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는 날아오르고 싶어

어느 곳이나 그렇지만, 점심 시간의 사무실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저수지 안의 제01K기지도 마찬가지였다. 비타민D 공급을 위해 특별히 태양광과 비슷한 빛을 내는 전등만이 사무실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수많은 칸막이 중 유일하게 한 군데에서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홀로 사무실에서 약간 불량한 자세로 의자에 앉은 성찬은 흥미없다는 눈빛으로 휴대전화 속 글자들을 훑어보고만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낡은 의자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젠 너무 익숙해진 소리라 거슬리지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찬은 지저분한 바닥에서 때탄 하얀색 충전선을 꺼내 휴대전화에 꽂고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마치 햇빛처럼 내리쬐는 전등 때문에 눈이 부셨다.

그의 칸막이에는 많은 양의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여 있었다. 꽤나 밀린 업무 때문에 몸은 쑤시고 정신은 피곤했다. 정작 밤에 잠을 들려고 하면 매번 눈이 말똥말똥하여 악순환만 계속되었다.

'진짜 죽겠다. 이렇게 살다가는 과로사하고 말겠지.'

성찬은 충전 중인 휴대전화를 들추어 보았다. 여전히 배터리는 부족했다. 충전하는 것 때문인지 오래 써서 그런 것인지 감촉이 따뜻했다. 뭔가 기분 나쁜 '따뜻함'에 그는 다시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시계를 보니 아직 점심 시간은 끝나려면 한참 남아 있었다. 성찬은 속이 안 좋아 점심을 거른 탓에 사무실에 홀로 있었다.

일은 많지만 이렇다할 성과는 인정받지 못하고, 아직 연인도 없고, 친구도 적은 성찬에게는 하루하루가 후회투성이었다. 모든 시간이 아깝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처음 재단에 들어왔을 때에는 호기심 때문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업무를 맡아보긴 했지만, 끝내 행정 업무가 그나마 덜 고단하다고 판단되었다.

가끔씩 연구 도중 큰 성과를 거두거나, 집 소파 밑에서 비트코인 다발이 든 USB를 발견해 사직서를 쓰고 탈출했다는 연구원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풀이 죽곤 하였다. 성찬은 조금이라도 성공하려는 자신이 괜히 억울해졌다. 그러면서도 자신도 그렇게 순식간에 '인생 역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게 망상에 불과한 것이란 걸 오성찬 자신도 잘 알고 있기에 이내 기분이 나빠졌다.

평소에 운도 좋지 않아 사소한 뽑기에서도 당첨된 적이 없었다. 복권이나 경마도 전부 틀렸다. 오죽하면 학창 시절 학급 학생들이 '무조건 성찬이랑 반대로 선택하면 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했을까.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불운이라 몰수록 자존감은 떨어져 갔다.

그래도 지금보다 조금 더 젊었을 적에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유명한 대학원만 가면, 박사과정만 따면, 연봉이 세고 모두가 부러워할 직장만 다니면 인생이 새로워질 거라고 믿었기에 그나마 즐겁게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힘들게 박사 학위까지 따고 연봉만은 신의 직장이라고 하는 재단에 입사하고 나서도 그의 인생이 급격히 행복해지진 않았다. 주변 환경은 변했지만 그를 맴도는 일상의 공기는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다만, 거북목은 더 심해졌다.

"이거이거, 심각한데요. 오랫동안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혀를 차며 창백한 엑스레이 사진을 막대기로 툭툭 건드는 늙은 의사의 충격적인 말에도 성찬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그냥 잠이나 실컷 자고 싶었을 뿐이었다.

과중한 업무 때문에 사무실에서 숙식하거나 퇴근 후 씻지도 못하고 바로 뻗어버리는 게 일상이었기에 돈을 많이 벌어도 자신을 위해 제대로 쓸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돈이 차곡차곡 모이면 그나마 다행인데, 어쩌다 통장을 확인해보면 집을 사려고 무리하게 끌어다 쓴 은행 대출금, 각종 공과금, 보험료, 자동차 유지비 등의 명목으로 돈이 뭉텅이째 꼬박꼬박 빠져나간 흔적이 찍혀있다.

게다가 이제는 '공부를 더 하고 좋은 직장을 가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자기위안조차 할 수 없기에 오히려 삶의 질이 더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공부를 미친듯이 해서 현재 한국에 있는 직장 중 최상위 티어의 연봉을 받는 재단까지 와서도 자신의 삶이 이 모양이니까 말이다. 자신을 희망고문해가며 더 나아갈 목표도 사라졌다.

힘들게 산꼭대기까지 올라왔는데 정작 그 곳은 물 한 모금, 기대어 쉴 나무나 너른 들판조차 없는 좁은 폐허였고, 이제 산을 내려갈 일만 남은 듯한 기분이었다. 재단도 여느 직장이나 다름 없었다. 사무직도 순식간에 개죽음당할 수도 있다는 게 차이점이었지만.

"에휴, 이런 생각만 하면 뭐해. 일이나 하자. 그래… 시작하기 전에 비트코인 시세나 확인해 볼까."

성찬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의자에 똑바로 앉고 책상 아래의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쿨러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만이 날 뿐, 모니터는 좀처럼 켜지지 않았다. 성찬은 불안하면서도 답답했지만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

그러나 끝내 블루 스크린만이 성찬을 환영할 뿐이었다. 시무룩한 표정의 이모티콘이 그의 화를 더욱 돋구었다.

"아오오, 진짜! 염병하겠다!"

되는 게 없다고 생각한 성찬은 고함을 지르고는 고개를 푹 숙이었다.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다시 사무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침 아무도 없겠다, 그냥 잠시 AIC용 컴퓨터를 사용해도 괜찮겠지? 어차피 잠깐만 사용할 건데. 휴대폰이 잠시라도 충전될 때까지만 하면 되겠지, 뭐.'

성찬은 총총걸음으로 사무실에서 복도로 나왔다. 아직 사람은 없었다. 그는 주변을 다시 확인하고 복도 끄트머리의 불투명한 자동문을 열고 방 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잘 쓰이지 않는 AIC 관리실이여서인지 실내는 어두웠다. 벽을 더듬거려 전등을 켜자 조금 비좁은 방 안이 드러났다. 바닥 곳곳에 여러 곳에서 나온 전선이 엉망으로 얽히고설켜 있었다.

'언젠 한 번 청소를 싹 해야겠다. 먼지도 되게 쌓였네. 이 퀴퀴한 냄새, 어후.'

성찬은 먼지가 조금 쌓인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를 발견하고 구석에 있던 의자를 책상 앞으로 가져왔다. 그러고 여유롭게 컴퓨터를 켰다. 최신형이여서인지 부팅이 순조로웠다. 그는 손목의 시계를 슬쩍 보았다. 시간은 아직 충분했다.

"입맛이 없어 점심을 거른 덕에 이렇게 몰래 컴퓨터를 사용할 줄은 몰랐는데. 무슨 스파이라도 된 기분 같구만."

컴퓨터의 패스워드는 손쉽게 머리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이건 AIC용 컴퓨터였으니까. 그것도 시설부 소속의 AIC.

'어차피 이건 인공지능응용학과 사람이 찾아와서 점검할 때에만 거의 쓰이는 컴퓨터니 아무도 신경 안 쓰겠지. 흐흐흐.'

"안녕하세요? Tulip.aic입니다."

"어, 어음, 안녕?"

전원이 켜지자마자 컴퓨터 안에 내장된 AIC가 성찬에게 말을 걸었다. 갑자기 들려온 탓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진정하고 여유 있게 AIC에게 대답했다.

"튤립, 일단 네가 당장 필요한 건 아니니까, 잠시 물러나 있어줄래?"

"네, 알겠습니다."

컴퓨터가 조용해지자 성찬은 안심하고 인터넷에 접속하였다. 잠시, 아주 잠시만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이니 괜찮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고는 구글에 비트코인 거래 사이트를 검색하고 파란색과 빨간색이 번갈아 있는 차트를 응시하였다. 안타깝게도 파란색 블록만이 눈에 띄었다.

'영 시원찮네. 팍 오르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려갈 기세인데.'

가격은 그렇게 오르거나, 내려가지도 않았다. 성찬은 비실비실하게 움직이는 가격 그래프가 맘에 들지 않았다. 거기서 크게 성장하지 못하는 자신이 연상된 걸지도 모르겠다. 한숨을 푹 내리쉬고 다른 가상 화폐도 찾아봤지만 별 흥미는 없었다.

"별다른 게 없네… 계속 오르기만 해준다면 참 좋을 텐데, 에휴. 그런데 하나 사는 것도 버거운 지경인데 이런 거에 관심 기져서 뭐하나."

그는 턱을 괸 채로 궁시렁거리며 마우스를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별다른 정보는 찾지 못하자 그는 성질이 나 창을 아예 닫아버렸다.

"메일이나 확인해 봐야지. 빨리 보기만 하고 가야겠다."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재단 인트라넷에 접속하려던 순간, 밖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성찬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고 나서야 점심 시간이 거의 끝나간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피곤해서인지 시간 감각이 무뎌진 탓이었다.

뭐야, 시간이 벌써?"

성찬은 작별 인사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말하려던 AIC를 무시한 채 급하게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아직 들키지 않았다.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을 얼른 대충이나마 치우고 살금살금 문으로 향했다. 다행히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문 밖으로 목을 내밀고 주위를 돌아본 뒤 무사히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성찬은 본 '사람은' 없었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전에는 자리를 비웠던 동료들이 들어와 밀린 업무를 보거나, 커피를 타거나, 쪽잠을 자고 있었다.

"너 어디 있었어? 점심 시간 동안 식당에 나오지도 않더니만."

"아, 속이 영 안 좋지 않아서. 그냥 한 끼 굶었지."

"그러다가 몸 상한다. 밥 좀 잘 먹고 다녀."

마른 성찬의 몸을 걱정이라도 하듯 건네는 말에 성찬은 간단히 감사 인사를 하고 그의 자리에 앉았다. 아까 앉았던 의자보다 훨씬 편안하고 푹신했다. 배가 조금 고프긴 했다.

성찬의 컴퓨터는 여전히 블루스크린을 내보냈다. 성찬은 답답한 마음을 달랠 겸 빈 속에 커피를 채우려 복도로 다시 나갔다. 달달한 자판기 커피의 맛은 조금이나마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었다. 성찬은 나중에 수리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날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만족스럽지도, 불만족스럽지도 않은 보통 같은 하루였다.


그 다음날은 성찬에게 지옥 같던 하루였다.

시설부 소속 자금 관리 AIC, 그러니까 어제 성찬에게 말을 건 그 인공지능이 재단 예산 대부분을 비트코인에 투자를 해버린 것이었다. 무려 수천억원의 자금이 순식간에 보이지도 않는 암호 화페로 변해버렸다. 그마저도 점점 가격은 떨어져갔다. 이대로 가다간 예산을 제대로 사용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체 뭔 일이 일어난 거야?"

"몰라, AIC가 멋대로 예산을 건든 거 같은데. 그것도 비트코인에 투자했다나."

"애초에 건들 수가 있기야 한 거야?"

"자금 관리용니까 접근 권한이 있었나 보지. 나도 자세한 걸 모르겠어."

"어떤 새끼가 실수로 저질러 놓고선 AIC가 한 거라 위장한 거 아냐?"

"내 생각엔 혼돈의 반란의 사보타주 같은데…"

온갖 소문이 나돌면서 사건이 커지고 있었다. 한국지역사령부는 모든 소속 인원에게 긴급 상황이라며 메일을 돌렸다. 유난히 소란스러웠던 사무실의 분위기를 읽었을 때부터 불안한 감정이 느껴졌다. 어제 저지른 일이 들키기리도 한 건지 걱정되었는데,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었다.

'시발.'

아직 아무도 자신을 사건의 주범이라 생각하진 않았으나, 들킬 후에 벌어질 일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술술 풀려가진 않았어도 어느 정도 안정적이던 자신의 인생이 파탄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라왔다. 속이 안 좋았다. 머리는 어지러웠다. 누가 툭 건들면 쓰러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야, 오성찬. 야! 사람이 말을 하잖아. 좀 들어."

"어, 어?"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자 온 몸이 오싹했다. 뒤돌아보니 어제 점심 시간에 잔소리를 한 옆 칸막이의 주인이었다. 그와 같은 입사 동기이기도 했다. 말을 걸어도 못 들은 체하는 성찬이 못마땅했는지 그의 미간이 찌뿌려져 있었다.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체했냐?"

"아냐, 아냐. 괜찮아. 아침을 좀 급하게 먹어서 그래. 이런 일이 일어난 줄 알았으면 적당히 먹을 걸 그랬어. 속이 조금 안 좋아."

누군가 그에게 안색이 안 좋다고 걱정을 해줘도 성찬은 괜찮다고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실상은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맞다, 시설부장님이 너 부르시던데? 얼른 가봐."

성찬은 몇 초 동안 가만히 서있다가 정신을 차린 그는 동료에게 반대로 짧은 질문을 던졌다.

"부장님이?"

"그래."

퉁명스럽게 나온 고작 두 음절의 이 한 마디에 두통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자신조차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생각하느라 정신이 어지러운데, 시설부장이 자신을 부른다는 말을 듣자 그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듯 했다.

그 뒤로 그가 어떻게 부장의 사무실까지 간 것인지 성찬은 기억하지 못했었다. 사건 이후에서야 그는 동료들로부터 자신이 거의 관절 인형처럼 뚜벅뚜벅 걷기만 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퀭한 눈빛을 덤으로 말이다.

문에 달린 작게 '부장실'이라 적힌 팻말은 진지한 글씨체로 새겨져 있었다. 노크를 몇 번 하고 문을 여니 50대 중반의 부장이 급하게 컴퓨터 속 문서들을 읽고 있었다. 고개를 든 그는 반갑게 성찬을 맞아주었다. 그의 약간의 미소를 띤 얼굴은 성찬에게 오히려 공포감만 줄 뿐이었다.

"아, 어서 오게."

"안녕하십니까."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성찬은 푹신한 가죽 의자에 앉아 나란히 부장과 마주보았다. 시선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몰랐고 그저 빨리 시간이 흐르길 빌 뿐이었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 주변에서 어느 정도 파악이 됐을 테지. 그런데 조사해보니 자네가 마지막으로 Tulip.aic와 소통했다고 나왔네. 그래서 자네를 특별히 불러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 하면-"

"… 죄송합니다."

"응?"

이젠 물러설 곳은 없다. 그냥 털어놓자. 성찬은 이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일찍 들키나 늦게 들키나, 선택지는 둘 중 하나 뿐이었지만 어차피 밝혀진 사실이었기에 성찬을 전자를 골랐다. 부장은 그의 말에 놀란 듯 당황한 표정으로 멀뚱히 고개 숙인 성찬을 바라보았다.

"잠시만, 뭐라고? 뭐가 죄송한데?"

"모두 제 잘못입니다. 어제 제 컴퓨터가 고장나서 몰래 AIC용 컴퓨터를 사용했습니다. 그때 비트코인 시세도 확인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뭔 소리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그러니까, 아무래도 제가 어제 AIC용 컴퓨터를 건드린 게 그 AIC에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저는… 저는 단지 검색하고 살펴보기만 했을 뿐인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시설부장은 성찬의 말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자신도 모르는 일에 대해 말도 더듬거리며 자백하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아- 그 일 말하는 거로군?"

부장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성찬은 놀랐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제 그 일이면, 나중에 따로 불러서 말하려고 했었는데."

"어, 네?"

"자네가 그 시설부 AIC 관리실에 들어간 건 이미 알고 있었네. 근처에 CCTV가 있었거든. 그래서 그 AIC한테 자네에 대하여 물어봤는데 사실만을 말할 뿐, 연관성은 적다고 스스로 말하더군. 그래서 그 일은 나중에 말해서 간단히 처리하려 했네. 그런데 이렇게 미리 말해주니 참 대단하구만."

"그럼 절 부르신 이유는…"

"자네가 이번 사건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을까봐 Tulip.aic와의 면담을 부탁하려고 부른 거네. 아무래도 헛짚은 모양이군."

시설부장은 성찬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웃음을 쏟아냈다. 성찬은 멍하니 있다가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잘 된 일이었다. 자신의 탓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안도감이 오기도 전, 부끄러운 감정이 먼저 들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게 아니라, 다른 일 보고 괜히 저리기만 한 꼴이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픈 마음을 참던 성찬에게 시설부장은 문서 몇 장을 건네주면서 몇 가지 사항을 일러주었다.

"그냥 간단하게 물어볼 만한 질문 몇 가지를 넣어봤네. 그리고 한 마디 더 하자면, 사령부에서 이번 사건을 아예 새로운 SCP로 지정하려나 보더군. 그런 만큼 자네한테도 임무가 주어진 셈이니, 열심히 임해줬음 바라네. 나도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거든."

시설부장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갔다. 이마의 주름이 깊어졌다.

"뭐, 이미 몇 가지 물어보긴 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네. 이번 건 그냥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거긴 하지만, 새로운 정보가 나오길 바라며 노력해주게나."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거기에 3등급짜리 정보도 들어있고 하니까 괜히 입밖으로 꺼내지 말고. 자네가 몰래 컴퓨터 사용한 건 나중에 처리할 거라지만 다음부턴 주의해주게."

"네, 주의하겠습니다."

"그만 가봐. 시간이 부족할 거야."

성찬은 관례적인 말을 하고 종이를 훑어보며 아까 들어올 때의 발걸음으로 조심스레 방에서 나왔다. 문을 닫고 그는 건너편 벽에 몸을 잠시 기댔다. 여전히 머릿속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래도 불안했던 생각이 풀리니 한결 나았다.

'아, 쪽팔려. 이게 무슨 꼴이냐.'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바닥을 바라보며 머리를 숙이던 성찬은 몸을 돌려 발을 재촉하며 목적지로 향했다. 아까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요새 사람이 퀭해 보인다?"

"말도 마, 이러다 진짜죽겠어. 게다가 며칠 전 일 때문에 팀장한테 까이기까지 하니까 장난 아니더라. 어찌 보면 그 일 때문에 이번 사건 처리에 엮인 거 아닐까, 나."

"네가 전에 말했던 고 팀장, 그 사람? 아이구야, 너도 참 빡센 직장 생활을 보내는구나."

자욱한 담배 연기가 깔린 흡연실 안에 두 사람이 있었다. 성찬은 피곤한 얼굴을 한 채 담배 연기를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내뱉었다. 재욱은 다 핀 담배를 구석에 놓인 재떨이로 던졌다. 살짝 비껴갔다. 재욱은 혀를 한 번 차고 떨어진 담배를 주우러 몸을 숙였다.

"근데 너도 바쁘지 않아? 너 요원이잖아."

성찬은 재떨이에 주운 담배를 부비는 재욱에게 말을 걸었다. 재욱은 재채기 소리를 내고 대답했다.

"나도 너처럼 죽을 맛이지. 우리 같은 정보국 요원들은 평소에도 바쁜데, 이번 일 때문에 역정보도 유포해야지, 요주의 단체 놈들 감시해야지, 높으신 분들 회의 준비해야지… 아주 미칠 지경이야."

"이럴 때엔 말단만 죽어나가는구나."

"그래도 지금 보면 상부에서도 갈려나가는 분위기던데, 자기네 월급 걸린 일이라선가?"

재욱의 농담에 성찬은 피식하고 웃었다.

"월급이야 우리도 받잖아.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갈려나가는 거지. 그나저나 이번 일은 도대체 어떻게 해결될려나."

"내가 듣기로는… 일론 머스크한테 부탁한다는데."

"뭐?"

성찬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농담 같은 말에 당황, 아니, 황당하였다. 재욱은 아랑곳않고 말을 계속하였다.

"그-러니까, 일론 머스크한테 비트코인을 사줘라, 하고 부탁한다나 뭐나. 예전에 스페이스 X 관련해서 접촉이 있었나 봐. 미친 소리 같겠지만 전부 사실- 일 거야. 아님 말고."

"이 뭔… 그럼 머스크도 요주의 인물이라는 거야? 무슨 프로메테우스 연구소 출신이래?"

"남아공 출신이지. 자란 곳은 캐나다지만."

"그래, 정-말 웃긴다. 그나저나 상부는 무슨 생각을 했갈래 그런 짓을 한데."

성찬과 재욱은 하얀 니코틴 안개가 짙게 깔린 흡연실에서 빠져나왔다. 열릴 때 문틈 사이로 연기가 새어나왔다. 성찬은 도저히 상부의 결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분명 수십 년간 무사히 일해오며 능력도 있는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결정을 내린다는 게 비현실적이었다. 온갖 비정상인이 넘쳐나는 재단에서 그런 결정이 드문 건 아니었지만, 정말 이런 얘기가 진지하게 나와 채택될 줄은 몰랐다.

"어차피 곧 에스씨피… 에이, 일련번호는 모르겠고, 그냥 이번 일에 대한 문서에도 실릴 내용이라 이렇게 말해주는 거다. 그러니까 보안부에 신고하거나 하지는 마라?"

"그래, 알려줘서 고맙다. 왜 그런 아이디어가 선정된 걸까."

"뭐, 그렇게나 다른 대책이 없었나 보지. 나도 그런 아이디어가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만 가련다."

"그래, 잘 가라."

재욱은 복도 구석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그는 성찬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성찬은 주변의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씻었다. 담배 냄새가 날까봐 손을 박박 닦았다. 세수도 한 번 하니 피곤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자신의 얼굴이.

'이대로 일만 하다가 죽으려나. 온갖 괴물 잡아 가두는 곳에서 갑자기 죽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만. 그래서 뭘 하라는 거야?'

성찬은 답답한 자신에게 질문했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한숨만이 나올 뿐이었다. 수도꼭지를 잠갔지만 여전히 물방울이 떨어졌다.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세면대에 고인 물에 둥근 파장이 일었다.

그때, 재욱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일론 머스크한테 비트코인을 사줘라, 하고 부탁한다나 뭐나.'

'그래, 이거다!'

성찬은 급하게 화장지를 뽑아 얼굴을 닦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화장지의 거친 표면 때문에 얼굴이 따끔거렸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아다녔다. 아무도 그의 계획을 알아선 안 되었다. 마치 며칠 전 몰래 AIC 관리실로 들어갔을 때처럼. 결국 아까 손을 씻었던 화장실로 돌아갔다.

좁은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간 성찬은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손으로 휴대전화의 키보드를 연신 터치했다.

'일론 머스크한테 비트코인을 사라고 했다, 이 말이지? 그럼 당연히 가격이 오르겠지.'

비트코인 구매 사이트에 접속하니 아직 시원찮게 움직이는 비트코인 차트가 눈에 들어왔다. 성찬의 계좌에는 몇 개 정도 구매할 수 있을 만한 돈이 들어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안약과 영양제를 소모하면서 재단에서 벌어온 돈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성찬은 그렇게 생각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인생 역전이다!'

기쁨에 젖은 표정으로 변기에 앉아 벽에 머리을 기대었다. 하얀색 전등이 유난히 화려해 보였다. 굉장히 급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 그는 '환상에' 젖은 채 가만히 있기만 하였다.

정말 아름다운 환상이었다.


"— 그래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말씀이군요."

둥근 안경을 올리며 예리한 눈빛의 남자가 성찬을 바라보았다. 그는 컴퓨터 타자를 치며 그동안 성찬의 발언 내용을 요약하고 있었다. 성찬은 애써 눈빛을 피하려 했지만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성찬은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당신의 동료들에게 계획에 대하여 말하다가 적발된 거라는데, 인정하십니까?"

상대방의 집요함 때문에 지친 성찬은 빨리 대화를 끝내고 했다. CCTV 카메라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 결과

"예, 예, 그렇습니다. 다 맞아요. 제가 SCP-899-KO, 이제 그거에 대한 격리 조치를 이용하려다가 걸린 거라고요. 이제 이 이야기를 몇 번이나 더 말해야 하나요?"

"발언이 번복될 수 있어 여러 번 조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러니 괜히 말 바꿔서 시간만 더 잡아먹지 마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하니 기분이 오싹했다. 그대로 어차피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별 생각이 들진 않았다. 이미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러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포기의 행복감이었다.

"하필이면 술자리에서 정신이 나가 그러고 말았으니… 제 자신이 부끄럽네요."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떳떳해질 수 있으니 잘 된 것 아닐까요?"

"아니, 그게 뭔… 휴우, 됐습니다."

약한 조명이 책상에 나란히 앉은 둘을 비추었다. 은은한 빛깔의 검은 그림자가 가볍게 흔들거렸다. 남자는 까끌거리는 자신의 턱을 만졌다. 성찬은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몇 마디 해도 될까요?"

"네, 좋습니다. 뭐든 말해보시죠."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 저는 모든 일을 제 불운 때문이라고 탓했었어요.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고 그랬죠. 근데 지금 보니 지금껏 전 불운하진 않았나 봅니다. 그냥 제 입이 오두방정이었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이번 기회에 좀 달라지고 싶다는 거죠. 몰래 한 짓 때문에 괜히 마음이 찔리거나 옳지 않은 방법으로 먼 행운을 쫓는 건 이제 그만두려고요. 당연한 얘기지만요."

남자는 엉뚱하게 들릴 법한 성찬의 말을 곱씹어보더니 말을 꺼냈다.

"뭐… 그런 거야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죠. 누구나 죄책감은 느끼니까요."

"그게 그렇게 되려나요…"

성찬은 고개를 들어 잔잔히 비추는 조명을 보았다. 부드럽게 나오는 빛이 그의 얼굴을 감쌌다. 포근한 기분이었다. 나른하였다. 남자는 그런 성찬을 보며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이내 성찬은 갑자기 남자를 바라보더니 비장하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뭔가요?"

성찬은 잠시 뜸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비트코인 얼만지 아시나요?"


"…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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