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평가: +3+x

플룻을 불었던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상당히 잘 불었던 것 같다. 집 한켠에 놓여져 있는 상장들 가운데 몇개는 분명히 플룻 대회에 나가서 받아온 것이었고,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 일이지만 나는 분명히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적이 있었으니까. 정장이 아닌 턱시도를 입고, 서류가방 대신 플룻을 들며 출근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숨을 쉬었다. 아버지는 회사원이었고 그렇게 멋져보이지는 않았으니까.
음악 선생님은 플룻을 활기차게 부는 아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이런 재능 있는 아이를 만나서 기쁘다고 했다. 런던의 하늘은 먹구름이 자주 끼기 때문에 다들 서정적으로만 플룻을 불었던 걸까. 노래를 연주한다는건 이렇게 즐거운 일인데 어째서 비 오는 날에 걷는 것처럼 우울하게 연주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회에 나가 여러차례 상을 타 오면서 나는 조금의 자만심을 가지게 되었다. 장기자랑을 할 때마다 나는 플룻을 불었고, 좀처럼 보기 힘든 특기에 어린아이들은 열광했다. 친구도 여럿 사귀게 되었다. 부모님은 나에 대한 기대로 흘러넘쳤다. 이 아이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반드시.

그 나이 또래가 그렇듯 나는 내가 정말로 둘도 없는 천재인 줄 알았다.

7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자만했다. 2년동안 대회에 나가오며 나는 오만했다.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어찌되었건 그 생활동안 내가 들어온 비판이나 날 선 충고는 없었으니까. 사람들은 나이를 훌쩍 뛰어넘은 솜씨의 소년에게 열망을 불태웠다. 정원사가 귀중한 꽃을 대하듯 나를 대했다. 조금의 가위질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겨 영원히 이 활기찬 연주를 들을 수 없을까 겁에 질렸다. 나의 수 배를 더 살아온 경험은 놀라운 속도로 내 마음의 경계를 찾아내었고, 선생님과 부모님, 평론가들과 수많은 친지들은 그걸 빼어나게 활용했다. 이 아이가 다치지는 않지만 잘못을 알 수 있게. 혼자서도 그의 음악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게. 어쩌면 그들은 윌리엄 킨케이드나 자스민 최를 보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자만이나 오만과 게으름은 흔히 생각하는 것 보다 꽤나 멀리 떨어져있다. 내 자만의 탑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 지 잘 알고 있을정도로 머리가 좋았기에 나는 노력했다. 탑을 높게 쌓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으면 불안했다. 내 위에 아무도 없어야 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 모든 건 내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 명확한 진리. 언젠가 이렇게 노력하다 보면 선생님이 그렇게 극찬하던 연주자들도 따라잡을지 몰랐다. 그들처럼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이는 플룻을 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같은 경지에서 관객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연단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도록 나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렇기에 내 탑은 높고 견고했다.
소년의 등장 역시 예견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말이 둘도 없는 천재지 사실 한명쯤 더 없겠는가. 소설이나 만화에도 많은 그런 아이들. 콩쿠르에서 만나서 서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고, 승패를 떠나 진정한 승부를 즐기며 서로의 실력을 쌓게 도와주는 그런 조력자.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언제고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원했다. 혼자 완성하기보다는 친구와 함께 완성하고 싶었다. 이 '음악적 성취도'를 같은 눈높이에서 평가해주기를 빌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무심하지 않아서 소년 하나를 내게 보내주었다. 심부름을 갔다 오는 길에, 교차로 앞에서.
한 손에는 과자봉지를 들고 있었다. 다른 손에는 비닐봉지 한가득 식재료를 들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어제 막 배운 악보로 들어차있었다. 주변의 소음, 길거리 악사의 음악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내 귀속에서 소리를 들었다. 소리와 함께 가득 보였던 건 길을 막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음악이 아닌 경건한 설교를 듣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대로변에 30명 정도가, 소리를 들은 사람들 전부라도 봐도 좋을 만한 인파가 내 나이 또래의 소년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는 플룻을 불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의 파도가 내 머리를 휩쓸었다.

언젠가 들었던 묘사와도 같았다. 마음을 움직이는 연주였다. 자기반성, 후회, 그리고 그 속에서 솟아오르는 희망. 나는 자만했던 나의 과거를 반성했다. 고작 이 정도 실력을 가지고 적수가 없었다고 생각했다는 걸 후회했다. 그리고 반드시 저 소년의 연주를 이겨보겠다고 내게 다짐하며 그렇게 서 있었다. 연주가 끝나고 소년이 가방 한 가득 채워진 파운드 위에 플룻을 얹을 때까지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반성이 내 마음을 휩쓸고 있었다. 그동안 쌓아왔던 오만함은 산산이 조각난 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 연주는 그 정도의 충격이었다.
천천히 내 마음을 수습하고 나는 소년과 친구가 되었다. 이름은 잭이라고 했다. 소년은 어릴 때 부모를 잃었고, 지나가던 은사에게 플룻 부는 법을 배워 그걸로 먹고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그가 불었던 노래가 무엇인지 물어봤고, 그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의 은사가 그에게 알려주었던 유일한 곡이었고, 그는 단지 그걸 외워서 불 뿐이었다. 오래전의 곡을 외워서 부는데도 그런 연주를 할 수 있다는건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그가 콩쿠르에 나오지 않았다는 걸 신에게 감사했다. 만약 그가 나왔었더라면 나는 오래전에 절망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정신이 충격을 넘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자만심은 어느새 다시 조립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기이한 연주를, 단지 그가 한 곡을 오랜 세월 불어왔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납득하고 말았다.
그 후로 몇 년이 흘렀다. 나는 그를 위해 무료로 곡을 몇 개 알려주었고, 그는 내가 알려주는 콩쿠르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의 낡은 플룻은 더 낡아졌고, 그의 노래는 더욱 충격적이 되었다. 가냘프며 청량했다. 나의 활기찬 음색과는 전혀 다른, 조금은 위태로워보이는 그런 선율이었다. 나는 그의 연주를 존경했지만 질투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꼈다. 밤에 울며 잠든 적도 많았다. 그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가장 견고한 벽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나를 친구로서 좋아했다. 그는 나의 연주를 듣기 힘들어진 것에 대해 속상해했다. 그는 내게 다시 그 활기찬 연주를 듣고 싶다고 말해주었다. 요 근래 내 연주가 너무 서정적이고 우울해지게 된 걸지도 몰랐다. 나는 무언가 계기가 필요했다. 완전한 공백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강력한 동기가 필요했다. 간간히 듣던 그의 첫 노래로는 부족했다. 악보 없이 외워서 부는 노래가 완전할 리 없다. 그가 악보를 보며 같은 노래를 내게 연주한다면 나는 어쩌면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 갈망은 위험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노래를 들어버린 이상 그것은 이미 마약에 가까운 것이었다. 단 한 순간도 그의 연주를 듣지 않으면 각오를 다질 수 없었다. 노력을 할 동기를 찾기 힘들었다. 만성적으로 그의 연주는 나의 자립심을 파괴하고 있었다. 이대로 망가지기 전에, 나는 조금이나마 실낱같은 희망을 잡을 필요성이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런던의 한 홀에서 그의 은사가 소속되어 있는 극단이 연주회를 열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홀 안에서 나는 초조감에 손톱을 씹으며 그의 연주를 기다렸다. 부모님의 손을 꼭 붙들며 나는 그가 지휘자에게 허락을 맡는 걸 지켜보았다. 반쯤 녹슨 플룻을 가지고 기뻐하는 걸 보았다. 그는 내 옆에 와서 손으로 브이자를 그려보이며 웃어주었다. 나도 그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앞으로 10분,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만성적인 의존을 버려버리고 새롭게 연습할 기반을 얻게 될 것이다. 기대감에 부풀어 나는 단상을 행복하게 쳐다보았다.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소년이 연단으로 천천히 올라가는게 보였다. 보면대는 소년의 눈 앞에 있었다. 마침내 내가 찾던 그 기적이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 소년은 천천히 팔을 올렸고, 플룻에 그의 선홍색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엄숙함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꿈을 꾸었다. 노래를 들으면서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면 조금은 이상하게 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안에서 환상을 보았다. 들어올린 소년의 은색 막대에서, 조용히 감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밤 공기들 속에서 그림을 보았다. 내가 닿지 못할 자리에 서 있는 소년을 보았다. 몇년이나 지났을지 모를 어느 밤의 홀에 당당히 서서 플룻을 부는 청년을 보았다. 그 작은 은색 막대에서 흔들리는 공기가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장소의 한 가운데에서 나는 또한 나의 미래를 보았다. 조용히 박수를 치며 앉아 있는 청년을 보았다. 그 꿈은 너무나도 적나라한 스포일러였다. 나는 더 이상 플룻을 불 이유를 찾지 못했다.

플룻은 이제 그저 깔끔한 옛날의 추억일 뿐이었다.

소년은 나를 다시 찾지 못했다. 나는 다시 소년을 찾지 못했다. 내가 플롯을 그만둔 이후 나는 런던에서 조용한 시골로 이사왔고, 그곳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악보가 내게 알려준 대로 나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삶을 살아왔다. 벽은 높았지만 힘들지 않았다. 나는 내 생각보다 수학과 과학에 재능이 있었고 무난히 대학교에 입학해 무난히 취업했다. 나쁘지 않은 회사에서 괜찮은 연봉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가끔 부모님도 찾아뵈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래도 가끔 그런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만일 내가 그 날 노래를 듣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플룻을 불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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