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겐 허락되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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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밤은 추웠다. 리지웨이 박사는 코트 깃을 고쳐세우고 D동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눈물 아니면 분노, 어느 쪽이건 간에 오늘도 기분 나쁜 대면이 있을 예정이었다. 박사는 어두운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고 한숨 쉬고는, 유리문을 열어 음산한 녹색 복도에 들어섰다. 여전히 쌀쌀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로 경비원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사형 선고'를 내리러 가는 중이었다. 동료들은 그렇게 부르곤 했다. 매달 말에 있는 이 기지의 D계급 인원들의 처분에 앞서 그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일종의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리지웨이 박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집행 담당자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일이었지만 윤리위원회의 태도는 강경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였다. 그렇다면 그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서 그들의 온갖 역정과 통곡을 참아온 박사에게는 무슨 위대함이 또 있단 말인가? 그는 그런 일에 신물이 났다.

구역과 구역을 건너면서 보안 카드를 긁을 때마다 박사는 마음을 다잡았다. 단지 앞으로 마주칠 감정의 폭발만을 대비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전에 앞서 그가 보게 될 환상…… 그것을 응시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D동의 구석 모퉁이, 면담실로 이어지는 기다란 복도가 나오자 그는 멈춰섰다.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이 시간대는 항상 그랬다. 워낙 외진 데다가 쓰이는 경우도 거의 없는 곳이라 보안마저도 허술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방으로 나있는, 절대로 불이 켜질 일이 없는 유리창들 덕분에 이곳은 직원들 사이에서도 소름 끼치는 장소로 정평이 나있었다. 음침한 연녹색 형광등이 가끔 깜빡거리는 탓에 훨씬 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리지웨이 박사는 되도록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유리창 내부를 주시했다. 방 안에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 앉아있었다. 역시 오늘도. 사형 선고를 내리러 갈 때마다 보아 왔던 환상이 이제 다시 스멀스멀 기어나오려고 하고 있다. 그는 침착하게 그것을 마주하기로 했다. 박사는 코트를 벗어 팔에 걸치고 속에 껴입었던 가운의 주머니에 다시 손을 집어넣었다.

이름은 자넷이었다. 그녀는 지금 머리를 손질하면서 해맑은 표정으로 테스트에 임하고 있었다. 리지웨이 박사는 이것이 자신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고, 사실 불도 켜져있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오늘 같은 날이면 항상 환각을 보았고 이제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정도로 익숙해져 버렸다. 박사에게 있어서 문제는 이 다음 유리창이었다.

눈을 돌리자 자넷이 침대 위에 묶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는 또 다른 리지웨이 박사가 주사기를 들고 그녀에게 나직히 말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자넷.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자넷이 힘없이 중얼거렸지만 리지웨이 박사는 묵묵히 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박사는 생각했다. 그는 왜 자넷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걸까? 시침이 움직이자 리지웨이 박사가 주사를 놓았다. 자넷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무어라 말하자 유리창 건너편의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11초만에 사망했다.

박사는 왠지 울적해졌다. 당시 리지웨이 박사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자넷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이것이 정말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일이란 말인가?' 박사는 이 때 그만두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는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5년 뒤의 리지웨이 박사는 여전히 여기 서 있다. 기도를 올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뒤로하고 그는 다음 유리창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탁자를 두고 마주 앉은 자신과 말라깽이 남자가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는데 이것은 건너편의 리지웨이 박사가 베푼 작은 호의였다. 사이먼은 마음에 드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재주가(잔머리가) 좋았고, 때문에 여러가지 잡일을 보면서 모르모트가 되는 대신 보다 인간적인 삶을 지킬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담당자와 농담 따먹기를 하는 중이었다. 건전한 내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를 상대하고 있는 자신의 표정이 어색하게 경직된 것으로 봐서는. 그럼에도 사이먼은 자랑스레 자신의 허황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리지웨이는 그것을 예의바르게 경청했다.

리지웨이 박사는 잠시 멈춰서서 심호흡을 했다. 그는 언제나 이 부분이 싫었다.

마음을 굳게 정하고 네 번째 유리창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보안 요원 두 명이 사이먼에게 달려가는 모습이 나타났다. 사이먼은 울부짖고 있었다. 박사는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집행 담당자 리지웨이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보안 요원이 침대 위에 붙들어놓은 사이먼을 향해, 박사는 천천히 주사기를 가져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 날 즈음부터, 박사는 D계급 인원들이 범죄자라는 점을 들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로 결정했다.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그는 두려웠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손사래를 치며 경시했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는 점점 무뎌졌고, 나아가 동정심에 거리끼지 않기 위해 인원들과 접촉을 피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리지웨이는 스스로 소름 돋는 전략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또한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정당화하고 있었다. 효율이라니,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그 단어 하나만으로도 모든 우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행태를 설명할 수 있는데.

잠시 공상에 빠졌던 박사는 고개를 젓고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복도가 유난히 더 길어 보였다. 왜 하필 이런 데다 면담실을 배정해놓은 거냐는 새삼스러운 짜증이 솟았지만, 그것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그는 유리창에서 또 다른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저게 누구였더라. 덩치 큰 흑인 남자가 자신의 얼굴 앞에서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그건…… 위협이 아니라 연극이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 박사는 그 날을 떠올리는데 성공했다. 카터는 유치원 교사였다. 그것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 앞에서 홀로 권투하는 시늉을 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앳된 목소리로 자지러지게 웃곤 했다고 말하던 광경이었다. 카터는 쑥쓰러워하는 듯 했지만 목소리에 자랑스러움이 묻어나는 것까지 감출 순 없었다. 그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되었지? 리지웨이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했다. 그가 마주하고 있는 유리창에서 이제 카터는 어디선가 구해온 나이프를 휘두르며 자신을 둘러싼 보안 요원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는 붉어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박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리지웨이는 방 안을 살펴보았다. 멀찍이 뒤에서, 저편의 그는 팔짱을 끼고 카터를 무심하게 바라봤다. 슬퍼하지도, 심란해하지도 않았다. 카터가 저질렀을 악행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을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결국 그 텅 빈 자신의 눈동자 속에서, 한 때 아이들 앞에서 무언극을 펼쳐보이던 카터는 총알 여섯 발로 허무하게 쓰러졌다.

리지웨이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기도를 올린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3년 전? 아니, 4년 전일지도. 사실 자넷 때 말고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박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곳에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거겠지. 이제 그에게 히포크라테스 선서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기합리화도, 상관들이 그렇게나 중요시하는 효율성이라는 말도 필요없었다. 그는 그저 맡은 일을 할 뿐이다. 박사는 이 주제에 대해서 이미 관심을 저버린지 오래였다.

그는 면담을 어떻게 시작할지 생각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곧장 자기 방으로 돌아가 뭐라도 한 잔 걸칠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불쾌한 대면을 가능한 한 빨리 끝내야 할 필요가 있다. '죄송합니다만 선생님, 선생님은 내일 부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쉽게 끝났으면 좋으련만! 리지웨이는 사형수에게 전달할 인사치레를 생각 가는대로 구상했다. 이런,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면담실 앞에 도착한 그는 쓸데없는 생각을 일부러 길게 끌면서 문을 열었다.

……뭔가 이상했다. 면담실의 불이 꺼져 있었다. 리지웨이는 손목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자신이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분명 이 방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전등 스위치를 향해 걸어갔다.

스위치에 손이 올라가는 순간 박사는 뒤늦게 직감했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남자는 방 안에 있었다. 그렇다면 불을 끄고 있던 이유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매복이었다.

박사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바깥에 경비가 서 있었는지 기억해보았다. 없었다. 게으르기 짝이 없는 보안 요원들은 교대 시간이 끝나가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제길.' 눈치챘어야 했는데. 최근 이 남자가 기지 이쪽 저쪽을 휘젓고 돌아다니면서 외부에서 물품을 들여오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는 걸 기억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무기임에 틀림없었다. 그 때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아 흐지부지 넘어갔었지만…… 이 남자는 솜씨가 좋았던 모양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다시 방을 건너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다. 남자는 뭘 기다리고 있는 거지? 아마 자신이 불을 켜는 순간을 노려 정확한 급소를 공격하려고 들 생각인 것 같았다. 리지웨이 박사는 팔에 걸치고 있던 코트 안주머니를 더듬어 상대방에게 대항할 유일한 무기를 감싸쥐었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의료용 메스였다.

이 남자가 자신의 처분일을 어떻게 눈치챈걸까? 낌새는 있었다. 요즘 들어 자신을 미묘한 눈초리로 계속 쳐다보곤 했다. 항상 달력을 보며 조바심을 내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처분 날짜 때문이라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왜 미리 조심하지 않았을까 후회하면서, 리지웨이는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셋, 둘,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 건지도 알지 못한 채, 그는 순식간에 불을 켜고 메스를 뽑아들었다.

방 한가운데에 강렬한 형광등 불빛이 쏘아내려졌다. 리지웨이 박사는 치켜든 메스를 이리저리 겨누어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입구를 향해 한 발짝 물러나는 순간, 중앙에 놓여진 책상 밑에서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리지웨이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한 순간에 스쳐지나갔다. 저 남자가 어떻게 경비 없이 홀로 방 안에 있을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가 바깥에서 들여온 무기는 몽둥이가 아니라 총이었을 거라고, 왜 소리를 질러 복도 끝에 있을 경비를 부를 생각을 하지 못했느냐고, 이건 무진장 멍청한 짓이였다고, 대응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며, 그는 자신에게 뛰어들 그 형체를 향해 메스를 무작정 내밀었다.

"선생님!"

리지웨이는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우두커니 눈만 깜빡였다. 자신 앞에 서있는 남자는 멍청하게 팔을 벌리며 환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뒤편의 테이블 위에 놓여진 케이크가 초를 세우고 형광등 불빛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리지웨이 박사는 아연실색했다.

"깜짝파티…… 인데."

남자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박사는 서둘러 메스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리지웨이와 남자는 잠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표정이 상호 간의 얼굴에 떠올랐다. 누가 보면 웃고도 남을 광경이었다. 마침내 쌍방의 머릿속에 상대방의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남자는 자신의 깜짝파티를 상대편의 입장에서 곱씹어보는 듯 했고, 리지웨이 박사는 이제 곧 크리스마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둘은 어색하게 사과를 주고받고 조촐한 파티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나 남자가 초에 불을 켜기 시작할 때에도 리지웨이 박사는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어쩌면 케이크 안에 폭탄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둘 다 죽겠지만…… 누가 알겠는가? 이 남자는 제한 물품을 들여오겠다고 그 난리를 피웠다. 자신이 관리하는 사람들의 인성에 회의적이었던 리지웨이 박사는 케이크 자체가 그에게는 금지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단지 앞의 남자를 노려보고만 있자, 남자는 싱긋 웃으며 혼자 촛불을 끄고 박수를 쳤다. 그리곤 상자 바닥에서 플라스틱 칼을 꺼내 케이크를 자르기 시작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박사는 주머니 속에서 메스를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파티는 몇 시간에 걸쳐 계속됐다. 술이 약간 곁들여졌지만, 리지웨이는 남자가 그것들을 어떻게 구할 수 있었는지 구태여 묻지 않았다. 담당 경비에 대해서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을 때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구속을 풀고 그를 때려눕힌 뒤 이 건물 어딘가에 재워 놓았다고 대답했다. 진담처럼 느껴지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리지웨이는 경비에게 사과를 전하고 뒷일을 부탁한다는 남자의 약속을 받아줄 수 밖에 없었다.

리지웨이는 그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파티 용품들을 조달했다는 것이다.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살은 더 먹고 죽겠다며 체념한 듯이 피식피식 웃었다. 리지웨이는 대체 왜 그런 일을 벌였냐고 묻고 싶었지만, 곧 죽게 생긴 사람의 생각은 이상하게 튀게 되더라는 대답을 먼저 들어버렸다.

남자는 지금 울고 있었다. 선고를 내릴 필요도 없이, 불행하게도 영리했던 그는 정말로 자신이 처분될 거라는 사실을 진작 깨달았다. 리지웨이는 사람이 울고불고하는 모습에 진저리가 났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잠자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의외로 그것은 여느 때와는 달리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했는데,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웃으면서 자기 이야기를 유쾌하게 주절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리지웨이는 그가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마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사는 흥미롭게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준비가 되었다고 해서 절망감을 떨쳐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됐다.

"하지만 로라를 다시 보고 싶었는데…… 딱 한 번만이라도……."

리지웨이는 이번에는 정말로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마지막 생일 파티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취기가 한껏 올라 비틀거리는 중이었다. 리지웨이는 문득 시계를 보고 벌써 새벽이 거의 다 지나갔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남자는 몽롱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보더니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리지웨이는 남자에게 간단한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방문을 열고 한 발짝 내딛었을 때, 그는 남자가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리지웨이 박사는 D동의 문을 열고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가 되어서야 비친 첫 눈이었다. 박사의 마음 속 한 구석이 갑자기 아련해졌다. 그는 지금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선생님!"

내일 자신을 죽이게 될 남자와 파티를 벌인 사람이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알았지만, 박사는 그의 이름조차 기억해내지 못했다. 남자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계속해서 마음 속에 맴돌았다. 그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바보같이 웃으면서 말했다.

"새해 복……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단순히 취기에 던진 말이 아니었다. 리지웨이는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간절함에 얼얼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새해 복'이란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다.

새해 복. 그 순수한 부탁이라니. 박사는 바람에 휘몰아치는 눈송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까지 무슨 일을 해왔던 것인가? 지금껏 자신이 꾹꾹 눌러 담아왔던 모든 다짐들이 저 눈과 함께 한꺼번에 날려 사라지는 듯했다. 자신의 역할이 인간을 상대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기도, 범죄자, 주어진 소임, 단지 자신과의 싸움만 고민하지 않았는가……. 박사는 쌓여가는 눈더미를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자넷의 얼굴을 한 어린 소녀가 눈덩이를 굴리며 나타났다. 자넷은 작은 사이먼과 함께 힘을 합쳐 눈사람의 머리를 올려놓았다. 그들 앞에서 앞치마를 두른 유치원 교사 카터가 허공에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리지웨이 박사는 자신이 평생토록 큰 짐을 안고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마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리지웨이는 뒤편의 기나긴 녹색 복도를 돌아보았다. 그는 비록 갇힌 몸이었지만, 영혼만은 자유로웠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로렌스 씨. 그는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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