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도서관

헬기가 털털거리며 내려앉았다. 한국에서 중국, 이어 러시아를 거쳐 폴란드까지 날아온 헬기에 탄 이들은 피곤한 듯 눈을 부릅뜨며 헬기에서 내려 땅에 주저앉았다.

“중간 급유 받아가면서 한국에서 폴란드까지 날아오다니, 맙소사. 이렇게 재수가 없을 줄은 몰랐는데.” 란란맥이 주저앉아 물통을 꺼내들며 말했다.

“우리 둘 다 폴란드어는 못 하지 않나? 한국어 통역이 있기나 할지 모르겠는데.” 이트륨이 말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군. 원래 본부에 착륙하려고 하면 당연히 관제 센터에서 응답이 와야 할 텐데. 여긴 한국하고는 규정이 다르나?”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요. 더군다나 지금 오면서 들은 그 뉴스나 야나기 투나잇 쇼를 보면 지금쯤 비상이 걸려 있어야 할 텐데. 무기를 들고 가죠?” 란란맥이 허리띠에 꽂힌 총을 집어들었다. 이트륨은 그걸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뭐…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중간에 어쨌든 문제없이 계속 급유를 받았었는데.”

이트륨은 그러나 본부 시설 쪽을 바라보고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건물 하나를 빼놓고는 모든 본부 건물들이 어두컴컴했다. 더군다나 가까이 가 보니 그 건물의 창문은 전부 깨져나가 있었고, 부서진 문틈으로 물줄기가 콸콸 흐르고 있었고, 안쪽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트륨이 손전등으로 부서진 문을 비추며 그 문짝을 강제로 밀었다. 문 뒤쪽에는 온갖 집기와 잡동사니들이 끼어 있었고, 이트륨은 손으로 밀리지 않자 발로 문짝을 걷어차며 밀어냈다. 그 안에 있던 잡역부 하나와 둘의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온갖 것들이 떠다니는 가운데 무릎까지 차오는 물속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뒤로 돌아 잡역부가 달아나기 시작하자, 란란맥이 소리를 질렀다. “이봐, 당신 뭐야! 거기 서!” 그가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물이라니.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트륨이 투덜거리며 뒤를 쫓았다.

추격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잡역부는 건물의 지리에 익숙한 듯 여기저기 문을 열어젖히며 그 난장판을 헤집고 다녔지만, 란란맥에게 뒷덜미를 잡히고 물속에 얼굴을 처박으며 추격전은 끝났다. 란란맥이 그의 멱살을 붙잡고 뒤집었다. 잡역부는 추레한 중국인이었다. 물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얼굴에 달라붙었고 얼굴에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 나타났다. 그가 소리질렀다. “그만! 한국말 햘 줄 알아여. 뭐든지 할 톄니까 그만!” 란란맥이 그를 놓아 주었다. 그들 셋은 잠시 숨을 골랐다. 물이 콸콸거리며 흐르는 소리가 괴괴하게 울렸다. 란란맥이 잡역부에게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며 물었다. “당신 뭐야? 다른 사람들은 왜 다 어디있고 당신밖에 없어? 여기 책임자는? 요원들은?”

“오, 먑소사.” 잡역부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여긴 폐…그 뭐라 그러더라?” 이트륨이 짜증스러운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그래! 폐쇄됐어요. 포란드 지부는 문을 다닸어요. 그… 뱀의 손한테 공격당해서.”

“뱀의 손?” 란란맥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도 남아 있습니까? 무슨 공격을 받았다는 거죠?”

“오… 그 고양이요.” 이트륨이 발로 땅을 툭툭 걷어찼다. “내가 해 본 것 중 최악의 면담이군. 이래 가지고서야 뭘 제대로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고양이? 처음부터 제대로 시작하라고!” 그가 버럭 소리질렀다.

“알아써요! 알았다고!” 잡역부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말하는 고양이! 윤리위원회에 속해 있는! Cat With Eye라고 부르던데요. 그 고양이가 들어와서는 열쐬로 문을 여니까 갑자기 거기서 물이 흘러나와서는 난장판이 되고, 여는 문마다 게속 그렇게 물이 나왔다고요. 요원들이 대응하려고 했는데 물이 너무 빨리 나와서 도저히 어떠케 할 수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못 알아듣겠군. 윤리위원회의 고양이가 어쩌고 저쩌고… 젠장, 도대체 한국에 착륙 못하고 폴란드까지 날아오게 되었냐고? 망할!” 그 때 반대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잡역부한테 뭘 기대하시는 겁니까? 보안 등급도 없는 변변찮은 인간한테.” 둘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까만 양복을 입고 중절모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그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 드릴까요?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 남자가 한쪽 손에 든 서류가방을 물 속에 던지듯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둘이 주춤거리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당신은 누구지? 당신도 그리 재단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은 아닌데?”

“나는… 아무도 아니죠. 그게 가장 맞는 것 같은데.” 그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중절모가 만들어낸 그늘이 그의 얼굴을 코까지 가려주었고, 보이는 것은 능글맞은 웃음밖에 없었다.

“오, 설마… 그 유명하신 아무도 아닌 자라고?” 이트륨이 과장된 몸짓으로 손뼉을 짝짝 쳤다. “난 롬바르디가 한 말이 진짜인 줄 알았는데. 당신은 그냥 요원들이 요주의 단체랑 이리저리 협력한 일 있을 때 땜빵 용으로 만들어낸 줄 알았지. 그나저나 도대체 왜 우리한테 온 거지?”

“이야, 제 마음에 깊게 스크래치를 내 주시는군요. 하기야, 저는 무(無)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기도 하니, 별로 틀린 말은 아니겠죠? 뒤의 질문에 답해 드리자면… 미래에 아마 여러분이 제게 필요한 걸 찾아주실 예정이어서요. 저는 그게 어디 있는지 몰라서 찾을 수 없지만, 여러분이 그걸 찾게 될 예정이라는 건 알고 있죠.”

“그게 뭐지? 우릴 이용해 먹을 생각이라도 있는 건가?” 란란맥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아무도 아닌 자가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몸을 쭉 폈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요? 모르텐 페데르센의 인터뷰 덕분에 요주의 단체들이 날뛰기 시작했으니까요. 다섯째주의는 자기네 연예인 신도들을 이용해 미디어 선동을 하고, 오컬트 연합과 연방수사대는 UN과 함께 연합군을 만들었고, 반란하고 부서진 신도 어떻게든 견디려고 발버둥치는 중이죠. 그리고 이곳은…” 그가 양손을 쭉 펴고 들어올렸다. “뱀의 손의 공격을 받았죠. 그것들은 방랑자의 도서관을 이용해 꽤나 다채로운 공격을 할 수 있으니까. 뱀의 손 첩자인 Cat With Eye가 여기의 문을 죄다 도서관을 통해 바다로 연결시켜서 물바다를 만들어 버린 거죠. 재단께서는 여길 포기하고 폐쇄하기로 결정한 거고. 해야 할 전쟁이 많으니까요, 안 그래요?” 그가 키득거렸다.

그들이 아무도 아닌 자의 얘기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뒤에서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잡역부가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야, 거기 안서!” 란란맥이 소리질렀지만, 그 잡역부는 무시하고 허둥지둥 뛰어 사라졌다. “오, 무시하세요. 그냥 뭐 훔쳐갈 거 없나 뒤적거리던 놈이니까.”

“잠깐, 잠깐만.” 이트륨이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요주의 단체들이 날뛰고 있다고? 당신도 단체는 아니어도 요주의 인물쯤은 되지 않나? 당신도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아닌가?”

“오, 그럼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기브 앤 테이크도 몰라요? 난 당신들한테 정보를 줬고, 당신들은 내 작은 음모를 진행하기 위한 장치가 되어 주는 거죠.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닐 텐데요.”

“결국 당신도 그리 믿을 만한 작자는 안 된다는 거군. 우린 떠나는 게 좋겠어. 우리 임무는 변칙 개체를 안전하게 재단 지부로 전달하는 거고, 여기 폴란드 지부가 폐쇄되었다면 떠나는 게 좋겠어.” 둘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아무도 아닌 자는 슬픈 듯 고개를 저었다. “아, 불신이여. 프랑스로 잘 가시길. 아마 급유쯤은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Cat With Eye는 조심해야 할 겁니다. 별로 만만한 고양이는 아니니까요. 절 가장 싫어하는 귀여운 녀석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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