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맞이

눈이 무겁게 내리고 있었다. 주타로는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추락하는 눈의 울부짖음은 창에 한 줄기 흔적을 남기고 저 멀리로 사라져갔다. 마치 저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싸움의 메타포처럼.

사나운 시대였다.

니카호 주타로는 마흔이 다 되어가는 중년의 남자였다. 얼핏 봤을 때는 그저 평범한 사내로 여겨질 법한 인상이었지만, 그는 사실 니카호 일족의 우두머리였다. 수집원 내에서 역병신에 대한 관리를 담당하고 있던 이 가문은 예로부터 특유의 비밀스러움과 비사교성으로 수집원의 다른 일파에게 종종 위협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런 가문을 이끌고 있으니 어디 바람 잘 날이 있을까. 나이의 무게를 절로 실감하게 되는 요즈음이었지만, 그보다도 무거운 것이 한 가문의 당수라는 직함인지라 그의 어깨는 언제나 무거웠다.

그러나 오늘 그의 마음을 불안케 하는 건 여타 정치적 지형 따위의 일이 아니다.

주타로는 조심스럽게 차를 홀짝였다. 씁쓸한 향취가 입안을 가득 메웠다. 녹차의 맛은 머리를 맑게 해주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응어리는 오히려 불안으로 굳어질 뿐이었다.

오늘은 맞이날이다.

그는 잔을 팔걸이에 두고 아무 소리도 없이 창가로 다가갔다. 눈보라는 전에 없이 강력하게 제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지만, 만일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면 그가 큰 곤경에 처해 있으리라고 짐작할 터였다. 사실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이날은 언제나 그의 걱정이었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선조들에게도 그러했고.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이날의 전통은 가문의 손님들을 영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들의 일족을 부강케 한 이들. 그 도래인들. 주타로의 가문과 그들 사이에는 아주 기나긴 이야기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주타로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들어온 이야기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에게 들었을 것이고, 같은 일이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사이에서도 벌어졌으리라. 이 집안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이 그 이야기를 알았으므로, 이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맞이날은 지난 24년간 일어나지 않았다.

주타로는 의자로 돌아가 잔을 들어 올렸다. 차는 아직도 따뜻했다. 그는 방을 나가, 그의 일족이 제 할 일을 하며 지나다니는 목조 복도를 거닐었다. 일족의 구성원들은 침묵을 깨고 나타난 그들의 수장에게 머리를 숙였다. 주타로는 대답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고 발걸음을 옮겼다. 가족을 다시 보니 마음속 한구석에 평안함이 되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걱정할 건 없었다. 올해도 분명 작년처럼 지나갈 것이 뻔했으니.

그의 아들이 달려온 것은 그때였다.

"아버지!"

그의 아들 마사오는 이제 막 8살이 된 소년이었다. 영특하기 이를 데 없는 아이인지라, 어린 나이임에도 최근에는 가문의 비술을 차츰 익히고 있었다. 마사오의 얼굴은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딘가 기시감을 느끼면서, 주타로가 물었다.

"무슨 일이지, 마사오?"

"이방인들이 대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그는 자신의 얼굴에서 혈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타로가 다급하게 물었다.

"키가 크고 창백한 외양을 했더냐? 조선의 의복을 입고?"

"음…아뇨, 아버지." 마사오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저 사내 하나랑 두 계집아이인걸요. 치요와 나이가 같아보였고, 사내는 누더기가 된 양장을 하고 있었어요."

"…알겠다. 고맙구나, 우리 아들." 주타로가 고개를 끄덕이곤 다가오고 있는 그의 동생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부로, 그자가 누구인지 알아야겠다. 그분들 중 하나일 리는 없겠지만, 뭔가 이상하구나.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형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부로가 답했다. "하지만 그가 스승 중 한 분이 아니라 그저 방랑자라면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범인(凡人)이 이 집에 쉬이 다다를 수 없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래도 도와야겠지. 날씨가 너무 사납다. 게다가 그는 아이들까지 있다지 않느냐. 우리가 외면한다면 그들은 죽을 것이다." 주타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가 스승님 중 한 분이 맞다면…"

그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마 기이한 일이 벌어지겠지."


주타로와 사부로, 그리고 몇 명의 청년들은 즉시 대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 중 몇은 추위에 떨고 있을 방문자들에게 둘러주기 위해 담요 몇 장을 들고 있었다. 주타로는 맨 앞에 서서 긴장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들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복도를 오가던 이들이 놀라 물러섰다.

"여전히 거기 있나?"

"네, 대문 앞입니다." 하녀장 오쓰메가 답했다. "치요 아씨가 하인들을 대동하고 옷을 조금 가져다주었습니다."

"다시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겠군." 주타로가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인님. 바로 데려와 따뜻한 방으로 옮겨드렸으니. 게다가 옷으로 몇 겹을 둘렀습니다. 그리고 아씨가 약간 추워하시긴 했어도 기침은 전혀 하지 않으셨지요. 아, 바로 저기— 치요 아씨!?"

오쓰메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주타로가 급히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작은 여자아이가 크고 어두운 색감의 목조 문에 얼굴을 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이 매섭게 추락하고 있었다. 그는 그 즉시 밖으로 달려가 치요를 안아 들었다.

"아— 아버지!"

"치요! 여기서 무얼 하는 게냐!" 주타로가 걱정과 화가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또 폐렴에 걸리고 싶은 게냐? 회복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하, 하지만 아버지—"

"되었다! 나올 생각은 하지 마라!" 그는 치요를 한 팔로 안은 채 다른 가족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바로 그때 주타로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목소리는 문밖에서 들려오고 있었으며, 차분하고 또렷했다. 추위에 고통받고 있는 존재의 목소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주타로는 그 목소리에 담긴 고독과 고뇌의 흔적 역시 느낄 수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태초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만 같은 짙은 색채의 감정이었다.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이지."

목소리를 듣자, 주타로의 눈이 점점 커졌다. 목소리의 주인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숨결에서 폐렴의 잔재를 느낄 수 있었다. 가만두면 재발할 것 같았기에, 불러 그 병을 없애려 하였단다. 기다리지 않은 내 잘못이야."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주타로는 조용히 그의 딸을 바닥에 내려두고, 대문으로 걸어갔다. 걸음걸음마다 점점 무거워지고 부자연스러워지는 것만 같았다. 몽롱한 감각이 열병처럼 몸에 퍼져나갔다. 진짜 그분일까? 한 번이라도 잊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설마 정말로—

주타로가 대문을 열었다. 곧 충격이 일었다. 주타로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스, 스승님— 한노 스승님."

"반갑네, 주타로." 그가 웃었다.

손님은 그곳에 서 있었다.


둘은 주타로의 방에 앉아 각자 팔걸이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주타로는 젊은 외양의 손님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나 있었다. 아마 제때 자르지 못한 듯했다. 손님은 니카호 일족의 특징인 붉은 유카타를 입고 있었다. 남자가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오랜만에 보는군, 주타로. 마지막에 보았을 때보다 많이 큰 것 같은데."

"스승님, 이제 마흔을 넘긴 몸입니다." 주타로가 씩 웃었다. "제가 죽기 전에 스승님을 다시 뵐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미국으로 떠나신 지 스무 해가 되었지요."

"자네의 말이 맞다." 이방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던 날도 아직 기억이 나는군. 1880년 3월 2일."

"제 딸이 태어나기 일주일 전이었지요."

주타로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스승님, 결례를 무릅쓰고 여쭙습니다만, 찾는 바를 이루셨습니까? 그러니까, 찾는 을 만나셨습니까?"

손님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자네 말은 스승님들을 말하는 것이겠지. 큰손님들… 전혀, 주타로."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분들 중 단 한 분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단다. 가모장과 포우루샤스파 스승님이 신대륙으로 갔다는 정보는 뜬소문이었거나 사실로 치부하기엔 너무… 오래된 정보였던 것 같더구나."

남자가 차를 홀짝였다.

"그러나 아주 헛된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의 신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이 성취한 최신의 사상을 들을 수 있었다. 그곳 사람들의 생활 양태를 모방할 수 있었다. 그것은 뭐랄까, 말하자면,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군." 손님은 자기 내부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약간의 경탄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제 아버지가 스승님을 섬겼을 때부터 서양의 문화가 유용하단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주타로는 다시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분을 옛 막부 대신 신정부에 동조하게끔 만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고요."

"변혁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마땅히 그 추종자가 아닌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포우루샤스파 스승님이 내게 언제나 역설하신 말이다. 너희 아버지 히로토모, 그리고 네 숙부 아리노부는 강인한 영혼과 단단한 의지로 변혁의 지도자가 되기 원한 진정한 무사였다. 난 단지 조언자였을 뿐이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곧, 그의 얼굴이 금세 차분해졌다. 주타로는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했지만, 눈앞의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조언자였단다. 단지 자네의 혈족뿐만 아니라 조선의 경주 이씨와 김씨의 일족에게도 그러했다. 역사의 교차로에서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지, 그대들과 함께 숙고하고 투쟁하며 거닐어 왔지." 손님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게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가 주동의 위치에 서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문의 수장이 놀라 답했다.

"아니야, 주타로. 진정으로 나는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젊은 외양의 남자가 울적하게 대답했다. "나 역시 주동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내가 이를 의욕하든 의욕하지 않든 간에."

그는 자신의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주타로는 남자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스승님이—"

"저 아이들은 나의 소생(所生)이다." 그는 조금은 자랑스럽게, 조금은 슬프게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이야, 내가 그곳에 거하고 있었을 때…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과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도망자일 뿐이지. 다시 말해 저들은 내가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존재라는 말과 같다. 하지만 지금 나의 힘은 너무나도 미약하구나."

손님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사람들의 보살핌 아래 우릴 의탁하고 싶다." 남자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내 아이들에게 집을 주고 싶다. 그 안에서 거하고, 동년배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고, 아무 걱정도 없이 편히 쉴 수 있는 집을. 그리고 내가 아는 가장 최적의 장소는 이 공간, 니카호 일족의 집이다. 부탁하마. 우리에게 이곳의 한구석을 내어다오."

침묵이 둘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주타로가 갑작스레 일어나 두 무릎을 꿇고 남자에게 절했다.

"돕겠습니다, 스승님.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지요." 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이 일족의 모든 이들은 그 목숨을 스승님께 빚졌습니다. 우리가 어찌 외면하겠습니까? 스승이시여, 이곳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리고 아씨들은 저희 자식과 같이 대우받고 자라게 될 것입니다."

손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주타로에게 몸을 기울였다. 목구멍으로 고마움의 말이 차올랐지만, 그 강도가 너무나 강하여 도리어 목을 막아버렸다. 남자는 단지 주타로의 어깨만을 두드려 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고맙네, 주타로. 자네의 친절함에 감사할 뿐이야." 남자가 중얼거렸다. "언제나 자네들 니카호 일족에게는 도움만을 받는군."

"스승님들께서 저희에게 주신 도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뿐입니다."

주타로가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 이제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밤이 깊어 오니.. 지치셨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인위적인 미소가 주타로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그의 딸이 전일 손님이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서 눈썹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꽤나 강압적인 표정이라고, 주타로는 생각했다. 고지식한 성격의 딸은 자기 어미를 닮아서인지 늘상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특히 뭔가가 상당히 불만족스러울 때는 더더욱.

"음, 후미코, 네가 날 왜 보고 싶다고 했는지 모르겠구나."

"딸이 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것이 어색할 일은 아니지요."

"그렇기는 하다만—"

"아버지," 후미코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주타로의 어색한 미소와 동시에 방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했다. "웬 이방인들을 이 집에 들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이들은—"

"아버지, 이 에요." 후미코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남자에게 니카호 성을 주고 이 집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게다가 제가 듣기로는, 수집원에까지 기용하려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만."

"그래… 그게 문제가 되느냐?"

"문제요?" 후미코가 차갑게 웃었다. "아버지, 제가 모를 줄 아십니까?"

"네가 모르고 내가 아는 게 뭔지조차 모르겠구나. 아침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그 남자를 후계자로 세우려는 게 아닙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웬 어중이떠중이를 이 일족에 받아주곤, 전 어디 오오에야마 가문 같은 곳에나 시집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순간 주타로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후미코 이 아이가 하는 말인즉슨, 웬 출신 성분도 불명확한 남자 하나를 가문에 들여, 현재로서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 후미코를 내쫓고 그를 대신 후계자로 세우겠다는 계획을 벌이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게다가 그걸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세워 실행하고 있다는 것. 무슨 말인가 했는데 생각보다 어이가 없는 이야기가 튀어나와, 주타로는 일단 맥이 탁 풀렸다.

후미코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게 아예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니카호 일족의 내부 구도라는 것이 아직도 장로층과 수집원 관련자들의 입김이 강한 터다. 애초에 주타로 자신부터가 수집원의 정일등 연의관이며, 장로들의 지지를 등에 입고 당주가 된 자가 아니던가. 그런 고색창연하고 꽉 막힌 일족 내부에서의 알력 다툼은 공공연한 비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 권력 싸움을 뚫고 온 자신이었기에 후미코의 절박함을 알 수 있었다. 후미코는 더욱이 행정력이나 두술에 조예가 깊은 정도 등에서 일족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지만, 오로지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장로층의 질시를 겪는 일이 많았기에 더욱 이런 부분에서 민감할 터였다. 주타로는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

"그럼 아버지께서는—"

"잠깐 내 말 좀 들어보겠니? 네가 화가 났다는 건 알겠다만, 상황 설명은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후미코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주타로의 말을 따라 말을 멈추었다. 주타로는 목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뭘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부터 고민이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기억하겠지. 이 가문의 은인들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후미코가 움찔하면서 주타로를 바로 바라보았다. 주타로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딸아이는 언제나 이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 전승에 대한 후미코의 애착은 남달랐다. 자기 눈으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으면서도 집안의 어른들 뒷꽁무늬를 쫓아다니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수집했다. 이 일족에 두술을 전수한 존재들, 몇 년에서 몇십 년간 머무르다가 어느샌가 또다시 바다 저편으로 훌쩍 돌아가는 사람들, 가문의 스승… 손님네.

"손님네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떤 내용인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그, 그럼요. 대한국에서 온 세 명의 큰스승께서 가졌음에도 베풀지 못한 자를 단죄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 아들인 작은 손님이 큰스승의 도를 따르게 되면서 이야기는 끝나지요. 헌데 이건…어찌 물어보십니까?"

"…에도의 막부가 세워지기도 전에 말이다, 후미코. 큰스승 간에는 불화가 있었다. 변혁을 적용하는 강도와 범위에 대한 논쟁이었지. 스승들은 서로 다투었고, 결국 다른 길을 걷게 된단다. 그때 야카르엔 스승과 포우루샤스파는 새 땅에서 새 도를 세우기 위해 서쪽으로 떠났지. 아슐링 스승과 바누야트 스승께서는 동방에 남아 여전히 그 도리를 펴게 되었단다."

"그 역시 들었습니다." 후미코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슐링 스승께서 사라지시자 바누야트 스승, 즉 한노 스승께서는 한동안 우리 일족과 함께 지내다가 제가 태어나기 직전에 미국으로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분이 어제 돌아오셨다."

"…네?"

후미코가 잠시 인상을 쓰더니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네?"

"어제 온 부랑자가—"

"한노 스승님이라고요?"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후미코의 얼굴에서는 이미 적개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살짝 멍한 표정이 이어지다가, 점차 눈이 커지는 얼굴. 어린 시절의 그때로 돌아간 듯한 감각에 주타로는 어딘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살짝 나오려는 웃음을 잡아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작은 손님이요?"

후미코가 믿기 어렵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렇다니까."

약 10초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바람만이 남았다. 후미코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달려 나가버린 탓이었다. 보아하니 그 손님에게 달려간 모양이었다.

주타로는 반쯤 입꼬리를 올린 표정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갈등이 이런 식으로도 풀리는군, 하고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후미코가 저런 반응을 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는 건지, 아니면 딸애가 보이는 반응이 신선해서 웃음이 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따라가 말려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후미코가 어련히 잘하리라 생각하며, 주타로는 다시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래…좋은 시기에 다시 오셨지. 그분께도, 후미코 네게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가문의 수장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겨울의 아침 햇살이 세상을 찬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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