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반란의 역사 (기밀)
이하는 혼돈의 반란의 약사로, 1924년부터 1933년까지 반란 조직이 형성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33년 이후 혼돈의 반란의 구체적 역사는 다른 민감기밀 중에서 처리한다.) 이 정보는 민감기밀 "SLATE THUNDER" (상위 파일의 내용 일체) 중에 포함되며 재단의 모든 인원이 접근할 수 있는 "일반지식"이 아니므로, 재단 데이터베이스 상의 이외 문서 및 기록은 해당 기술과 어긋날 수 있으며 파일 #008956 (혼돈의 반란 관련 일반 배포 공식 개요) 에 일치하도록 편집되었다. 편집하지 않은 문서 및 기록의 열람을 승인받은 인원은 서면으로 기록정보보안관리부에 연락하여야 한다.
1919-1924 : 서곡
1차대전이 끝나면서 재단은 유럽 전장에서 모집하여 새로 들어온 인원, 전시경제가 축소되며 실직한 군사학자, 국가에 봉사하려 나갔다 돌아오는 인원 등의 유입으로 매우 늘어난 병력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쟁의 공포에서 갓 빠져나온 터라 재단 인원 다수는, SCP 개체를 인류를 이롭게 하는 데 사용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체적 주장은 다양했다. 전후 체제를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SCP를 무기화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SCP를 복제 후 판매하여 공장이라든가 마셜, 카터 & 다크 사 (양자 모두 전쟁으로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린 것으로 보임) 처럼 경제성장을 자극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재단이 소장한 물품들의 연구를 비동맹 과학자에게까지 개방하여 모든 인류가 혜택을 누리게 해야 한다는 측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해당 주장들은 어느 때보다 더 논란이 많은 내용들이었지만, 재단 측에서는 논란의 내용들이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재단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은, 국제 사회가 전쟁에 심각하게 정신적 외상을 입었고 재단 직원이 전투든 전시 연구든 다양한 분야에서 온 전문가로 채워지면서, 재단 자체가 전에 없이 해당 주장들에 취약한 구조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다양한 이상으로 갈라져 있는 와중에, 재단 내 반대파가 현재 상황에 약간의 위협이 될 일을 만들어 냈다. 이 위협은 1924년 5월 익명으로 발행되어 널리 퍼진, 《신선언》(A New Manifesto)이라는 이름의 통합 선언문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문서는 재단의 몇몇 고위 인원이 공동으로 작성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재단 행정부가 "고통과 몰락뿐이 없는 길로 헛되이 나가고" 있다고 맹비난하며 개혁과 개편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내 O5-7이 단속을 명령하고 선언서의 소지를 금지하면서, 불만은 더 널리 퍼졌다.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거대 보안시설들에서 폭동이 심심찮게 일어나면서, O5 평의회는 이 의제를 논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24. 06 : 대분열
재단 인원 다수가 《신선언》과 이로 시작된 단속에 모두 반기를 들게 되던 무렵, O5 평의회부터도 역시 이 의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의견차를 보이고 있었다. 위원들 대개는 의제를 해결한 뒤 매일 하던 확보, 격리, 보호를 계속할 수 있기를(그리고 잠시 발길을 멈췄던 곳에서 다시 나아갈 수 있길) 바랐다. 몇몇 위원, 특히 O5-7, O5-10, O5-13 등은 재단의 강령에 혼란을 불러일으킨 모든 인원들을 엄벌하는 것을 바랐다. 이들 강경파는 "재단 인원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을 자행하는" 인원들을 케테르 임무에 광범위 배치 및 D계급 강등 처리하는 안을 지지하였다. 다른 위원, 특히 O5-9 [나이젤 웨스턴(Nigel Weston) 장군], O5-11 [블라디미르 보리소비치 프레데릭스(Vladimir Borisovich Frederiks) 백작] 등은 반대파를 강력 지지하며 선동문의 일정 부분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6. 10 : O5 위원회 불신임 투표
1924년 6월 10일의 O5 위원회 회의에서, O5-9는 O5 위원회 불신임 투표를 시행하는 안을 강제 상정하였다.
O5 위원은 선출직이 아니며, 보통은 위원회에서 신임 위원을 선택하여 임명되었다. 위원은 종신으로 또는 은퇴할 때까지 재직하지만, 윤리위원회의 2/3의 의견으로 탄핵받을 수는 있었다. O5 위원들 열세 명은 모두 똑같이 한 표씩을 행사하며, O5-1은 회의 대개에서 동 위원들 중 최고 자리를 맡는다. 평의회 내규에서는 위원이 9명 이상 참석한 회의 중에 평의회 불신임 투표를 시행하도록 시킬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투표시에는 모든 5등급 인원(O5는 제외, 기권 처리), 기지 및 부서 감독관, 각 부대 대장, 윤리위원회 위원 등이 무기명으로 투표할 24시간을 받게 된다. 투표에서 2/3의 찬성표를 얻게 된다면, 구 O5 평의회는 해체되고 새 평의회가 조직되며 투표를 제안한 위원이 이를 이끈다. 투표 결과가 이에 미치지 못한다면, 투표를 제안한 위원은 자동으로 사임 처리된다.
불신임 투표 절차를 그때까지 시행했던 적이 없었으므로 (그리고 그때 이후로 시행한 적 없음), O5-9의 결정은 이내 재단에 거대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O5 평의회 서기실은 충실하게 이를 통지한 뒤 투표 집계를 시작했다.
6. 11 : 쿠데타 기도
다음날 일찍이, 유효표의 88퍼센트가 모이며 불신임 투표 기각이 확정되었다. 이 중 53퍼센트가 해당 정책의 통과를 지지하였지만, 나머지 표가 모두 평의회를 해산하는 쪽으로 가더라도 총합은 해산에 필요한 2/3에 모자라는 게 확실해졌다.
6월 11일 평의회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O5-9(전 영국 육군 장군)와 O5-11은 재단 사령부 본부를 방위하던 특무부대에게 다른 O5 위원들을 구류할 것을 명령하였다. 특무부대 사령관이자 전에 프랑스 육군 대령을 지냈던 자크 클레망소(Jacques Clemenceau) 요원은 이를 따랐지만, 그때는 O5-3과 O5-12만이 남아 있었다. O5-1, 2, 4, 5, 6, 8, 10, 13은 이미 간밤에 몰래 기지를 빠져나가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미국 등지의 재단 시설로 피난을 떠난 참이었다. O5-7은 투표를 시작할 때부터 워싱턴 D.C.에 있었다. O5-3과 O5-12의 경호측은 피경호인이 체포되는 데 저항하였으나, 이어 잠시 총격전이 발생하면서 O5-3, O5-12, 특무부대 사령관 모두 사망하게 되었다. 음모단을 반대하고 있던 특무부대 부사령관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요원은 이어 O5-9와 O5-11을 반역죄로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두 반역자 위원은 모두 도망쳤다.
6. 12-13 : 대변절 & 첫 반격
웨스턴 장군 (O5-9 직위 상실) 과 프레데릭스 백작 (O5 위원회 궐석 판단으로 O5-11 자격 박탈) 은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제37기지로 도망쳤다. 전 독일제국 연구원이었던 제37기지 관리관 볼프강 프리츠(Wolfgang Fritz) 박사는 웨스턴과 프레데릭스를 호의적으로 대하였다. 세 사람은 "삼두회(Triad)"를 창설하였으며, 삼두회 이사회의 첫 번째 공식 명령은 O5 위원회가 "불법 단체"임을 선언하며 재단의 지휘권을 주장했다. 삼두회는 O5 위원회를 따르는 부대들의 지휘권을 축출한 뒤에 재단 "중앙의회"를 만들어 재단 직원 중에서 의원을 민주적으로 선출하겠다고 공약했다. 재단 정책은 그 구성원의 의견을 반영해야 하며 구 정권의 과잉행동을 통한 반대는 지푸라기와도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상대로 O5 위원회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삼두회를 힐난하고 그 추종자를 "재단의 반역자"라고 규정하면서, 위원회에 충성하는 MTF들이 몰래 동원되어 재단 사령본부와 제37기지로 급파되었다.
웨스턴과 프레데릭스가 탈출한 뒤 브라운 요원이 봉쇄하고 있었던 재단 사령본부는 충성파 MTF를 기꺼이 맞아들였다. 안타깝게도 O5-7의 강경책에 따라 MTF는 재단 사령본부에 남아 있는 모든 직원들을, 브라운 요원까지도 포함해서 체포하였다. O5-7이 자신의 명령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항변하기는 했으나 (그곳의 인원들의 충성심을 확인할 수 없으므로), 본부 직원들에 대한 대우는 매우 가혹하였다. 시설은 해체되었고, 직원들은 어딘가에 억류되었으며 보관하던 SCP 개체들은 다른 시설로 옮겨졌다.
재단 사령본부의 운명을 전해 들은 제37기지는 충성파 MTF에 거세게 저항하였다. 인원과 무기가 부족했던 탓에 MTF는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삼두회는 보복 차원에서 위원회가 재단에 가한 행동들을 넓게 폭로하였고, 이로써 내부 불만이 폭증하게 되었다. 재단 시설 및 부대 다수가 격노하면서 삼두회를 지지하며 삼두회 측으로 변절하였다. 위원회와 삼두회 모두 SCP 개체를 이용하여 "와일드캔자스(Wildkansas)" 토네이도를 일으켜 헝가리 파티(Páty) 마을에 있던 제83기지를 완전히 파괴한 책임을 물으며 서로를 비난했다. 해당 토네이도는 F4등급으로 추정되었으며, 비아(Bia)에 내려앉아 3시간 뒤 바쯔(Vác)에서 소멸했다. 이는 유럽에서 그때까지 제일 강력한 토네이도였으며, 너비 500-1500m에 길이 70km의 길을 진행하며 이재민 다수를 만들고 시민 아홉 명과 제83기지 인원 24명의 사망, 50명 이상 인원의 부상 등의 결과를 낳았다. 와일드캔자스 토네이도는 재단 내전 동안 발생한 첫 번째 주요 공격이라고 널리 받아들여졌으나, 몇십 년 뒤 사실 MC&D 직원 한 명이 재단이나 삼두회, 혹은 혼돈의 반란에 나중에 참여하게 되는 다른 어떤 집단과도 제휴한 적 없이 만들어낸 것임이 밝혀졌다.
1924-1926 : 재단 내전
개요
재단 내전은 1924년 6월 12일 발발하여 1926년 10월 10일까지 이어졌다. 내전은 충성파(기존 O5 위원회에 충성하는 재단 인원) 와 삼두회파(반역자 삼두회에 충성하는 부대. 나중에 혼돈의 반란으로 분화할 조직) 사이에서 벌어졌다. 재단은 내전 후 비밀 분석을 수행하여 다음의 통계치를 추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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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충성파 |
삼두회파/반란 |
내전 전 재단 병력(인원)의 보유 비율, 상한 및 하한 |
61% - 43% |
57% - 39% |
동원가능한 병력(양측 모두)의 실제 동원 비율 |
40% |
불명, >90% 추정 |
내전 전 재단 자원(금전)의 보유 비율 |
56% |
44% |
내전 전 SCP의 내전 후 보유 비율 |
안전 70%, 유클리드 89%, 케테르 95% |
불명 (안전 30%, 유클리드 11%, 케테르 5% 추정) |
내전 전 "유용", "역설계 적합", "생산가능", "무기화 적합" 등의 평가를 받았던 SCP의 보유 비율 |
61.7% |
불명 (38.3% 추정) |
사상자 (백분율) |
52.3% 사망 및 부상, 실종 |
87.9% 사망 및 부상, 11.3% 내전 이후 감금 및 처형, 0.8% 내전 이후 행방불명 |
결과적으로 재단 내전은 조직 역사상 가장 피를 많이 흘리고 가장 파괴적인 갈등(재단이 직접 연관되는 경우 중에서)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해당 전쟁의 민감한 성질 때문에, O5 위원회는 이내 가능한 자료를 모두 동원하여 5등급 미만의 보안 인가를 요구하는 모든 기록에서 내전의 자세한 특징들을 말소하였다. 상호간에 정보가 분리되는 재단의 특성, 철저한 방첩 활동 및 숙청 작업, 내전에 참전한 재단 편 병력이 대개 재단의 보안·군사·준군사·정보 부대에 그쳤다는 사실 덕분에 은폐 작업은 현저한 성공을 거두었다. 은폐 작업이 얼마나 철두철미했던지, 재단 내전이 끝나고 단 12년이 지난 1938년 이후로 영입된 재단 인원들 대부분은 내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조직 내에서는 혼돈의 반란의 뿌리가 1924년 떨어져 나간 "재단 요원들의 조그만 악당패"라는 것이 일반 상식이지만 ("삼두회"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기록상에서 완전 말소됨), 지금까지도 그 시련의 규모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1924 – 1925.07 : 삼두회 우세기
1924년 6월 전쟁이 처음 발발하고 나서 오래 지나지 않아 삼두회 병력의 계급은 제37기지에서 수십 개 보안시설 및 기동특무부대까지, 여덟 대륙 전체에 적용되었다. 삼두회파의 구조도는 전전의 재단을 따라하는 모습이었지만, 아래와 같은 주요 차이점이 있었다.
- 삼두회는 O5 위원회와 재단 고위사령부 (전전의 재단 내 기구로, 모든 무장특무부대와 보안 인원을 통솔 및 제어함) 의 역할을 담당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삼두회는 기존 O5 인원회 및 재단 고위사령부의 권한을 부정하며, 대신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삼두회의 세 사람 (그리고 그 부하들) 이 해당 기관들의 의무를 짊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 프레데릭스 백작은 삼두회의 정치 및 행정 책무를 담당했다. 이 때문에 프레데릭스는 사실상 조직의 지도자를 맡게 되었으나, 명목상으로는 웨스턴 및 프리츠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 웨스턴 장군은 삼두회의 군사 및 보안 책무를 담당했다. 웨스턴은 사실상 내전 내내 삼두회의 최고군사지도자 자리를 맡았다.
- 프리츠 박사는 삼두회의 과학기술 및 연구 책무를 담당했다. 내전 중에도 충성파, 삼두회파 양쪽에서는 각자의 방법으로 변칙적 개체들을 확보, 격리, 보호하고자 하는 행동을 계속하였다. 충성파와 달리 삼두회파는 SCP 개체를 자기 명분에 따라 실전 배치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으며, 프리츠가 배치 관련 모든 활동을 감독하였다.
- 삼두회에는 윤리위원회가 없었다. 프레데릭스 백작은 성명서를 발표하며 그런 위원회는 비상사태를 해결하면 다시 도입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 재단 인원 중에 삼두회에 충성을 공식 맹세한 사람은 다가오는 중앙의회 의원 선거에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924년 6~7월의 혼란 속에서, O5 위원회와 재단 충성파는 조직을 재편성하고 정리하는 데 분투하였다. 재단에는 상상할 수 있는 외부 위협의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는 긴급계획을 마련하고 있었지만, 긴급대책부는 그때 조직의 얼굴을 강타한 시국에 대처할 어떤 효과적 방안도 내놓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때는 삼두회파 역시 충성파와 똑같은 방안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O5 위원회가 계획한 거의 모든 행동들이 예측당하고 대응받게 되었다. 삼두회에 대응하는 예방책 차원으로 파리 외곽의 재단 사령본부를 해체했던 것조차 실패한 작전으로 드러났는데, 충성파에서 시설의 문서 다수 (개인적 재무정보 명단부터 SCP 개체 파일의 군사전투서열까지 모두 다) 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상실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재단 정보국에서는 해당 문서들이 삼두회 때문에 사라진 건지 전혀 명확하게 입증하지 못했지만, 그때로서는 삼두회파 요원 측에서 훔쳤다는 설이 신념처럼 남게 되었다.
8월이 되어서 위원회는 간신히 미국에 본부를 재건할 수 있었으며, 이곳이 나중에 상급감시사령부(Overwatch HQ)로 발전하게 되었다. 보안상의 이유로 새로 만든 이 시설에는 어떤 SCP 개체도 배치할 수 없게 되었다. 위원회는 사망한 두 명과 반역자 두 명을 대체할 인원을 보강한 다음,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삼두회에 맞서고자 과감하게 여러 행보들을 시작하였다.
- 재단 내무윤리부(DIAPR)가 해체되고 대신 고등재판소(OHI)가 만들어졌다. O5-6, 7, 13 (모두 강경파로서 쿠데타 이전부터 반동분자를 배척하며 위원회에 충성심을 증명한 이들) 이 OHI를 감독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OHI는 이미 해체된 DIAPR뿐만 아니라 재단 방첩부 및 재단 고위사령부 보안기구가 오랫동안 담당하던 업무까지 지휘할 수 있는 거의 무한한 권력을 받게 되었다. OHI는 1930년까지 재단 구조도 속에서 핵심 기구 노릇을 했다.
- 삼두회 옹호파로 꽉 차 있었던 탓에 1924년 8월까지 본질적으로 전혀 기능하지 못했던 재단 고위사령부는 해체되었다. O5 위원회는 충성파 무장부대를 직접 관장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자신이 지휘통제기구를 대체한다는 사실을 공고히 했다. 재단 보안 관리는 OHI의 관할으로 이전되었다.
- 연대급(각 3,200 ~ 4,500명) 무장 기동특무부대 10개를 설치하였으며, 각 단디아(Genga)-1에서 –10까지로 지정되었다. "단디아"는 콥트 문자 중에서 하나로, 충성파와 삼두회 모두 MTF 번호를 지정하는 데 그리스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던지라 기존 부대와 혼동하지 않도록 선택되었다. 일명 "단디아 부서"가 삼두회 병력과 전투하는 것으로 계획된 모든 무장 교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일반 MTF와 다르게, 단디아 부서 소속 크고 작은 부대들은 중대급까지 "행정관(Political Officer/Politoffizier/Zampolit/Officier Politique)"이라는 추가 직책을 갖추고 있었다. 이 직책에는 부대 사령관과 같은 등급의 인원을 배치하였으며, 부대가 O5 위원회에 충성을 바칠 수 있도록 OHI가 특별히 이를 선임하였다. (단디아 부서는 1927년, 재단 부서에서 행정관 직을 폐지하던 시점에 해체됨)
- 모든 재단 인원은 자신이 배치된 시설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기지 외 여행은 임무 목적으로 허가받은 경우로 제한되었다.
- 밖으로 나가는 모든 전신 및 편지는 검열 처리되었다.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전신 및 편지, 그리고 모든 전화통화 (밖으로 걸든 안으로 걸려오든) 는 감시 처리되었다. 모든 개인적 편지는 발송 유예되었다.
- 반(半)독립적 주간 내부신문이자 계간 내부 학술저널이었던 《재단의 감시자(Foundation Monitor)》는 정간되었으며, 나중에 1948년에나 복간되었다.
위원회가 내놓은 대책들은 가지각색의 성공률을 나타냈다. 8월 중순에 들어서 위원회는 삼두회에 충성을 맹세했던 부대들이 5월 이래로 이용하던 금융자산을 모두 동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산의 대부분을 삼두회로 떨어져 나간 측이 현금화했는지라, 삼두회의 실제 현금흐름에 끼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더 직접 영향을 끼쳤던 것도 있었다. OHI는 삼두회에 동조한다고 의심되는 재단 인원을 확인하고 숙청하는 데 나무랄 데 없이 화려한 실적을 쌓았지만, 재판관이 가혹한 기술을 동원하는 바람에 무수한 인원들이 삼두회의 팔에 안기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단디아 부서는 삼두회와 교전하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수적 우세를 거머쥐고 있었으나, 1924년 가을부터 그해 겨울까지 큰 손실을 겪게 되었다. 단디아 사령관은 사후 보고서에서 패배의 원인은 삼두회가 SCP를 무기화 사용한 점 (단디아 부서도 O5 사령부에 이를 요청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함), 단디아 부서 안에서 삼두회로 전략전술 정보 유출이 만연하는 점, 부대 행정관이 틈만 나면 전투에 개입하는 점에 있다고 시사했다. 충성파의 의욕은 급락했고, 이탈과 O5 위원회에 대드는 반란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
한편 삼두회 쪽에서는, 이탈자가 유입되는 데 자신감을 얻어 1925년 2월 중앙의회 선거를 실시하였다. 중앙의회는 스코틀랜드 퍼스(Perth) 외곽의 삼두회 측 시설이었던 제12지구에서 소집되었다. 중앙의회 의원 75인은 삼두회 부대 대표였지만, 웨스턴 장군과 프리츠 박사의 공작으로 삼두회의 세 인원이 조직을 거의 완전히 조종할 수 있도록 남았다. 웨스턴과 프리츠는 88세 고령이었던 프레데릭스 백작이 건강 악화로 노망기가 늘어나자 백작이 주변의 이목에 더는 띄지 않도록 조용하게 움직였다. 재단 정보요원은 백작이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었으며 1924년 말부터 1925년 초까지 일어난 타격으로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알렸다. 세심한 정치극을 동원한 끝에 프레데릭스의 노망기는 자신의 능력이 재단 (충성파, 삼두회 모두) 의 인식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하게 되었다.
1925. 07 : 천장을 때리다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는 재단 부대, 더불어 행정관의 무능함과 재판관의 월권 등이 이에 함께한 끝에 1925년 6월에 들어서는 삼두회파 인원이 충성파를 3:2로 넘어서게 되었다. 재단 사령부는 새로운 전략이 절박하게 필요함을 인식했다.
단디아 부서 사령관이 1925년 7월 초입에 교체되었다. 젊고 활기 넘치는 신임 사령관 윌리엄 채터튼(William Chatterton) 준장은 취임하자마자 비밀리에 O5-1에게 대담한 전략을 하나 제안하였다. O5-1은 이를 단독으로 승인했다. 다른 위원 및 O5 사령부 직원 측에는 작전상 보안이 필요하다는 말 이외에 전략의 내용을 통지하지 않았다. 채터튼은 단디아 부서와 다른 여러 충성파 부대에게 몇 가지 작전 명령을 보안이 위태롭다고 알려져 있던 통신 채널로 전파하였다. 해당 명령은 삼두회 치하에 있던 아프리카의 시설에 역공을 개시할 수 있도록 각 부대들이 집합하여 전열을 가다듬기를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이 명령이 내려질 즈음, 재단 비행기 하나가 밀사 한 명과 위조한 5등급 계획안을 싣고 가다가 기계 오류를 가장하여 제12구역 위에 해당 구역 주작전기지에서 12km 이상 떨어진 지점으로 추락하였다. 삼두회파 부대는 충실하게도 조종사와 밀사의 유해를 수습하였으며, 또한 이에 딸려 있던 계획안 역시 회수하였다. 해당 계획안의 내용은 소비에트 연방 북쪽에 있는 북극해의 섬 노바야젬랴에 위치한 조그만 전초기지인 제99기지에서 케테르 등급 SCP를 무기화하여 개발 중임을 시사하고 있었다. 표현에 따르면 무기화한 이 SCP는 "개발을 마치면 전쟁의 흐름을 돌려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재단이 오랫동안 유지하던 무기화 반대 정책을 저버리고 있는 이상, 삼두회로서는 재단이 해당 장치를 운용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둘 겨를이 없었다. 제99기지는 단디아-3 공작원 중에서도 기량과 정치적 신뢰도를 따져 가며 가려 뽑은 100명 이하의 엘리트 그룹만이 가볍게 경비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이었다. 시설 규모를 작게 하여 O5-1이 기밀 누설을 방지하려 하는 모양새였다. 밀사는 제99기지에서 상급감시사령부로 중간 보고서를 실어 나르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속임수에 걸려든 삼두회는 아르한겔스크 항으로 동원가능한 병력의 3분의 1을 운집시켜 이들을 목적지에 배로 수송하고자 하였다. 웨스턴 장군은 해당 작전을 감독하는 위치에 재능 있는 소비에트 해군 사관 유리 졸네로비치(Yuri Zolnerovich) 준장을 선임하였다.
삼두회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단디아-2, 3, 4, 5 전체 인원이 카닌 반도, 콜구예프 섬, 노바야젬랴 등에 전략 배치되었다. 제99기지의 케테르 SCP, 그리고 물론 제99기지 자체는 모두 재단이 꾸며낸 정보였다. MTF 카이-13의 공습조가 또한 아르한겔스크로 파견되어 삼두회 선박에 선체 흡착 지뢰를 몰래 설치하였다.
당시 헬싱키에 머무르던 프레데릭스 백작은 자신의 수행단 속에 끼어들어 있던 충성파 잠복요원에게 작전의 소식을 얻어듣게 되었다. 졸네로비치가 러시아 차르의 처형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있었던 사람이었는지라, 감독관 선임에 격노한 프레데릭스는 아르한겔스크까지 찾아가 작전 책임자의 위치를 사적으로 자신에게 옮겨 버렸다. 프레데릭스 백작은 차르 치하에서 황실 대신을 지낸 덕에 러시아 제국군에서 명목상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군 사령관으로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졸네로비치가 삼두회파 부대의 최고지도자로 있는 웨스턴의 위치를 들어 조치에 반대하였으나, 늙은 데다 감정에 치우쳐 있던 프레데릭스는 졸네로비치를 쏘아 버린 다음 니콜라이 황제의 복수라고 쏘아붙일 뿐이었다. 채터튼 장군이 기대하고 있었던 바로 그 결과였다.
1925년 7월 24일 현지 시각 2200에 삼두회파 소함대가 아르한겔스크를 떠났다. 프레데릭스는 선체 흡착 지뢰가 있는지 점검해 보라는 졸네로비치의 명령을, 재단이 삼두회가 다가오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데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백지화시켜 버렸다. 소함대는 대형 수송선 열다섯 대와 호위 순양함 십여 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0500에, 소함대가 콜구예프 섬 북쪽으로 순항하던 중에 흡착 지뢰가 폭발하였다. 호위함 열 대와 더불어 수송선 여섯 대가 즉시 침몰했다. 남아 있는 선박들 역시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살아남은 호위함 중 한 대와 수송선 아홉 대 중 일곱 대는 엔진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프레데릭스 백작이 타고 있던 기함은 천운이었는지 엔진이 제대로 기능하던 수송선이었다. 뒤이어 단디아 부서 함대 및 전폭기가 공습을 개시하자, 프레데릭스는 고장난 배들은 버리고 엔진이 멀쩡한 남은 배 세 대에게 즉시 콜구예프 섬에 상륙할 것을 명령했다. 이 중에 충분히 오래 살아남아서 해안까지 닿은 배는 프레데릭스의 수송선뿐이었는데, 단디아-4가 상륙하려는 삼두회파 병력 및 선원에게 기관총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두 시간이 조금 더 흘렀을 때, 삼두회에 충성하던 병력 중에 이용가능하던 병력의 3분의 1이 완전히 지워지게 되었다. 이는 삼두회의 위세가 천장을 찍고 내려오는 시점이 되었으며, 이후로도 삼두회가 절대 복구하지 못한 타격이었다.
프레데릭스 백작은 콜구예프 대첩 (삼두회파에서는 "극북 대학살") 에서 전사하지는 않았지만 재단 부대에게 체포되었다. 프레데릭스는 무르만스크의 재단 구금 시설로 이송되었으며, 삼두회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헬싱키에 가택 연금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웨스턴 장군과 프리츠 박사는 이 처참한 패배와 뒤이은 배반의 소식을 전해 듣자 프레데릭스를 추방 선언하여 삼두회 안에서 백작이 상징하던 위치를 박탈해 버렸다. 이 세 번째 위치는 이후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았으며, 웨스턴과 프리츠가 프레데릭스의 이전 직무상 책임을 쪼개어 가져가게 되었다. 체포되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프레데릭스 백작은 심각한 뇌졸중을 일으켰으며, 침대에 누워 노망기만이 남아 살게 되었다. 프레데릭스는 1927년 모두의 관심에서 잊혀진 채로 노환으로 외롭게 사망하였다.
1925. 08 – 1926. 03 : 후퇴하는 삼두회
채터튼 장군은 콜구예프 대첩의 여파로 충성파가 잡은 기회를 지체 없이 밀어붙였다. 8월에는 인도차이나에 주둔한 삼두회 부대에, 9월에는 남아메리카에 공세가 이어졌다. 병력 구성도 전체 중에서 가장 많이 훈련받고 장비도 가장 월등했던 3분의 1을 상실한 터라 휘청거리고, 대체할 만한 병력 대다수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곳인) 벨기에령 콩고나 에티오피아 제국에 소재하는 시설을 지키던 참이라, 삼두회는 두 현장에서 모두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웨스턴은 9월 늦게 아프리카에 보유하던 삼두회 병력을 이전하기로 하는 운명적 선택을 하게 된다. O5 사령부 정보국에서 10월에 삼두회의 병력 재배치를 발견하자, 채터튼은 겨울에 펼칠 아프리카 공습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충성파와 삼두회파가 물리적 전장에서 맞부딪치는 만큼이나 선전전에서도 격돌이 이어졌다. O5 위원회는 8월 1일 "현재의 갈등에 대한 포고"를 "충성심에 상관없이 모든 재단 인원" 앞으로 발행하였다. 포고 내용은 전투 행동의 정지를 촉구하고 양쪽 보병의 용맹함을 치하하며, 또한 삼두회파 부대의 일반 사병들에게 자신의 지도자가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며 진정한 임무가 무엇인지 망각하고 있고 또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몰락과 수치, 비통뿐인" 길로 데려가고 있음을 인정하기를 청원하고 있었다. 삼두회 선전기구는 이에 재빠르게 응수하여, 재단의 포고령은 "잔혹한 대학살을 팔아먹는 비열한 집단의 거짓말과 조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묘사하였다. 양측이 모두 분쟁의 묘사를 제어할 수 있고자 검열을 수많은 지점에서 이용하였으나, 이 방향에서는 충성파가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12월, 채터튼 장군과 O5-1, 6, 7은 재단에 위협이 될 비변칙적 인간을 제거할 수 있도록 비밀리에 O5 사령부 담당 분과를 설치하였다. 암호명 █████████████로만 알려진 이 조직의 자세한 정보는 지금까지도 재단 내에서 고급 기밀로 남아 있다. O5 위원회는 1970년대 중반까지 해당 프로그램의 존재조차 인정한 바 없다. █████████████의 첫 표적은 삼두회의 남은 두 인원 프리츠 박사와 웨스턴 장군, 그리고 이들의 직속 부하였다.
1926년 1 ~ 2월이 지나면서 충성파는 삼두회파에 견주어서 점점 더 강세를 띠었다. 양측에 널리 퍼진 전쟁 관련 통념 중에는 삼두회파가 SCP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있다. 그러나 전쟁의 마지막 6개월 동안 삼두회파는 재단 부대에 맞서 SCP를 실제 이용한 적이 없다. 웨스턴은 삼두회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전략적 자산을 이용하고 싶어했으나, 프레데릭스 (체포 이전) 와 프리츠는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자연발생하거나 인공발생한 재해로 충성파 부대가 피해를 입거나 삼두회파가 이익을 보았을 때가 있다면 그 상황이 SCP를 이용한 결과라고 주장하자는 데에는 동의하였다. 유감스럽게도 1926년 1월 쾰른이 라인 강이 넘쳐흘러 홍수 피해를 입은 것 말고는 삼두회가 자기 소행이라고 할 만큼 눈에 띄는 재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재래식 병력으로도 뒤처지고, 활기와 효율을 되찾은 충성파 방첩부의 활동으로 충성파 사병에게서 유입되는 전향자가 끊어지고, 게다가 SCP의 전략적 배치마저 망설이면서 삼두회는 전쟁의 흐름을 돌릴 수 있다는 희망을 점점 더 잃어 갔다.
1926년 3월 25일, █████████████ 공작원이 제37기지로 침투하여 자고 있던 볼프강 프리츠 박사를 암살하였다. 프리츠가 사망하고 프레데릭스는 노망이 나 잊혀진 채로 1927년 죽을 때까지 가택연금된 상황에서, 웨스턴 장군은 잔존하는 삼두회파 부대의 유일한 사령관으로 남게 되었다.
1926. 04. – 06. : 새로운 전략
3월에 프리츠가 암살된데다 여러 달 동안 삼두회파 부대에게 막대한 손해가 이어지자, 웨스턴은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삼두회는 자원이 몹시 부족한 실정이었다. 순전히 동원가능한 인력, 제어가능한 시설, 확보한 SCP, 무기, 자금, 병참 능력 등의 지표에서 충성파는 삼두회파에게 3 ~ 4 : 1 수준으로 넉넉히 앞서나가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다른 점이 있었다. 절대량 면에서 충성파는 "유용한" SCP (상대적으로 적은 위험을 안고 이용 및 무기화, 역설계할 수 있는 개체)를 더 많이 보유한 반면, 양측이 보유한 전체 SCP 개수 중의 비율로 관찰할 때는 삼두회가 유용한 SCP의 비율이 더 높았다. 웨스턴은 전전의 재단 보관 물품 목록을 입수하면서 이러한 이점을 깨닫게 되었다. 웨스턴은 삼두회가 소유하던 모든 SCP들의 이용 규제를 철폐하면서 연구진에게 전력을 다하여 충성파에게서 전술전략적 우위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기를 주문하였다.
해당 결정은 삼두회파 인원 사이에서 많은 논란을 빚었으며, 중앙의회 의원의 3분의 1이 이에 회의를 품었다. 인원들 다수는 재단의 기본 사명 – 이용 및 파괴가 아닌, 확보, 격리, 보호 – 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으며, 웨스턴의 지시는 삼두회의 존립 명분이 정당한지 심각한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의혹이 담긴 이야기들을 듣게 된 웨스턴은, 이용 및 연구 규제는 충성파와 겪고 있는 분쟁이 끝날 때까지만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는 이에 두려움을 누그러뜨렸으나, 제09구역의 전체 직원을 포함하여 수많은 삼두회파 인원들은 충성파에게 돌아서고 말았다. 그러자 웨스턴은 조용하게 중앙의회를 해산하고 의원들을 체포 (및 일부 처형) 해 버렸다.
웨스턴의 새로운 전략은 너무 미약한데다 너무 늦은 대책이었다. 마지막 여섯 달 동안 일어난 충돌 중에서 충성파 사상자는 나머지 기간의 전체 사상자를 합친 것보다 두 배나 많았지만, 전쟁의 가속도를 늦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8월에 들어섰을 때 삼두회가 통제할 수 있었던 보안 시설은 십여 개도 채 되지 않았으며, 웨스턴은 남아 있던 SCP들을 나중에 삼두회가 다시 사용할 수 있고 충성파가 습득하는 위험을 낮출 수 있도록 세계 각지의 은신처에 숨겨둘 것을 명령하였다. 9월이 되어서 제37기지는 마침내 단디아 부서에게 점령되었다. 삼두회파는 남은 시설 대개를 저버리고 스코틀랜드 퍼스 교외의 제12구역으로 후퇴하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농성하며 포위전을 대비하였다.
1926. 10. : 제12구역 전투
1926년 10월에 들어서 남아 있던 삼두회파 부대는 거의 모두가 제12구역에 은신하게 되었다. 채터튼 장군은 시설 쪽으로 무조건 항복을 제안하였다. 제안은 거절되었다.
전투 자체는 2주일 동안 이어졌다. 웨스턴은 소모전을 진행하려 시도하였으나, 12 : 1을 넉넉하게 넘어가는 전력 차이에서 성공할 가망은 거의 없었다. 포격과 공중 폭격이 쉴새없이 쏟아지고, 신경 가스가 아낌없이 풀려나오고, 재단의 유일한 전차 중대가 전면으로 공격을 가하면서 제12구역의 방어선은 갈수록 쓸려 나갔다.
1926년 10월 17일, 웨스턴 장군이 포탄에 맞아 전사하자 겨우 57명 살아남아 있던 삼두회파 부대는 모두 항복하였다. O5 위원회는 득표수 7-6으로 이들을 재단에 반역한 죄목으로 총살형에 처했다. 재단 내전은 종결되었다.
1926-1933 : 잿더미에서 재건된 혼돈의 반란
제12구역이 항복하고 일명 "마지막 57인"이 처형되면서, 삼두회파는 사실상 조직을 갖추고 통일성이 있는 집단으로서 그 수명을 다하였다. 이후 7년 동안 재단은 자신의 시야에서 빠져나간 생존자는 없다고 (잘못) 믿었다. 현재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몇몇 인원 및 SCP가 수효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재단의 추산 결과에서 벗어났다. 최근 추정치로는 이때 빠뜨린 인원의 수는 수십 명에서 수천 명 사이, 개체 수는 다섯 개에서 500개 사이에 이른다.
제12기지가 몰락하고 오래 지나지 않았을 때, 삼두회파였다가 나중에 혼돈의 반란을 구성할 이들은 분열 및 고립된 데다 어디에도 바로 위협이 되지 않을 처지였다. 이들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 여념이 없었는지라 그렇게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일은 숨어 있거나 잠적하는 것, 또는 남은 일생을 편집증에 시달리며 잊혀진 채로 사는 것뿐이라고 여겼다. 당시 재단 공작원은 이들 다수를 발견 즉시 사격하라는 명령을 여전히 유지하는 실정이었다.
데미안 오코너(Damien O'Connor) 대령은 패배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오코너는 카리스마 있으며 총명한 아일랜드 출신 선동가로서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가 이끄는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암살부대 "더 스쿼드(The Squad)"에서 활동하다가 재단에 합류하여 MTF 사령관을 지냈던 인물이었다. 오코너는 삼두회파 잔당에게 닥친 곤경을 아일랜드 혁명 당시 영국 왕실에 대항하던 아일랜드 독립운동가의 고난, 그리고 1차 대전 중의 아랍 혁명 당시의 아랍의 고난에 필적하는 투쟁으로 바라봤다. 맹렬한 연설과 타고난 전략 설계 능력을 바탕으로, 오코너는 전략 담론 여러 권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중에서 대다수는 여전히 재단 정보부에서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삼두회파 잔당의 비밀 회동에서 자주 연설을 펼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본 파일은 1928년 포드로기스탄(Podlogistan)에서 오코너가 동지 십여 명 앞에서 펼친 연설의 부분 기록문을 첨부하고 있으며, 이는 1933년 재단 정보부에서 획득한 자료이다.
오코너가 지지자를 통합하는 동안, O5 위원회는 재단 내전에 관련된 정보를 표적으로 하여 내부 정보 억제 행동에 착수하였다. 각자의 역할을 고도로 세분하는 재단의 특징, 대공황 시기에 쏟아져 나온 인원들의 대거 유입, 그리고 검열에 관련하여 위원회가 행사한 비상 권력에 힘입어, 재단의 일반상식에서 사건의 내용을 숙청하는 작업은 현대의 재단 인원조차 놀랄 만큼 큰 효과를 거두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재단 내전을 직접 겪은 적 없는 인원들은 이 분쟁이 존재하였는지조차 거의 알지 못하게 되었다. 대분열과 2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투는 축소 기술되어, 재단의 공식 기본입장 안에서는 이탈한 요원들이 만든 악당의 무리 정도로 남게 되었다.
삼두회파 잔당은 1933년에야 재단의 레이더에 포착되었다. 재단 방첩부의 중급 분석가 아서 피어스(Arthur Pierce)는 리스본의 한 안전가옥에서 회수한 문서 (오코너가 펼친 연설의 부분기록문 포함) 를 바탕으로 겉보기에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지난 몇 년 동안의 사건들을 하나로 이어붙일 수 있었다. 피어스는 1933년 3월 5일 O5 위원회에 메모 하나를 제출하였는데, 내용에서는 "재단에 맞서려 하는 혼돈스러운 반란 세력an insurgency of chaos against the Foundation"의 등장을 경고하고 있었다. 이 메모의 사본을 탈취하여 입수한 오코너는 반색하더니 그 자리에서 삼두회의 잔당을 "혼돈의 반란Chaos Insurgency"으로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이 단어는 지금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1933년 이후의 반란 약사
주석 : 재단 보안상의 문제로 1933년 이후 혼돈의 반란에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SLATE THUNDER와는 다른 기밀 자료집에 분류되어 있다. 해당 정보 열람을 인가받은 인원은 서면으로 기록 및 정보 보안 관리국으로 연락할 것.
상기 언급과 같이 1933년 이후 혼돈의 반란 약사는 보안상의 이유로 필요한 부분은 생략하였다. 이하는 반란의 역사 중에서 중요한 순간을 선별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1939 – 1945)
혼돈의 반란과 재단 모두 추축국이나 연합국 중 한쪽의 편을 들지는 않았으나, 반란은 이 격변의 시기를 제3세계 국가 및 식민지 여러 곳에서 영향력을 다지는 데 이용하였다. 한편으로는 반란은 재단을 표적으로 직접, 또는 추축국과 연합국을 대리인 삼아 공격을 벌이기도 하였다. 전쟁기 동안 반란과 재단 사이에 벌어진 가장 큰 충돌은 레닌그라드에 있는 제41기지를 점령하려 하는 사건이었으며, 이는 나치당이 포위 작전을 벌이던 시기에 일어났다. 해당 시도는 실패로 그쳤다.
(자세한 정보는 민감기밀정보 "███████████████" 참조)
대리전 흡수 (1947 – 1967)
혼돈의 반란은 그 역사 내내 전쟁을 이용하고 무장 분쟁에 병력을 파견하기는 했지만, 5~60년대에는 서방국가와 소비에트 국가 양쪽의 군대 및 정보기관의 다양한 위치에서 암약하는 스파이들을 이용하여 게릴라 반란 세력 및 제3세계 여러 국가의 민족해방운동 세력을 흡수 및 후원하였다. 혼돈의 반란 지도부의 상당수 인원이 1950년에서 1970년 사이에 교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후속 세대에서 유망주로 떠오른 인물 중에는 CIA 및 KGB 간부, 특수부대 고문 등이 끼어 있었다. 이들은 원래 자신과 대립하는 세력에 호의를 보이던 지역으로 파견되어 지역의 정치 기반을 흩트리고 각자의 정치상관에게 더 유순하게 이를 재구성하려 하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변칙 물품을 마주치고 사용하면서, 또한 그곳에서 바로, 또는 자신의 상위 기관에서 더 높은 자리에 있던 반란 스파이의 (은밀한) 지시로 혼돈의 반란에 흡수되면서, 해당 공작원들은 반란 쪽으로 동화되었다.
(자세한 정보는 민감기밀정보 "█████████████" 참조)
제59무장기지 전향 미수 사건 (1962. 10.)
1962년 10월, 티베트의 제59무장기지 관리자 안드레 포슈(Andre Foch) 대령은 인도-중국 전쟁이 발발한 틈을 타 전쟁 때문에 생긴 사건인 척하며 제59무장기지를 혼돈의 반란 쪽으로 전향시키려 시도하였다. 재단 무장신속대응특무부대 카이-13이 이에 개입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전향 시도는 실패하였다. 포슈는 직후에 재단에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탈출했다는 소문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는 재단 내전 이후 발생한 가장 큰 변절 사건이었다.
(자세한 정보는 민감기밀정보 "███████████████████" 참조)
현대의 혼돈의 반란 (1991 – 현재)
오늘날의 혼돈의 반란은 균질한 계층적 조직이라기보다는 구성원이 매우 다양하면서 또한 느슨하게 연결된 세포들의 여러 방향으로 펼쳐진 사회적 네트워크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지도자"의 존재는 일부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도자가 여러 세포들을 지휘·조직·통제할 수 있는 능력 범위는 최소한 다소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지도자 개인을 체포 및 살해하더라도 반란의 조직 활동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적다. 반란에는 지리적 위치를 가진 기지가 없으나, 제3세계의 많은 국가에 주둔군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혼돈의 반란이 재단, 세계 오컬트 연합, 그 밖에 다른 조직과 분쟁을 일으킬 때 사용하는 후현대 게릴라 비대칭전의 일반 전략은 자못 일관된 형태를 띠지만, 반란의 구체적 전술·전략·이데올로기는 꽤나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반란은 수많은 집단, 조직, 정부 등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범위는 합법으로 행동하는 명망 높은 곳에서 은밀하게 범죄를 일으키는 곳까지 폭넓다. 재단 이론가 측에서는 혼돈의 반란을 패퇴시킬 반(反)반란 전략을 아직까지 만족스럽게 수립하지 못하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