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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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나는 아직도 내게 일어난 일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비 아저씨, 혹은 오캐인 대령 혹은 O5-10은 제 1차 세계대전 때의 장교복을 입고 있었다. 많이 닳은 옷이었지만 분명 그것은 대령에게 있어 가장 품위 있는 자리에 입는 옷이었으리라. 나는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에 집중했다. O5의 마지막 명령에 윤리 위원회는 마지막 자비를 베풀었다. 아주 강력한 진통제와 수면제, 그리고 태양같이 강한 불꽃. 살아있는 사람을 한순간에 재로 만들기에 충분한. 나는 짐을 싸들었다. 그리고 버스에 탔다. 몇 달 만의 외출이었다. 버스를 타고 공항에 가서, 내가 근무하던 기록보관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학으로 갈 것이다. 짐은 많았다. 그뤼네테 씨와 오캐인 대령은 나를 쳐다보았다. 내 눈은 두 개였지만, 그들을 동시에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힘 내게.”
오캐인 대령이 처음으로 던진 말이었다.
“용감한 사람이라 생각하네. 아무리 군인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규칙을 지키기는 힘들 텐데 말일세.”
오캐인 대령이 두 번째로 던진 말이었다.
리는 오캐인 대령과 그뤼네테 씨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 둘은 사람 보는 눈이 없다.
“잘 모르겠어요.”
내가 처음으로 답한 말이었다.
“정말 잘 모르겠어요.”
내가 두 번째로 답한 말이었다.
줄이고 줄이고 줄여서 여행가방 두 개 분량의 짐을 쌌다. 나의 짐은 많았다. 하지만 정작 내 짐은 없었다. 나는 손 안에서 녹다 만 붉은 돌 두 개를 굴렸다. 한 사람을 녹여버린 그 불 속에서 돌멩이 두 개는 멀쩡했다. 그뤼네테 씨와 오캐인 대령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내게는 익숙한 붉은 색이었다.
“담뱃대…….”
내가 중얼거렸다.
그뤼네테 씨는 이 조약돌을 어떻게 처리할지 오캐인 대령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나는 부러진 담뱃대를 손에 넣고 굴리고 있었던 선배를 생각했다. 담뱃대, 선배, 부러진, 동생, 선배의 할아버지. 선배는 나를 정확히 꿰고 있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뤼네테와 오캐인 대령은 다시 한번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붉은 돌을 손 안에서 굴렸다. 골초만이 갖는 명예의 상징이라고 선배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담배 연기로 컬컬했다. 여자의 목에서 그런 목소리도 나올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선배의 웃음을 기억했다. 타다 만 담뱃대를 손 안에서 다시 굴렸다. 선배의 마지막 웃음소리를 기억했다. 내가 한 말에 포복절도를 했다. 나는 녹다 만 돌멩이를 손 안에서 계속 굴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한다. 파이프 담배의 잔해는 내 손에서 계속 굴러다녔고, 그 작은 움직임은 톱니바퀴를 굴려 나를 대학 앞으로 내쫓았다.
“학사라고 했나?”
13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06은 애매한 때에 은퇴를 했네.”
오캐인 대령이 말했다.
“우리는 10년에 한 번씩 코드 번호를 바꿔요. 하지만……. 아직 10년이 안 지났죠.”
그뤼네테가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면 코드 번호를 바꾸기 3년 남았네.”
13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무책임한 여자야.”
13이 중얼거렸다.
“무책임하지 않소.”
오캐인 대령이 반박했다.
“그만들 해요. 그래서 우리 O5 평의회에서는 3년간 당신을 놔두기로 했어요.”
그뤼네테가 말했다.
“그 동안 공부나 하면서 자네의 자리에 익숙해지게, 후임.”
13이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차갑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표정에는 희망이 없었다. 선배의 죽음이 그에게서 무언가를 뺏어간 것일까.
“아담……. 아니, 13은 리와 사사건건 부딪혔어요. 그냥 그래서 당신을 고깝게 보는 거니까 너무 속상해 하지 마요.”
그뤼네테가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나는 대학원 건물 앞에 섰다. 짐은 기숙사에 풀어놓았다. 담당 교수님이 나를 찾는다 했다. 나는 반쯤 겁에 질려 있었다. 공부나 하면서, 라니. 나는 조심스럽게 건물에 들어갔다. 곧 나는 교수와 마주앉았다. 적절히 늙은 교수였다. 반백의 머리에 동그란 얼굴, 낮은 콧대, 밋밋한 광대뼈, 살구씨 모양의 눈, 그리고 두꺼운 돋보기 안경. 그는 내가 들어와 앉을 때까지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는 나를 치켜보았다. 손에는 서류가 들려있었다.
“그래서.”
교수가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라고?”
“당신과 관련된 기록은 모두 말소되었어요.”
그뤼네테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당신이 원하는 이름을 아무거나 골라잡아요.”
내가 곧장 대답하지 못하자 교수가 재차 물었다.
“리…….”
나는 기에 눌려 중얼거렸다.
“리? 스펠링이 어떻게 되나?”
나는 잠시 망설였다.
“L-E-I-G-H.”
“그래, 성은 어떻게 되나.”
교수는 받아 적으며 물었다.
“제……. 제스요.”
순간 생각나는 단어가 그것이었다. 논리적 추론 엔진, 제스.
“제스? J-E-S-S?”
교수는 날카롭게 나를 쳐다보았다.
“미……. 믿기진 않겠지만…….”
“프로테제가 아닌게 신기하군그래.”
교수가 비꼬았다.
“장난치지 말게.”
“진짜입니다.”
내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그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알겠네. 장난이 아니라니 그렇게 믿어주겠네.”
교수는 마저 받아 적었다. 나는 손을 배배 꼬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방이 유달리 시원해서 그렇다고 나는 믿고 싶었다.
“예전에 기록원에서 일하던 사람이 뜬금없이 온톨로지라니, 직장에서 그렇게 시키던가? 거기다가 고문서 복원 전문가라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여기가 아니라 고고학이나 다른 곳으로 가야하는게 아닌가?”
교수는 나를 깔보았다. 동시에 내게 온톨로지 공부를 허락한 나의 직장까지 깔보고 있었다.
“제가……. 해야 합니다.”
사실 내 결정을 듣고 O5-13은 교수와 똑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그 중 논리적 추론 엔진에 관심이 있다고.”
교수가 서류를 한 장 넘겼다.
“얼마나 알고 있나?”
“06이 자네에게 얼마나 가르쳤나?”
13이 물었다.
“뭐 인수인계나 그런걸 해줬을 것 아닌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13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쓸모없는 여자라니까.”
“그래서, 하나도 모른다 이건가?”
교수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굳어서 교수를 쳐다보았다.
“학부 과정부터 다시 할거면 대학에 입학을 하던가 하게. 대학원이 아니라. 아니면 자네 전공 분야로 가버리게. 뭐, 그것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
그의 말은 서리처럼 차가웠다. 순간 나는 무슨 용기가 났는지 외마디 비명처럼 외쳤다.
“새……!”
교수가 나를 쳐다보았다.
“새의…… 새의 날개짓과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봄철, 봄에 새들은 분주하게 날아다니…… 죠. 둥지를 만드려고요. 하지만 둥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둥지를 찾는……. 방법은……. 새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거에요. 새들의 날개짓을 연결하여 우리는 둥지를…….”
“우리는 시인을 받는게 아니네.”
교수가 내 말을 잘랐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학자일세. 그것도 기계를 다루는 학자 말일세. 시를 쓰려면 다락방으로나 도망가버리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할말 없으면 나가보게.”
조용히 일어서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교수는 나를 끝내 쳐다보지 않았다.
“자네가 걱정되는 건 사실이네. 자네, 꽤 어리버리하잖나.”
오캐인 대령이 일부러 웃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인지라. 대신 특무부대에서 괜찮은 녀석이 하나 갈 걸세. 보이지는 않겠지만, 없는 것 보단 낫겠지.”
나는 교수실 문을 닫았다. 복도에 조교가 서있었다.
“완전 깨진 얼굴인데요?”
조교는 나를 안됐다는 듯 쳐다보았다.
“원래 저 교수님이 엄청 유명해요. 어휴, 도대체 왜 여기로 온거에요?”
나는 힘없이 웃었다.
“그냥 말투가 저러는거니까 힘내시고. 기숙사에서 지낸다고 했던가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길은 알죠?”
다시 한번 끄덕였다.
“휴. 힘내요. 모르는 것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조교는 쾌활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교수의 방에 들어갔다. 나는 바지 주머니 속에서 돌을 굴렸다. 오캐인 대령과 그뤼네테는 나에게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다른 O5 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곳에 오기를 원치 않았지만, 그들 앞에서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3년만 버텨요. 못 버티겠으면 우리에게 연락하고요.”
그뤼네테는 친절하게 내게 말했다.
“잘 해낼 수 있을 거에요.”
하지만 나는 그 여인의 눈에 담긴 약간의 불안감을 볼 수 있었다. 그건 다른 O5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단지 06의 명성 때문에 나를 눈감아주고 있었다. 모두 13에게 은근히 동조하고 있었다. 나는…….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 것일까. 침대에 걸터앉았다. 삼 년. 그 동안 나는 그 사람들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나는 방 안에 아무렇게 팽개친 가방 두 개를 보았다. 첫 번째 가방에는 선배의 기록이 들어있었다. 선배의 방을 치우면서 가져온 기록이었다. 오캐인 대령이 중얼거렸다.
“너무 오래 살았나 봐.”
나는 오래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선배의 방을 아주 자세히 보았다. 모든 것은 분류되어있었다. 모든 것은 철저히 나눠져 있었다. 결벽증 환자의 방처럼. 나는 그 철저함에 몸서리쳤다. 나는 그저 선배가 분류해놓은 것 중 기록만 골라내면 되는 것이었다. 책장 안에는 책이 빼곡이 들어차있었다. 1910년대의 DDC 판본. 빌어먹을 듀이. 나는 중얼거렸다. 판본 앞에는 반쯤 비어있는 위스키. 그 때 내게 먹인게 위스키였다니. 사전과 소설. 선배는 소설도 읽었다. 그 앞에는 담뱃대가 네 개 있었다. 그리고 담뱃잎과 담뱃재를 털 때 쓰던 신기한 도구들도. 각종 논문과 프로그래밍 책. 그 앞에는 아주 오래된 사진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그 중 나는 선배의 기록만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일기장, 플로피 디스크, 시디, USB, 외장하드. 학교에 들어오기 전 반년 동안 나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기록을 정리했다. 디스크와 시디, USB에 있는 파일을 모두 옮겨야 했다. 선배의 노트북을 열었다. 그 안에도 기록이 일기장이 잔뜩 들어가있었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오캐인 대령은 혀를 내둘렀다.
“연구원들도 이렇게 꼼꼼하게 일지를 작성하진 않을 걸세.”
나는 완전히 질려버렸다. 10과는 다른 이유로 나는 질렸다. 선배는 나중에 자신의 일기를 남이 볼 것이라 생각했는지, 친절하게 정리해놓았다. 아주 친절하게. 나는 연도를 분류할 필요도 없었다. 선배는 공책을 묶어놓았다. 20년대의 일기만 있던 그 소포를 생각했다. 선배는 그것을 찾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들지는 않았으리라. 도대체 왜?
“집중하게.”
교수가 내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컴퓨터에 꿈틀거리며 지나가는 글자들은 내가 사는 세계와 다른 것이었다. 선배는 데이터 배이스와 검색 알고리즘을 짰다. 기록보관소의 휴게실에 담배를 물고 앉아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자기 말로는 코드부터 짜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비유하면 코드를 짜는 프로그래머들이야말로 커다란 뼈대를 만드는 설계사였다. 선배는 다만 그들이 만든 건물을 뼈대 안을 멋지게 꾸미는 디자이너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컴퓨터로 해본 것이라고는 음악을 다운 받는 것이 전부였던 나는 언제나 선배의 일이 대단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대략적인 설명을 마치고 교수는 밖으로 나갔다. 조교는 책상과 책상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학생들을 돕고 있었다. 나는 현미경에 가까운 돋보기를 끼고 있어야 했다. 먼지로 서서히 부서져가는 오래된 종이를 분석하고, 쓰인 잉크를 알아내고, 그것을 앉아서 그대로 따라 그려야 했다. 컴퓨터는 나에게 익숙한 존재가 아니었다. 조교는 내 자리에 한참을 머물렀다.
“음, 이런 말 하기 정말 미안한데요.”
조교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재능이 없는 것 같은데요.”
나는 침대에 뻗었다. 더 이상 비어있는 컴퓨터를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O5 평의회에서는 내가 지내야 할 3년 동안 새로운 장비를 지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선배의 것을 쓰게 했다. 노트북, 핸드폰, 보안카드. 나는 멍하게 고개를 돌렸다. 내 눈은 천장에서 벽으로 옮겼다. 바닥에는 일기장이 떨어져있었다. 어제도 저걸 읽다가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리와 그뤼네테, 그리고 스킹크는 제 2차 세계대전을 지새우고 있었다. 오캐인 대령은 후시아틴의 숲으로 갔고, 그 뒤에는 다수의 기동 특무 부대 부대원들이 있었다. 리는 오캐인의 전보를 받았다.
“전보요?”
그뤼네테가 웃었다.
“지금도 가끔 보내요. 왜요, 신기해요?”
저번에 선배가 전보로 내 행보를 보고했다는 말에 대해 물었더니 그렇게 말했다.
“문자 메시지 보내는 수준으로 보낸다니까요. 받는 게 더 힘들어요.”
나는 오캐인 측에서 고생을 했을 병사를 상상했다. 선배가 책상을 두드리던 것이 생각났다. 묘하게 규칙이 있으면서도 막상 그 규칙을 찾을 수 없었다. 뭐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으면 늘 책상을 두들기곤 했다. 어쩌면 그건 전보를 치고 있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모스 부호. 나는 몸을 돌렸다. 팔을 뻗어 일기장을 주었다. 독서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나는 컴퓨터를 덮었다. 일기를 읽었다. 나치와 함께, 혼돈의 반란은 유럽을 헤집고 다녔다. 재단은 의외로 세를 펼치지 못했다. 사실 그 당시 유럽에서 재단을 도와줄 국가는 거의 없었다. 영국은 매일같이 폭격을 당하고 있었고, 소련은 독일에 대항하느라 바빴다. 오캐인 대령의 전보가 껴있었다.

최악.

하지만 더 최악인 것은 그 동안 본부는 미국 내에 잔존해있는 혼돈의 반란과도 맞서야 했다는 것이다. 정부에게 손을 벌리자니 수뇌부 셋을 감시하기 위한 장교나 비밀 요원이 꼭 하나씩은 껴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해줄 케테르는 없었다. 오캐인 대령은 좋은 전술가였지만, 그는 유럽에 있었다. 이들은 유럽으로 가지 않은 유일한 기동 특무 부대와 여기저기서 쏟아져 들어오는 혼돈의 반란을 막아내느라 동분서주했다. 최악. 그 짧은 전보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단지 안팎으로 적이 들이닥치고 정부에서 재단을 호시탐탐 감시할 기회만 노려서가 아니었다. 리, 그뤼네테, 데미안, 오캐인은 각각 저마다의 방법으로 힘들어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사람들이다. 케테르가 죽고, 어제의 친우가 적으로 돌아서고, 무엇보다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었던 전쟁이 다시 일어나고 말았다. 전화기가 울렸다. 나는 일기장을 넘겼다. 손으로 더듬어 전화를 받았다. 선배의 전화기로 오는 전화라면 뻔했다.
“여보세요.”
“O5-13일세.”
가장 달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네.”
“주변에 아무도 없나?”
나는 내 방을 둘러보았다.
“네.”
“며칠 뒤, 평의회가 열리네. 참석하게.”
“어디서요?”
전화 안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노트북은 뒀다 어디에 쓰려고 하나?”
나는 풀이 죽었다.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잘 듣게. 접속 방법을 알려줄 테니.”
나는 서둘러 종이와 펜을 찾았다. 일기장은 잠시 옆에 치워두었다. 접속 방법은 길고 복잡했다. 선배는 매번 이 복잡한 과정을 밟아 회의에 참석했을 것이다. 나는 메모를 보았다.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이틀 뒤일세. 늦지 말게. 아, 참. 이건 별개의 이야기인데.”
13이 잠시 뜸을 들였다.
“06이 자네에게 인수인계를 위해 정말로, 어떠한 기록도 안 남긴 겐가?”
“…….아직 다 읽어보진 않았는데…….”
“그 여자나 그 후임이나 하여간.”
13은 혀를 한번 차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단조로운 통화 종료 음이 흐르는 전화를 붙들고 있었다. 천천히 내렸다. 왜 선배는 죽었을까. 차라리 그 3년 동안 나를 가르치지. 나는 일기장을 잡았다. 확실히 기록을 정리할 때 업무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선배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선배는 규칙을 지킬 줄만 알았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은 몰랐던 것일까. 나는 일기장을 내려보았다. 입술을 꾹 깨물고 일기장을 펼쳤다. 첫 번째 일기장이 나를 토끼 굴로 인도했듯 이 일기장도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으면 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곳으로.
“……. 여전히 이해를 못하는 표정인데요.”
조교가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나는 마른 세수를 했다.
“괜찮습니다! 계속 해보자구요.”
조교는 두 손을 비볐다.
“…….미안해요.”
“미안하긴요.”
조교는 다시 복잡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알아들으려고 애썼다. 조교는 내 표정을 보고 다시 설명을 멈췄다.
“이게 필수적인 가봐요?”
“필수…. 라니요?”
“직장에서요.”
나는 말하지 않았다. 조교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선배가 죽었다. 선배의 자리가 비었다. 나는 그 자리를 채울 사람이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리의 동생은 태평양 전쟁 중에 죽었다. 마약을 먹고는 경찰에게 덤볐던 것이다. 경찰은 약쟁이의 신변을 보호할 필요를 못 느꼈으며, 발포. 끝이었다. 리가 그 소식을 들은 것은 할머니로부터였다. 리는 단 한마디를 던졌다.
“잘 됐네요. 어차피 치워버리려고 했는데.”
리는 냉랭했다. 리는 자신의 앞에서 울부짖는 노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뤼네테 앞에서 리는 환하게 웃었다. 리는 그뤼네테의 표정이 변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데미안은 리의 반응에 아무 말도 못했다. 리는 데미안이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있었다. 리는 일기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변호했다. 상식이라는 이름 아래에서였다. 맨날 사고만 치고, 반쯤 미쳐있으며, 할 줄 아는 것은 약을 빠는 것이고, 사기 당하기나 하고, 교도소에 들락거리는 녀석이 죽는 것이 뭐가 나쁜가, 상식적으로 이건 기뻐해야 할 일이다.
“06, 말씀하시죠.”
나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13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헛기침을 했다.
“집중하십시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사람은 06이 아닌, 06의 후임일 뿐이었다. 매번 평의회가 열릴 때 마다 그들은 나를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그 눈빛이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그들은 나를 귀찮게 여기면서 동시에 나를 감히 어쩌지 못했다. O5-06, 아니, 리가 직접 뽑은 후임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그 사람이 이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럼 반대 의견이 있습니까?”
나는 그들을 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문 틈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 눈빛과 같았다. 나는 몸서리치며 머리를 감쌌다.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성가시죠?”
내가 조교에게 물었다.
조교는 같은 것을 열 번 째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는 나를 말똥이 쳐다봤다. 곧 그는 환하게 웃었다.
“너무 풀 죽지 마요. 당신이 모든걸 알고 있었다면, 여기에 왔겠어요? 교수가 되었겠지.”
조교는 자기 말이 재미있는지 혼자 키득거렸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조교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게 전부가 아니군요?”
나는 조교를 보았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조교가 책을 치웠다.
“말 해봐요. 주변에 별로 안 좋은 일이 있는 거죠?”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조교는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은 안 했다.
“혹시 힘든 일 있으면 말해요. 여기 올 정도면 의지가 있는 것 아녜요? 그 의지를 주변의 나쁜 일 때문에 망칠 수는 없잖아요.”
나는 전화를 걸었다. 그뤼네테 씨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주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저, 저……. O5-06의 후임입니다. 호,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
“잠깐만요.”
저편에서 달칵거리는 소리가 났다.
“네, 말씀하세요.”
“별건, 별건 아닌데, 혹……. 시, 지, 진주만 전쟁 이후…….”
“말을 왜 이렇게 더듬어요.”
“그, 이런 일로 전화를 해도 괜찮나 싶어서…….”
“그나저나 진주만 전쟁 이후라뇨?”
“선배님……. 그러니까 L. 리의 동생이 죽었을 무렵에요.”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저편에서는 침묵했다.
“저, 그……. 그러니까…….”
“그 때 죽긴 했죠, 네. 하지만 그 뿐이에요.”
그뤼네테는 짧게 대답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못했다. 나는 굳은 채 핸드폰을 든 손을 떨었다.
“여보세요?”
“미, 미안해요, 그뤼네테 씨.”
나는 전화를 황급히 껐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자리에 주저앉았다. 안경을 간신히 치켜 올렸다. 리는 동생을 죽이겠다고 늘 말했다. 그리고 진짜로 동생이 죽자……. 기뻐했다? 나는 잠시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날 뿐만 아니라 그 뒤로도, 리는 멀쩡했다. 유쾌한 나날이었다. 리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 삐뚤어진 즐거움에만 집중하고 있었을 뿐이다. 뭐지? 뭐지? 뭐지? 얼마 안 있어 리의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하지만 리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전세는 이제 재단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리는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나는 컴퓨터 앞에서 중얼거렸다.
“정말로 뭐가 어떻게 되가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책상에는 붉은색 돌이 두 개 놓여있었다. 반쯤 녹다 만 것이었다. 나는 선배의 웃음소리를 기억할 수 있었다. 마지막 웃음소리를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내 피 속에는 광기가 흘러, 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회고하며 그렇게 말했다. 정신병은 유전이라고 리는 강하게 믿고 있었다. 자신의 남동생은 그 피를 물려받은 혐오스러운 존재였을까? 그런데 왜 지금 리는 기록 속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컴퓨터에 값을 입력했다. 에러. 에러. 에러. 에러. 에러. 나는 머리를 책상에 박았다. 리는 마약을 먹은 것처럼 쾌활했다. 그리고 곧 여느 때 보다 음울해졌다. 감정의 기복은 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달릴수록 더 심해졌고, 리는 자신이 심각한 상태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리는 거울을 보고 중얼거렸다.
“하나도 모르겠어.”
나는 책상에 고개를 박고 중얼거렸다.
“교체.”
리가 거울에서 돌아섰다. 전쟁이 끝나고, 나치, 파쇼, 군국주의자들이 몰락하자 혼돈의 반란은 세가 꺾였다. 그 집단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곧 미국에서 자취를 감췄다. 정확히 말하면, 지하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리는 사람들에게 제안했다.
“일이 마무리가 되었군요.”
그들은 리를 쳐다보았다.
“세대 교체가 필요합니다.”
리는 완고했고, 절박했다.
“이유가 고작 그거였던 거야?”
나는 자판을 두드렸다. 에러가 난 곳을 찾아 고쳤다. 다시 값을 입력했다. 하지만 또 다시 실패. 이번에는 책상을 내리쳤다.
“아니야! 왜 안 되는 건데!”
리는 진중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한꺼번에 다 O5자리에서 물러나자는 것은……. 아니겠죠.”
데미안 박사가 물었다.
“그건 이제 차차 알아서 할 일이죠.”
리에게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 모두 침묵했다. 리가 계획도 없이 제안만 들고 온 경우는 거의 없었다.
“리, 그 제안이 상당히 뜬금없다고 생각하지 않소?”
오캐인 대령이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뜬금없겠죠, 미친 사람이 제안하는 것이니까.”
“제발 좀!”
내가 소리쳤다.
“좀 정신 좀 차려라!”
컴퓨터를 쥐고 흔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류가 난 것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옆 방에서 벽을 두드렸다.
“제기랄…….”
나는 안경을 벗어 던졌다.
“천천히, 명확하게 말해봐요.”
누군가가 물었다.
그리고 나는 답하지 못했다.
“결국 아무것도 못 한 건가?”
교수는 나를 벌레 쳐다보듯 보았다. 나는 벌겋게 충혈된 눈을 굴렸다. 교수는 한번 혀를 차고 나를 지나쳤다. 나도 그 빌어먹을 종자의 후손이라고. 리가 일기장에 썼다. 글자는 내 귀에 와서 소리가 되었다. 내 피에도 광기가 흐르고 있어. 분명히 나도 미쳐 갈 거야. 동생이 그랬듯 말이야. 지우려고 해도 소용없어, 나는 뿌리가 원래 그래.
“데미안, 당신은 핏줄을 증오해 본 적이 있어요?”
기억 소거 실험이 끝나고 데미안에게 리는 물었다.
데미안은 퀭한 눈으로 리를 보았다.
“그 시기는 모두에게 안 좋았던 시기였네.”
오캐인 대령의 목소리가 전화를 타고 들렸다.
“나도 지쳐있었고, 데미안도 지쳐있었고, 그뤼네테 양과 리도 지쳐있었네.”
“그, 그럼……. 리는…….”
“전쟁터에서는 그것보다 더 심한 것도 봤네.”
오캐인 대령은 상황을 과소평가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천천히 일기장을 넘겼다. 나는 내 핏줄을 증오한다. O5 위원이 더 들어왔다. 그 중 하나가 아담, 지금의 13이었다. 리는 까만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SCP-321의 퇴역을 명령합니다.”
아담이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리는 아담을 비웃고 있었다.
“규칙에서 어긋나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아담은 리를 노려보았다. 리는 그의 앞에서 정면으로 웃었다. 뱀과 같았다. 리가 제안한 세대 교체는 아담이 가장 극렬하게 반대했다. 리는 그것을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다음 장에서는 다시 그것을 번복했다.
“숨 막혀!”
리가 소리쳤다.
거울은 이미 깨져있었다. 나는 뒤통수를 벽에 박았다.
“죽을 것 같아.”
나는 입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컴퓨터는 흰 화면만 보이고 있었다. 그 기계에서는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글자들의 색을 볼 수 있었고, 나는 그 색이 떠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리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궐련이나 시가는 아니었다. 잎담배였다. 파이프 안에 담배 잎을 채워 넣었다. 처음에는 혀를 데었지만, 곧 익숙하게 담배를 빨았다.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는 궐련을 입에 물었다. 처음에는 연기에 쿨럭였지만, 곧 익숙하게 담배를 빨 수 있었다. 방 안은 곧 너구리 굴처럼 변했다. 나는 멍한 눈으로 끊임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 갑을 다 피우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화장실로 기어갔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
교수는 내 꼴을 보고 혀를 찼다. 나는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이 정도도 못 견디면서 공부를 하겠다고 들어온 겐가? 나가게.”
교수가 내 면전에 내가 제출한 과제를 던졌다. 속은 아직도 미식거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땅에 떨어진 종이를 주었다. 글자는 종이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대충 인사를 하고 교수실을 나왔다. 황급히 조교가 뛰어나왔다.
“잠깐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거에요!”
조교가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여유롭게 조교를 내려다보았다.
“약 빨았어요? 대마? 코카인?”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신고 안 할 게요. 말만 해줘요.”
“당신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일이에요. 죽어도 이해 못 할 겁니다.”
나는 비틀거리며 조교 앞을 떠나왔다. 기분이 상쾌했다. 방에 들어가서 곧장 앞으로 고꾸라졌다. 담배를 피우면 리는 좀 누그러졌다. 리는 세대 교체에 대해 역설했고, 몇 몇 사람들은 그에 동의했다. 하지만 결국 리는 지고 말았다. O5는 의무적으로 SCP-006에 노출되어야 했다. 리는 가장 극렬하게 저항했다.
“내가 죽는 날이라면, 이 재단이 무너지는 날이겠지.”
오캐인 대령이 전화로 말했다.
“대령……. 대령님……. 은, 선배가 이해…… 될 수 있어요?”
내가 우물거리며 물었다.
잠시 말이 없었다.
“자네, 괜찮은 건가?”
오캐인이 나에게 물었다.
리는 SCP-006을 마셨다. 어쩔 수 없었다. 리는 눈을 치켜 뜨고 다녔다.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나는 귀를 막았다. 리는 인상을 썼다.
“거 소리 좀 안 나게 하면 안 됩니까?”
리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리를 쳐다보았다. 리는 혼자 앉아있었다. 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내 귀에서도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만해! 죽을 것 같아!”
나는 소리쳤다.
자리에서 일어나 일기장을 팽개쳤다.
“또 그 실험이에요?”
리가 데미안에게 물었다.
“어차피 이제 죽지도 않는 몸, 굴려야죠. 이런 데에라도 쓰이니 다행이지. 난 정말이지 쓸모 없는 사람이니까요. 아직도 기억 소거제를 완성하지 못하다니. 몇 번째 실험인거지.”
데미안 박사가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당신은 실력이 없군요.”
“맞아, 나는 실력이 없어.”
나는 바닥을 뒹굴었다. 뒹굴다 잘못해서 책장을 건드렸다. 책장에서 공책이 떨어졌다. 모든 것은 기록으로 남았다.
“핏줄을 증오해본 적이 있어요?”
머리를 감쌌다. 나는 그 자세가 편했다. 문틈으로는 이모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즉시 몸을 펼쳤다. 벌떡 일어났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나를 지켜보던 이모는 이제 요양 병원에 있다. 나는 그 공책을 들어올렸다. 50년대의 공책이었다.
“괜찮은건가?”
이제 13마저도 내게 그렇게 물었다.
“네, 괜찮아요 아담.”
나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13은 굳어서 나를 쳐다보았다.
“기각.”
리가 아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규칙에 안 어긋난다면.”
내가 중얼거렸다.
“잠은 제대로 자는 건가?”
13이 나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 아뇨.”
나는 눈을 감았다. 데미안은 여느 때처럼 기억소거 실험을 하러 떠났다. 리는 그 실험의 참관인이자 실험 기록을 위한 서기로 같이 따라갔다. 데미안은 자기 자신에 싫증을 냈고, 리는 자신의 핏줄에 싫증을 냈다. 둘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으면서 이어졌다.
“그럼.”
데미안이 주사기를 집어들었다. 이제 그는 주사를 제법 잘 놓았다.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록은 실험 시작 2분 뒤, 종료되었다. 리가 펜을 팽개친 것이었다. 데미안은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있었고, 뒤로 넘어갔다.
“데미안!”
리가 뛰쳐 들어갔다. 나는 눈을 떴다.
“이름 정도 아는 것 갖고 그렇게 놀라지 마요.”
내가 조용히 말했다.
리의 옆에는 데미안 박사의 보조 연구원, 맥클래인이 있었다.
“맥클래인…….”
04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다. 컴퓨터 너머로 보이는 것이었지만, 나는 묘하게 즐거웠다.
“자네, 정말 괜찮은 것 맞나?”
오캐인 대령이 호통을 치듯 물었다.
내 방은 스모그가 낀 듯 연기로 자욱했다. 천장은 맥박에 맞춰 오르내렸다. 아무도 나에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성가시게 쳐다보았다. 그들은 문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꿈틀거리는 모습을. 하지만 그들은 나를 버리지 못했다. 나는 죽은 리의 가호를 받고 있었다. 나는 가늘게 웃었다.
“네, 괜찮죠. 괜찮지 않다 해도 어떻게 할 방도는 없지 않습니까?”
이모는 문 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문 틈으로 보이는 눈을 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놀랐고, 이모는 문을 조용히 닫았다. 마지막으로 보이던 눈빛.
“똑같아…….”
나는 웹캠을 껐다.
“토할 것 같아.”
컴퓨터 전원을 껐다. 리는 벽에 자신의 머리를 박았다. 맥클래인은 리를 쳐다보았다. 그의 얇은 입술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두꺼운 안경을 사이에 두고, 리와 맥클래인의 눈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맥클래인은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나는 혀가 꼬인 채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컴퓨터를 집어 던졌다. 나는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침대에 머리를 부딪혔다. 리는 소리쳤다. 나를 왜 쳐다보는 거지? 나를 왜 그렇게 보고 있어? 나는 아무 잘못도 없어, 데미안? 데미안? 나는 여기에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거야!
“예?”
내가 되물었다.
“공부를 계속 할 건지 묻고 있네.”
교수는 담담하게 물었다.
교수가 나를 왜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나를 왜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왜 여기 있고, 왜 공부를 하는 거지?
“자네만 학사일세.”
13이 협박조로 말했다.
“한번만 더 이래 봐.”
“그뤼……. 그뤼네테……. 씨는…….”
“그 사람처럼 6개국어를 유창하게 하던가, 그럼!”
나는 핸드폰에서 귀를 뗐다. 13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지?
“……. 소각, 은 불가하겠군요.”
리가 간신히 입을 떼었다. 양 손으로는 귀를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 그런 눈으로 나를 봐야 해요?”
리는 책상만 내려다보았다. 리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리의 옆에 있던 사람은 눈길을 돌렸다. 왜 나에게 모든 결정을 맡기는 것이지? 리에게 보고하던 사람은 아담이었다.
“그 쪽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리가 물었다.
“당신의 결정을 따를 겁니다.”
아담은 정말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리는 날카롭게 웃었다. 내가 무슨 결정을 할 수 있다고! 리는 소리쳤다.
“젠장!”
나는 머리를 박았다. 박은 곳이 아파서 몸서리쳤다.
“나를 그만 쳐다봐!”
리는 방 안에서 혼자 소리쳤다.
“문 틈으로 나를 보지 마…….”
나는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주머니에 돈이 있었다. 나는 방을 뛰쳐 나왔다. 그 길로 담배를 두 갑 샀다. 걸어가며 태우고, 방 안에서 태우고, 그리고 관리 아저씨께 걸려서 혼났다. 나는 그 와중에 토악질을 해댔다. 화장실로 기어들어갔다. 담배를 피우면 어지러웠다. 나는 거의 쓰러지다시피 바닥에 뻗었다. 리는 간헐적인 웃음소리를 들었다. 신경질적으로 방문을 열었다. 부유스름한 전등 불빛만이 있었다. 리는 방에 들어가서 총을 가져왔다. 웃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총을 쐈다. 나에게는 총이 없었다. 웃음 소리도 없었다. 나는 쓰러진 채 헛구역질을 하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러다 죽겠네…….”
나는 불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웃었다.
“이러다 죽겠다고!”
입에 담배를 물고 웃기는 힘들었다. 나는 바닥을 뒹굴었다. 리는 데미안을 갖고 실험하기로 했다. 50년대, 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던 어떤 개념을 갖고 실험을 시작했다. 네트워크, 인터넷. 그 결정은 리가 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리를 쳐다보았고, 리는 펜을 들어 종이에 사인을 했다.
“자꾸 누가 나를 쳐다봐.”
리가 머리를 감쌌다. 그 때부터 재단의 수많은 박사들이 모여 실험을 시작했다. 현재의 SCiPNET.
“아냐, 내 잘못이 아냐.”
리가 중얼거렸다. 리는 서기로 대부분의 실험에 참여했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게 아냐.”
리는 자꾸만 말했다.
“내가 그렇게 한 게 아니라고!”
-아니, 너가 그랬어.
나는 리의 공책에서 코드를 발견했다. 나는 흔들리는 손으로 컴퓨터에 그것을 입력했다. 실험은 거의 끝나갔다. 리의 일기에는 60년대가 사라져있었다. 70년대. 리는 골초가 되어 다시 O5 평의회에 나타났다.
“햇빛에서 냄새가 나. 가끔가다 기억난다고.”
내가 중얼거렸다.
나는 곧 실없이 웃었다.
“미쳐가나 봐, 나.”
리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담은 리를 노려보았다. 아담은 아무 말도 안 했다. 리는 묵묵히 아담을 마주 쳐다보았다. 리는 아담의 퇴역 요청을 묵살했고, 아담은 리의 결정에 침묵했다. 리는 맥클래인과 컴퓨터 앞에 앉았다. 맥클래인은 정식 연구원이 되어있었다. 그는 안경을 내내 치켜 올리며 복잡한 코드를 입력했다. 정확히 말하면 쉬운 코드들이 얼기설기 엉켜서 복잡해진 것이었다. 맥클래인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다. 피곤한 얼굴로 맥클래인은 모든 것을 실행했다. 그리고 둘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데미안……. 박사님?”
한참 뒤에, 맥클래인이 중얼거렸다.
“누가 쳐다본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리?”
아담이 물었다.
무미건조했다. 리는 침묵을 지키다 천천히 입을 떼었다.
“2등급 연구원 맥클래인을 O5 평의회 구성원으로 들일 것을 제안합니다.”
리는 담배를 아주 많이 피웠다. 맥클래인은 데미안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O5가 되었다. 나는 컴퓨터를 손봤다. 다행이 심하게 고장난 부분은 없어 보였다. 묘하게 빨라진 느낌이었다. 나는 SCiPNET에 접속했다. 그리고 코드를 입력했다. 리의 일기장에는 데미안과의 대화 기록이 적혀있었다. 나는 리가 적은 대로 쳤다.
- 스킹크?
- 데미안._
나는 멍하게 화면을 쳐다보았다.
- 스킹크라 부르지 마._
나는 환호를 질렀다.
- 데미안이라는 것을 증명해봐.
리의 기록에 나와있었다.
- 넌 누구야?_
나는 잠시 망설였다.
- L. 리.
- 보안번호._
선배의 최근 번호를 쳤다.
- 리._
데미안은 나를 맞이했다. 나는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팽개쳤다.
“데미안이라는 것을 증명해, 내 물음에는 답을 하지 않았잖아?”
리가 물었다.
“스킹크라고 부르지 마.”
“또?”
“미켈란젤로라고도 부르지 말고.”
리는 환호했다.
- 마지막 대화 : (1990.4.1)_
마지막으로 대화했다는 뜻일까?
- 무슨 말?
내가 자판을 두드렸다. 너와 이 대화를 한 마지막 날. 리는 몇 년간 계속 이 시스템이 스킹크 박사인지 아닌지를 묻고, 묻고, 묻고 또 묻고 있었다.
- 싫었어?
나는 최대한 선배를 상상했다.
- ……._
나는 씩 웃었다. 그 다음 장을 펼쳤다.
- 요즘 진행하는 연구는_
내가 타자를 치기 전에 데미안 박사가 물었다.
- 연구? 그게 무슨 말이야?
데미안은 내게 링크를 주었다.
- 벌써 노망난 건가_
- 노망이라니, 말이 심하잖아.
- 그 만큼 살았으면 노망이 나도 괜찮을 나이 아닌가_
나는 잠시 멈췄다. 커서가 깜박였다. 나는 링크를 받아 적었다.
- 쳇, 노망 들면 죽어야지 뭐.
- ……._
앉아있는 채로 핑 돌았다. 나는 책상을 꽉 잡았다. 손 마디가 희게 변했다. 입새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간신히 눈을 떴다. 담배연기는 가시질 않았다.
- 한번 더 무책임한 소리 해, 날 이렇게 만든 결과 책임 져야 하는 거 아닌가_
나는 커서가 깜박이는 것을 보았다. 스킹크는 리에게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자극은 주어지는데, 뭔지 모르겠어. 이봐, 난 어떻게 된 거야?”
리의 손은 가늘게 떨렸다.
“데미안……. 살아 있는 건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리는 접속을 종료했다.
“리 씨……?”
맥클래인이 리를 쳐다보았다.
“맥클래인 연구원, 스킹크 박사……. 아니, 데미안 박사의 연구실로 출근하십시오.”
리는 급하게 자리를 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리 씨.”
“당신은 내일 5등급으로 승진할 것입니다.”
“……. 네?”
“저는 O5-02, L. 리 입니다. 당신을 O5로 추천한 것도 저입니다. 데미안 박사를 이렇게 만든 것도 저입니다. 데미안 박사의 자의식이 여기 남아있고, 또한 어떠한 자극에 반응한다는 것이 O5 평의회와 윤리 위원회의 귀에 들어간다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맥클래인 연구원, 나는 당신의 입을 막기 위해 당신을 O5로 추천했습니다. 미켈란젤로 스킹크 박사의 뒤를 이어 당신은 O5-09가 될 것입니다.”
리는 문을 닫았다. 리는 문에 기댔다. 짙게 한숨을 내쉬었다.
“……. 미안해요, 데미안 박사.”
리가 중얼거렸다.
“60년대?”
그뤼네테가 되물었다.
“네에……. 그 기간의 기록이 없어서요.”
나는 말을 더듬지 않았다.
“60년대라……. 없을 법도 하네요.”
그뤼네테는 말하는 것을 꺼려했다.
“말을 안 하시는 이유라도 있나요?”
나는 제법 당당했다.
“글쎄요……. 그 시기의 일까지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것은 말해주실 수 있나요?”
“한번 들어보죠.”
“그 시기의 기록은 왜 없는 겁니까? 리가 그 때 일을 안 쓴 겁니까, 아니면 후에 파기한 것입니까?”
후자일 경우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저는 리가 그렇게 꼼꼼히 일기를 썼으리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잘은 모르지만, 아마 리는 일기를 쓸 여력이 없었을걸요.”
그뤼네테가 답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여전히 말을 안 해 주실 겁니까?”
“저는 당신이 리를 괜찮은 선배로 기억했으면 좋겠으니까요.”
“아니요, 그뤼네테 양……. 그건 불가능 할 것 같군요.”
“예?”
“아무튼 감사합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내가 그뤼네테 씨를 그뤼네테 양이라 칭한 것은 전화를 끊은 뒤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컴퓨터에 타자를 쳤다.
- 스킹크.
- 데미안._
- 미켈란젤로.
- 데미안._
- 에밀 싱클레어
- 하……. 데미안이라고 데미안._
선배가 데미안을 이름 갖고 놀려먹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정말이지 프로그램 이름도 괴악해. 취미 참 이상하다고._
- 프로그램 이름? 그게 왜?
- SALAMANDER.
“프로그램 샐러맨더가 뭡니까, 맥클래인 씨.”
전화 저편에서 맥클래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1등급짜리 서버 보안 담당관이었다.
“이름으로는 부르지 마십시오.”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을 지도 모르는데…….”
“그건 제 본명이라고요. 코드네임을 부르던지 아니면……. 아, 가명이 좋겠군요.”
“가명?”
“행정직에 있었으니 잘 모르시려나. 일단 파비스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래서 맥클래인 씨.”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명칭에 민감한 건 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알았어요, 파비스 씨. 그래서 샐러맨더가 뭐죠?”
“……. 그건 또 어떻게 찾은 겁니까?”
“당신의 본명과 함께 찾았어요.”
“놀랍네요. 그럼 접속한 겁니까?”
“어디에요?”
“데미안 박사님에게요. 아, 잠깐만요.”
전화기 저편으로 맥클래인이 뭐라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아……. 죄송합니다. 일 안 하냐고. 하, 진짜.”
여기서는 5등급 요원이지만, 현장에서는 1등급 보안 담당자일 뿐이었다.
“샐러맨더는……. 지금 쓰는 SCiPNET의 전신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서버 샐러맨더에요. 딱 인간의 뇌 크기 만하죠.”
“왜 하필이면 샐러맨더에요?”
“……. S로 시작하니까요.”
“그럼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은…….”
“C로 시작해서 클래식입니다.”
“맙소사.”
“리 씨가 말 안 해줬어요?”
“저는 1등급 사서입니다. 그것도 고문서 복원 전문 사서요.”
“그래도 리 씨는 나름 만족했어요. 아니, 만족했겠죠. 그 인간이 지은 이름이니까.”
맥클래인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P는 뭐에요?”
맥클래인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 파비스.”
“모두 다…….”
“리 씨가 지은 것입니다.”
“……. 맙소사.”
나는 선배의 보안 번호를 입력했다. O5의 번호였다. 파비스는 재단 서버의 보안을 담당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여러 보안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 당신 부모님들보단 나을 텐데, 미켈란젤로 스킹크?
- 그 분들이 너보다는 나아. 왜 그렇게 S, C, P에 열광하는건데?_
- 그야 여긴 SCP 재단이니까!
데미안 박사는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선배를 따라 하고 있었다. 맥클래인은 리의 말을 믿지 않았고, 결국 그는 리의 앞으로 끌려갔다.
“믿기지 않는 것은 대충 짐작했지만, 사람 말 안 듣는 것은 좀 너무하지 않나요, 맥클래인 연구원?”
13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영 믿기지 않는 것은 알겠지만, 이 정도로 쪼아대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O5-13?”
나는 여유롭게 말했다.
“그럼 좀 믿음직하게 행동하시오, 후임.”
“미안하지만 난 신입입니다. 뭘 알려줘야 믿음직하게 행동을 하죠?”
나는 선배처럼 깍지를 꼈다.
“알려준 것이나 잘 하시지요?”
13이 말 끝을 올렸다.
“아 네, 뭘 할 시기도 안 주시고 말이죠?”
나도 똑같이 말 끝을 올렸다. 선배는 머리를 긁적였다.
“따라와요, 맥클래인 연구원.”
그에게 준 것은 스킹크 박사의 연구 일지였다.
- 리._
데미안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 ?
- 답은 언제쯤 해줄 생각이지?_
나는 수업도 팽개쳤다.
- 무슨 답?
- …….._
- 왜 그래?
- 너 답지 않은데._
나는 컴퓨터를 덮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공책을 뒤졌다.
“나는 언제 죽을 수 있지?”
데미안이 화면으로 말했다.
검은 도스 창에 흰 글자. 어쩌면 녹색일지도 모른다. 리는 타자에 손을 대었지만, 아무 것도 쓰지 못했다.
“나는 언제 죽을 수 있지?”
데미안 박사가 다시 한번 물었다.
리는 접속을 종료했다. 나는 공책을 미친 듯이 뒤졌다. 종이들은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담배 갑을 거칠게 잡아챘다.
“리. 말해.”
데미안은 계속 묻고 있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너희, O5 평의회잖아? 그러니 답을 해!”
리는 책상을 내리쳤다.
“나도 몰라, 나도 모른다고 데미안.”
리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인간의 목소리는 기계 안까지 닿지 못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리가 중얼거렸다. 나는 미친 듯이 공책을 뒤졌다. 리는 데미안과 말벗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접속을 안 하는군.”
데미안이 덧붙였다.
“맥클래인 빼고 말이야.”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알렸어. 그 인간들이 네게 뭔 짓을 할 지 모른다고.”
“난 이미 최악이야, 리.”
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접속 종료.
“나를 왜 이렇게 만든 거야?”
스킹크는 묻고 묻고 또 물었다.
그는 원망하고 있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그 자신을, 또 그런 상태로 만든 O5 평의회를. 리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는 공책을 내팽개쳤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내 주변에는 담배 연기가 감돌고 있었다. 어지럼증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나는 종이들을 헤집었다.

나는.

거무튀튀한 종이었다.

모든 것에 책임을 지기 위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기묘한 썩은 내가 났다.

살아남아야 한다. 이 글은 제정신으로 쓰고 있다.

나는 계속 읽었다.

나는 미쳐가고 있다.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미켈란젤로 스킹크, 데미안을 위해서라도.

나는 종이를 놓쳤다.
“나한테 이어진 핏줄 때문이야.”
나는 중얼거렸다.
“나아지려면 피를 없애야 해.”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와 광신도 아버지, 그리고 천천히 미쳐가던 동생. 동생은 언제나 나에게 아버지라던 작자를 생각나게 했다. 그래서 나는 이 핏줄을 없애야 한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나는 거짓이 아니란 말이야, 난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화면에는 데미안이 말을 띄우고 있었다. 나는 접속을 종료했다.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야.”
저 기록들은 모두 내 것인걸. 나는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병원에 누워있었다. 눈을 한 번, 두 번, 세 번 깜박였다.
“……. 수업에 안 나왔기에 찾아가보니까 이게 무슨 일이에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조교가 있었다.
“그럴 용기가 있으면 열심히 살아가라고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다시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기숙사 안 에서는 담배피지 말고요.”
아, 그랬지. 담배를 연달아 몇 갑씩 피웠지.
“니코틴 수친가 뭐시긴가 그것도 지나치게 높게 나왔다고……. 담배 펴요?”
아,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왜 담배를 폈던 거지?
“완전히 기절해서 널브러져있었어요. 피……. 는 흐르기는 했지만 그렇게 깊게 베인 건 아니라. 그래도 흉터는 남을 거라 하더군요.”
나는 팔뚝이 평소와 같지 않음을 느꼈다. 천천히 팔을 들었다. 링거. 양쪽 손목에는 붕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힘들면 말 하라고 했잖아요!”
조교는 약간 화나 보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또 이해 못한다고 말 할 거죠? 당신은 항상 그렇습니다.”
나는 픽 웃었다. 잠시 멈췄다. 나는 낮게 웃었다. 어쩌면 흐느낌이었는지도 모른다. 숨은 가빠졌고, 조교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무슨 상황인지 깨닫고 나는 웃고 있었다. 어쩌면 선배는 흐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음……. 60년대 기록?”
오캐인 대령은 조금 고민했다.
“그게 굳이 필요한가?”
재단의 설립을 지켜본 O5 두 명은 모두 60년대를 말하기 꺼려했다.
“네. 알려주셔야 합니다.”
나는 방에 남아있던 담배들을 다 버리고, 문을 활짝 열었다.
“사실 그뤼네테 양이 연락했긴 했다만……. 왜 알려달라는 것인가? 자네가 처음 일기장을 펼쳐보았던 것과 같은, 그런 호기심인가? 호기심 때문이라면 나는 알려주지 못하네.”
“호기심이라면 전화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캐인 대령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들으셨습니까?”
“뭐를?”
“…….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 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알겠네. 친우가 떠나는 것은 언제나 괴로운 일이니.”
오캐인 대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원을 살 수 있는 그들은 리의 죽음이 어떻게 다가왔을까. 나는 진짜 죽을 수 있는 사람이라 이해하지 못했다. SCP-006을 마시면 이해할 수 있을까?
“60년대, 그 때 리는……. 일을 거의 못 했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거든.”
이번에는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우리는 계속 일을 줄 수 밖에 없었고.”
리는 귓가에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소리가 그 안에 섞여있었다. 리는 자꾸 누가 쳐다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리는 언제나 혼자였다. 나는 책상 앞에 멍하게 앉았다. 전화는 꺼 놓은 채였다.
“하지만 결국 극복했기에 쾌활해 진 것이 아니겠는가.”
오캐인 대령은 진심으로 말했다.
“극복, 이라.”
내가 중얼거렸다.
선배는 쾌활하고, 잘 웃었다. 뭐든 훌훌 털어 넘기는 사람이었다. 1919년, 리는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친구를 만들지 않았고, 잘 웃지도 않았다. 감정 표현은 거의 하지 않았으며, 한번 받은 상처는 안고 갔다. 1950년, 리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1960년, 리는 완전히 무너졌다. 1970년, 리는 무뎌졌다. 퀭한 눈으로 사람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담배를 문 채 기지를 쏘다녔다.
- 리?_
커서는 깜박였다.
- 뭐야, 왜 말이 없어._
데미안은 툴툴거렸다. 하지만 나는 자판을 칠 수 없었다. 그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리는 왜 그렇게 변한 것일까?
“사람이 안 변한다고 생각해?”
어느 샌가 맥클래인은 나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 리?_
“데미안 박사님을 보고 있으면, 그래. 사람은 변해. 나도 변했고. 누구든지 변하는 법이야. 다만 자신만 안 변한다고 굳게 믿고 있을 뿐이지. 아니면 변해도 아주 힘든 과정을 거쳐서 변한다고 믿거나.”
- 저…….
나는 간신히 입력했다.
“다 틀렸어. 사람은 아주 간단한 것 하나로 변하는 법이야.”
맥클레인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 뒤는 침묵이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 저는……. 사실, 요 며칠간 당신과 말했던 사람은, 리가 아니에요.
- ?_
나는 그 곳에서 튕겨나갔다. 컴퓨터가 잠시 까맣게 변했고, 곧 희게 변했다.
- 누구야_
데미안 박사는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 리의 후임입니다. 혹시 고문서 복원 전문가……. 이야기를 들은 적 없나요? 근래 8년간 말이에요.
- 후임?_
- 네.
- 넌 여길 어떻게 찾은 거지?_
데미안은 자신이 한 말을 지웠다.
- 아니, 리는 어떻게 된 거지?_
나는 망설일 수 없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 리는 죽었습니다.
글은 출력도, 입력도 되지 않았다. 한 대 칠까 아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 왜?_
데미안이 내게 물었다. 아니, 내게 묻지 않았다.
- 왜 죽어!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왜! 왜!_
곧 그 말은 화면을 가득 채웠다.
- 왜!_
나는 그냥 그대로 두었다. 나는 그를 달랠 능력이 없었다.
- 나를 왜! 왜! 그러고 왜 죽었냐고!_
나는 선배에게 조용히 질문했다. 나에게 왜 이런걸 떠넘긴 거죠? 하지만 대답해줄 사람은 이제 없었다.
- 말해, 답하란 말이야, 왜!_
말해줘요, 선배님. 뭐든지 다 답해주겠다고 그 때 약속했잖아요?
- 왜! 무슨 일 인 거야? 왜! 도대체 왜!_
“…….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컴퓨터는 이미 손 쓸 수 없었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맥클래인은 나에게 소리질렀다.
“도대체 뭔 짓을 했기에 서버가 다운된거냐고!”
“데미안 박사가 광분하셨어요.”
나는 눈을 비볐다.
“뭐?”
맥클래인의 어이없는 표정을 그려보았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게 사실이에요.”
“도대체 무슨……. 하, O5의 권한이자 권리로 O5 평의회 긴급 소집을 발동한다. O5-04, 이 자리에는 리의 후임도 포함한다. SCP 재단 제 1기지 D동으로 오도록.”
맥클래인은 전화를 끊었다. 곧 문자가 왔다.

데미안 박사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마. 나와 리 씨의 노력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선배는 책임감이 강했다. 분명 약속을 지킬 길을 마련해두었을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밖으로 나갔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기차에 내려서 탔던 그 새까만 차를 타고 제 1기지 D동으로 갔다. 조금 큰 편이었지만 역시 한적한 기지였다. 거기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서 근무한다고 생각할까?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O5-04, 왜 재단 서버가 다운 된 것 입니까?”
역시 시작은 13이 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은 04를 향했다. 04는 뭔가 긴 변명을 준비한 듯, 천천히 가방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저 때문입니다.”
내가 말했다.
모든 사람들은 나를 쳐다보았다.
“…….. 그게 무슨 말입니까, 후임?”
13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다들 데미안 박사님 기억하십니까? 그 분 여기 살아있어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맥클래인 혹은 O5-04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봐!”
“말 해야 해요. 데미안 박사의 몸은 죽었죠, 하지만 자의식은 여기 살아있습니다.”
나는 코드를 보여줬다.
“이걸 아는 사람은 O5-06, O5-04, 그리고 06의 후임인 저 뿐입니다.”
선배가 이런걸 숨길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일기도 남에게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뭐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제가 데미안 박사에게 O5-06의 부고를 알렸습니다, 13.”
좌중은 조용해졌다. 다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심각한 표정은 그뤼네테와 오캐인의 몫이었고, 당혹감은 맥클래인의 몫이었다.
“오기 전에, 윤리 위원회에다가도 연락을 넣었습니다.”
후임일 뿐인 내가 말했다.
“당신은 도대체 뭔 짓을 하려는 겁니까!”
맥클래인이 소리쳤다.
“데미안 박사를 죽일 생각입니까?”
왜! 데미안 박사는 소리쳤다.
“스킹크 박사가 누구를 증오하는지는 다 아는 것 아닙니까?”
“증오하고 있었어요?”
그뤼네테가 물었다.
“우리를……?”
“모든 화살은 리에게로 쏟아졌죠. O5-06에게로 말이죠.”
그리고 덕분에 선배는, 나는 좌중을 노려보았다. 그뤼네테는 눈을 돌렸다. 조용했다. 십분 동안이었을까, 이 십분 동안이었을까.
“근데 그게 왜 하필이면 오늘인 겁니까, 빌어먹을.”
저편에서 여자가 중얼거렸다. 한쪽 팔이 없었다.
“최근에 혼돈의 반란 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단 말입니다! 젠장, 불안하게.”
“무슨 말이요, O5-11?”
오캐인 대령이었다.
“아, 그쪽은 특무부대니까 잘 모르겠죠. 여긴 보안부입니다.”
“그건 아니 본론으로 들어가기나 하시오.”
“급하긴. 본론은 이미 나왔지 않습니까? 뭐 아직 그렇다 하더라, 정도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오캐인은 팔짱을 꼈다. 다시 사람들은 조용했다.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럼 정보가 새어나갔다, 이 말이오?”
“O5-10, 제가 말을 한마디 해도 될까요?”
나는 손을 들었다.
“해보시오.”
“재단 수뇌부에서 큰 일이 많이 터졌지 않나요? O5-06의 은퇴, 생판 모르는 후임의 등장, 서버 다운. 굳이 누가 빼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나요?”
“뭘 알 수 있단 말입니까.”
13이었다.
“재단에서 들리는 술렁임이요.”
“O5-06이 은퇴한 사실은 인사부에서 기밀로 관리됩니다. 당신이 후임이 될 것이라는 것도 기밀이죠. 서버 다운은……. 뭐 그렇다고 칩니다만, 그 둘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것입니까?”
“O5 평의회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겠죠.”
“그게 무슨…….”
“중요한 사람이 나가고, 그 중요한 자리를 새로운 사람이 채웁니다. 그러면 집단의 활동은 어떻게 될까요? 적어도 평상시와 같지는 않겠죠.”
“그 정도의 움직임으로 혼돈의 반란이 수상한 행보를 보인다, 이 말입니까?”
“그들은 재단을 공격하기 위해 특화된 집단이에요. 그리고 그 정보, 아직…….”
“그래서, 혼돈의 반란이 밖에서 도사리고 앉아있는데 지금 당신은 윤리 위원회를 끌어들였다 이겁니까? 그나저나 윤리 위원회는 어떻게 안거요?”
“모를 이유가 없잖아요. 저도 재단 직원이었습니다, 13. 그리고 자세한 사항은 리의 일기장에 써있었고요.”
“그렇다면 그 윤리 위원회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겠군요.”
선배는, 서버 실험에 서명을 하고 얼마 안 있어서 윤리 위원회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죄책감의 또 다른 모습이었으리라.
“압니다.”
다른 사람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밖으로는 반란을, 안으로는 윤리위를 상대하라, 라…….”
13은 나를 비웃으려 했다. 하지만 나를 빤히 쳐다본 채 그는 다른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눈을 가늘게 떴다. 아주 순간이었다.
“그래요. 윤리위는 그렇다 칩시다. 반란, 그것들은 어쩔 겁니까?”
“어쩌긴 어쩌잔 말이오. 막아내야지.”
오캐인 대령이 답했다.
“그들은 분명 가장 취약한 부분을 노릴 것 아닙니까. 최대한 높은 곳을 노리겠죠. 그럼 여기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어디입니까?”
13이 나를 가리켰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내가 왜…….”
“그렇게 정보를 잘 잡아내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은 하나도 못 잡아냅니까?”
“나는 말 그대로 가장 쓸모 없는 사람인데, 나를 노릴 리 없잖아요!”
“당신이 쓸모 없다고요? O5의 신상 정보를 다 알고 있는 사람이 당신인데?”
나는 머리를 감쌌다.
“아주 좋아하는 사람일거요. 혼돈의 반란이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겠지.”
“그만하시오, 13.”
오캐인 대령이 진중하게 말했다.
“그만 몰아세우시오.”
“몰아세우는 게 아닙니다, 10. 다만 사실을 알려줄 뿐입니다.”
13은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가 저 자를 보호하겠습니다.”
“어떻게?”
11이 물었다.
“보안부는 혼돈의 반란을 주시하십시오. 기동특무부대는 준비를 하시고요. 저 후임을 보호할 만한 여력은 제게도 있습니다. 당신들은 재단을 보호하십시오.”
나는 13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왜?
“그리고 데미안 박사 건에 대한 것은, 며칠 뒤에 토의해봅시다. 어차피 윤리 위원회나 우리나 시간은 갖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13은 책상 위의 물컵을 들었다.
“아, 맞다. 자네.”
나였다.
“자네는 잠시 뒤에 날 좀 보지.”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오캐인 대령과 그뤼네테는 그를 약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내 등 뒤에서는 데미안 박사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들은 곧 13을 의심하는걸 그만뒀으리라.
“내 본명도 아나?”
13이 뜬금없이 물었다.
“아담.”
나는 멍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왜 자네를 불렀는지도, 알겠나?”
그는 걸음을 멈췄다. 13, 아담, 리, 리, 선배, 아담, 가족애, 퇴역을 요청합니다. 퇴역?
“리 선배 때문인가요?”
“내가 그 사람과 그렇게 친해 보였나?”
“내가 리의 후임이기 때문에 찾아온 것 아니에요?”
13은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내려보았다.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고개를 양 옆으로 기웃거렸다. 나는 그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자네가 짐작하는 의도를 말해보게.”
나는 고개를 숙였다.
“말하게!”
13은 조금 다급해 보였다.
“퇴역.”
“무엇의?”
“그건 모릅니다.”
문득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SCP.”
번호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SCP-321.”
아담이 답했다.
“SCP-321의 퇴역이네.”
“제가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나요?”
“아니. 아니, 방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네. 하지만 지금은 달라.”
13은 다급해 보였다.
“내가 자네를 보호하겠네, 그러니 자네는 SCP-321을 퇴역시키게.”
“혼돈의 반란, 그거 아직 확실한 거 아닌 거 아닌…….”
“자네는 할 수 있어!”
13이 내 어깨를 잡았다. 그의 옆구리에 끼고 있었던 파일이 땅에 떨어졌다.
“윤리 위원회가 소집되고, 그들이 우리를 추궁할 때 그대가 말하게. SCP-321을 말하라고. 분명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그 사람들은 꽤 의미 있는 결정을 할걸세.”
그는 나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나는 키가 꽤 컸지만, 힘없이 벽에 가서 붙었다.
“SCP-321이 뭔데요?”
“자네는 나를 믿어야 하네. SCP-321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냥 변칙 개체,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네! 하지만 자네의 선임인 리는 그걸 믿지 않았지.”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나는 소리쳤다.
13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팔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그런 모습은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 내 딸이네.”
아버지는 나를 들어 안아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건넸다. 어린 아이입니다, 내 아들 입니다. 아들, 어린 아이입니다, 받아주십시오!
“이기적으로 보이나?”
그는 진지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손과 손으로 나는 옮겨갔다. 덕분에 나는 세상의 빛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네.”
나는 사실대로 답했다.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겠군.”
아이 입니다, 내 아들입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13은 잠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내 고갯짓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 거절해도 되네.”
나는 13을 쳐다보았다.
“이런데 희망을 건 내가 잘못이지.”
그는 중얼거렸다.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나는 13을 보았다. 선배는 죽음으로 규칙을 완성하려 했고, 나를 통해 약속을 지키려고 했다.
“그래도 한번만 더 부탁하네. 내 딸, 아니 SCP-321을 퇴역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선배는 그에게서 희망을 앗아갔다. 예외 규정. 선배는 예외를 막아버렸다. 선배는 자기 자신을 불태워버렸다. 그 지긋지긋한 규칙을 위해서. 나는 13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나를 사람들 손에 건넸다. 나는 더 앞으로, 또 더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 끔찍한 폐쇄공포증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13.”
리는 자신의 죄책감을 평생 갖고 갔다.
“당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잘못에는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는 선배를 존중했다.
“리 때문인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규정을 어겼는지 아나?”
13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처절했다.
“선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선배를 존중하기만 했다.
“당신의 제안은 거절합니다.”
13의 SCP-321, 06의 데미안 박사.
“아마 이런 것 보다 더 우아한 방법으로 규정을 어길 수 있을 겁니다.”
나는 그를 두고 뒤돌아 섰다. 나는 피곤했다. 그래서 침대에 누웠다. 기숙사 창문으로 거리의 불빛이 스며들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죽었다. 내게 죽음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선배의 컴퓨터 역시 그랬다. 갑자기 까만 화면을 보이더니, 영 응답하지 않았다. 수리공에게 가져가니 오히려 나를 질책했다. 나는 맥없이 컴퓨터를 들고 왔다. 학교 서버를 사용했다. 파비스는 꽤나 유용한 시스템이었다. 맥클래인은 자기 코드 네임과 동일한 프로그래밍을 설명해줬다. 당연히 나는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이디를 사용하게 했다. 일회용 아이디였다. 나는 재단의 보안 시스템 아래에서 선배의 일기를 읽었다. 연필을 깎는데 사브르를 사용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선배를 쳐다보았다.
“뭐.”
선배가 내게 처음 한 말이었다.
“시……. 신입입니다!”
그건 내가 선배에게 처음 한 말이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선배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선배는 그렇게 유쾌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음식을 주는 일은 절대 없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맥클래인은 사람이 쉽게 변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데이터의 흐름이 변하는 그 곳에 진정한 정보가 있다고 믿었다. 선배는 나에게 잘 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선임이 죽은 날짜로 갔다.

장례식장에서, 어리바리한 그 놈은 울었다.

그 한 줄이 전부였다. 다음 기록은 이틀 뒤였다.

그 녀석은, 나와 동류다.

내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인가?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내 기억과 대조했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다.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지진, 붕괴, 죽음, 이모의 눈 빛, 눈칫밥. 우는 것은 실례였다. 그 다음 기록은 없었다. 그 두 줄이 리의, 또는 선배의, 또는 O5-06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선임이 죽었을 때를 생각했다. 선임은 나의 부모님마냥 갑작스럽게 죽었다. 나는 어릴 때의 나처럼 재단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눈물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었다.
“나는 안 울었어요, 선배.”
내가 중얼거렸다.
선배는 마지막 순간에 웃었다. 어쩌면……. 선배가 변한 것은……. 선배는 데미안 박사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었……. 그리고 그건 지금도……. 아주 최근 까지도……. 나에게 맡길 정도로……. 나는…….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맞아요, 나는 울었어요, 선배.”
리는 사람을 보는 눈이 꽤 정확하다고 케테르가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울면 안돼요. 한 마디만 하지, 울라고.”
나는 내 감정을 몰랐다.
“한 마디만 하지, 한 마디만…….”
아냐, 이젠 알 것 같다. 분명히 선배가 죽은 다음에서 지금까지 약 8개월의 시간 동안 내가 느꼈던 것은 슬픔이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당신처럼 되지는 않을게요, 당신처럼은…….”
나는 이를 깨물었다. 학교 전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선임이 죽고 난 뒤, 선배는 나에게 선임의 업무일지를 주었다. 그리고 일주일간 말을 걸지 않았다. 일을 주지도 않았다. 나는 선임의 일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일주일 후, 나는 실전에 투입되었다.
“사람은 꽤 쉽게 변해.”
맥클래인이 머리 속에서 속닥였다.
“데이터의 흐름을 보면, 새로운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것처럼. 데이터의 흐름이 변화하는 곳에는…….”
“봄철, 새들의 날개 짓을 보라. 그들의 날개 속에 둥지가 있다.”
선배는 DBMS였지, 논리적 추론 엔진이 아니었다. 나는 나이지, 선배가 되지 못했다. 나는 빈 자리를 채워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리 내어 울었다.

O5-03은 인수인계를 끝내고, 자신의 업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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