는 점심시간마다 도서실에서 만났고, 사서 선생님이 감독하는 분위기가 허락하는 안에서 대화를 나눴다. 독서 이야기만으로는 십대 둘의 대화가 그리 잘 이어지지 못했기에, 우리들은 암묵적으로 대화 주제를 여러 번 바꾸어나갔다. 나는 선배와 내가 생각보다 잘 맞다는 것을 금세 알아냈다. 여름방학이 되자 우리는 종종 만나 놀러다니고는 했다. 영화를 본다던가, 같이 밥을 먹으러 다닌다거나. 아마 고등학교 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그때까진.

여름방학이 끝났을 무렵이었다. 선배는 거의 일주일 간 여행을 다녀와 그동안 못 보게 되었는데, 다시 만나자 선배가 전과는 영 달라져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ramb1da 2018/3/09 (금) 23:20:14 #5869845


선배의 어깨에 귀신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 매달려 있었다.

흔히 귀신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쭉 찢어진 입에 머리는 산발이 된 인간 같지 않은 무언가.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그것은 온종일 선배의 어깨에 기형적으로 매달려서는 내 쪽을 보고 있었다. 혹시 나만 보는 것일까 하고 확인해봤더니 나 이외에는 아무도 선배더러 뭐라 말하거나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은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처음에 이게 몰래카메라인가, 무슨 분장인가 하면서 도저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 전엔 귀신 비슷한 것은 한 번도 보지를 못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분명 좋지 않은 상황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넌지시 선배에게 말을 걸었다.

ramb1da 2018/3/09 (금) 23:20:14 #5869845


선배도 내가 장난을 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곧 내 표정이 진지함을 눈치챘는지, 선배의 태도도 변했다. 선배는 당황이 역력한 표정으로, 보인다는 귀신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최대한 귀신에 대해 열심히 답해주었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 그 뭔가는 얼굴 이곳저곳에 큰 상처가 났을 뿐더러 목에는 피멍이 들어서 비위가 약한 나로써는 종종 구역질을 불러일으키는 꼴이었다. 게다가 그 뭔가는, 나만 보면 입이 찢어질 듯 웃는지 우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선배의 얼굴은 내 설명을 들음에 비례해서 창백해지고 있었다. 난 선배를 걱정하면서도, 선배가 이렇게 놀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게 선배는 항상 대범하고 용감한 사람이였으니까.

그 이후 선배는 하루하루 여위어 가는 것처럼만 보였다. 갈수록 불안해했고,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는 듯 했으며 도서실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선배를 데리러 가서 같이 하교하는 것이 내 일과가 되었다.

그리고 선배는 사라졌다.

ramb1da 2018/3/09 (금) 23:26:14 #5869845


정말 갑작스러웠다. 선배는 그 다음주 월요일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나중에 듣기를, 선배는 유학을 갔다던가, 그랬다고들 했다. 나는 그날 펑펑 울었다. 나는 혼자 이 학교에 남겨진 것이고, 선배는 몸도 마음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먼 타지로 간 것이니까. 왜 내게도 알리지 않고 떠났을까… 그건 아직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까지 졸업해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 기억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던 김에, 이렇게 말해본다.

공포 영화처럼 뚜렷하지도 않은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다. 혹시 2001년 ○○고등학교 3학년 1반 5번 선배를 알고 있다면 내게 아래 이메일로 연락 바란다. — 29190441@mai1.net

m1dn1gh十 2019/10/09 (수) 23:29:44 #82965128


오랜만이야
벌써 15년이 넘었으니 말해줄 때도 된 것 같네

m1dn1gh十 2019/10/09 (수) 23:29:44 #82965128


급우 잔혹하게 살해한 십대 검거

수사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피했다 발각

……

급우를 폭행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여학생이 누리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김 모 양(18)은 급우 이 모 양(17)을 말다툼 끝에 우발적으로 폭행하였다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모 양이 사망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경찰은 부검 결과 김 모 양이 흉기를 사용해 여러 차례 피해자를 공격한 후 최소 6분간 손으로 목을 조른 것으로 보인다며, 가해자가 미리 흉기를 준비한 점 등을 고려해 범행에 가해자의 주장은……

넌 뉴스도 안 보고 사니

링크 있으니까 보고 오렴

ramb1da 2018/3/09 (금) 23:30:02 #5869845


뭐?

m1dn1gh十 2019/10/09 (수) 23:30:44 #82965128


봤지

내가 그 년 직접 못 죽인게 한이야

근데 어쩔 수 없지 그게 규칙이니까

m1dn1gh十 2019/10/09 (수) 23:30:44 #82965128


도와줬으면 고맙다는 말도 좀 해 주고 그러렴

ramb1da 2018/3/09 (금) 23:32:08 #5869845


그 선배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당신 시발 대체 뭐야

m1dn1gh十 2019/10/09 (수) 23:32:44 #82965128


걔처럼 니 선배님 되어야 했던 사람


🈲: SCP 재단의 모든 컨텐츠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합니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