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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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배께.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해도 저는 다른 길을 걷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 알고 있더라도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흔한 연구원 조수였고, 당신은 흔한 연구원이었죠. 힘없고 수많은 재단 인원 중 두 명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 눈에는 3등급 연구원이 아닌 연약한 한 명의 인간만이 비쳤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잠들기 직전 당신의 숨소리가 너무 가늘어서였을까요.

난 겁쟁이였습니다. 재단에 들어오고 여러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피비린내가 가득한 곳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당신이 아름다워 좇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으로서는 6년이 더 지난 때의 기억이지마는, 아무튼 당신이 빛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제가 겁이 많았다는 사실도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있고…

죽을 때가 다가오니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죽은 지 몇 년은 더 된 시체로 그리움을 달래보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공식을 저는 너무 일찍 알아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공식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능 때 수학 공식이 기억이 안 나 끙끙거렸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잊고 싶어요.

변칙 개체가 날뛰었을 때 당신과 저는 297기지 21번 복도에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다리를 접질려 겨우 걸을 수 있었고, 저는 갈비뼈에 금이 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끝은 정말 흔했습니다. 어느 소설에서도 취급해주지 않을 죽음이었죠. 사건 보고서에 당신의 이름 대신 사망자 13번이라는 글이 적혀있을 때, 저는 지금 죽는다면 당신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쟁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영화 속의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을 타파할 엄청난 능력도, 때 맞춰 도와줄 지원군도 없었죠. 하지만 서로를 의지하기에는 각자의 상처가 너무 깊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잃었고 각자가 날을 세우며 기억 소거제 사용 허가서를 상사에게 내미는 때였습니다. 모두가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저도 참 이기적입니다. 동료들에게 제가 겪은 슬픔을 떠안게 해주다니요. 하지만 그게 어떻습니까, 그게 어때요. 우리는 언제나 일어서 왔습니다. 사랑하는 누군가의 심장이 뜯겨도 자신의 심장은 멀쩡히 뛰고 있지 않습니까. 억울하고 슬퍼 울음을 터뜨려도 우리는 서로를 다독일 손이 있지요. 오른쪽 눈이 안 보이면 왼쪽 눈으로 보는 게 우리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저는 너무 지쳤고, 아마 저로 인해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제는 그게 무슨 소용이렵니까. 저도 신경 쓰지 않으려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녹색 경보를 기뻐하는 샴페인을 딴 기억이 선명해집니다. 천국에 있을 당신을 상상합니다. 그곳은 계속 녹색 경보겠죠. 제가 그곳에 가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샴페인을 홀짝거리고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계속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당신의 영원한 조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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