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은 결착

밤.

연경은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기지개를 켰다. 설립식은 성공적이었다. 가야금 소장과의 대담 역시 순조롭게 흘러갔으니, 더 걱정할 게 없었다. 극동부문 한국지소와의 관계는 아무런 일이 없는 이상 적절히 유지될 것이고, 그렇다면 외보전원도 한국 땅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테다. 성취감과 안도감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런 생활을 영위한 지도 이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산천을 헤매며 허기를 채우던 시절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하물며 비루한 것들이 추앙할 제에도 작금의 영화와는 비할 바가 못 되었으니. 연경은 씩 웃으며 좌석에 몸을 묻었다. 삶이란 게 참 어찌 나아갈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는 몸을 옥죄는 정장 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고, 그리고 앞에 놓인 생수를 마셨다. 휴대폰이 울리면서 여러 통의 안부 문자, 설립식에 대한 안건, 감사 인사와 청탁 등등의 잡다한 연락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연경은 하나하나 처리하며 뒷목을 문질렀다. 이런 것들을 적절히 응대하는 것 또한 현재의 영화를 즐기는 대가였으니까.

차가 번화가에 들어섰다. 차창에 네온사인이 내렸다.

"그나저나 식사는 준비되었나?"

연경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운전수가 백미러로 연경의 안색을 살폈다.

"방에 준비해뒀습니다."
"걸릴 건 없었지?"
"네, 아무도 모를 겁니다. 상황 조성은 다 해뒀습니다."
"김 실장만 믿어."

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닌 괜찮으시고?"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덕분에."

짧은 대화 직후 차가 호텔로 들어섰다. 먼저 와 있던 수행원들이 연경을 반겼다. 연경은 차에서 내려 호텔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호텔이었다.

운전을 맡았던 남자를 포함한 수행원들이 연경의 뒤를 따랐다. 연경의 숙소는 11층에 있었다. 상대적으로 중요하진 않았지만, 이러나저러나 연경도 108평의회 중 하나인 외보전원의 간부가 아닌가. 타 단체에서 위해를 가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닐뿐더러, 지금처럼 거사를 성사시키고 난 뒤에는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귀중한 식사시간을 방해받을 수는 없으니.

직원을 제외하곤 약간의 사람만이 돌아다니고 있는 로비를 지나, 연경은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그제야 피로감이 몰려왔다. 식사를 하곤 좀 쉬어야 할 것이었다. 얼마 뒤 총회가 있으니 그도 준비를 해야 했고, 그러려면 우선 지금 조금 쉬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적막 아래 그들이 거니는 발걸음 소리만이 복도를 울렸다.

그리고 잠시, 연경이 멈추어 섰다.

"왜 그러십니까?"

수행원 중 한 사람이 연경에게 물었다. 연경은 아무 말도 없이 갑작스레 다른 곳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네?"
"아무것도 안 느껴져."

연경이 조용히 말했다.

"…벌레들이 없어. 녀석들이… 여기로 오지 못하고 있어."

잠시 침묵이 일었다.

"…게다가 여기 너무 조용하잖아."

그리고 동시에 복도의 불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수행원들이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호텔 전체에 지진이라도 난 듯,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빛의 암전도 반복되고 있었다.

이내 김 실장이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어,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수행원 하나의 머리에 사격했다.

그의 시체가 바닥에 추락했다. 다른 수행원들이 재빨리 총을 꺼내 들었다. 연경은 고개를 돌려 김 실장에게 시선을 던졌다. 켜졌다 꺼지는 불빛 아래에서, 그의 표정은 읽어낼 수 없었다.

"네놈 어미를 살린 값을 이리 치느냐?"

그러나 김 실장은 대답이 없었다. 그 대신에, 그는 몸을 비틀며 서서히 무너져 내리다가, 다시 관절을 꺾으며 중심을 잡았다. 남자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더니, 이윽고 가라앉으며 초점 없는 동공을 연경에게 보였다. 핏줄이 터져 눈이 붉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야기를 나누었던 김 실장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씌기라도 한 듯.

"네놈…뭐냐?"

남자가 비틀린 몸뚱아리를 이끌고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경호원들이 긴장하며 총구를 바로 세웠다. 연경은 그들의 뒤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상황은 다분히 기이했다. 벌레를 이용해야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벌레들이 호텔 주위로 모여들기만 하고 안으로는 전혀 다가오질 못하고 있었다. 호텔에 무슨 방비라도 되어있는 것처럼.

"어디서 보냈지? 능구렁이 손? 혼돈의 반란?"

연경이 남자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리고 김 실장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김 실장의 것이 아니요, 아주 다른 존재의 목소리였다.

"네가 불태운 곳에서."

무덤 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에, 연경은 저도 모르게 전율을 느꼈다. 어딘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

"그간 평안하였느냐?"
"그러니까 누구냐고 묻잖아!"

연경이 소리쳤다.

"기억도 못 하는구나…하긴 그럴 테지. 네년이 속여 죽음으로 이끈 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남자가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불빛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한순간, 김 실장의 얼굴에 다른 이의 표정이 어렸다.

"나는 이영이다."

객실 문이 뜯어져 나가 연경 앞에 서 있던 수행원의 몸을 강타했다. 남은 경호원들이 미친 듯이 총을 갈겨대기 시작했다. 탄은 김 실장의 몸을 걸레짝으로 만들었고, 남자는 바닥으로 무너졌다.


* * * *


그리고 이영은 피식 웃었다.

호텔의 12층, 이영은 이곳으로 돌아와 아무도 없는 객실의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정천이 앉아, 계단으로 접근하는 목표물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살짝 기분이 좋은 이영과 달리 정천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래, 오랜만에 육신을 가져보니 어떻소."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관절 하나 돌아가는 걸 전부 신경 써야 하니. 내 몸 같지 않다고 하던 말을 이제 이해하겠습니다."
"그래도 그 정도면 양호한 거요. 내 본 어떤 망자는 빙의하고는 등을 바닥으로 하고 기어가는 것도 보았어요. 걷는 법을 까먹었다고 하더라고."

정천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목을 스트레칭하고는 코트를 집어들었다.

"그건, 잘 사용됩니까?"

영이 정천을 응시했다.

"아마도. 우선 혜윤에게 사용했을 때는 잘 돌아가는 걸 확인했으니…"
"다행이군. 이제 내 차례니, 저자들이 영영 달아나기 전에 조치를 해야겠소."
"그럼…"
"결계를 풀어야겠지."

정천이 마뜩잖은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이 안에서는 우리도 술법이 영 통하질 않으니 말요."

정천이 고개를 기울여 보이고 밖으로 나섰다.


* * * *


"우선 몸을 피하시죠!"

연경과 경호원들은 몸을 돌려 계단 쪽으로 나아갔다. 경호원들이 사방을 경계하자, 연경은 틈을 타 급히 도움을 요청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는 터지질 않았다. 호텔 자체에 술수가 걸려있던 걸 왜 깨닫지 못했을까. 우선 이 공간을 나가야만 했다. 경호원 두어 명이 먼저 계단 문을 열었고, 연경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햇빛이 비추었다.

다른 이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연경은 흙바닥에 쓰러진 몸을 일으켰다.

어디선가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들려오는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비가 섞인 바람이 뺨을 때렸다. 연경이 몸을 일으키자, 그 앞에는 초가가 있었다. 익숙한 초가였다. 불타 없어진 그 초가. 연경의 눈이 커졌다. 이곳은 그날 그가 보전원을 탈출하여 왔던 장소였다. 기억이 차츰 나기 시작했다. 그 허술한 선비를 죽인 곳.

아이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연경은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았다. 시간 변칙도, 공간 이전술도 아니다. 공기 중에 느껴지는 미세한 거짓의 온도. 이는 필경 환술이다. 이처럼 막대한 양의 환각을 보이는 능력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는 동시에 자신의 능력이 되돌아왔단 걸 느끼고, 벌레들을 불러모았다.

이제 방법은 한 가지다.

연경은 눈을 감고 공기의 일그러짐을 느끼기 시작했다. 흐름과 흐름 사이에서 미처 가리지 못한 부분, 즉 현실의 편린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계단으로 온 것이 맞았다. 단지 눈앞이 가로막혔을 뿐이었다.

연경은 날벌레들을 사방에 흩뿌려 앞에 놓인 구조물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거의 맹인이나 다름없는 현 상황에서는 쉽사리 발을 내디뎌서도 안 되니까. 조금의 정보가 모인 뒤에야 서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단 놈들을 찾아야 했다. 아직 지원도, 능력도 제대로 운용할 수 없는데다가 민간인으로 가득 찬 이 공간에서는 섣불리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이내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에서.

연경은 소스라치며 감은 눈을 떴다. 그리고 안구 없는 아이의 얼굴과 마주쳤다. 연경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오며 뒤로 넘어졌다. 아이는 그날 죽은 이영의 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환술이나 너무나 사실적이었고 강력했다. 연경이 소환한 벌레 무리가 아이에게 덤벼들었으나, 환술이 으레 그렇듯 그저 통과하고 지나갈 뿐이었다. 대신 공격을 맞은 듯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마 경호원 중 하나인 것만 같았다.

아이의 환상은 이내 불어나 여러 명으로 조각났다. 수십 개의 손이 연경을 붙들어 끌고 갔다. 버둥거렸으나 거역할 수 없었다. 환술이 물리력을 갖다니, 보통 환술사가 아니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족속은 많지 않았다.

김서방.

짙어지는 웃음소리만이 귓가에 맴돌 뿐이었다.

몇 번의 헛손질이 허공을 갈랐다.

그들은 연경을 폐가 안으로 끌어갔다. 폐가의 어두침침한 문짝 안으로. 연경의 손아귀가 문지방을 붙들었지만, 그러나 썩은 나무는 오래 버티질 못했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 * * *


이영은 혼자 남아 정천이 들여다보던 화면을 쳐다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채비를 했다. 이제 계획의 막바지로 이어나가고 있는 참이었다.

실상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건 혜윤과 정천이 숙덕거리면서 무언가를 꾸미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그들은 여러 통의 전화를 연달아 걸어대고 있었다. 이영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판을 벌린다는 게?"
"그 이물, 지네가 한국에 입국하는 건 오늘 밤이요. 바로 내일, 연합 극동지부의 한국지소 개소식이 있고. 그러하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지네를 단단히 본을 보이려면 이렇게 단순히 넷 뿐으로는 능치 않을 거요. 그러니 우릴 도울 사람들을 불러야지."

정천이 씩 웃었다.

"걱정은 마쇼, 형씨. 이 판에서 나만큼 발 넓은 놈팽이도 얼마 없으니까."
"잠깐, 나도 같이 가?"

걸립이 당황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채무 변제받기 싫어?"
"아니, 이건 너무하잖아! 언제까지 부려먹으려는 거야!"
"그럼 계속 우리 사촌누님네 만날 때마다 몽둥이찜질이나 당하던가!"

걸립은 끙 소리를 내며 다시 주저앉았다.

정천의 말마따나 그가 발이 넓다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연락은 탁구공처럼 되돌아오고, 또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한 시간이 채 안 되어 둘은 어떤 청사진을 그려내고 있는 듯했다.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갈겨대던 정천이 영에게 손짓했다.

"이게 그 지네, 맞지요?"

정천이 띄운 화면에는 연경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현대의 옷을 입고 머리 모양을 달리했지만 영은 능히 알아볼 수 있었다. 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공기가 차가워지면서 창문에 서리가 앉기 시작했다.

"반응 보니 알겠구만. 바로 오늘 찍힌 사진이요. 입국 당시에 포착된 거지. 이쪽도 한국지소 설립은 중대 사항이라, 주시해오던 이들이 많았소."
"외보전원의 대표격으로 온 거랍니다. 얼굴마담 격인가?"

혜윤이 말을 받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경로는 대략 이런 느낌이요. 한국지소 개소식이 지금 한창 열리는 중이고, 그 한복판에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지. 딱 벌집되기 식상인데다가 우리 동료들에게도 좋을 일은 아니니까. 그러니 우리는 그 행사가 끝난 뒤를 노리는 거요."
"개소식이 끝나고 나서?"
"그렇지. 정보원에 따르면 "

정천이 노트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근방의 호텔에 지네의 수하들이 목격되었다고 하는군. 오늘 지네는 이곳에서 묵을 거요. 그렇게 된다면… 거길 덮치면 되겠지."

혜윤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무모한 게 흠이라면 흠이랄까."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잖아? 가장 방심할 적에 뒤를 덮치는 게 정석이라고 본다."

정천이 반론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지만, 상대는 108평의회의 일원 중 하나에서 중역을 맡고 있다고요. 다른 게 아니라 영이 오라버니 안위가 프라블럼이 될 수도 있다니까."

어느샌가 친근한 호칭으로 불리게 된 영이 조심스레 손을 들고 질문했다.

"내 안위야 상관없지만… 어찌하여 그것이 우리에게 해가 된단 말입니까?"

혜윤은 대답 대신 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영은 뒤에서 혜윤이 창에 불러온 이미지를 바라보았다. 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건…"
"그 호텔 전경. 보여요? 민간인들이 딱 득시글 득시글댈 타이밍이란 말이지. 우리가 아주 잠깐이나마 사람들 주의는 돌릴 수 있지만, 그뿐이니까. 보아하니 이 지네 년도 그냥 당하고만 있진 않을 것 같고. 어딜 보나 여기서 소동 일으키면 불리한 건 우리 쪽이라, 천이 오빠 맘도 알겠지만 바로는 노노에요."
"그렇다면…밖으로 이끌어 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영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정천이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끼고 물었다.

"밖에서 싸움을 벌인다면 더욱 눈에 띄지 않겠소?"
"이를 노리는 거지요."

영은 좌중을 둘러보며 조금씩 말을 이어나갔다.

"돌이켜 보면, 저 이물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제 안위에 불과합니다. 최우선은 자신이 안전한 것이고, 이를 위해서라면 다른 것도 희생시킬 수 있지요. 보전원에 금제되기 전에 거했던 촌민들을 고기 방패로 사용한 것하며, 내게 벌인 짓이나…그러한즉슨 호텔에서 공격할 때에도 자신이 달아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친지라 해도 팔아넘길 것입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내 이어나갔다.

"우리가 진정으로 염려해야 할 것은, 이제 이 연합이라는 족속이 지네의 새처를 앎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지네가 살아남거나, 혹은 죽더라도 이들은 우리가 그 모든 짓, 다시 말해 지네가 벌일 모든 악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울 것입니다. 우리를 잡기 위한 정당한 목적으로 내세우면서요. 지네는 죄 없는 희생양이 되겠지만, 우린 아니겠지요."
"그러니 차라리 더 많은 이들이 목격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
"공터 같은 곳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여염이나, 묘당의 손길이 얹힌 공간에 가까워서는 의에 좋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외부자로서 내부의 다툼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곳…그런 곳이 좋겠습니다."

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랏일 하던 사람이라 다른가? 맞는 말이요. 내가 섣불렀군."
"아닙니다, 허나 이 계획의 문제점은 만일 여러분이 말하는 대로 그 연합이라는 존재가 아주 크다면… 기록 같은 것도 그네들이 마음대로 조작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듯싶소."

영이 정천을 바라보았다. 정천의 입가에 의기에 찬 미소가 어렸다.

"발견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를 테니까…"
"이해가 잘 안 가는군요."

영이 어리둥절하게 대답했다.

"곧 알게 될 거요. 아, 봉고가 준비되었다는군. 시작해봅시다."


* * * *


적막.

벌레 우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인식되지 않는 암흑.

어딘가 익숙한 암흑에 잠시 넋을 놓다가, 다시 멍한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한다. 방금 전까지 무얼 하고 있었던가, 하고 생각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주 먼 옛날의 지평선을 걷는 듯이.

연경은 무릎을 끌어안고, 다시금 자신이 어느 영화관에 앉아있는 것을 깨닫는다. 아까까지 앉아있던 동굴이, 스크린에 들어오고 있다. 기억조차 하지 못할 시간 저편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안을 헤치고 지나가는 자신이 있다. 아니, 자신의 시야가 있다. 어둠 속이지만 연경은 이를 알 수 있다. 저건 자신의 몸이고, 그리고 어린 몸이니까.

알 수 없는 것과 아는 것의 경계가 무의미할 정도로 본능에 치우쳐진 삶 사이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먹어치웠던 시간. 그 기나긴 삶에서 죽음은 언제나 조미료였다. 연경은 눈을 돌려 다른 곳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나, 그럴 수는 없다. 어쩐지 저 광경을 외면할 수 없다고, 그런 느낌이 든다.

어둠과 어둠. 본능과 본능 사이의 정경. 어딘가 그리운 광경이지만, 그러나 연경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떠나온 장소에 마음을 두지 않고, 외려 혐오에 가까운 심경을 품는 것이 연경의 심성이다. 그는 더 나아져야만 하고, 더 좋은 곳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곳으로 나아가는 존재이므로. 그 발걸음에 어떤 희생이 수반되더라도.

허나 나아간 곳에서도 그저 벌레들만이 자리하고 있음을 안 심정은 또 어떠한가.

그리고 갑자기 시야 저편에서, 어떤 작은 움직임이 감지된다.

손끝 저 너머에서 감도는 생(生)의 감각. 허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그저 스크린뿐이요, 익숙한 그 느낌의 원천은 보이지 않는다. 직감적으로 연경은 그 미물을 흡수한다. 서서히,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지금 보이는 것 이외의 무언가가 존재하리란 생각이 강하게 뇌리를 스친다.

연경은 으레 그렇듯 손목에 힘을 주고 벌레를 이끄는 신호를 방출한다. 무언가에 막힌 듯 신호는 잘 발산되지 않지만, 그나마 약간의 벌레들을 끌어모으는 데는 가능할 정도로 흘러나온다. 벌레가 무언가에 막혀 바로 오진 못하지만, 이내 아주 작은 것들이 피부를 건드리기 시작한 걸 느낄 수 있다. 연경은 그것들도 삼키고, 그리고 서서히 촉각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낀다.

덜컹거리는 이 느낌.

벌레들은 더욱 기어온다. 흔들리는 어딘가에 있었으니, 바로 접근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벌레들이 오는 족족 연경은 자신의 몸과 합일시킨다. 감각은 더욱 되살아나고, 그리고 점점 더 강해진다.

영화관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무언가 부드러운, 털과 같은 감촉을 느끼고, 연경은 몸을 움직이려고 애쓴다. 부드러운 것 아래에 딱딱한 바닥이 있다. 그리고 연경은 그 위에 누워 있다. 사방은 막혀 있고 공기가 통하지 않는다. 영화관에 앉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감각이 순식간에 압축되자, 연경은 구역질을 겪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영화관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환영은 점차 재와 먼지로 흩날리다가 

뙤약볕 아래의 얼음처럼 흐느적대며 녹아내리고 말았다.

불이 초록빛으로 빛났다. 봉고는 열심히 제 목적지로 나아가고 있었다. 정천은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차창에 팔을 걸쳐두고 액셀러레이터에 발을 올렸다. 밤은 더욱 깊어가는 중이었다.

"한적하구만."
"아름답군요, 한성의 밤은. 아니 이제 서울이라고 해야 할지."

조수석에서 영이 뇌까렸다. 그는 밤이 되어도 죽지 않는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을 잃은 채 노상이나 보았던 저 빛. 이제 기억을 찾아 다시 바라보는 이 광경은 어딘가 그 본질을 되찾은 것만 같았다.

"자연에게는 공해요. 시간이 흐르니 영 안 좋은 것도 있습디다. 특히 산천에는 더 그렇지. 지네란 년처럼 모든 영물이 인간 속에서 대우받고 살게 된 것도 아니고."
"그는 그렇겠습니다. 내적으로는 강상의 윤리가, 외적으로는 사대교린의 법칙이 모두 무너졌다 하니 인간은 또 어떠하겠습니까."
"하하, 어디 가도 선비인 줄은 잘 알겠군."

정천은 호탕하게 웃음을 내뱉고는 운전대를 돌렸다. 봉고가 움직임에 따라 뒷좌석에 물건처럼 실린 존재들이 이리저리 쓰러졌다. 그들은 연경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나마 살 가망이 있어 보이는 자들만 연경을 납치하는 겸해서 들고 온 것들이었다. 죄다 정천의 환술로 하여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연경이 그렇듯이.

허나 영은 어딘가 이전과 사뭇 다른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우린 운전만 잘하면 되니, 걱정할 것 없을 거요. 마부일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소. 딴에는 호화판으로 지네를 잡아주는 거 아니오? 차까지 태워서 불가에 던지는 거니."
"그렇겠습니다. 허나 지네가 얌전히 붙들려 있을 때의 말입니다만."

정천이 영을 바라보았다.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영이 정면을 바라보고 말했다.

"지금 네년이 전부 듣고 있다는 걸."

많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정천의 발이 브레이크에 직격하자마자, 무지막지한 벌레 군집이 그들의 바로 앞을 덮쳤다. 차가 관성으로 밀리면서 벌레 몇 마리를 튕기고 말았다. 이내 군집은 무지막지한 규모로 차의 범퍼와 유리창에 몸을 부닥치기 시작했다. 군집은 거의 구 형태로 차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런 정신 나간…!"

정천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둘은 잽싸게 행동했다. 영의 이마에 힘줄이 돋으면서 차창에 김이 서렸다. 이내 빠른 속도로 벌레 군집이 몇 미터 밖으로 튕겨 나갔다. 벌레들은 다시 달려들었지만, 거대한 방어막이 봉고를 감싸는 듯 그 이상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정천 역시 조심스럽게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내려섰다. 그의 손등에 한순간 푸른 불꽃이 일었다. 정천은 허공에 몇 번 손짓하고는, 이내 그 불꽃은 응축되어 하나의 구체로 화(化)하였다. 정천의 지휘에 따라 불꽃은 허공을 갈라, 막 너머의 벌레 군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간의 적막.

그리고 푸른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영은 팔에서 얼굴을 치우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잿더미가 되어버린 벌레들의 잔해뿐이었다.

"…도깨비불?"
"멋있지 않소?"
"일찍 좀 쓰지."

영이 농담을 던졌다.

"참, 지네는?"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잽싸게 뒷편으로 다가갔다.

트렁크의 문은 부서져 있었다.

"좀 쉽게 가나 했다…"


* * * *


연경은 어둑한 밤거리를 달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는 그저 달리기만 했다. 생애 처음으로 연경은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그저 이 서울 바닥을 헤매면서, 길을 가로막는 것들이 있으면 피했고, 길이 나면 그곳으로 갔다. 큰 길가에서는 몸을 돌렸고, 작은 동물들이 나타나면 잡아먹었다. 취했거나 으슥한 곳에 거하고 있던 놈들도, 잡아먹었고.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벌레가 사라진 것을 연경은 느꼈다. 아직 그의 수천 배 정도 벌레가 남아있었지만, 그 순식간의 절멸은 분명 위협적이었다.

허나 연경에게는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경호원의 지원도, 한국지소로의 도움 요청도 불가했으니까.

연경은 완전히 홀로였다.

자기연민에 빠질 새도 없이, 연경은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연경은 지금 일종의 사절로 한국에 온 게 아니던가. 다음날 호텔에 자신이 없음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때는 게임 끝이었다. 연합의 접근조가 그를 구출하러 올 것이었으니.

일단은 이 밤을 버텨야만 했다. 연경은 또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골목길을 걸어가는 연경의 뒤에서, 누군가가 몸을 숨겼다.

노상에서 거주한 지 올해로 4년 차가 되어가는 박씨는 문제의 여자가 올바른 방향으로 행하는 것을 보고, 그리고 머릿속으로 큰 동그라미를 그렸다.

들키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천만다행으로 처참한 몰골 탓인지 여자는 옆 빌라 주차장에 웬 남자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걸인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특수한 능력이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박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제 남은 것은 저 여자가 나아가는 길에 숨어있을 그의 동료들이 알아서 할 터였다. 남자는 그의 왕초에게 머릿속으로 강한 신호를 보내며 멀어져 갔다.

그리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박과 서울 지역 걸인들의 왕초, 걸립은 박에게 전달되어 온 신호를 받고 능청스러운 얼굴을 지었다.

"지네가 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구만!"
"오케이, 모두 원하는 대로 진행되고 있네요."

그들은 정천의 방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혜윤의 노트북에는 도시의 CCTV 영상들이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었다. 노트북 옆에는 그의 휴대전화에서, 영상통화를 틀어두고 운전을 하는 정천의 얼굴이 드러난 상태였다.

"이게 먹히네."
"지성체라는 게 퍽 단순하잖아요. 적절한 상황과 패닉한 심리 상태, 그리고 어둠에 휩싸인 시간대. 게다가 평소에도 있을 법한 장애물을 세워두면, 의심하지 않고 주의 깊게 살피지 않은 채 피하기만 하죠. 마치 자기가 갇힌 지도 모르는 채 상자 안을 기어 다니는 벌레처럼."
"그렇다고 하수도 공사를 직접 시킬 필요까지 있었어?"
"삽질 좀 시킨 건데 뭐."

혜윤이 피식 웃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밤거리가 아니오, 거대한 체스판에 가까웠다. 연경을 순순히 잠재워 목표한 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실패했다면, 그렇다면 스스로 가게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혜윤과 정천의 인맥, 그리고 그 인맥들의 인맥, 그리고 그 인맥들의 인맥…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은 모두 동원해서.

"지금 여기 얽힌 이들이 죄다 그 HEA란 조직의 인사들입니까?"

영이 물었다.

"아니, 대다수는 아니요. 지금 이들은 자기가 HEA와 연루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거요. HEA 자체가 뭔지를 모를 걸. 저들은 그저 시킨 일을 할 뿐이니."
"비밀이 많은 조직이군요."
"그게 이 조그마한 동네의 미덕이거든. 또 누가 알겠소, 이 조직 이름이 실은 HEA가 아닐 수도 있지."

정천이 작게 덧붙였다.

"정말로 아닐 수도 있고. 내가 만난 회원 중 몇은 HEA라는 이름을 아예 처음 들은 눈치더라고."


* * * *


연경은 슬슬 다리가 아파져 오는 것을 느끼고 속도를 줄였다. 어느새 남대문 근처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까이에 아파트를 짓는 듯, 공사장이 있었다. 을씨년스러웠지만 찾는 이 하나 없을 것 같아 그곳에 피신하기로 마음먹었다. 행여 불량배라도 있으면 더 좋았다. 저녁 식사는 두둑이 할수록 좋았으니.

공사장 일대는 한적했다. 철근 구조물이 차지하고 있는 장소 이외에도 자재나 차량 등의 물건을 배치해둔 공터가 있었다. 연경은 잠시 멈추어 서서 숨을 골랐다.

지축에서 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연경은 잠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음 순간에서야 그것이 무얼 뜻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자신이 걸어온 어둠 저편에서 회색 봉고가 튀어나와 연경의 몸뚱어리를 허공 저편으로 날려버렸다.

연경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돌려 땅바닥에 착지했다. 봉고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내려섰다.

"…김서방."
"알아봐 줘서 대단히 고맙군."
"네놈이 어딜 감히 훼방을 놓느냐? 나와는 연고도 없는 주제에."
"그래, 할망구 말이 맞아. 난 댁하고는 아무 인연이 없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네. 댁 같은 쓰레기랑 엮이면 사는 꼴이 말이 아닐 테니."
"곧 그리될 게다. 지금이라도 내 앞에서 "
"근데,"

정천이 말을 잘랐다.

"미안하지만 내 성격이 워낙 의에 죽고 참에 사는 부류라서. 특히 댁이 이영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연경이 눈을 부릅떴다. 어딘가 기시감이 든 이유를 알았다.

이영이 없다.

그리고 그 순간, 연경은 귓가에 그 목소리가 울리는 걸 들을 수 있었다. 피를 차갑게 만드는 목소리.

"그렇다는구나, 지네야."

연경은 다음 순간 목이 졸리는 고통과 함께 자신이 주저앉은 것을 깨달았다. 영은 눈을 감고,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며 연경을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한 일이었구나."

영이 보고 있는 것은 현실의 상이 아닌, 연경이 영위해 온 지금까지의 내력이었다. 그날 그곳 장대비가 내리던 순간과, 그 뒤에 떠돌아다니던 시기. 산천을 떠돌다가, 다시금 선한 이물인 양 행세하며 사라질 위기에 처한 보전원 인원들에게 합류한 순간. 조선 밖으로 나가 정체를 숨기며 권력을 쌓아온 발자취. 그런 모든 기억이 영의 뇌리에 쏟아지고 있었다.

김세경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억을 되찾은 순간, 그는 또 하나의 힘이 자신에게 깃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접촉한 인물의 내력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완전히 전부는 아니었으되, 오래 접촉할수록 그 정도가 강해졌다. 혜윤에게 의도치 않은 접촉을 했다가 전일의 식사에 대한 기억을 얻게 되면서 자각한 힘이었다.

"예가 어딘지 아느냐?"

연경이 힘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한 와중에도 그의 얼굴에는 스멀스멀 능글맞은 웃음이 스며들고 있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나리?"

영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

"네년이 내 가족을 몰살한 바로 그 장소다. 이곳이 그 초가다, 이 빌어먹을 잡것아."
"아… 여기였구나. 그래요, 댁의 처자를 맛보온 기억이 납니다. 퍽 맛있었죠. 비록 오래 병들어 식감은 별로였지만…"
"주둥이 놀리는 건 여전하군."

그는 정천의 옆으로 날아가 지상에 내려섰다. 연경이 콜록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늘 끝을 보자꾸나."

연경이 영의 시선을 맞받아 그를 노려보았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연경이 중얼거렸다.

"영혼이나마 지상에 남아있으면 다 잊어버릴 것이지…굳이 다시 돌아와 험한 꼴을 자초한다는 게."

그의 눈빛이 일순간 달라졌다. 곧바로 벌레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날벌레들의 편대 비행이 장엄한 오케스트라처럼 날아들었다. 아까 불태워 버린 수의 제곱은 되어 보이는 양이었다. 연경이 숨겨둔 모든 병력이었다.

정천은 온몸에 도깨비불을 두르고 군집을 향해 정권을 날렸다. 바람을 타고 날아간 불길이 벌레들을 조금 태웠지만, 역부족이었다. 불길이 잦아든 곳에 두 배의 벌레들이 꼬여왔다.

영은 공중으로 날아가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벌레의 무리라 한들 결국 떼로 모여 있으니 강한 법. 바람을 통해 흐트러뜨려, 아예 이곳에서 날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는 전신에 힘을 주고, 정신을 집중했다. 바람이 일면서 벌레들이 힘없이 휘말리기 시작했다.

격통.


순간 의식이 흐릿해졌다. 의식을 에워싸는 강렬한 고통에, 영은 신음을 흘리다가 그만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육신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아픔을 느낀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나 깊게 생각할 여력조차 없었다. 격통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멀찍이서 무언가를 겨누고 있는 연경의 모습이 보였다. 무기가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일어서야만 했다. 영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가까이의 벌레들을 밀쳐냈다. 그러나 수가 너무나 많았다. 정천이 불꽃을 날리다 차츰 수세에 몰리는 장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와야 한다.

영은 벌레 사이를 헤치고 비틀거리며 정천에게 다가갔다. 정천이 힘겹게 물었다.

"꼴은 또 왜 그렇소!"
"지네에게 혼령을 공격할 수 있는 기물이 있습니다. 아마 그걸로 계속 공격하겠지요. 낭패입니다."
"연합에게 무기를 받았을 거요. 제때 수색해서 버렸어야 하는 건데."

약간 기력이 돌아오자, 영은 폴터가이스트로 약간의 방어막을 형성했다.

"빈대 잡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고, 이 벌레들만 한두 마리 잡아서는 될 일이 아니겠소."

정천이 말했다.

"허면?"
"속공으로 갑시다. 머리를 쳐야지."

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영은 막을 거두었다. 벌레들이 무서운 기세로 덤벼오기 시작했다. 앞으로 밀려오는 거대한 무리 앞에, 정천이 나섰다. 그의 입가에 문득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스파크가 일어나듯.

그리고 그가 불을 뿜었다.

청룡처럼 나아가는 불길의 물결 하에, 벌레들은 본능적으로 집결했다가 타 죽었다. 1초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으나 상당한 피해를 주기에는 충분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이영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공기의 무게와 한기가 가중되면서, 비틀거리고 있던 벌레들이 이내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입에서 김이 나올 정도로 공기는 차가워져 갔다.

연경의 총구가 영을 향하기 전에, 정천이 그에게로 돌진했다. 정천의 손짓에, 그의 모습을 한 인영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총 다섯 명의 정천이 한 손에는 불꽃을 쥐고 질주하고 있었다.

무기가 그 중 하나를 맞추었으나, 그곳에는 그저 도리깨 한 자루만이 중심을 잃고 쓰러질 뿐이었다. 나머지 네 명은 그대로 연경에게 돌진했다. 누가 진짜인지 가늠하기도 전에 강렬한 통증이 연경의 복부에 자리했다. 도깨비불로 뒤덮인 주먹이 낼 힘은 상당했다.

황급히 남은 벌레들을 불러들였지만, 연경이 공격하는 족족 분신이었다. 무의미한 공격이 이어졌다. 돌아오는 것은 그저 통증. 정천은 유려하게 몸을 놀리며 공격해왔다. 유연한 체술과 도깨비불의 공세는 지치지 않는 듯했다. 그의 주먹은 말 그대로 타올랐고, 본시 이물인지라 강한 내구도를 지닌 연경의 몸도 그 공격 앞에서는 서서히 내상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잡았다."

방심한 찰나, 연경의 손이 진짜 정천의 목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빠르게 이동하고 있던 정천의 분신들이 동시에 도리깨와 빗자루 따위의 물건들로 변해 바닥에 나뒹굴었다. 정천은 연경의 손목을 붙들며, 컥컥대는 소리를 냈다.

"쥐새끼 같은 놈."
"어이쿠, 허, 지네 새끼가, 허, 할, 말인가."

연경이 지네의 부속지처럼 날카롭게 변이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모래가 연경의 눈을 덮쳤다.

연경은 정천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영이 공중에서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바람을 통해 모래를 공기 중으로 흩뿌리면서.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영은 건축 자재를 공중으로 들어 올려 모래 폭풍과 함께 연경에게 내던졌다. 간신히 몸을 날려 범위 밖으로 나간 정천과 달리, 연경은 목재를 몸에 정통으로 맞고 괴성을 발했다.

그러나 연경도 쉽사리 당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 목재가 날아오자, 연경은 한 팔로 이를 부숴버리고 파편과 함께 벌레를 정천에게 방출해버렸다. 그리고는 영에게 예의 그 무기를 겨누었다.

총탄이 날아오기 전에, 영은 주위에서 철판을 불러와 자신의 영체를 감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철판이 찌그러졌다.

동시에 정천도 가공할 속도로 날아오는 공격을 불태워버리곤, 몸을 던져 바닥에 떨어져 있었던 철근 하나를 주워들었다. 이윽고 그의 손등에 불이 붙었다. 철근의 색감이 점점 붉어져 갔다.

"너희가 아무리 용을 써봤자 날 죽일 수는 없어! 결국 날이 밝을 터고, 그리된다면 네놈들은 평생 도망자로 살아야 할 것이다."

연경이 외쳤다.

"네년처럼 말이냐?"

이영이 반문했다. 그의 서슬 퍼런 눈초리가 연경을 쏘아보았다.

"평생을 도망다니고, 자신의 본질은 없이 그저 남들에게 기생만 하며?"
"그보다 더 비참한 꼴이겠지."

연경이 응수했다.

"악귀인 네놈은 그 자리에 못 박혀 영영 소멸될 것이고, 김서방인 네 친구는 즉각 처분되겠지. 말했지 않느냐! 이 모든 건 네가 자초한 일이지, 어딜 감히 내게 네 원한을 돌리느냐!"
"아직도 반성의 기미가 보이질 않는구나…좋다."

영이 표정없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짐승은 맞아야 길이 든다지."

그리고 동시에, 연경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허나 정천의 철근이 회전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눈 깜짝할 새에 장딴지에 타오르는 격통이 일었다.

영에게 총탄이 맞았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연경은 정천의 공세를 상대해야 했다. 정천은 춤을 추는 듯한 날랜 동작으로 연경의 손톱을 막아내고는, 가슴팍을 걷어찼다. 공세는 꾸준히 지속되었다. 몰아침과 날카로움의 간극에서, 수세는 드러나지 않았다.

김서방에게 특정한 검술이나 창술은 없다. 그네들의 자유분방함은 어떤 유파를 형성할 정도로 거대하고 체계적인 무술을 익히게 두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자랑으로 여겼다. 그런 그들이 전통으로나마 보존해 온 무가의 비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씨름과 몽둥이질이었다.

지금 정천이 구사하고 있는 동작에는 그 두 가지의 품새가 모두 깃들어 있었다. 김서방 특유의 장난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몸놀림, 그리고 타선 없이 무자비해지는 타격. 지극히 아이적이면서도 지극히 계산적인, 지극히 노련하면서도 지극히 광적인 형태의 공세였다.

정천은 머리 위로 철근을 돌리면서 측면으로 연경을 겨냥했다. 다리로는 기마 자세를 취했다. 이윽고 연경의 공격이 시작되자, 그는 피하지 않고 어깨로 지네의 목을 밀치었다. 이내 그대로 머리에 철근을 내리찍었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곧바로 두개골이 박살이 났겠지만, 연경은 즉사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꽤나 강한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비틀거리며 거리를 가늠하지 못한 채 내지르는 공격은 허망했다. 영의 공격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몸에 받아버린 연경은 신음을 흘리며 균형만을 유지할 뿐이었다. 정천은 곤봉 격으로 움직이고 있는 철근을 꼬나들고 공격 자세를 가다듬었다. 좋은 때를 놓칠 수야 없다.

그리고 그 때,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거, 거기 뭐하는겨! 경찰 부르기 전에 그거 언능 내려놔!"

인근 주민인지, 공사장 관리인인지 웬 중년 남성이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영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정천과 연경의 모습은 살인자와 피해자의 구도 바로 그것이나 다름없었다. 딴에는 도우려고 재빨리 현장을 급습한 듯했다.

남자의 유일한 오판은 바로 그 피해자가 그 공간에서 제일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정천이 어떻게 손써보기도 전에, 연경은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도움을 요청하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그 입이 더욱 크게 벌려졌다.

이윽고 입이 닫혔다. 남자의 머리를 머금고.

"이런…!"

점차 연경의 형체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남은 남자의 몸뚱어리를 모두 집어삼킨 그는 자리에서 도약했다. 그리고는 정천과 영이 타고 온 봉고 위로 착지했다. 이내 그의 손으로 뒷자석 문짝이 뜯겨져 나갔다. 그곳에는 바로 연경 자신의 경호원들이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그들이 손을 쓸 새도 없었다. 영과 정천은 연경이 차례대로 경호원들의 몸뚱어리를 집어삼키는 것을 바라보았다.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지천을 울렸다. 달 아래의 게걸스러운 식사는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역겨웠다.

이윽고 연경의 몸은 변했다. 그의 형태는 점점 불어나고 거대해졌다. 부드러운 살은 안으로 들어가고, 그 자리를 딱딱한 외피가 대신했다. 그곳에는 이미 인간 여성의 형체는 없었다. 아주 거대한 지네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

"자기 수하까지 잡아먹을 줄은 예상치 못했는데."
"저렇게까지 발악하다니, 어지간히 다급했나 봅니다. 몰아치지요."

영이 대꾸했다. 부피가 커진 만큼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부위도 넓어졌다. 영은 두 팔을 뻗어, 영력으로 지네를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나 지네는 도리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영은 당황한 나머지 공격이 날아오는 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지네의 몸통이 영을 강타했다. 영은 거의 몇 미터 밖으로 날아가려던 몸을 간신히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연경은 오래 묵은 지네, 곧 영물이었다. 당연히 영과 같은 혼령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본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그 능력을 마음껏 부릴 수 있을 테다. 영은 황급히 자세를 가다듬고, 남은 철근 쪼가리들과 함께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정작 철근 쪼가리들은 지네의 외피에 직격한 뒤 초라하게 찌그러질 뿐이었다.

지네의 관심이 영에게 쏠린 사이, 정천이 예의 곤봉을 쥐어들고 덤벼들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곤봉이 외피 사이의 연결부를 강타하자, 지네가 괴성을 발했다. 지네는 영에게서 몸을 돌려 정천에게로 덤벼들었다. 그 거대한 몸집에서 어떻게 그런 가공할 만한 속도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정천은 재빨리 곤봉으로 돌진을 막아내었지만, 충격에 밀려 바닥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지네가 다시금 정천에게로 내달렸다. 미처 대응치 못한 공격에, 정천의 몸이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지네의 흉악한 턱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늘한 느낌이 들면서 환부에서 무언가 흐르는 감각이 일었다. 얼굴이 베인 것이었다.

정천은 곤봉으로 이를 막으려고 했다. 곤봉이 지네의 턱을 둔탁하게 내려찍었다. 확실한 타격 없이 그저 두드리기만 하는 공격이었다. 아무런 소득이 없이, 지네가 보인 약간의 악력에도 곤봉은 쇳덩어리로 조각이 나고 말았다.

"…윽!"

빠져나오려고 용을 쓰던 그의 입에서 신음이 일었다. 영의 시야에 정천의 하반신이 드러났다. 그의 오른쪽 다리, 검은 바지 위로 검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지네의 독발톱이 그 위를 찌르는 상태였다.

영은 황급히 염력으로 공기를 응축시켜 지네에게 던졌다. 공기의 파동이 북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지네의 머리를 가격했다. 그러나 지네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정천의 확실한 죽음을 노리는 듯했다.

이미 도망갈 수는 없었다. 독이 다리 전반에 퍼진 상황이었다. 정천은 기진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네가 독발톱을 빼들고, 다시 정천을 향해 치켜들었다.

벼락처럼 무언가가 지네에게 쏟아졌다.

지네가 기성을 발하며 돌아섰다. 쇳조각들이 엄청난 속도로 그의 몸통에 박혀온 것이었다. 일전처럼 지네의 외피는 견고했으나, 그 틈새의 연결부에 가 닿은 공격은 상당히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지네의 체액이 모랫바닥에 흩뿌려졌다.

지네가 떠나가라 괴성을 지르더니, 이윽고 영에게 돌진해 왔다.

영은 자리에서 떠올라 남아있는 자재들을 부유시켰다. 연경과 맞붙을수록 그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아니, 이렇게 말하자. 그의 한이 강해지는 만큼 그는 강해질 수 있었다. 더욱이 지금 수백 년의 한을 이어오게 한 당자(當者)와 대치하고 있지 않은가.

허나 그새 힘을 기른 것은 영 혼자만이 아니요, 연경 역시 그러했다. 그간 권력을 사용하여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몰래 집어삼켰는지, 수백 년전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거대해진 지네의 육신은 감당해내기 어려웠다. 정천마저 행동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한순간의 실수는 사치일 테다. 그러나 물러설 길은 없었다.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끝나야 했다.

영은 지네가 달려드는 속도에 맞추어 빙글빙글 떠다니고 있던 철판 조각을 빠른 속도로 하강시켰다. 지네의 바로 앞에 조각들이 날카롭게 박히자, 지네의 속도가 느려졌다.

그 잠깐의 간극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는 이윽고 손바닥에서 회오리를 일으켰다. 다른 한 손으로는 현장에 비치되어 있던 안전모 더미를 이끌어 왔다. 회오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지네의 눈앞에 폭풍이 밀어닥친 것은 그때였다. 바람의 거센 움직임 사이에 섞인 안전모가 흐름 사이에서 가공할 위력을 갖고 돌격해 왔다.

날카롭진 않았으되 수십 개의 둔탁한 타격이 일궈내는 충격은 적지 않았다. 하나를 가르면 또 하나가 날아와 눈을, 또 하나가 날아와 복부를, 또 하나가 날아와 환부를 때렸다. 정신없이 날아드는 공격이 몇 개의 예리한 공격보다 강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바람에 먼지가 섞여들었다.

폭풍이 잦아들고,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 사이에서 지네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불투명한 장막 뒤에서 거대한 몸집만이 미동 없이 누워 있는 모습만이 눈에 들어올 뿐.

묘한 기시감과 함께, 미약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네의 상태를 알 수 없었다. 이영은 조심스럽게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리된다면야 상황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거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긴장이 풀리지 않아서일까? 영은 어딘가 이상한 기운을 지우지 못한 채, 이내 정천에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가슴팍을 무언가 강타하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익숙한 통증이 전신으로 일었다. 무서운 속도였다. 이를 감내하기도 전에,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아픔이 가중되었다. 영은 무릎을 꺾으며 쓰러졌다. 가슴을 후비는 듯한 통증이 섬세하게 전신의 통각을 일깨웠다. 살아있는 몸이 있었다면 정신이라도 잃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의식을 집중할 수 없었다.

먼지바람 사이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났다. 연경이 싸늘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며 걸어나왔다. 흐릿한 시야에 그 옛날, 그 마지막 순간 보았던 얼굴과 유사한 표정이 드러났다.

"멍청하긴."
"네…이 년…!"

영이 쥐어짜 낸 목소리를 냈다. 안간힘을 쓰며 바닥에 손바닥을 짚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아픔은 수백 배로 늘어났다. 몸이 자꾸만 엎어지고 힘을 잃었다. 영혼 자체가 산산이 조각나는 듯한 고통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연경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주위를 흘끗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정말 이영 댁은… 솔직히 조금 놀랐어. 옛날의 그 이영이 아닌데? 그때처럼 빌빌거리며 허술하게 굴진 않네."

영은 대꾸하지 않은 채, 그저 신음을 흘리며 중심을 잡기 위해 애썼다. 그런 영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연경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이렇게까지 몰려본 건 오랜만이야. 감탄했어… 사람이 죽으면 다 이렇게 되나? 좀 더 영민해진다든가."

잠시간 공터에는 영의 신음과 풀벌레 우는 소리만이 일었다.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어? 모든 게 다 의미없다는 생각."

연경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내려앉았다.

"모든 게 다 벌레 같다고 느낀 적 있나?"

풀벌레가 울었다.

"글쎄, 내겐 그게 언제나 드는 생각이었어. 댁들이 내게 보여준 그 환각… 그 안에서 봤던 그 동굴에서 나왔을 때도, 인간들 사이에서 섞여 살기 시작했을 때도 모든 게 똑같았거든."

연경의 시선은 먼 달밤을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완연한 여유의 표방. 영은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으나, 그마저도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인간들이라는 족속, 이 땅 위의 모든 지배자인 척하지만 결국은 목숨에 벌벌 떨고 힘에 흔들리는 벌레들일 뿐이야. 자기네들이 그렇게 무시하는 벌레라는 족속들과 차이가 어디 있는지, 두고 보면 우습지. 만물의 이치는 한 가지라고 하던가? 하하, 너무나도 초라한 이치에 불과하지만."

영의 흔들리는 눈빛과 연경의 눈빛이 허공에서 만났다.

"그런데 당신은… 모르겠다, 정말 인간이라는 느낌이 드네. 이걸 뭐라고 하더라, 사전적 정의에 부합한다고 해야 할까? 이거 하나만은 인정해줘야겠어."

그리고는 그는 다시 총구를 들어 올렸다.

"뭐, 그거랑 이거랑은 별개의 이야기지만."

다시 한 발의 총성이 일자, 영은 등에 타는 듯한 고통이 발하는 것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온몸에 진동이 일었다. 주체할 수 없는 반동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댁의 나약함은 전혀 나아지질 않는군그래."

다시 한 발의 총성. 영은 턱에 힘을 주고 비명을 참지만 터져 나오는 아픔은 막을 수가 없다.

"늘 그렇지 않나? 자기 나약함으로 말미암아 처자를 죽이고, 그걸 타인에게 전가하려고 들지."

한 발이 또 격발되자 영은 모래 섞인 공기를 움켜쥐며 아픔을 참아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입가에 맴도는 비명은 스스로 행동하려는 듯 기지개를 켜고야 만다.

"이 행동으로 댁은 또 끔찍한 처지에 놓일 텐데도, 그것도 헤아리질 못하는 거야!"

통증과 통증의 간극 사이에서 영의 의식은 점차로 갈기갈기 찢겨간다. 먼 옛날 보전원의 도사들이 혼령을 제령하는 모습이 주마등처럼 재생된다. 고통스러워하던 혼령의 모습에 영은 문득, 아, 저것은 나구나, 라고 떠올린다. 나의 모습이구나, 라고 생각한다.

연경이 영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키틴질 껍질로 뒤덮인 손,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손이 영의 목을 움켜쥐었다. 연경의 새까만 눈동자, 그 내부에 가득 찬 지네의 움직임이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차디찬 밤하늘에서 내리는 달빛이 낙사한 시체처럼 영의 등허리에 부딪혀 으깨졌다. 연경이 나직하게 말했다.

"네놈의 아내와 딸을 죽인 건 너지, 내가 아니다. 네가 나약하여 그들을 죽음으로 몬 게다. 날 불러들인 것도 너, 막지 못한 것도 너다!"

연경의 목소리가 영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하물며 오늘 네 친구의 죽음에도 너는 혐의가 생기는구나."

경련하는 영의 시야가 차츰 연경에게서 벗어나 누워있는 정천의 형상으로 옮겨갔다.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다. 자기 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인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파고들었다.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이가 악물리면서 여태 간신히 억눌러 온 죄책감의 파도가 그의 마음을 잠식했다. 호탕하게 웃던 정천의 모습. 그의 모습 위로 다른 두 명의 얼굴이 겹쳐졌다. 놀라울 정도로 닮은 그 사람들. 그들이 시체로 화(化)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들이 몇 날을 두고 앓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들이 병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던 날의 아침이 떠올랐다. 그 거대한 굴레의 앞에서 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연경의 말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자, 생각은 걷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억의 향연 속에서도 영은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꿇어앉고자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기억 하나하나를 그대로 다시 살폈다. 다시 살피는 것만 해도 엄청난 아픔이 수반되었다. 돌아오는 형상들과 마주할 때, 그는 그저 그 자리에서 죽어 잊고자 하였다. 이미 죽었음에도 잊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면서.

기억은 다시 거꾸로 돌아간다. 딸, 효옥이 자라나던 시절. 효옥이 태어난 날의 시점. 아내와 함께 살게 된 날. 아내와 혼인을 올리던 날. 부친이 돌아가시던 날. 납채서와 납폐서를 주고받던 나날. 혼담이 오가던 날. 상투를 틀던 날…

그러나 모든 기억은 점차 한 공간으로 모이고 있었다. 길지 않던 인생, 기억 속에 침전하여 가라앉고자 하여도 하나의 기억이 그를 계속하여 붙잡아 두고 있었다. 어느 오후의 일이었다. 어린 효옥과 병들지 않은 아내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영은 그 뒤에서 그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따라가던 날의 기억. 그들이 부르던 노래. 아내와 딸의 곡조가 조화를 이루던 순간. 그는 머릿속에 떠오른 한 구절을 뇌까리고 있었다 

 아아, 시간이여 너 그곳에 멈추어라. 이 순간을 변치 않게 해다오.

문득 거센 불길이 심장을 가득 태우는 것 같은 열감이 가슴팍을 가득 메웠다. 연경의 무기로 인한 통증이 아니요, 어떤 자연스러운 현상이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고통은 전부 열감으로 바뀌었다. 온몸을 태우는 듯한 온도가 전신을 메웠지만, 영은 그로 말미암아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힘을 회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조금씩, 그리고 조금씩 그는 몸을 일으켰다.

연경이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총탄은 이미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영은 멍하니, 총탄이 그의 몸에 닿자마자 차갑게 얼어 이내 산산조각이 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한기와는 정반대로 열감이 전신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뭐…야?"

연경이 인상을 찌푸리며 짓이기듯 내뱉었다. 그는 한 번 더 총구를 겨냥했지만, 탄약이 없음을 뜻하는 철컥하는 소리만을 들어야 했다. 연경은 무기를 옆으로 내던졌다. 이윽고 연경의 이마에 힘줄이 솟더니, 그는 다시금 지네로 변이하기 시작했다. 키틴질 껍질이 솟아오르면서 영이 서 있는 공간으로 거대한 몸집이 낙하했다.

영은 재빨리 몸을 빼어 뒤편으로 피했다. 큰 소리와 함께 지축이 뒤흔들렸다. 지네가 그를 보며 괴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불길이 지네의 안면을 강타했다.

"김형!"

영이 불길이 날아온 곳을 보고 외쳤다. 정천이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지네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정천은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괜찮습니까?"

영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정천의 환부는 불로 지져져 있었다.

"다행히도, 불이 말을 듣더군. 독은 태웠으나… 아직 환부에는 남아 있어서, 일단 지져놨소."

정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통증은 아직도 지속되는 듯했다.

"에이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앰뷸런스도 불러놓을 걸 그랬나?"
"나는 김형이 영락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같이 귀신 되긴 뭐하니. 허, 저거 저 불길을 맞고도 일어나네."

지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조금은 주춤해진 기색이었다. 영은 정천을 바라보고,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내 그는 지네가 오는 방향으로 돌진해 갔다.

둘은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그리고 두 이물은 공터 바로 정중앙에서 맞붙는다.

결착.

영이 더 빨랐다. 지네가 흉악한 턱을 놀리기도 전에, 그의 주먹이 지네의 턱을 후린다.

섬뜩한 소리를 내며 맞붙은 주먹과 턱이 다시 떨어진다.

반격이 오기 전에 또 한 번의 주먹이 날아든다. 팔을 휘두르는 감각, 그리고 귓가에 아직도 자리하고 있는 그들의 노랫소리. 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서글퍼서, 영은 다시금 분노하고, 그 분노가 힘이 된다.

또 한 번의 격침.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지네가 뒤로 넘어갔다. 굉음이 일면서 지네의 몸이 철근 구조물에 부딪히고 말았다. 구조물에서 여러 개의 철근이 떨어져 나와 바닥에 꽂히었다. 지네는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의 영은 방금 전까지 농락당하던 한낱 귀신이 아니었다. 일시적으로 증강된 한이 투입된 자극을 전부 힘으로 바꾸어 내고 있었다. 힘의 방향은 모두 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 한을 풀 수 있는 기회… 지네를 향해.

비틀거리며 괴성을 발하는 지네의 앞에, 영은 일전처럼 공기를 회전시켰다. 지금까지 만든 것은 그저 애들 장난이라는 듯, 소용돌이는 점차 커져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해진다. 영은 온 힘을 정신에 집중하고, 그리고는 정천에게 외쳤다.

"김형, 불꽃을 던져요!"

정천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가 무얼 하려는 건지 깨닫고 손아귀에서 푸른 불꽃을 피어오르게 했다. 이내 불꽃은 지금까지 타올랐던 강도 그 이상의 강도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맥이 잡힐 때까지 기다린 다음, 정천은 영에게로 불꽃을 던졌다. 영이 만들어 낸 용오름에 가 닿을 때까지.

불꽃이 용오름과 만나 타올랐다.

푸른 화염의 소용돌이가 하늘과 땅 사이의 간극을 메웠다. 그리고 그 용오름이 천천히, 그러나 육중하게 지네에게 돌진해 갔다. 지네는 몸을 빼내보려고 하지만, 이미 늦었다. 무너져내리는 건축물이 그의 움직임을 차단하고 있다.

그리고 용오름은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고고하게 나아간다.

마침내 그 온몸을 태워버릴 때까지.

용오름에 휘말린 건축물이 푸르게 불타올랐다.

그리고 그 아래 불길에 갇혀버린 지네 한 마리 역시, 더없이 푸른 빛깔로 타오르고 있었다.


* * * *


먼지를 일으키며 철근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다리를 아프게 누르고 있던 콘크리트 더미가 치워지고, 그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이내 가슴팍 위에서 철근이 떨어져 나갔다.

다시 맡는 청명한 공기 속에서 연경이 처음으로 본 얼굴은 

이영의 얼굴이었다.

"에이씨."
"말했잖습니까, 지네 살아있다고."
"이걸 또 살아있네…"

연경은 얼굴을 찌푸리며 이영을 노려보았다. 기세는 등등했으나 온몸이 결딴이 난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마저도 어디 한 군데 틀어박혀 요양하면 될 일이었지만, 아직도 이 두 놈이 버티고 있으니.

"이… 징글징글한 새끼들아! 이만큼 조졌으면 됐지, 윽, 뭘 또 버티고 있어!"
"지네란 것은 원래 아가리는 끝까지 박살 안 나나 보네. 나 같으면 얌전히 닥치고나 있겠구만."

정천이 다리를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영은 아무 말 없이 연경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다. 이내 그의 몸은 아수라장이 된 건축물 위에 던져졌다.

밖으로 나왔어도 연경이 도망갈 수는 없었다. 체력도 없거니와, 도망가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연경은 전신의 통증을 애써 참아보려다가 그대로 다시 엎어지고 말았다.

"날, 윽, 여기서 죽여도 너흰 얼마 못 간다. 곧 연합이, 찾으러 올 거야. 너흰 연합 간부를 죽인 거라고!"
"죽일 생각도 없으니 걱정 마라."

영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시계였다.

이내 그는 연경의 몸을 바로 뉘이고, 연경의 손목에 시계를 걸었다. 시계는 곧 수갑의 형태로 바뀌어 연경의 손목을 졸라맸다.

"뭐, 뭐하는 짓이야."
"선물."
"뭐?"
"네년에게 주는 게 아니다. 바로 네가 선물이다."

연경이 눈을 부릅떴다.

"뭐…?"
"왜 지금까지 그 경비원 말고 아무도 안 와봤을까?"

영이 조용히 물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 하나 없는 적막함.

"연합이 벌써 정보를 통제한 걸까? 글쎄, 그 연합이라는 족속, 오늘 한국지소를 설립하지 않았던가?"

연경은 자신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그들을 막은 것도 아니고, 연합이란 족속이 막은 것도 아니면, 과연 누가 조치를 취했을까?"

그제야 연경의 뇌리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재단.

"네, 네 이 놈…!"
"어디 한 번 그곳에서도 잘 살아봐라. 다만 그곳에는 지난 날의 나처럼 쉬이 속아넘어 가는 이는 없을 게다."

영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오래오래 살거라, 그 안에서."

저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들려왔다. 연경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려고 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어둠뿐이었다. 그러나 연경은 그 소리가 구급차가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연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영에게로 고개를 돌린 순간,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텅빈 공터에 연경의 고함만이 울려 퍼졌다.




* * * *




서울의 모 병원.

1인실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따분한 얼굴로 신문을 들추던 그는 이내 포기하고 신문을 냅다 허공에 집어 던졌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독은 다 태워버렸는데 추가 검사라니? 극도의 자유방임주의면서 이런 데에는 일일이 참섭하는 건 또 뭔가. 정천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병상 옆에 놓인 과일 바구니에서 포도를 하나 까먹었다.

병실 문이 드르륵하고 열렸다.

그러나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없었고, 귀신은 있었다. 이영이 객쩍은 표정으로 털레털레 들어오고 있었다. 정천도 그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괜스레 우스운 기분이 들어 농을 던졌다.

"거 뭐 사오기라도 하지."
"내가 이 상태로 어찌 무얼 사고 그러겠습니까."
"어허, 시도는 해 봤소?"

영이 무안한 얼굴로 딴청을 피우자, 정천은 피식 웃고 들어오라고 손을 내저었다.

"꽤나 많이 왔다간 모양입니다."

영이 정천 옆에 쌓인 문병 선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탁자 위에는 과일 바구니부터 시작해서 초콜릿이나 음료수 박스 등등이 놓여 있었다.

"인맥 관리가 중요한 법이요."
"여하간 김형은 그런 건 참 잘 이어나가는 것 같습니다. 부럽군요."
"뭘, 형씨도 이제부터 만들면 되는 거지. 또 누가 아오? 그때 알던 이들 가운데 지금도 살아있는 이가 있을지."
"적어도 인간은 나와 같은 경우가 아니면 이 땅에 머물러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정천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러면 이제 어찌할 생각이요?"
"앞으로의 거취 말입니까?"
"그래요, 어디 따로 갈 데도 없지 않소?"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이었다. 귀신이 되어버린 지금, 그가 갈 곳은 저승이 아니면 길바닥뿐이었다. 얼추 한을 갚긴 하였으나 이대로 사자에게 끌려가는 것도, 그렇다고 걸립마냥 길바닥을 배회하는 것도 딱히 끌리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런 탓에 고민만이 깊어지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정천이 운을 띄웠다.

"말씀하십시오."
"수사에는 관심이 있소?"

영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수사라 함은… 공적인 것은 아닐 터이니, 혹 김형의 업과 같은 사설 수사를 말함입니까?"
"그렇지 뭐."

정천이 포도를 한 알 더 떼어먹었다.

"실상 형씨가 가진 그 능력, 다른 이의 내력을 간파하는 그 힘이 이 일에 제격이거든. 그렇지 않소? 용의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간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요. 헌데 형씨의 힘으로는 그게 손바닥 들여다보듯 쉬운 일이잖소."
"그렇기는 합니다만…"

영이 머뭇거리자, 정천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와 함께 HEA에 들어오는 건 어때요."

영은 잠시 눈을 끔뻑였다. 오랜 옛날, 이금위 사람들을 보며 이물들의 거취와 그 행방을 밝혀내는 업을 잠시 부러워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과연 그들처럼 할 수 있을까.

문득, 마음속에서 추적거리던 장대비가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영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거 없겠지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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