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 서곡

카에스틴이 탄 작전수행차량은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급히 어디서 가져온 온 차량인 듯, 차량 안에는 전에 쓰던 요원들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한 구석에 플라스틱 접시 위에 있는 먹다 남은 크레이프를 집어 들었다. 아마 프랑스에서 징발해 온 차량인가 보군. 그렇게 생각하며 접시를 구석의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을 때, 차량 내에 있는 전화기가 울렸다.

그는 떨떠름하게 그 전화를 잠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GRU ‘P’ 부서와의 교전이 있었다든가 하지는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O5 평의회나 그의 상관들이 독촉을 한다는 건 영 그런데. “카에스틴입니다.” 약간은 시큰둥하게 수화기에 대꾸하고 응답을 기다렸지만, O5-6, 그의 임시 상관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무언가 망설이는 것 같은 침묵만 들려올 뿐이었다.

“누구십니까?” 그가 물었다. 여전히 침묵이 이어지다가,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전화통 너머로 들렸다. “지역사령부의 페테르 브릴러 연구원. 그리고 기동특무부대 카이-17의 고든 소령이 같이 있…소.” 말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고민하는 건지, 그 목소리는 끝에 가서 망설였다.

카에스틴은 잠시 멍하니 수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가 되물었다. “설마 오늘 텔리온에서 낙하산을 타고 우리 대원들에게 표적 연습을 시켜 준 사람들인가? 내가 감사인사라도 해야겠는데?”

“하하. 유머 감각이 정말로 뛰어나시군. 어쨌든, 우리도 감사인사 받으려 전화한 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생산적인 목적이죠. 지금 평의회가 부대를 이끌고 우크라이나로 온 목적이 뭔지 압니다. SCP-065-KO 그것 때문이죠. 맞지 않습니까?”

“아, 재미있는데? 내가 직접 지역사령부에 사보타주를 지시했는데 그런 최신 업데이트를 가지고 있다니. 그 정보를 어떻게 구했는지도 궁금하군. 아마 그쪽에 동조하는 스파이들이 좀 있나 보지?”

“그것보다는 더 나은 얘기를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수준이 좀 낮군요. 지금 난 협상을 제안하는 겁니다.”

“아, 협상이라.” 카에스틴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기 시작했다. “뭘 협상하겠다는 거지? 평의회를 배신하고 떨어져 나가서 지금 완전한 적대 상태에 놓여 있는, 지역사령부 인원이 내게 협상을 제안한다. 꽤나 재미있는데? 그래, 뭐 SCP-065-KO 얘기를 꺼내는 걸 보니 그것과 뭔가 관련이 있나보군. 쓸 만한 패를 갖고 있나?”

“간단합니다. 당신들은 GRU ‘P’ 부서가 점령하고 있는 그곳을 빼앗으려 합니다. 맞습니까?”

“군사작전의 목적은 확인해 줄 수 없지. 군사 기밀이니까.” 카에스틴이 느긋하게 손으로 턱을 천천히 쓸었다. 면도를 며칠 동안 하지 못해서인지 턱이 까슬까슬했다. “더군다나 나름 이 전쟁의 사령관이 자네들 같은 배신자들과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꽤나 리스크가 있으니 확인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수밖에. 하지만, 순전히 내 재미를 위해, 온전히 내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그렇다고 가정해 보지. 제안하고 싶은 게 뭔가?”

“그 점령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신들은 전면전을 벌일 필요도 없고, 굳이 우크라이나 정부나 민간인 기억 소거 때문에 땀 뺄 필요도 없고, 인력을 거의 잃을 일도 없을 겁니다. 그만하면 그럴 듯 하지 않습니까?”

“난 모르겠군. 그게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지.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엄연히 대외적인 명분은 O5 인원을 살해하는 데 공모한 GRU ‘P’ 부서에 대한 응징이야. 과연 전면전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보나?”

“하, 반란과 부서진 신과 P 부서가 힘을 합친 선례는 전혀 없죠. 과연 그걸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흐흠, 정보국과 외무부와 내부 보안부가 한목소리로 말하는 걸 백면서생 하나가 부정하려 드는군. 그래서 정확히 어떻게 도와줄 수 있다는 건가?”

“내부 구조. 그리고 경비 위치.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뭔가 했더니, 그런 빈약한 패였군. 협상을 할 거면 좀 더 그럴 듯한 카드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같은 차에 있는 부하가 그를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카에스틴이 한 번 그를 쏘아봐주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을 포커에 비유하자면 내가 에이스 넷을 쥐고 있는 셈이야. 자네들은 원 페어로 허세부리고 있는 거라고. 그러나 포커에서 허세부릴 때에도 한 쪽이 압도적이면 별 재미를 보기가 힘들다네. 남은 일은 내가 판돈을 싹 챙기고 자네들을 파산시키는 것뿐인 것 같은데?”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침묵 속에서 박사가 느낄 분노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그럴 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다른 것도 있습니다.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고, 혹시라도 만일의 사태가 생기는 것도 완전히 막을 수 있겠지요. 가능성은 항상 있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흐흠… 뭐. 우린 지금 가상의 영역에서 놀고 있으니 그런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그래서, 요구하는 건 뭔가?

“간단합니다. 즉각적 철수. 그것 말고는 별거 없습니다. 자세한 건 제가 대변하는 사람에게 직접 들으시죠.”

“호오라…” 카에스틴은 머리를 굴렸다. 꽤나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굳이 이들이 제 발로 잡히거나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이렇게 협상을 제의한다는 건 뭔가 분명히 있기는 있다는 소리다. 한 번 만나서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별거 없으면 그냥 그 자리에서 끝장내면 그만이니까. “자, 그럼, 이렇게 하지. 이 가상의 설정에 근거한 이 대화를 좀 더 이어나가기 위해-” 그가 ‘가상’에 힘을 주어가며 말했다. “적당한 위치에서 만나면 좋겠군. 아마 그쪽에서 장소를 제안하는 게 좀 더 안심이 되겠지?”

브릴러 박사가 좌표 하나를 불렀다. 그는 그 좌표를 차량을 몰고 있던 운전병에게 불러주고, 방향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작전수행차량이 유턴을 할 때, 카에스틴은 몸을 편안히 좌석에 뉘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주 매끄럽게.


브릴러 박사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박사가 전화를 하는 동안 느긋하게 권총을 손질하고 있던 고든 소령은 하품을 쩍 했다. “드디어 끝난 겁니까? 뭐 이렇게 말로 뭐라뭐라 하는 건 내 취향이 그다지 아니어서 원.”

사무관이 고개를 돌리고 나타샤를 소리쳐 불렀다. 나타샤는 예의 그 무표정을 하고 순식간에 사무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가서 차를 준비시키게.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군. 우리는 조금만 있다가 움직이지.” 그녀는 고개를 아주 살짝 움직이고 걸어 나갔다. 사무관이 둘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래, 가기 전에 한 마디만 더 해두지. 자네들은 재단에서 일했으니 제대로 보지 못하는 면이 있을 거야. 그러나 재단이 이 세상을 위험에서 지키려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분명한 착각이야.”

소령과 박사는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적대감의 표현으로 봐야 할까? 어쨌든 이미 되돌리기에는 너무 많이 와 있었다. 사무관이 지팡이를 바닥에 딱딱거리며 방을 나섰다. 둘이 뒤를 따랐고, 막 건물을 나설 즈음에는 다른 방에서 나온 특무부대원 둘이 합류했다. 소령은 저번처럼 리무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건물 앞에는 매끈한 험비 두 대가 서 있었고, 나타샤가 그 중 한 대의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 러시아를 섬긴다면서 미국 군대에서 쓰는 차량 두 대를 가지고 오다니. 보아하니 당신들도 별로 그렇게 겉과 속이 같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소령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사무관이 나타샤가 탄 험비에 올라탔다. 그들 넷은 다른 험비에 올라탔고, 소령은 조수석에 앉자마자 품에 가지고 있던 휴대용 도청 방지기를 작동시켰다. 거슬리는 전자음이 희미하게 들려오자 고든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후. 그 사무관인지 뭔지 하는 노인네 때문에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겠군요. 어떻습니까, 브릴러 박사님? 이거 뭔가 걱정되지 않습니까? 그 말하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어요. 죄다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니까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박사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카에스틴 차장이 들었던 비유가 정확한 것 같군. 우리가 원 페어로 허세부리고 있다고 하는데, 그게 정확할지도. 어찌어찌해서 이렇게 됐으니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밀고 나가야지. 우리 목표를 잊지 말아야겠지.”

“젠장, 좋은 동기를 가지고 있으면 항상 당하는 것 같다니까요.” 소령이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험비는 빠르게 목적지까지 나가고 있었다. 나무들이 차창을 스치듯 지나갔고, 나뭇가지들이 차를 붙잡고 싶은 듯 쉴 새 없이 유리에 부딪쳤다. 그는 SCP-065-KO가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 인적이나, 아니면 뭔가 설비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희미하게 다른 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재단에서 활동하면서 꽤 많이 들어 본 소리였다. 정보국 작전수행차량이 내는 엔진소리. 품에 있던 쌍안경으로 보니 대략… 400m쯤 밖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그의 부하가 명령을 받고 핸들을 돌렸고, 곧 험비 두 대가 공터에 멈춰 섰다. 평의회 쪽에서 온 차는 넷이었다. 검은 정보국 작전수행차량 하나, 그리고 똑같이 검은 정보국 QRF(Quick Response Force) 차량이 셋이었다. 내리기 전 그가 박사에게 속삭였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정말 주의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QRF는 전투 목적의 MTF 팀이랑 맞먹어요. 지금 상황에서는 못 당합니다.”

그들이 모두 험비에서 내렸다. 나타샤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지만, 사무관은 험비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검은 차의 문이 열리고 카에스틴이 선글라스를 쓰고 차에서 내렸다. 사무관을 보고도 그는 놀란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QRF 팀 셋을 데리고 왔으니 걱정할 건 아무 것도 없겠지. 소령이 속으로 씁쓸하게 생각했다.

“뭡니까? 저렇게 잔뜩 팀을 데려온 건 무슨 의도죠? 실력행사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브릴러 박사가 날카롭게 말했다.

“우리가 한 얘기는 전부 가상의 얘기라 하지 않았나. 협상이나 뭐 그런 것도 전부 가상일 뿐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았지. 내게 지금 보이는 건 지역사령부에 붙은 배신자들과 꽤나 신원미상의 사람 둘인데.” 카에스틴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뭐 좋습니다. 그렇다 치죠. 소개나 해 드리죠. 이쪽은 GRU ‘P’ 부서의 사무관입니다. 세부 사항을 합의하러 나왔죠. 나한테 그런 것처럼 계속 빈정거려 보시죠.” 박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무관이 그 모든 게 그냥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 대략적인 건 충분히 박사가 잘 설명해 주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 보지. 아, 혹시 자네가 나보다 나이가 많나? 미안하지만 그냥 반말로 하겠네. 우리 쪽 요구사항은 간단하네. 재단 쪽 인원들을 즉각적으로 철수시킬 것. 그리고 SCP-065-KO를 지금 차지하고 있는 P 부서 인원들을 확실하게 모두 죽일 것. 아, 그리고 여기 우리 넷에 대한 안전을 보장할 것. 우리가 줄 수 있는 건 들었을 테고. 어떻게 생각하나?”

카에스틴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하, 나도 반말로 가 볼까. 정말이지 구차하기 짝이 없는 조건들이군. 브릴러 박사, 당신이 나한테 수준을 운운할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계파 갈등에 쩔어서 우리 힘을 빌리려고 하는 그런 작자의 대변인 노릇이나 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군. 그래, 그 대가로 내놓을 거라고는 기껏해야 경비 위치에 내부 구조? 웃기지도 않아.”

“하지만 자네는 저 부하들을 데리고 나왔지. 분명히 관심이 있다는 뜻 아닌가? 호위병이 잔뜩 있어야 이 자리에 나올 정도로 겁쟁이는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뭐가 그리 문제인가? 한 번 생각해 볼까. 왜 우리 정보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럴까? 정보가 충분하고, 만약 SCP-065-KO를 다시 되찾으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점령당한 그 시점에 움직였겠지. 그게 목적이 아니라 P 부서를 밀어버리는 게 목적이었다면? 그래도 상관없어. Diplomacy Party 사건 때나 다른 핑계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이때까지 기다렸다는 건 결국 정보가 없었기 때문 아닌가?”

카에스틴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쯧쯧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무어라 반박하지는 못 했다. 인상을 잔뜩 쓰고 그가 마지못해 말했다. “그렇다 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더 있지. 난 당신을 믿지 않아. 믿는 게 더 웃긴 일 아닌가? 뭔가 신뢰를 줄 수 있는 걸 줘야지. 저 안에 매복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방법은 딱 하나겠군. 내가 같이 자네들과 함께 이동해 주지.”

“안 됩니다!” 나타샤가 화들짝 놀라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외쳤다. 그동안의 무표정은 온데간데없이 그녀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괜찮네. 내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고.” 사무관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저을 때, 카에스틴이 말을 툭 던졌다.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둘 다 따라오는 건 어떻겠나? 그게 가장 나을 것 같은데?”

사무관과 나타샤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사무관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지만 나타샤는 간절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고,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고 험비에 올라탔다. 곧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이어지고 차들이 모두 SCP-065-KO가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나무들이 요란하게 짓밟히며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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