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솔 웃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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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겨울


광양을 향한지도 벌써 보름이 다 되어갔다.

해는 어느새 중천이였다. 간밤 세상을 덮어버릴 듯 맹렬히 내리던 눈도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쳐버렸다. 어제의 맹렬함은 어디에 숨겨두었는지 지천을 덮은 눈들은 푸근한 이불인 척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동지(冬至)는 보름 앞으로 다가왔고 무심한 태양은 늘 그러했듯이 뉘엿뉘엿 움직이고 있었다. 백강(帛鋼)은 심정이 급해 걸음을 재촉코자 하였으나 짐덩어리를 하나 달고온 덕에 그러지를 못하였다. 차라리 저것이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였으면 지게에 이고 달려가면 그만일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짐덩어리, 그러니까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은 마치 툭 치면 마른 가지 쪼개지듯 바스라질 것처럼 빈약해 보였다. 솜버선에 솜저고리 솜바지까지 솜으로 몸을 죄 두르더니 그 위에 갖옷까지 갖춰 입은데다 그것도 모자라 짐꾸러미에서 포(袍)를 하나 꺼내 칭칭 감고도 팔다리를 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으니 그 꼴이 백강은 영 못마땅했다.

사실 무리도 아닌 것이, 벽오는 이제 애년(艾年)인데다 무릎이 아프네 허리가 쑤시네 하는 말을 달고 사는 노인이였다. 산행(山行)은 아니라지만 언덕에 언덕을 거쳐 가는 길이였고 거기에 간밤에 눈까지 내려 걷기도 힘드니 이가 오죽할까. 애초에 시간이 넉넉했다면 더 편한 길을 택할 수도 있었던 터, 출발할 적 회포를 푼답시고 밍기적대며 시간을 허비한 것이 못내 아쉽게만 느껴졌다.

해가 뜬 직후부터 걷기 시작했으므로, 두 시진은 족히 걸어다녔을 것이다. 벽오가 죽을 듯 살 듯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백강 본인도 슬슬 힘이 부치던 차, 마침 큰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쉬었다 가세나.”

황동 장식이 빛나는 검지가 큰 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귀가 먹은 듯 한참 동안이나 멍하게 걷고 있던 벽오는 그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제서야’ 라고 말하는 듯한, 안도감에 찬 얼굴을 보며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멀리서 보았을 땐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상당한 고목이였다. 둘레도 장정 열댓은 와야 두를 수 있을 듯 해보였고 눈이 치워진 곳에 간간히 보이는 굵은 나무뿌리를 보니 그 연배를 짐작할 만 했다. 다만 육중한 덩치에 비해 키는 조막만한 것이 마치 누가 망치로 한대 내리쳐 눌러 놓은 것 같았다. 이 정도 나무면 수호목이니 신목이니 하며 이것저것 달려있을 법도 한데, 주변에 인가가 없어 수호목이 되기는커녕 길가던 나그네 관심이나 한두번 받으면 다행인 수준인 듯 해보였다.

백강이 나무를 보던 사이에 벽오는 나무에 쓰러지듯 기대더니, 등을 기댄채로 하체에 힘을 빼고 무릎을 굽히기 시작했다. 몸을 지탱할 하체가 무너지자 나무에 딱 붙은 등이 조금씩 아래로 미끄러지더니 결국 털석 하고 주저앉았다. 백강을 이것을 앉았다고 해야 할지 쓰러졌다고 해야 할지에 대해 잠깐 고민했다. 허나 그 고민은 결코 오래가지 못했는데, 벽오가 나무에 충돌하며 가한 충격이 나무가지를 흔들자 그 위에 앉아있던 눈이 후두둑 하며 백강의 머리 위로 낙하했기 때문이다.

졸지에 눈을 뒤집어써 때아닌 백발노인 신세가 되어버린 백강은 당황한 듯 잠시 멈춰있더니 바로 물 빠진 개처럼 몸을 좌우로 움직여 눈을 털어냈다. 허나 실상 그를 당황케 만든 것은 그를 덮친 눈이 아닌, 무릎팍에 살포시 놓여있던 웬 외간 남자의 머리통이였다.

"엉겨붙지 말아, 징그럽게."

그 말에 벽오는 손을 흔들어 장갑을 벗어던지더니,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춥단 말일세. 이 보세. 손가락이 얼어버렸다고, 이게… 끙, 굳어서 움직이질 않아. 자네는 따뜻하잖나, 잠깐 신세 좀 지겠네."

벽오는 능청스래 손을 뻗어 손목을 눈 앞에서 까딱까딱하며 미소지었다. 허나 거친 숨소리와 시퍼렇게 질린 손가락을 보니 허언은 아니였던 모양이었다.

"혹 못 쓰게 되면 내가 새로 하나 달아주겠네. 되었는가?"

소매를 걷어붙여 나무로 외장을 한 팔을 보여주며 톡 쏘았다. 벽오가 술자리에서 본 바로는 속은 쇳덩어리며 오동나무 외장에 황동으로 장식을 넣었는데, 영 정갈하지 못하고 정신 사납게 생기었다. 한소리 하려다 그의 아버지가 만들어주었다는 말을 듣고 아무말도 못하던 벽오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졸부가 사치한답시고 금칠한 싸구려 가구처럼밖에 보이지 않는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신체발부수지부모를 차차하더라도 저런 팔을 다느니 차라리 외팔이로 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허, 이 사람 무서운 소리를 하는구만 못쓸 정도는 아닐세. 아무튼간에 흰소리 말고, 광양까진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가?"

"이대로만 간다면 사흘 내에 당도할 걸세. 평시엔 나흘 넘게 잡고 가야 하니 퍽 빨리 가는 셈이다만, 문제는 자네가 보고 싶어하던 초조제도 그때 시작한다는 거지. 초조제가 시작되면 마을 문을 전부 닫으니 지금보다 더 서둘러야 할 걸세. 그리고 나는 이 말을 여섯번째 하고있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벽오는 동지가 다가올수록 더욱 초조해지기만 했다. 본인도 이미 알고 있는 날짜를 연거푸 물어보는것도 그 때문이라. 벽오가 내쉰 짧은 한숨엔 그런 걱정이 그대로 서려있었다.

"그러길래 이사람아, 내가 말 빌리자고 할때 내 말을 진즉에 들었어야지. 여기 물 있네, 자 받으라고."

"어차피 이 눈길에 말이 있어도 제대로 움직일 수는 있고? 전란때는 사람 하나 업고도 이정도는 가뿐했는데, 지금은 꼴이 말이 아니군. 이 나무 없었으면 그냥 길바닥에서 쓰러질 뻔했네그려. 허허."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나무에 완전히 기대어 축 늘어져 있는 것이 척 보기에도 벽오는 굉장히 지쳐보였다. 신체의 노화나 한계라는것을 느껴보기에도 전에 몸의 반신 이상을 기계로 갈아치웠던 백강이기에 벽오의 몸 상태에 공감할 순 없었지만, 친우가 더이상 자신과 같지 않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은 그에게도 슬픈 일이였다. 아마 그 기분은 벽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잠시동안 정적히 흘렀다.

"그러고 보니 자네, 광양에 철로 된 거목이 있다 하였지? 이 나무에 비하자면 어떠한가?"

그런 의미에서 이 발화는 그 어색함을 타파하기 위한 발화였다. 백강은 그의 배려에 감사하며 말을 이었다.

"이 나무와 비교를 감히 할 수준이 아니지. 일단 지름이 이 나무의 다섯배정도는 되네. 높이는 열배도 넘을 거고."

백강은 나무 표면의 껍질을 하나 집더니, 뜯어내 떨어트렸다.

"광양 거목도 이런식으로 껍질이 주기적으로 떨어져 나오는데, 쇳덩이다 보니까 무게가 장난 아니거든. 맞으면 즉사할 무게라 떨어지기 전에 주기적으로 떼어주는 사람들이 또 따로 있다네."

벽오는 신기하다는 듯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야기에 꽤나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었다. 고향을 떠난 이후 고향 이야기를 하는것이 오랜만이였기에 신이 난 백강이였고, 벽오는 벽오대로 손자에게 들려줄 이야기 벌었다는 생각에 더 신이 났기 때문에 한참동안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또, 나무 줄기를 잘라보면 관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얼마동안 이야기를 했을까, 백강은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

“이 사람, 잠들었구만.”

구름이 몰려온다.

차던 새벽공기의 감촉을 기억하며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를 조금 데우듯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이제 조금은 따뜻해진 공기가 폐에 녹아들었다.

지천에 깔렸던 눈도 정오의 태양을 당해내지는 못했던 듯 어느덧 조금씩 녹아내려가고 있었다. 이따끔씩 나무가지 위에 얹어진 눈들이 푸드득거리며 떨어졌다.

백강은 설피를 고쳐 신고 있던 벽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겐가? 손 잡게. 아니면 업힐텐가?"

피식하는 웃음과 함께 손을 잡고 일어났다.

"흰소리하기는. 빨리 가자고. 문이 닫히기 전에 도착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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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인 어느 겨울날 두 사람이 길바닥에 내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무릎을 끓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굉장히 아픈 표정으로 허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한 사람은 문이 이미 닫혔음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주저앉아버린 백강이였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백강의 등에 업혀있다가 백강이 주저앉음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벽오였다.

그리 높은 높이는 아니였으나 눈도 누군가가 전부 깔끔하게 치워둔 바람에 언땅에 그대로 들이박았고, 무엇보다 뜨끈한 등에 업혀 자고있던 편안히 자고있던 벽오에게 갑작스래 찾아온 고통은 격한 반응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아이고, 사람죽네. 아이고 허리야…"

평소라면 엄살부리지 말라느니 내가 기계로 잘 바꿔 줄테니 걱정 말라느니 등 핀잔을 열번도 더 넣었을 백강이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이번 초조제에 불참하는 것은 그에게 사회적인 죽음과도 같았다. 아니, 그걸로 끝나면 다행일 일이다. 무쇠 심장이 덜컥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쇠가죽을 아교로 이어붙여 만든 폐가 빠르게 부풀었다 쭈그러들었다.

"자네, 괜찮나?"

그리하여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한 벽오가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마을에 들어가야 하던 것은 벽오도 마찬가지였던 터. 이유는 다를지언정 둘의 생각은 이제 같은 곳에 있었다.

들어가야만 한다. 어떤 수를 써서든.

백강이 어린아이들 흙장난하듯이 손으로 바닥을 긁어가며 무언가를 써내려가던 때, 벽오는 문 주위를 돌아다니며 혹여나 들어갈 틈이라도 없는지 찾고 있었다. 문이라면 곧 움직이는 물건이고, 움직이는 물건에는 항상 틈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밖에서 열 방법은 없는가?"

"자네는 우리가 들러붙는다고 저게 움직이기는 할 것처럼 보이는가?"

그 말에 벽오의 고개가 자연스래 위로 올라갔다. 관절이 허용하는 범위까지 목을 올려보자 백강이 말해준, 광양 마을의 유일한 "문"은 문이라기보단 등반해야 할 절벽에 가깝게 보였다. 높이만 해도 사람 대여섯명 정도에 폭은 높이보다 훨씬 길었다. 계속 살펴보았지만 틈은 전혀 없었다. 이것이 정말 문이 맞는 것인지, 혹여나 백강이 지 마을 문짝 모양을 잘못 알고 애먼 절벽 아래에서 헛짓하고 있는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연거푸 들었다. 아니, 그랬으면 했다.

상황은 백강도 비슷했다. 문을 옮겨보자는 벽오의 말을 겉으로는 묵살해버린 백강이였지만 사실은 벽오가 말하기 전부터 여기서 문을 밀어낼 수 있는가를 계산해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가능한 일이 아니였다. 왜놈들한테 된통 당한 뒤로, 절대 다시는 왜놈들이 우리 집에 눌러앉는 꼴은 보지 못하리라 하며 그가 직접 설계한 문이 아니었던가. 적어도 그가 문 밖에 있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문을 어떻게 연다고 해도 초조제를 방해한 죄로 더 끔찍한 벌을 당할 것이 뻔했다.

생각에 잠긴 백강 앞에 제비가 날아들었다. 동지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운 이 추운 겨울에 무슨 까치인가 했더니, 그가 몇해 전에 매에게 당해 죽어가던 것을 치료해준 그 까치였다. 그가 손가락을 내밀자 익숙하다는 듯 철판으로 땜질된 머리를 비벼댔다. 잠깐동안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였는지, 그는 제비한테 하소연이라도 할까 고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심한 제비는 제 집을 향해 떠나버렸다. 제비를 탓할 일은 아니지만 잠깐이지만 내심 제비에게서 위안을 얻었던 그에게 야속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백강은 고개를 올려 입구 위쪽으로 날아가는 제비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의 머리속에 어떤 생각이 퍼득 떠올랐다.

아직도 문에 틈이 없나 계속 살펴보고 있던 벽오가 그의 부름에 다가온 것은 다경이 지나고서였다. 백강이 먼저 운을 뗐다.

"자네, 꼭 들어가야 한다 했었나?"

"그, 그렇지?"

벽오의 대답이 돌아오는 동시에 백강의 기계 눈이 무섭게 뻔뜩였다. 비장하기로는 임진년 전쟁나갈때보다 더한 눈빛이었다.

"사실은, 방법이 하나 있네."

벽오는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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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속은 퍽 깨끗했다. 벽돌은 가지런히 정렬되어 원을 이루고 있었고 벽오가 보기에 대체 무언가 하는 장치들이 많이 붙어있는 지붕도 그 흔한 거미줄이나 얼룩 하나 없었다. 끝없는 공백 말곤 물이고 바닥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완벽한 우물 같았다.

겁이 많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깊은 구덩이를 보고 있자면 떨어질까 걱정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런데 그곳으로 뛰어내릴 것이란 말을 들은 사람은 오죽했을까. 우물 속을 계속 들여다보다 그만 어지러워진 벽오가 버럭 화를 냈다.

"자네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난 지금 진지하네. 다른 어느때보다."

백강이 절벽 위쪽의 오두막과 그에 딸려있는 우물로 안내할 때만 해도 오두막 아래에 비밀계단 같은 것이라도 있는가 했다. 하지만 그 오두막이 천문관측용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옆의 그 우물이 양주골의 천문관측용 구멍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벽오는 여기서 당장 벗어나야겠다 생각했다.

"그 높이에서 떨어져서 어떻게 살아남겠다는건가?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시게!"

"진정하고 들어보세. 우물에 제대로 떨어지기만 한다면 천문소까지 한번에 도달할 수 있고, 천문소는 거주소가 있는 2단에 위치해 있으니 바로 우리 집으로 통할 수 있어. 천문소엔 지금 분명 아무도 없네. 내가 천문감인데 누가 있겠나? 벽을 잘 잡고 착지한다면 못할것도 없을 걸세. 전에도 해본적이 있어."

"떨어지는게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는게 문제지 않나!"

어이가 없던 나머지 큰 소리를 내었던 벽오였지만 듣기로는 왜란 직후에 이 양주골의 입구와 출구 설계를 맡았던 이가 자신 앞에 있던 백강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지금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정말 이 우물 말고는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소리였다. 영 믿음직하지 못한 친구이긴 이런 일로 빈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위험은 조금 따를지라도 살아서 들어갈 수 있는 것 또한 분명했다. 벽오의 마음도 점점 기울고 있었다.

"백강, 그 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나?"

"뭐든지 답해주겠네."

"내가 아는 자네는 예를 아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런 종류의 제사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닐세. 그런데 이번엔 왜 굳이
지금 이렇게 무리를 해서까지 들어가려 하는건가?"

"자네 무슨소리하는가. 자식된 자로서 대부(大父)의 뜻을 기리는 제에 참석하지 아니함은 폐륜과도 같지 않은가. 유도(儒道)를 좇는 이로서 어찌 그런 망령된 짓을 하겠는가? 그리고 자네도, 하등 관계없는 사람인데 여기서 이러고 있잖나."

"헛소리 말게. 자네 내가 아는것만 해도 제를 여섯번은 빠졌네. 심지어 한번은 나랑 술먹다가 불참한 것이 아니었나. 그리고 나는 다른 이유가 있네."

"후, 정말 자네에겐 뭘 숨길수가 없구만. 정 원한다면 보여겠네. 단, 결코 내가 먼저 말했다는 것을 밝히면 아니될세."

백강은 오른편에 놓여있던 봇짐을 풀더니 거기서 붕대에 쌓인 짧막한 막대기 같은 것을 꺼내들었다. 붕대를 조금씩 풀수록 반짝이는 검은 형체가 드러났다. 마침내 붕대가 다 풀리자, 화려하게 장식된 검은색 단검이 드러났다. 벽오가 아는 한 저렇게 장식된 검은 단 하나뿐이 없었다.

사인검. 아무리 간댕이가 부은 백강이라 해도 저걸 스스로 만들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하사받은 것일테지. 벽오의 머리속에서 이제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 했다. 한양에서 급하게 양주골로 향했던 이유, 백강은 성상의 밀명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벽오의 눈엔 무언가 이상한 것이 밟혔다.

"헌데 백강. 자네가 들고있는 그것, 내 봇짐 아닌가?"

백강은 풀어둔 봇짐을 두어번 살펴보더니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았는지 표정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었던 것은 벽오도 마찬가지였던지 그 또한 말이 없었다. 백강은 곧장 자신의 봇짐을 풀더니 거기서 자신의 것을 꺼내고 다시 보여주었다. 아까의 근엄한 표정은 어디가고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근데 벽오 자네도 사인검을 가지고 있다는건…"

"아마 자네와 같은 이유겠지."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이 깨진 것은 백강이 푼 봇짐에서 두루마리 하나가 툭 떨어진 것을 보고 나서였다. 비단으로 싸여진, 붉은 빛깔의 두루마리.

"잠깐, 자네 이 두루마리 혹시…"

백강의 이마에 땀이 한두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벽오는 한숨을 푹 쉬었다.

"교서일세. 성상께서 직접 하사하신."

백강의 면(面)이 그 여느때보다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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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롱 하나 켜지 않은 기계 가득한 작은 방, 지상까지 뚫린 구멍 아래 아스라이 비치는 햇빛에 의지한 채 두 남자가 대화하고 있었다. 둘은 모두 벽에 기대어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내려올 적에 너무 긴장했던 나머지 내려오자마자 온몸에 힘이 풀려버려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된 탓이오, 한 사람은 다리로 내려올 적의 충격을 모두 감수하느라 기계 다리가 완전히 작살난 까닭이었다.

"성상을 직접 뵙진 않았을 것이야. 그렇지?"

"자네 말이 맞네. 왜란 시절 충무공 아래 계시던 분 중 나를 잘 챙겨주시던 분이 한분 계셨네."

백강이 책상까지 몸을 뻗어 나무토막 몇개를 가져오며 말했다. 완전히 작살나버린 다리를 임시로나마 교체해 움직일 수 있게 되게까지는 시간도 좀 필요하겠다, 서로 못하고 있던 이야기나 좀 하자 했던 것이다.

"그분께서 말하셨네. 조만간 수신도 안에서의 일체의 무기 제조를 금할 것이라고."

벽오는 곰곰히 생각해 교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여기까진 분명히 교서에 있던 내용이었다.

"또한 동시에 선조대왕의 뜻과 수신도가 공헌한 바를 인정해 지방관을 파견하고 불어도감(不語都監)이 감독하게 하고 수신도 사람들에게도 위패를 내려 주실 것이라 하셨네."

벽오는 저것이 수신도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이백년을 조정의 눈을 피해 살아온 이들이다. 그런데도 왜란이 일어나자 본인들의 모든 힘을 바쳐 조선을 위해 싸울만큼 충성심이 강한 이들이기도 했다. 선조대왕께서 이들을 치하하며 마을 두곳을 인정해주시고 나서부터 전처럼 조정에게 쫓기는 신세는 아니게 되었다 해도 여전히 이들은 조선 안의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위패를 내린다는 것은, 지방관을 내려준다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나 진배없을 것이다.

"내가 맡은 임무는 무기의 제조를 금하는 과정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혼란을 조기에 차단하고자 초조제 기간에 여론을 미리 움직여 두는 것이었네."

이시발은 이 말이 너무나도 쓰게만 느껴졌다. 백강의 말 중 뒤쪽은 교서에 있지 않은 내용이었다. 교서는 그저 모든 무기를 파기하고 그 제조법이 담긴 모든 문서를 압수하리라는 것을 명령할 뿐이었다.

성상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자신에 대한 위협은 아무리 자그만한 것이라도 모두 분쇄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이었다. 교지만을 받았을 때에는 설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성상의 의도는 너무나도 뻔했다. 무기만 모두 사라지면 수신도는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전혀 아니였다.

"사실 이게 그렇게 떳떳한 일은 아닌 것을 알고있네. 모든 일은 공론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내가 다섯살배기일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히게 들은 말이니까."

수신도의 무기가 사라지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1년? 아니면 그보다 더 짧게?

"하지만 말일세, 난 너무나도 가슴이 뛰네. 드디어 우리도 나라의 녹을 받고 일할 수 있게 되는걸세."

그 일이 모두 끝나면, 수신도는 어떻게 될까?

이시발은 지금 조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만큼 재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성상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재야의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벽오는 감히 반역을 저지를 인재는 못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임금이 죽을 때 따라죽을 정도로 충심이 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이 그가 지금까지 침묵을 지킨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는 친우의 꿈을, 친우의 가족을, 친우의 모든것을 제 손으로 불태울 만큼 냉혈한도 못되는 사람이었다.

벽오는 어느새 거의 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친우의 손을 꽉 잡았다. 백강의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백강 잘 듣게."

침 넘기는 소리 하나도 선명하게 들릴 만큼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초조제가 끝나면 반드시 내가 이르는 사람을 찾아가게나."

"절대. 그 누구의 눈에도 띄어선 아니 될걸세."

그날, 벽오는 반역을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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