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는 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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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가 SCP-423-KO의 식사지급 담당이다. SCP와 직접 대면하는 것은 아무리해도 익숙해질 수 없지만 그래도 어딘가의 도마뱀이나 목 꺾는 인형 같은 것들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이제 슬슬 그 벌레 녀석에게 줄 책이나 준비해야지.”

그 벌레에게 지급하는 책의 종류는 지급해선 안 될 목록에 있는 것만 아니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고민하게 된다. 대부분 소각 처분될 책들 중에서 고르는 것이긴 하지만… 대상의 반응도 보고 책도 처리하니 꽤나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음? 여기서 뭐하나.”

한참 태워질 책들을 보던 도중 낯익은 얼굴의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 나와 함께 벌레 녀석을 담당하는 박사님이니만큼 선택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물어봤지만…

“신이나 뭐 그런 거 나오는 거 빼곤 아무거나 먹이게. 뭐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군.”

의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것보다 저번엔 자기가 벌레에게 성경을 먹였으면서 잘도 말한다. 박사님은 그 말을 끝으로 그냥 자기가 갈 길을 가버렸고, 결국엔 아무런 도움 없이 나 혼자서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던 도중 문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분명 내 주머니 속에 있을 그것을 꺼내보았다.

“…괜찮겠지?”

가족들에게서 온 편지. 직장이 직장이다 보니 가족들과 만나기 어려운 만큼, 편지가 꽤나 자주 온다. 특히 오늘 아침에 도착한 이 편지엔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형제들의 손길이 닿아있기에 꽤나 분량이 길다. 원래 받은 편지는 쌓아두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내용도 이미 봤기에 벌레에게 준 뒤 소각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럼 이걸로 해볼까.”

그리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달랑 종이 몇 장으로 벌레 녀석의 배가 부를까 의문이었지만 혹시라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면 나중에 다시오면 될 것이다.
편지를 벌레가 들어가 있는 금속제 박스의 앞에 두고 살며시 뒤로 빠지니, 검은 점들의 덩어리가 박스에서부터 기어 나왔다. 몇 번이고 본 광경이지만 면으로서 존재한다는 저 벌레의 모습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편지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벌레는 이내 편지를 덮었다. 내가 주긴 했지만 가족들에게 받은 편지가 검은 점들로 뒤덮인 광경은 그리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가족들을 만나면 사과를 해야 될 것 같았다.

“내용도 별로 없는데 오래도 있네.”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도 벌레는 편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역시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벌레가 편지에서 떨어졌다. 그것을 확인하고 편지를 주우러 갔지만…

“뭐, 뭐야?!”

갑작스럽게 벌레가 내 발 앞을 막아서면서 글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읽기 힘들었지만 자세히 보니 이런 글이 써져 있었다.

[어떻게 가족이 준 편지를 이렇게 취급할 수 있는 거니?!]

묘하게 감정이 실린 것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벌레가 떨어진 편지를 주워서 그 내용을 확인해보니, 어머니의 이름만이 사라져있었다. 그제야 이 벌레의 또 다른 특성을 기억해냈다.
먹은 인물의 성격이나 지식을 짧은 시간동안 따라할 수 있는 것.

[이 엄만 도대체 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집에도 자주 안 오면서 보낸 편지는 또 이런 취급이라니!]

“아니, 저기, 그게…”

분명히 그저 벌레가 따라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박력에 선뜻 무시할 수 없었다. 억지로 고개를 돌려 소각로로 향해봤지만 어느새 벌레는 소각로가 위치해있는 벽에서 또 다른 글을 형성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보낸 편지는 바로 소각한다고!? 난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그야 그렇겠지?!”

벌레에게 가르침 받은 적 따위 없다.
어느 순간 그런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벌레와 대화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곧바로 편지를 소각로에 넣고 소각 버튼을 눌렀다. 그런 나를 향해 벌레는 또 다른 글을 형성하였다.

[어차피 이 말을 들어도 집으로 올 생각 따위는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알아주기 바란단다.]

난 어째서 이 벌레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되는 것일까.

[우리 가족은 물론, 이 엄만 널 언제나 생각하고 있단다. 가족이니까. 그러니까 시간이 남을 때마다 집으로 오렴.]

“…알았어요.”

난 어째서 이 벌레에게 이런 말을 해야 되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다시 한 번 벌레를 보았지만, 벌레는 자기가 언제 그런 말을 했었냐는 듯 흐물흐물 거리며 자기가 나왔던 금속제 박스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누구와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 떠올리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가족이 나를 기다리는 것과 같이, 나도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집에나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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