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버려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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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캐함은 썩 달갑지 않은 감각이다. 익숙해지지도 않고. 목과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텁텁한 연기가 행여 눈에라도 닿으면, 그 매캐함을 씻어내려고 눈병이라도 걸린 양 줄줄 흘러넘치는 눈물이 시야를 가려버린다. 그러나 눈물 따위론 매캐함이 가시지 못한다. 연기는 사람을 쉽게 죽인다.


그것이 눈을 떴을 때 머릿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생각이었다. 영은 대체 어쩌다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해내지 못했다. 시가지 한복판, 왕복 4차선 도로 한가운데의 교통섬에서 눈을 뜬 것으로 보아 자동차 매연을 잘못 들이켜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곳은 대체 또 어디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은 자기 발로 이곳까지 걸어온 기억이 없었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는 건 참 드문 일이다, 영은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전국팔도를 돌아다니며 길을 잃기는 커녕 없는 길도 헤치고 다니는 위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딱 봐도 사람이 많아보이는 이런 번화가에서 헤멜 걱정일랑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야 그렇지 않은가. 그는 누가 뭐래도—

"…누구였지? 나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영은 드디어 자신에게 닥쳐온 최대의 위기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이것저것 기억나지 않는 것 투성이더니만, 기어코는 자기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기억이 도통 나지를 않는 것이다. 어젯밤 혹시 술이라도 진탕 마셨는가, 어디 머리를 부딪히지는 않았나, 아무리 애를 써서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영은 머리가 급격히 지끈거려오는 것을 느끼고 정류장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두통약이 먼저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영이 관자놀이를 쥐어싸매고 뭘 하고 있든 신경도 안쓰고 제 갈길을 재촉했다. 버스를 기다리며 영의 바로 옆에 앉아있는 이들도 그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도시 인심이란 야박한 법이다. 하지만 그렇게 방해 없이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영은 몇가지 중요한 기억을 되살려낼 수 있었다.

이영. 이씨에 외자로 영이란 이름을 쓴다는 게 자신에 대해 떠오르는 유일한 기억이었다.

그리고 남대문. 흐린 기억 속 가야할 곳은 남대문이었다.

그곳이 제 집이었는지, 행선지였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일단 가보지 않고선 도저히 떠오르지 않을 모양이었다. 의문은 차고 넘치지만 일단 이렇게 되었으니 발길을 옮길 수 밖에 없으리라. 영은 벌떡 일어나서 기지개를 잠시 펴고는, 옆에서 멍하니 버스 운행정보 전광판을 노려보며 앉아 있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남대문 가는 길을 모르십니까?"

영이 양해를 구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 사람은 전혀 대꾸도 없었다. 아니, 암만 서울 인심이 박해졌다곤 해도 이렇게 무안을 줄 것이야 없지 않은가! 영은 속으로 탄식을 하고는 시선을 돌려 다른 이들에게 향했다. 정류장을 서성이는 다른 사람, 방금 버스에서 내린 사람,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 그러나 누구 하나도 영에게 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답은 커녕 영에게 눈길 한번 주는 사람도 없었다.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서있던 영의 옆으로 낡은 고속버스 한 대가 매연을 마구 뿜으며 지나갔다. 시꺼먼 연기가 영을 덮쳤다. 텁텁한 연기, 매캐한 연기가 들숨에 끼어들고 감은 눈을 비집었으니, 기침과 눈물이 터져나올 터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영은 연기를 들이마실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연기는 마치 영도 연기와 다를 바 없다는 듯 그저 섞였다가 지나가 사라질 뿐이었다. 매연을 먹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불쾌감이 영에게 엄습해왔다. 그것은 한기였다.

영은 비칠거리며 정류장 구조물에 다가갔다. 잘 닦인 유리창은 매정하게도 그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다.


* * * *


많은 귀신들이 사후 각성 과정에서 기억을 잃어버린다. 멀쩡한 장례를 거쳐 차사들에게 인계된 망자는 온전히 저승길에 오르지만, 그러지 못한 자들은 이승 한구석에 버려진 채 닳고 무뎌져간다. 기억이 마모되고 영기가 흩어진 영혼은 끝내 사람의 흔적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땅의 일부가 되어 사라진다. 영이 이 사실을 알 리는 없었으나, 그렇게 되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 것은 행운이었다.

영은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죽은 자는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주워들은 적이 있었다. 따라서 유리창에 자신의 상이 반사되지 않는 걸 알아챘을 때 영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당연하게도 공포와 절망이었다. 기억이 없다 한들 자기가 죽었다는 걸 태연히 받아들일 망자가 누가 있으랴.

뒤따라 고개를 내민 감정은 난감함이었다. 기억나는 게 없으니 자기가 대충 얼마나 전에 어디서 죽었는지도 알 턱이 없었다. 어쩌면 단순히 유체이탈과 몽유병이 동시에 와서, 어딘가 그의 몸뚱이가 영혼을 기다리며 죽은 듯이 누워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영은 내심 기대해보고 있었다.

영이 통일로를 따라 터벅터벅 걸어내려가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단 기억에 있는 곳으로 향해보면 뭐든 얻을 게 있으리란게 영의 생각이었다. 말걸 이 하나 없고 아는 길 하나 없는 딱한 처지에 기댈 것이라곤 도로 표지판 뿐이었으므로, 그는 일단 서대문이라 적힌 표지를 따라 남동쪽으로 쭉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은 정말 남대문으로 향하는 방향이 맞긴 했다. 영이 그걸 알았다면 운이 좋다 여겼을테지만 사실 사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영의 뒤를 쫓고 있는 사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날 정천은 과일 구경이나 하려고 영천시장에 들른 참이었다. 시장 입구를 스쳐가는 영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러나 정천은 영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망자가 저리 당당하게 대로를 걸어다니는 것은 요즘같은 시대에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야 이미 죽었지만, 죽은 것보다 더한 꼴을 자처한다는 이야기다. 오지랖이 특기고 자랑인 의협 김정천에게 저 딱한 영혼을 방치하는 것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저거 저대로 가면 서대문경찰서인데."

경찰서. 이 나라에서 길 잃은 자라면 누구든 먼저 찾아갈 만한 곳이리라. 하지만 그자가 인간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많이 다르다. 그런 치들을 그냥 두고는 못보내는 열성분자들이 제각기 끄나풀을 꽂아댄 결과, 경찰은 자신도 모르는 새 범죄자 못지 않게 귀신들을 잡아들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워오고 있었다. 영도 가던 길을 쭉 간다면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터였다.

정천은 우선 이름도 사정도 모르는 젊은이가 혹시 경계하거나 놀라지는 않을지 염려하여 잠시 기척을 숨겨가며 영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혹시나 요 근방을 잘 아는 귀신이라 안전지역을 골라 싸돌아다닐 뿐이라면 괜히 말 걸다가 서로 무안해질 게 아닌가. 하지만 저 맹한 표정이나 확신 없는 걸음걸이로 미루어 볼 때 그럴 일은 없을 듯 했고, 영이 서대문 사거리까지 죽 가거들랑 정천은 거기서 그를 멈춰세울 작정이었다.

한편 영은 기묘한 오싹함을 느끼고 있었다. 자기가 귀신이 된 걸 깨달은 뒤로 온기없는 몸뚱이에는 한기가 계속 서려있었지만,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영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시선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대관절 누가 유령을 미행한단 말인가? 의문이 시작되자 영은 그 시선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걸음을 늦추다 늦추다 덜컥 멈춰섰다. 영은 그 자리에서 불쑥 소리를 질러 그 시선의 주인에게 말을 걸 참이었다. 아무도 자길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대로 아무 상관 없을테고, 누군가 자기 말을 들을 수 있다면 필시 반응을 해오리라. 그러나 입술을 떼기도 전에 누군가 억센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는 것은 분명 영의 생각을 뛰어넘은 일이었다.

"눈치가 빠른 건지 느린 건지 모르겠소, 형씨. 일단 조용히 하십시다."
"아니, 당신은 누구십니까?"

영은 고개를 비틀어 정천의 손바닥에서 입을 빼내고는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정천은 슬쩍 손을 떼주며 영에게 속삭였다.

"일단 사설탐정이라고 해두겠소만… 여긴 보는 눈이 많아서 내가 뭘 못하겠으니 일단 자리를 옮기지요."
"예?"

한손으론 능청스럽게 통화하는 척을 하면서 다른 손으론 영의 팔뚝을 덥썩 움켜쥔 채, 정천은 한적한 골목으로 영을 이끌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영은 그저 조용히 따라가는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귀신 신세가 된 건 대충 알아챘습니다만, 당신이… 도깨비라고요?"
"뭐 요즘 세상엔 썩 안어울리는 이름이죠. 김서방네라고 하면 이짝에선 다 통합니다."
"허어."
"왜, 안 믿깁니까?"
"갑작스런 게 너무 많아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라 그럽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기억은 진짜 전혀 없어요?"

행인도 점주도 어떤 인적도 없는 기묘한 골목 구석에서 정천은 영에게 이것저것 알려주고 캐묻고 하느라 바빴다. 물론 영도 머리를 바쁘게 돌리고 있었다. 귀신이 된 자기랑 멀쩡히 대화하고 있는 이 김정천이라는 사내를 얼마나 믿어도 될지, 믿더라도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영의 처지를 정천도 이해하고 있었다.

"…해서, 일단 되는대로 남대문으로 가고 있던 겁니다."
"남대문이라. 멀지는 않구만. 안전한 길을 안내해드릴테니 같이 가죠."
"정말입니까?"
"난 누구든 마지막 원은 이루고 나야 성불한다는 주의라서요. 초상공안이든 차사들이든 지금 날 제끼고 형씨를 그냥 잡아갔다간 내가 분해서 잠을 못 잘 겝니다."
"그렇다면야… 신세 좀 지겠습니다. 남대문에 간다고 뚜렷이 뭐가 이뤄질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뭐, 마침 지금쯤 그 양반도 남대문에 있겠다. 일단 가면 뭐든 도움이 될 겁니다."

그 양반은 또 누구람, 영은 의문을 속으로 흘리며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앉은 자리에서 설명을 다 들어봤자 백지 상태인 그의 머리에 제대로 들어서지도 못할 테니까. 정천은 새 인연에 신이 난 듯 촐싹이며 물었다.

"이름이 이 영이라니, 영씨라고 부를 수도 없고 이거 원. 하하하! 그냥 한동안은 형씨라 부를테니, 나는 김씨든 정천이든 맘대로 부르십쇼."
"도움 받는 입장에 막 부를 수야 있습니까. …김 형?"
"으하하하하! 뭔 노가다꾼이나 사극 배우도 아니고! 재밌는 형씨네 진짜."
"음, 미안합니다."
"뭐가 미안해요? 맘에 드니 그대로 합시다! 자, 빙 돌아 가느라 길이 멀어요. 날 저물기 전에 어서 갑시다."
"그럽시다."

그렇게 길동무가 된 두 남자는, 정천이 안내하는 샛길을 따라 둘러둘러 먼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


짝짝이 양 팔을 자신있게 뻗은 채, 숭례문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언젠가 한 번 불타버린 뒤로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서울의 정문으로 우뚝 서있는 이 상징적인 건축물은 그런 일 따위야 흐르는 시간을 따라 으레 찾아오는 상처일 뿐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 보였다. 정천은 그래서 이 장소를 좋아했다.

"다 왔수다, 형씨. 뭐 생각나는 건 없어요?"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속이 이상한 거 같기는 한데요."

여전히 전화하는 척 하며 주변의 시선을 무마하는 정천에게 영은 맥빠지는 대답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럴 줄은 알았지만서도. 그러면 먼젓번에 말했던 그 양반한테 물으러 갑시다."
"그래서 찾으시는 그분은 누구십니까?"
"아, 내가 오면서 말을 안했나? 아마 형씨를 제일 잘 알 것은 객사차사일텐데 걔 찾으면 지옥문 여는 것이고. 그 대신에 서울, 아니 한성 길바닥에는 누구보다 빠삭한 양반이 있어요 거."
"길바닥?"

정천은 더 말해 무엇하냐는 듯 영의 질문을 웃음으로 흘리더니, 눈을 땡그랗게 뜨고 주변을 빤히 둘러보았다. 한규 이놈이 헛소리를 한 게 아니라면 분명 최근에 수입상가 쪽에서 놀고 자빠졌다는 그 양반이 눈에 띌 터였다. 그리고 정천의 짐작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야! 길치!"
"길치?"
"어! 김장철 니는 왜 여깄는감!"
"김장철?"
"꼴에 걸신이라고 옷 입고 다니는 꼬라지는 변한 게 없구만."
"그러는 장철이 너는 그 탐정노릇 아직 하고 다니나?"

낡은 트렌치코트 차림의 후줄근해보이는 남자가 정천과 제법 반가운 듯이 인사를 나누자 영은 두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며 얼굴에 의문부호를 띄웠다. 그런 영에게 정천은 이 기묘한 거지꼴의 사내의 정체를 소개해주었다.

"형씨, 이쪽은 걸립이요. 거렁뱅이 신."
"동냥의 신이라 해 줘."
"뭐, 직업이 이래 된 관계로 구석구석 안 다니는 골목이 없고, 안면 트고 다니는 지박령도 많으니 형씨에 대한 소식을 건너건너라도 알고 있을 만한 친굽니다."
"걸립이올시다."
"이영입니다."
"이영…?"

걸립은 뭔가 께름찍한 촉이 왔다는 듯이 입가를 죽 일그러트리며 영을 바라보았다. 영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사실 걸립 스스로도 그 이유가 명확히 떠오르진 않고 있었다. 정천은 일단 걸립을 찾았으니 뭐든 실마리가 풀릴 거라 낙관하는 눈치였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진 않을 모양이었다.


"뭐? 모르겠다고?"
"요 근시일간에 저 사람의 소식을 들은 게 없냐고 물었잖어? 암만 생각해도 없어."
"그러면 이 형씨가 허공에서 뿅 튀어나왔단 말이라도 할 셈이야?"
"아니 그렇지는 않고. 이영, 이영이라는 이름 분명 들어는 봤단 말이지."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정천은 영문 모를 말만 해대는 걸립에게 씩씩대며 열을 올렸다. 걸립은 그런 정천을 제치고 영에게 직접 물었다.

"자 형씨. 남대문까지 와서 보니 좀 어떻소?"
"어떻다니요?"
"익숙한 게 좀 있느냐고, 대문 빼고."
"아… 아니오. 기억도 안나고 떠오르는 것도 없는데."
"암만 기억이 날라갔대도 이래 날아갈 수는 없지. 자 그럼 형씨. 올해가 무슨 해요? 지금 당장이든, 기억에 있는 마지막 해든 아무거나 말해 보쇼."
"올해…? 그…"
"그러면 서기 2019년이라고 하면 좀 익숙하쇼?"
"…?"

걸립은 이마를 턱 짚더니 정천에게 조용히 말했다.

"어디서 주워왔어?"
"어… 독립문 옆 영천시장에서."
"내 말은 어쩌다 이런 골치아픈 망자를… 에휴. 됐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여, 도대체?"

답답해하는 정천과 영문을 모르겠다는 영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걸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형씨. 내 장담컨대 댁은 고작 한두 해 묵은 귀신이 아니요."
"…"
"허, 그럼 한국전쟁 때 귀신이라도 된대?"
"아니. 형씨가 내 기억 한 켠의 그 이영이 맞다면, 댁은 죽은지 수백 년은 족히 넘었소."
"…뭐?"

정천의 입이 덕 벌어졌다.

"아니, 그걸 어떻게 확신해. 이씨 본관에 동명이인이 얼마나 많은데!"
"하이고 장철이 이놈도 감 많이 죽었네. 금제소 직장1 실종 사건이 기억이 안나는가?"
"금제소? 보전원 얘기야?"
"그래, 그때 한성 뒷바닥에 못 들은 놈이 없었는데."
"보전원…?"

묘하게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런 영의 낌새를 보며 걸립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댁은 보전원 금제소에서 일하던 서생이었소. 이름은 이영(李榮), 호는 지범(只凡). 숙종 5년 기미년에 이물 하나를 빼돌려 달아났다가 그 후 행방이 묘연해졌지. 사건을 아는 자들은 댁이 어쩌다 그랬는지, 어디로 도망했는지 참 궁금해했는데…"
"자, 잠깐만요. 저는 여전히 기억이 안 납니다. 잘 모르겠어요. 나는…"
"걸립. 뭔가 더 자세한 정보는 없겠나? 상세하게 사정을 쫓다보면 뭔가 더 생각날지도 몰라."
"정확히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을 내 알고 있지만… 하… 그쪽에 빚 지우는 게 쉬운 게 아닌데 진짜…"

걸립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정천의 눈치를 살폈다. 정천이 뭐가 어찌되든 방법을 찾아보라는 강렬한 눈빛으로 답변을 대신하자 걸립은 또 한숨을 길게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김세경 교수 알지? 중세경신 자청비. 그치가 전에 김철현이를 냅다 서울에 보냈다가 나한테 신세를 좀 져놓은 게 있거든…"


* * * *


"부탁한 거, 일단 알아볼 수 있는 만큼 알아봤어요. 제법 흥미롭더라고요."

"아이고, 영광입니다 교수님. 정말 이런 일로 수고를 끼쳐드려서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걸립은 신세를 지웠다던 말과는 달리 통화 내내 연신 저자세로 굽신거리고 있었다. 세경에게 조사를 부탁한 뒤 날이 저물자 세 사람, 아니 신과 도깨비와 귀신의 기묘한 일행은 일단 정천의 월세방으로 자리를 옮겨 있었다.

"이영씨는 옆에 있나요? 스피커폰으로 돌려보세요. 한 번에 하게."
"예입, 여부가 있겠습니까."
"안녕하세요. 김세경이에요."
"반갑습니다, 교수님. 이영입니다."

영의 목소리엔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세경은 그런 영을 풀어줄 겸 가볍게 운을 뗐다.

"저승에 안 이를 거니까 겁 안먹어도 돼요."
"아뇨, 그것보단… 과거를 찾는 게 이상하게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왜 이럴까요…"
"그 마음 알 것 같네요. 그러면 더 미루면서 불안해하기보단,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영이 헛기침을 삼켰다.

"…네. 부탁드립니다."
"우선 양해부터 구해야겠네요. 보전원은 민간자료가 거의 없어서, 서천이랑 능구렁이 손에서 단편적으로 모을 수 있는 자료들을 짜집을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부터 말씀드릴 이야기가 정확할지는 확언하지 못해요."
"그만큼만 해도 분에 넘치는 호의입니다."
"…그러면 시작하죠. 뭔가 떠오르면 바로 말하시고요."

세경은 자신이 다방면으로 구한 정보들을 이야기로 재구성해내어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영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 어차피 폐도 없는 몸뚱이건만 숨이 가빠왔고, 살점도 남지 않은 낯짝이건만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한 마디 한 마디 과거의 기록이 들춰질 때마다, 요동치는 영의 내면에서 기억도 조금씩 껍데기를 벗기 시작했다. 이윽고 영은 세경이 읽어주는 그 옛날의 자기 이야기를 하나하나 똑똑히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야기 그 너머의 진실이, 그의 망막을 뒤에서부터 때려댔다. 마치 스스로가 가슴 깊숙히부터 불타 으스러지는 듯, 매캐한 연기가 자신을 휘감는 것을 영은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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