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탈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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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어요?"

그의 계획을 전해듣고 난 연경의 솔직한 반응은 그러했다. 지범은 얼른 조용히 하라는 손시늉을 했다.

"아니, 제 억울함을 풀어준다면서 고작 하는 말이, 탈옥이요?"
"쉿, 목소리 낮춰.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일이 틀어져."
"그걸 아는 양반이 이따위 망발을 계획이랍시고 말해요?"

그녀의 반응은 타당하기 그지 없었다. 보전원 금제소에서의 탈옥 시도는 거의 자살 행위나 다름 없었으니.

"그래도 해야 돼."

안 그러면 모두 죽어. 그는 떠오르는 뒷말을 조용히 삼켰다. 그날도 때아닌 장대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 * * *


그의 아내와 딸아이의 상태,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거진 한 시진에 걸친 지범의 구구절절한 설명과 설득이 끝나자 연경은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돌리고 고심에 빠졌다. 탈옥은 중죄였다. 더군다나 세간의 이목이 닿지 않는 조정의 감옥에서 탈출한 죄는 더욱 중하게 다루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갇혀있자니,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예상할 수 없는 법이었다.

"하아, 그래요. 이제 와서 이래 죽나 저래 죽나, 한 번 해보자고요. 계획이 뭐에요?"

그날부로 지범은 없던 잠조차 줄여가며 연경을 빼돌리는 계획에 몰두했다. 최종적인 목표는 연경을 무사히 빼돌려 아내와 딸아이의 치료를 마치고 각자 종적을 감추는 것이었다. 그것만 성공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으나, 결코 쉬운 일은 못 되었다. 당장 연경을 옥에서 데리고 나오는 것부터가 큰 어려움이 되었다.

서편 옥의 복도에는 부적이 붙은 금줄들이 겹겹이 둘러져 있었다. 지범과도 같은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술사나 이물 따위가 드나든다면 반드시 탈이 나도록 되어있었고, 그가 알기로 이 금줄은 어째선지 칼조차 들지 않았다. 옥 창살에 걸려있는 금제의 봉인은 미리 허가를 받아두지 않고서는 봉인을 풀 물품들을 받을 수도 없으며, 봉인이 풀어지는 순간 금제소에 속한 술사들에게 무언의 신호가 간다 하였으므로 결코 들키지 않고 연경을 데리고 나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령 어찌저찌 탈옥에 성공하더라도 그 후의 일이 더욱 걱정이었다. 옥중 부녀자를 데리고 나와 온갖 술법과 재주를 부리는 보전원의 술사들을 어떻게 따돌리며, 또 도망에 성공한다 한들 후일 지속될 이금위의 추적은 어찌 피하는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가 생각을 거듭할 수록 하지 말아야할 이유만 계속해서 떠오르고, 해야할 이유는 희미해져만 갔다.

그리 생각하며, 그가 퇴청하고 돌아온 집에서는 여전히 꿉꿉하고 들큼한 특유의 죽은 냄새가 났다. 이제는 간병해주는 이도 구하지 못해 이웃에게 끼니를 챙겨줄 것만을 간신히 부탁하고 있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그의 아내의 모습은 갈수록 나빠져만 갔다. 백색으로 물들어 희미해진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는 언제 숨이 넘어갈지 모를만큼 위태로운 아내의 모습을 보며, 그 곁에서 한참토록 앉아있었다. 그는 일련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스스로를 향해 웃어보이던 아내, 그런 아내를 닮은 딸아이의 얼굴, 딸아이가 내민 따스한 손길, 그리고 그 모든 게 일그러지고 망가진 지금 이 순간.

옆에서 딸아이가 괴로워하는 신음을 흘렸다. 장지문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슬며시 내비치고 있었다. 그는 딸에게 다가가 손을 붙잡고, 품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이토록 작은 아이가 가쁜 숨과 함께 눈물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한 가지 의미로만 다가왔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계시를 잊지 않았다.


* * * *


그로부터 수 일이 흘러 몇 가지 준비를 더 마친 후, 마침내 그는 비가 멎은 어느 날 밤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소수의 사람들을 남기고는 모두 퇴청하였을 시간, 충분히 밤이 무르익을 동안 집무실에 앉아있던 지범은 고뇌에 빠져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잠시나마 금제소의 보안 체계를 뚫어내어 이물을 빼돌리고 도망치기 위해서는 가장 극단적이고 무식한 방법밖에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위에 두었던 작은 보따리를 손에 쥔 채 서편으로 향하기 직전, 다음과 같은 행동으로 계획을 시작했다.

그는 집무실 한켠에 그득히 쌓아둔 두루마리들을 향해 수통에 담아두었던 기름을 잔뜩 부었다.


* * * *


"연경!"

지범은 뛰듯이 다가와 창살 사이로 작은 은장도와 함께 언뜻 나무조각처럼도 보이는 칼의 열쇠를 건네주었다. 창살 사이로 집어넣는 그의 손에 작은 번개라도 통하는 듯이 저릿저릿한 감각이 들었다. 연경은 그것들을 잡아채듯이 받아들고서는 빠르게 이음새 부분에 꽂아 육중한 칼을 벗어던졌다.

"드디어 벗어보네, 이 지긋지긋한 것.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뭔가 틀어진 줄 알고 놀랐잖아요."
"그런 소리할 시간에 빨리 갈아입어. 곧 있으면 온갖 사람들이 고서각의 불을 끄러 오느라 혼란스러울테니, 그때 사람들 틈에 섞여서 빠르게 도망쳐야해."
"정말 불을 질렀다니… 잡히면 사지 멀쩡히 죽기는 글렀네요. 봉인을 풀 거리는 가져왔어요?"

연경은 그 자리에서 망설이는 기색 없이 해진 옷으로 바삐 갈아입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어색하게나마 끊어냈다. 체격이나 얼굴까지 온전히 숨길 수는 없을테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의 적당한 눈속임수는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지범은 들고 온 보따리에서 작고 검은 돌멩이 하나를 꺼내어 창살에 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창살에 문질러진 흑석은 점차 빛을 더해가며 하얗게 변하더니, 투명한 액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기이하게도, 그 액체가 창살을 따라 흘러내리자 그 경로를 따라 연기와 함께 창살이 녹기 시작했다. 연경은 들어본 바 없는 눈앞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거 설마… 이물을 가져온 거에요?"
"이걸로 금줄도 녹여뒀어. 봉인이 완전히 끊어지면 술사들이 눈치를 챌 거야.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되 소리는 내지마."
"정말 나 하나 꺼내려고 온갖 죄는 다 저지르네요.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어요?"

순간 창살을 문지러든 그의 낯에서 온갖 표정들이 스쳐지나갔다. 나라가 가진 온갖 비밀 지식의 보고를 제 손으로 불태웠다는 죄책감, 선현이 말씀하신 괴력난신에 기대며 인륜을 저버린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지범에게 있어 그 죄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살릴 수 있는 가족을 죽게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 가장 크고 중한 죄악이 될 터였다.

한참의 적막이 흐르고, 마침내 사람 하나가 기어서 지나갈 수 있을만한 충분한 구멍이 생겼다. 그는 부글거리는 이물을 바닥에 내팽겨치고, 연경이 나오는 것을 도왔다. 연경의 눈에 비친 그는 결연하면서도 광기에 물든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려야 해."
"…."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그들은 옥 복도의 끊어진 금줄들을 지나 출구로 향했고, 천운이 따른 것인지 지범의 의도대로 입구를 지키고 있는 관리는 갑자기 일어난 화재 사태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옥문을 열자 서편의 복도가 나왔고, 천만다행으로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아 그들은 걸음을 서두를 수 있었다.

지범이 동편의 집무실과 고서각에 시간을 두고 불을 놓아둔 덕분에, 물 한두 바가지로는 급히 해결될 수 없을 것이었다. 이 근방에 물을 길을 수 있는 곳이라고는 작은 토정(土井)1 하나 뿐이고, 두레박을 미리 망가뜨려두었으니 약간이나마 시간을 더 벌 수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시간을 더 벌기 위해서는…

그는 기름의 든 수통의 뚜껑을 열고 눈에 보이는 서고를 향해 집어던졌다. 그의 뒤에서 불이 붙은 초가 날아가더니 오래된 책들을 태우며 순식간에 불길로 치솟았다. 지범이 뒤를 돌아보자 결연한 표정의 연경이 마저 불 붙은 양초들을 집어던지며 물었다.

"이러려던 거 맞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가던 길을 통해 바깥문으로 향했다. 선비는 뛰지 않는다는 말이 무색할만큼 누구보다 점잖치 못하게 달려가던 지범의 발에 밟히는 것이 있었다. 시선을 내려다보니 바닥에 쓰러져 앙상히 말라죽은 회색 시궁쥐였다.

한 번 밟힌 충격으로 완전히 찌그러진 털처럼 되어있었는데, 그 안에 살이나 근육 따위는 일절 없이 앙상한 가죽만 남은 듯했다. 문득 오싹함이 지범의 등골을 타고 올라왔으나, 그는 앞서 가는 연경의 재촉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을 모른체하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귀퉁이를 돌던 다음 순간, 그들은 날카로운 눈매의 관리 하나와 마주쳤다. 수염을 기르고 상투를 올려쓴 근엄한 모양새와 차려입은 복식을 보아 짐작하건대 주부, 내지는 술사였다. 순간 지범은 머리가 새하얗게 된 듯 싶어서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연경은 그런 그를 보며 손목을 물어뜯을 작정으로 입가에 가져다댔다.

그 관리는 위아래로 지범와 연경을 훑어보더니, 생긴 것과 같은 근엄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계시지 마시고 어서 밖으로 나가십시오. 금제소 동편에서 불이 났답니다."
"아!"

들키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지범은 빠르게 급박한 체를 하며 연경의 팔을 끌고 문으로 향했다. 그가 지나친 관리는 머릿속에 얼굴을 담아놓으려는 듯 그들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다가 어디론가로 향했고, 연경은 바깥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계속 그 관리가 지나간 쪽을 돌아보았다.

"저쪽으로 가면 우리가 온 방향에서 불이 났다는 걸 알텐데, 이러다가 금방 들키는 거 아니에요?"
"잡히지만 않으면 상관 없어. 그동안 시간만 조금 벌 수 있다면…"

밖으로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것은 공기 중에 가득한 매캐한 연기와 금제소 동편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거대한 열기였다. 밤까지 재소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덕에 불이 생각 이상으로 잘 퍼진 모양이었다. 몇 안되는 사람들이 제각기 마당에 쓰러진 채 콜록거리고 있거나, 고함을 지르며 물을 찾고 있었다.

고함 치는 이들 중 얼굴이 익은 몇몇 이들은 그를 알아본 듯한 눈빛을 했지만, 그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대문으로 향했다. 죄책감을 가질 시간조차 아까웠다. 지범과 연경은 도중에 붙잡는 손이 없기를 바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르게 대문의 문지방을 넘었다.


* * * *


대문을 나선 직후서부터는 빠르게 달려 하마비를 지나치고 곧장 말을 묶어둔 곳을 향해 죽어라 내달렸다. 당장은 불을 놓아 혼란에 빠졌다고 한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제소의 봉인이 풀렸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봉인 물품의 출납 명부에 마지막으로 적혀있는 이름이 지범의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내고 그 길로 바로 추적해올 것이다.

지범은 얼른 연경을 안장에 올리고, 자신 역시 몸을 올라탔다. 흙길을 따라 천천히 걷던 말은 지범의 재촉에 못 이겨 한성 저잣거리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연경과 지범을 태운 말은 길을 빠라 빠르게 질주했고, 그들 위로 검은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그들을 향해 희미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미리 말까지 빌려두다니, 치밀한데요."
"고마청에 행선지를 속이고 두 필을 빌려두었어. 하나는 집에 메어두었지. 붙잡히는 순간 우리는 둘 다 죽은 목숨이야."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지요.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이렇게 대놓고 큰길로 다녀도 돼요?"
"어줍잖게 돌아가기보다는 시장 바닥을 통해서 빨리 도망치는 게 맞아. 불을 질러 겨우 빠져나왔지만, 곧 이금위에서 우리를 쫓기 시작할거야. 이금위에서 마음만 먹으면 우리가 어디로 숨어도 곧장 찾아낼 수 있을테니 빠르게 벗어나야 해."

최소한 바로 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반 시진 이전에 한성 대문을 빠져나가야 했고, 하루가 지나기 전에 완전히 떠나 조정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던 지범은 지방의 친척에게 미리 연통을 해두어 치료가 끝나는 즉시 밤낮으로 말을 타고 달려 가족들과 함께 행방을 감출 심산이었다.

한참을 달려 다다른 한성 남쪽의 숭례문은 미리 보아둔 대로 기청제(祈晴祭)2 덕택에 활짝 열려있었고, 꾸벅꾸벅 졸던 병졸들과 몇 마디 나눈 끝에 마침내 한성을 벗어나는 순간에는, 지범은 그렇게나 싫어하던 장대비에게 약간의 감사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한성을 벗어난 이후로부터 그는 더 볼 것도 없이 말을 재촉하여 떨어질락말락하는 위험한 속도로 집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집에 가까워지는 매 순간, 하물며 달이 중천에 떠오를 즈음 도착한 집에서도 그는 자꾸만 그 쥐를 밟았을 때의 물컹하고도 공허한 감각이 떠올라 그의 마음 한 켠에서 자꾸만 불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 * * *


말을 거의 혹사시키다시피 하며 거칠게 몬 덕에 그는 빠르게 집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는 집에 다다른 직후 말을 메어두지도 않은 채 곧장 방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방문을 열어젖히자, 고작 반나절이 지났을 뿐인데 방에는 이미 무덤가에서나 느껴질 법한 싸늘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한발 뒤늦게 들어온 연경은 서둘러 송장과도 같은 몰골으로 누워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심각한 표정으로 맥을 짚었다. 지범의 마음 속은 불안이 가득해졌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 달려오는 동안 한 사람이라도 숨을 거두었다면, 그래서 영영 구할 수 없게 된다면… 연경은 손을 떼고 지범을 잡아끌어 앉혔다.

"어서 이리 와서 거들어요. 상태가 심각해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맥도 불안정해요."

그 말대로였다. 그가 아내의 이마에 손을 올리자 허여멀건 피부와 송골송골 배어나오는 식은 땀이 닿았다. 공기구멍을 따라 겨우 흘러나오는 듯한, 색색거리는 불규칙적인 숨이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연경은 금방 자세를 취하고는 스스로 손목을 물어뜯어 피를 냈다. 연경이 기이한 영창과 함께 손짓하자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에서는 곧 작은 벌레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핏방울에서는 전과 같이 여러 종의 벌레들이 잔뜩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 고작 작은 지네 몇 마리만 조금 나타날 뿐이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지범은 연경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는데, 누워있는 아내와 딸만큼이나 연경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래 갇혀있었던 후유증임에 틀림없었다. 연경은 지친 안색으로 다시금 손목을 물어뜯었으나,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 듯 싶었다. 지범은 어린아이라도 된 듯이 그 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물었다.

"왜 그래, 괜찮나? 살릴 수 있는게지?"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저로서는 한 사람도 제대로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피가 부족해서, 주술이…"

살려내야 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기필코, 반드시.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인륜을 저버리고 천륜을 다시 저버릴지언정 내 가족만은 살려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리 되뇌며 주변을 훑어보던 그의 눈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방구석에 작은 과도가 놓여있었다. 해야한다. 해야한다. 해야한다. 그는 다시 연경을 돌아보았다.

"내 피, 내 피를 써. 그것 밖에 답이 없어."
"저승길 따라가고 싶어요? 이 정도로 위독할 줄은 몰랐어요. 나나 댁 피를 몽땅 뽑아다 써도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지범은 그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 과도를 집어다가 순식간에 자신의 팔뚝을 찔렀다. 그의 오른손에 밀려들어오는 고기 써는 감각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광적인 고통이 동시에 그의 머리로 타고 올라왔다.

"크윽, 아아아아악!"
"아니,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지범의 입에서 고통이 담긴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의 찢어진 팔뚝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방바닥을 적셨다. 그 모습을 본 연경은 그야말로 아연실색이었다. 지범은 팔에서 쏟아져나오는 피와 고통을 참으며 끅끅거리는 소리와 함께 겨우 말을 뱉었다.

"내 피를 써…"
"…."

입술을 깨물고 있던 연경은 이윽고 눈을 감고 기이한 음절들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절들은 더할 나위 없이 불경하여 결코 인간의 언어라 보기는 어려웠으며 차라리 짐승의 괴이한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지범의 귓가에 울리기는 하였으나 차마 그로써는 무슨 말뜻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던 그 소리는 방 안 가득히 메아리쳤다.

그 영창이 지속됨과 함께 방 안에는 서서히 온갖 벌레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뒷간에 날아드는 것들부터 장독에 숨어드는 것들, 발밑을 기어가던 것들, 깊은 숲속에서나 보이는 것들, 아예 본 적도 없는 생경한 것들까지 세상 천지의 모든 벌레가 그 방에 모여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천의 날개들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가득했고, 수만의 다리가 기어다니는 소리가 방 전체를 뒤덮었다.

그것들은 지범의 팔뚝에서 솟아나오는 피에 달려들어 흔적도 없이 마셨다. 다리 많은 벌레들은 지범의 발끝에서부터 기어올라 은장도로부터 생긴 길다란 상처를 비집고 들어가려 했고, 날개 달린 것들은 떨어진 핏방울이 바닥에 스며들기도 전에 먹어치웠다. 지범은 생전 처음으로 느끼는 이 불쾌하고 끔찍한 감각에 몸서리쳤으나 함부로 털어내지는 않았다. 점차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암만 끔찍한 일을 겪더라도 아내와 딸이 살아나면 그것으로 되는 일이었다.

마침내 지범이 제 몸을 가눌 수도 없을만큼의 지경에 이르자, 벌레들은 피를 빨아먹는 것을 멈추고 일제히 그의 아내와 딸에게 달려들었다. 지범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방 안에 누운 두 사람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크고 작은 벌레들이 달라붙어 우글거리는 기이한 풍경을 보고만 있었다. 그의 마음 속에서 지범 스스로의 생명의 불씨가 꺼져감과 동시에 희망의 잔불이 점차 빛을 더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찰나의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수 시진이 걸린 것 같기도, 아예 한나절이 걸린 것 같기도 했다. 지범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피를 뽑혀 머리가 어지러웠다. 감고자 하는 의지도 없이 눈꺼풀이 감겼다. 이대로 희미한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 그대로 숨을 거두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버틸 수 없었다.


* * * *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방에는 특유의 꿉꿉하고 들큼한 냄새가 모두 사라져있었다. 연경은 장지문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는 듯 보였는데, 어쩐지 지범과 눈을 마주치려 들지를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몸을 일으켜보려던 그는 팔뚝의 상처에 자못 심한 고통과 어지러움을 느끼며 다시 쓰러졌다.

방바닥에는 각종 벌레들이 가득하여 완전히 검게 보였다. 그는 피가 부족한 탓인지 제대로 가눌 수 없는 몸을 필사적으로 일으켜 당장 눈앞에 보이는 딸에게로 향했다. 벌레들은 그가 움직이는 대로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아이는 언뜻 보기에 잠들어 있는 듯 보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안색이 좋아보였고, 여느때보다 편안해보였다. 그는 마음 속에서 솟아오르는 따스한 감정과 함께 딸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분명 차갑다고 느낄 정도는 않았다. 그러나 싸늘했다. 지범의 포개어진 손 위로 서서히 힘이 풀리고 이완되는 무언가가 닿았고, 앙상한 손가락 마디가 느껴졌다. 그는 딸의 얼굴을 보았다. 아이는 초점이 풀린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지를 두어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눈꺼풀이 뜨여만 있는 상태였다.

지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의 손이 움찔,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이 아이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마저 경직되지 않은 근육이 외부의 자극에 보이는 평면적인 반응일 뿐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하나의 선고처럼 다가왔다. 아이는, 이미 숨을 거둔지 오래였다. 천지만물이 그를 저버리는 순간이었다. 지범은 빈혈의 증세로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운 상태였으나, 속에서부터 겉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끔찍스러운 울음을 금수처럼 쏟아냈다.

"끅, 끄허어억… 꺼헉, 끅, 어헉…."

너무 늦었나, 너무 늦었던 것이다. 연경을 찾은 것도, 봉인을 푼 것도, 집으로 달려온 것도, 내가, 내 팔을 찔러 피를 낸 것도 너무 늦었다. 확인을 하겠다며 뜻없이 흘려보낸 그 시간들만 아니었어도. 멍청하게 의원이나 찾아볼 시간에 연경에 대한 비록을 조금만 더 빨리 읽어보기만 했어도! 아니, 일찍이 내가, 더 빠르게 판단하기만 했어도…

그런 그를 보며 무언의 결심을 굳힌 연경은 방을 가득 채운 벌레들에게 일련의 손짓을 보였다. 벌레들은 병상에 누워있는 두 시신에게 조용히 몰려들어 그 시체들을 감싸기 시작했고, 싸늘한 시체에 달라붙은 벌레들은 이불 너머로 꾸물거렸다. 연경은 딸의 시신을 붙잡고 괴로워하는 지범을 향해 다가섰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정말, 그러시기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제 아내와 아이를 살리겠다고 팔뚝에 칼을 꽂는다니, 보통 인간치고 독하고도 그리 독할 수가 없지요."
"이제 와서, 끄흑,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아이가, 아내가! 봉인을 풀어 사람을 살린다는 이물까지 데려왔건만!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으니… 내가 죽일 놈이다, 내가 죽일 놈이야!"
"아니요, 내가 놀란 점은…"

연경은 옷소매로 지범의 이마의 땀을 가벼이 닦아내고서, 싸늘한 시신의 발목을 쓰다듬었다. 그의 팔뚝에서 멈추지 않은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찌 그리 사람을 쉬이 믿습니까?"

순간, 연경의 손이 그의 환부를 꿰뚫었다. 그 직후 연경은 가공할 만한 괴력으로 순식간에 그를 기둥으로 내던졌다. 시신을 붙잡고 오열하고 있던 지범은 육중한 쾅 소리와 함께 한순간 허리가 끊어지고 환부가 터지는 불같은 고통에 휩싸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것 뿐이었다.

"아아악!! 크학, 큭… 끄아아악!! 이게, 이게 무슨 짓…"
"날 잡아들였던 그 치들처럼 도술을 부리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품에 부적 한 장은 숨겨두었을 줄 알았지."
"으윽, 흑… 대체 무슨 소리를…"
"이따위 허술한 인간인 줄 알았으면, 이딴 개짓거리할 필요 없이 빠져나온 순간 먹어치워버리는 거였는데."

연경은 품에서 금줄을 꺼냈다. 그와 동시에 방을 에워싸고 있던 벌레들이 갑자기 이불 위로 누워있던 두 시신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지범은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연경은 힘없는 그의 팔과 몸통을 기둥에 대고서 금줄로 두세겹을 감아 칭칭 묶고 있었고, 아까의 벌레들은 치료할 때와 마찬가지로 두 시신을 까맣게 에워싸고 있었다.

"흑, 흐으… 대체 무슨, 무슨 짓을 하는…"

그제서야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벌레들은, 지범의 아내와 딸의 시신을 파먹고 있었다. 지범은 순간 세상이 떠나가는 듯한 괴로운 괴성을 질렀다.

"너, 너 이 미친… 미친 괴물 자식이…!"
"내 능력에 피 따위는 필요 없어. 그냥 눈속임이었을 뿐이야. 어떻게 제압해야하나 막막했는데, 제 손으로 제 팔에 칼을 꽂을 줄은 몰랐지."
"뭐하는… 처음부터…!"
"말하자면 처음부터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 네 눈깔이 나한테 찾아오던 것들의 광적인 눈빛을 담고 있길래 거기에 맞춰주었을 뿐이야. 위험해졌을 때 한번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했는데, 이런 짓까지 벌일 줄은…"

지범의 숨이 격하게 끊어지고 이어졌다. 모든 혈관이 분노와 증오로 가득차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좁은 방에는 수천마리의 벌레들이 서로 날개를 부딪치고, 다리를 움직이고, 살갗을 파먹는 소리로 가득했다. 연경은 분노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비웃고는, 문득 바닥에서 길게 타오르던 촛불 하나를 넘어뜨렸다. 불씨는 천천히, 이불을 지나 방바닥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지범의 머릿속은 더할 나위 없이 혼란스러웠다. 지금껏 연경을 마주했던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속았나, 이용당했나, 하지만 그런 것은 따질 겨를이 없었다. 눈앞의 아내와 아이가 죽었다. 세상을 등지더라도 지켜주고 싶었던 가족들이 이제는 싸늘한 주검이 된 채로 벌레들 따위에게 뜯어먹히고 있었다.

"후우, 그래도 다행이에요. 그대로 도망쳤다면 기력이 없어 얼마 못 갔을텐데, 병자 두 마리라도 잡아먹으니 그나마 기운이 좀 살아나네요. 선비님 덕택입니다."
"이… 이…! 네깟놈은 지옥에 떨어질 테다! 천지신명이 네가 한 짓을 모를 줄 아느냐!"
"모를 리가 없지. 나같은 년을 만들어 세상에 보낸 것도 그 잘나신 천지신명이실텐데. 사람을 죽이기 위해 태어나 사람을 잡아먹으니 무엇이 어찌 잘못되었을까?"

벌레들은 두 시신에 달라붙어 온갖 부분을 빠르게 파먹고 있었다. 머리, 몸, 팔, 다리… 벌레들은 바닥에 서서히 퍼지는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먹는 것에만 열중했다. 그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네놈에게도 최소한 인간의 도리가 있다고 믿었다. 네가… 네 재주로 사람들을 살려냈다는 말을 믿었다!"
"어머, 산등성이에 죽어가는 사람들 살려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걸요. 한두놈만 성하게 살려두고 힘든 척 좀 하면 지들끼리 산신령이니 선녀니 온갖 말을 보태면서 다른 인간들을 몰고 왔지요. 그 중에서 연고 없는 놈들 모아다가 통째로 먹어치웠는데, 아무래도 그 때문에 잡힌 듯 하니 다음부터는 좀 더 교묘히 식사할 방법을 찾아야겠네요."
"나도 어서 먹어치워라, 이 악귀 자식아! 어디 끝장을 내봐라! 네 너를 지옥에서 다시 보리라!"
"큭큭… 안 먹을겁니다, 지범 선생. 너같이 악쓰는 놈 괜히 주워먹었다가 탈날까 두렵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나라의 중한 재산을 들고 도망친 놈 집에서 불타죽은 시체 하나는 나와야하지 않겠어요?

살갗, 근육, 신경, 골수까지, 벌레들은 뼈를 제한 모든 부위를 남김없이 갉고, 찢고, 뜯어먹었다. 지범은 지난 순간순간의 자신을 원망하며 가슴이 터져버리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피를 빨려 혼미해진 의식에 집중하며 그는 떠오르는대로 온갖 악을 내질렀다. 어느새 불길은 벽면에 닿기 시작했고, 연경은 장지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 이 망할 괴이 따위가… 너 따위 이물을 믿는게 아니었는데…"
"선생께서는 보전원의 귀중한 재산을 가지고 도망친 탐욕스럽고도 무능한 관리로, 나는… 그런 관리에게 속아 강제로 끌려가서는 불타 사라진 귀중한 보물로 기억되겠지요. 댁 아니었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으니, 이렇게나마 감사를 드립니다."

마침내 뼈만 남았다. 더없이 배를 채운 벌레들은 나타났던 구석으로 다시 일제히 날아서, 기어서 사라졌다. 이제 이불 위에는 체형이 다른 백골 유해 두 개만 덩그러이 남아있었다. 지범은 스스로 두 눈을 파버리고 싶었다.

"아아… 옥아… 옥아…"
"어서 일어나야지, 너희 아버지께서 너를 살리려고 이런 개고생을 하셨는데."

연경은 그리 말하며 뼈만 남은 시체 한 구를 걷어차보였다. 그에 지범은 새된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질렀으나 깔깔거리는 연경의 웃음에도 묻힐만큼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보아도 금줄은 풀릴 기색이 없었다. 바닥에서 시작된 불길은 어느새 천장까지 뒤덮기 시작했고, 슬슬 매캐한 연기와 잿가루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그럼 불이 더 번지기 전에 저는 이만… 선생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지옥에서 기다리십시오. 내 따라갈 일 없으니."
"이, 쿨럭, 천하의 괴물자식…!"

연경은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장지문 너머로 가벼운 발걸음을 돌렸고, 그대로 영영 사라졌다. 어느새 바닥을 전부 뒤덮은 화염은 지범의 살갗에도 닿아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그 불길은 더욱 뜨거워져만 갔고, 더욱 밝아지기만 했다. 모든 것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방 안의 모든 가구와 잡동사니, 이불에 싸여있던 시체까지 모조리 불타고 있었다. 방을 가득 채우던 벌레들은 이제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그의 마음은 사념들 따위로 시끄럽지 않았다. 깊고 어두운 공허 너머로 떨어지는 것처럼 고요했고, 어둔 방 안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작은 촛불처럼 분명했다. 그의 안에는 오로지 하나의 감정만이 남아있었다. 그의 남아있는 의식을 아득히 감싸고 있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듯이 이글거리는 그 감정은…

증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그것 하나 뿐이었다.

"반드시, 내 반드시 찾아내고 말테다. 억겁의 세월이 지나도 반드시, 큭, 찾아내서 그 죗값을 치르게 하고 말겠—"

듣는 이 없는 그의 외침이 채 끝맺기도 전에 불타는 대들보가 쿵하고 무너졌다. 동시에 천장이 와르르 내려앉았다. 사방에 자욱한 연기가 떠올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서 뜨거운 열기와 이글거리는 불꽃이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삼켜버릴 작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지범은 손가락 한 마디도 움직이기 어려웠다. 방금의 충격으로 갈비뼈가 부서진 듯 했으며, 코로 들이키는 공기는 더 이상 지범의 숨을 채워주지 못했다. 살점이 쪼그라들고 의식이 흐려지는게 느껴졌다. 팔과 다리가 검게 타올라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서도 그를 묶은 금줄만큼은 결코 끊어지는 법이 없었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는 그를 그토록 괴롭히던 시끄러움이 다시 찾아와주기를 바랐다. 때아닌 장대비가 쏟아져 이 불길을 잡아주기를 원했다. 강물이 불어나 연경의 발이 묶이기를 바랐다. 떨어지는 빗줄기 속에 자신을 내던져 그의 마음 속에 가득한 후회, 자책, 괴로움 따위가 모조리 씻겨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숨을 틀어막는 자욱한 연기 속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그 옛날 언젠가 자신을 붙잡아주던 두 사람의 손을 다시 잡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제 그가 저지른 과오 덕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한 차례 무너진 처마 너머로 달빛이 비웃듯이 새어들어오는 것 같았다.

매캐함은 썩 달갑지 않은 감각이다. 익숙해지지도 않고. 목과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텁텁한 연기가 행여 눈에라도 닿으면, 그 매캐함을 씻어내려고 눈병이라도 걸린 양 줄줄 흘러넘치는 눈물이 시야를 가려버린다. 그러나 눈물 따위론 매캐함이 가시지 못한다.

연기는 사람을 쉽게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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