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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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직거리는 라디오의 잡음이 들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까부터 라디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라디오의 윗부분을 몇 번 툭툭 쳐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하긴, 거의 10년은 된 차를 중고로 산 것이니 멀쩡하게 작동하는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내비게이션은 당연히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아까 전에 인터넷에서 검색했던 기억을 토대로 어렴풋이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24살의 작가. B급 잡지에 B급 호러 소설 단편을 연재하는 B급 작가이다. 잡지사 이곳저곳에 연재문의를 넣어봤지만, 그 중에서 내 글을 실어주겠다는 곳은 지금 내가 연재중인 곳뿐이었다. 야심차게 소설을 한두 권 내놓았지만, 예상했다시피 흥행은 대참패.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참패까진 아니고 그냥 중박은 쳤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냈던 책을 끝으로, 그 출판사에서는 더 이상 내 책을 출판해주기 어렵다고 했다. 돈이 안 되니까 그런 거겠지. 나도 내 소설이 재미없다는 건 충분히 안다.

내 이 찌질한 상황을 한 번에 타개할만한 멋진 소설을 쓰기 위해 몇날 며칠을 새며 창작활동에 몰두했지만, 내 뇌에서 나온 게 다 거기서 거기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 이거다!’ 라고 할 만한 글은 나오지 않았다. 불안감이 밀려왔다. 2년쯤 전에 “난 글로 먹고 살 거야!”라면서 집을 뛰쳐나온 뒤 지금까지 그래도 밥을 벌어먹고 살 정도는 되었는데, 그건 책 인세와 잡지 연재 고료를 합쳤을 때 얘기였고, 책의 판매량이 저조해지자 생활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교실 구석에서 글을 쓰던 때에는 나중에 나는 스타 작가가 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었는데,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그것도 엄청.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수두룩했고, 글짓기로 학교에서 상을 타며 ‘미래에 글로 먹고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해왔던 나는 어느새 어중간한 글쟁이가 되어있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자 우울감이 밀려왔다. 내가 진로를 잘못 정한 게 아닐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우울해 할 시간도 주지 않았고, 통장 잔고가 나를 압박했다. 통장에 찍혀있는 숫자가 돈을 쓸 때마다 점점 깎여나가는 게 마치 내 생명력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했지만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건 글쓰기 밖에 없었기에 뭐라도 글을 써야했다. 나는 이 우울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옛날에 빚을 내서 샀던 고물차를 이끌고 무작정 드라이브에 나선 것이었다. 바다나 산이나 그냥 뭐라도 다른 곳의 풍경을 좀 보면 이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인터넷을 보니 무진이라는 곳이 한적하고 풍경도 좋다기에 나는 목적지로 무진을 택했다.

그렇게 한참을 갔을까, 지금 내가 맞는 길로 가고 있는 건가에 대한 확신이 점점 옅어질 때쯤, 한적한 길 위에 표지판 하나가 보였다.

어서 오세요. 여기서 부터는 무진입니다.

되는대로 왔지만 그래도 길은 맞게 찾은듯하다. 무진에 들어서자, 옅은 안개가 사방에 깔려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헤드라이트를 켰지만, 별다른 소용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차의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앞으로 갔다. 창문을 살짝 열자 바다냄새가 짙게 났다. 확실히 이 근처엔 바다가 있다. 그렇게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자동차의 시동이 멈췄고 차는 가던 길에 서버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리해도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뜬금없이 멈춰버린 차 안에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 앞에 흐릿하게 표지판이 보였다.

출입을 금합니다. 미끄러워서 추락할 수 있습니다.

표지판에 출입을 금한다는 말이 오히려 나를 자극했다. 차가 고장 나서 돌아갈 길이 막막했지만, 그런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은 채 나는 표지판이 가로막고 있는 제방으로 향했다. 옅은 안개가 사방에 깔려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괜히 머릿속의 잡생각이 짙어졌다. 어릴 적부터 장애인이었던 동생에 대한 고민부터, 책만 읽어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초등학교 시절, 친구라고 믿었던 애들이 나를 구덩이에 파묻으려 했던 중학교 시절, 부모님이 이혼하고, 지금도 나를 괴롭히는 불치병에 걸렸던 고등학교 시절, 기억하기도 싫은 대학교 시절까지 잊으려고 했던 고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안개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아까와는 달리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짙은 안개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한 40분 정도를 꼬박 걸었을까. 체력이 현저히 떨어진 게 느껴졌다. 평소에 운동 좀 할걸. 나는 완전히 지쳐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아까 차를 버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이런 쓸데없는 고민들을 하지 않았으면 무진에 혼자 오지 않았을 텐데.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내 선택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는 나보다, 적어도 내 주변에선 나보다 불행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특정한 일이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없었지만, 그냥 인생이 전반적으로 불행하다. 그게 주변 환경 때문인지 내가 못났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내 인생은 불행으로 가득 차있었고, 오늘 그 리스트에 하나가 추가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글로 먹고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 안개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내 앞을 가로막던 안개가 걷히자, 내 앞에 푸른 바다가 보였다. 안개 속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푸른 바다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갑자기 나타난 바다를 보고 있자, 다시 옛날 생각이 났다. 하지만 아까 떠올랐던 우울한 기억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밝은 기억들이었다. 유치원 때 소설을 썼던 기억, 엄마가 사줬던 책을 들고 좋아하던 기억, 수첩에 글을 끼적대며 미래를 그리던 기억, 우울할 때마다 글을 쓰며 버텼던 옛날이 생각났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천천히 정리되자, 나는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 내가 글 쓰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한 거지? 어느 때 부터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마도 글을 쓰는 게 생계와 직결되면서 부터였던 것 같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니 압박감을 느꼈던 것이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했던 이유가 다시 떠오르자, 여기에 오기 전에 가졌던 고민들이 해결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바다를 보았다. 짙은 안개가 사라진 푸른 빛깔의 바다. 한참동안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던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좋은 글감이 생각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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