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먼곳에

2022년 5월 15일

경상도 ???

남자와 나라시는 사람 없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사람 없는 버스 정류장"이라는 말은 정확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유령들이었으니까. 그 어떤 카메라나 심지어 대부분의 인간들도 남자를 포착하지 못하리라는 점이 이 사실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었다—나라시는 조금 예외적인 경우니 제외하고라도. 그들의 모습은 작은 밤도시의 경관과는 퍽 어울리지 않았다.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남자는 대충 1980년대 대학생의 표준형처럼 보였으며 나라시는 원피스 유사한 검은 천옷을 입고는 어떤 그릇을 들고 있었다. 밤은 고요했고 그들은 공허한 눈길으로 찻길 저 너머를 살펴보고 있었다. 저편에서 검은 고양이 하나가 본능적으로 무언갈 느끼곤,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더니 멀리 사라졌다.

그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나라시가 질문을 던졌다. 언제나 그랬듯 옛된 한국어로 느슨히 구성된 반말의 구조였다.

"찾을 수 있지? 왕 말이야. 가야국의 왕."

답하기 어려운 말이 아닐 수가 없다. 어려운 질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아무리 반복적으로 설명을 해 보아도 질문자가 도무지 들으려 들지를 않기 때문이다.

"모르겠는데… 아마 있다면 찾을 수 있겠죠."

"유령은 분명 있을 거라며?"

"분명이라고는 안 했는데…… 됐습니다. 찾을 수 있겠죠. 그리고 도심지에서 너무 크게 말하시면 듣는 귀가 있습니다."

나라시는 경고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이젠 존재하지도 않는 폐부로부터 깊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저 사람이야 행복한 미래를 기대하는 듯 웃고 있다지만, 남자는 앞으로의 일들이 까마득하기만 했다. 억울함이며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쓴맛처럼 올라왔다. 어떻게든 돌아가기만 하면 인사부장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이라는 굳은 다짐이 그의 마음속에 새겨졌다.

이 고생길만 보이는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은… 이틀 전이었다. 아니면 사흘 전이었거나.



2022년 5월 14일

심야클럽 회실

그날도 그— 지금부터 서라원이라고 부르자. 라원은 약간 짜증이 나 있었다. 불행히도 원인은 똑같았다. 그나마 그때가 지금보다 나았던 것은,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리라.

햇살이 들지 않는 회실에 나라시의 종알대는 목소리가 종일 울려 퍼졌다. 가뜩이나 조용함과 어두움을 담으려 설계된 곳에서, 웬 열댓살짜리로 보이는 애 하나가 1초에 거의 세 단어씩 말하는 소리가 공간에 가득하니 대다수의 회원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아마 가장 골치를 썩었던 사람은 인사부장 윤성재임에 분명했다. 가끔 그리고 지금이야 라원에게는 재수 없는 인간임에 틀림없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동정받을만한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접수원이었다.

"인사부장님. 인사부장님."

라원은 그때 듣고 있던 노래에 집중하기를 그만두고, 인사부장이 나라시에게 쫓김에 가깝게 대화하던 장면을 지켜보았다. 1950년대풍 복식을 한 남고생이 일천 사백 년을 넘게 묵은 여자애에게 당황하는 것은 나름 볼만한 풍경이었다. 부장의 창백한 인상은 평소보다 네 배는 더 창백해 보였다.

"오늘은 찾아줄 수 있겠지? 왕 말야. 왕."

"그으게요… 이번에도 좀 급한 일이 있어서."

그 말을 듣자마자 나라시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주위에서 푸른 불씨가 튀자 멋모르고 지나가려던 유령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처음 왔을 때는 신입 회원이 너무 많아서 안 된다고 했지?"

"….네."

"이 주일 쯤에는 무슨 방? 방재? 그 사람들 때문에 못 한다고 했고."

"…그렇죠."

"엊그제는 또 뭐랬더라… 이렇게 한 여섯 번을 미루지 않았어?"

"그렇기는 한데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라시는 인사부장을 붙잡고 거의 쥐어 흔들면서 떼를 쓰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미룰 건데, 언제까지, 하는 소리가 전보다 두 배는 커졌다. 윤성재의 곤란한 표정은 거의 탈곡기 속의 낱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라원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에 인사부장의 눈이 서라원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아, 잠시만 놓아보세요. 찾아드릴게요."

윤성재가 흘러내리듯 아이에게서 벗어났다. 나라시의 검붉은 눈이 지치지도 않는 기대로 연신 반짝거렸고, 그때쯤 서라원은 윤성재와 자신의 눈맞춤에 불길한 낌새를 느치고는 슬금슬금 도망치려고 하고 있었다— 부장들과 얽히는 것은 열에 아홉은 귀찮은 일을 의미했으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윤성재가 더 빨랐다.

"서라원 회원님?"

라원은 못 들은 척을 하며 막 복도 모퉁이를 돌아 도망치고 있었지만 윤성재의 염력에 의해 그 시도는 좌절되었다. 결국 라원은 지구로 추락하는 혜성처럼 두 귀신 사이로 질질 끌려오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열성적으로 쏟아지는 나라시의 눈빛이었다.

"……왜요?"

서라원은 마지막 기대를 담아 짐짓 모르는 투로 말했다. 자타공인 그는 심야클럽에서 가장 게으른 사람이었으니까. 이런 모욕적인 칭호는 언제든 그를 온갖 업무의 손아귀에서 구해주었으니, 혹시 한번 더 구해주지 않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마침 이 서라원 회원님께서 이런 일에는 아주 둘째가라면 서러우신 분이시거든요."

라원은 이제야 후련한 자유 속으로 막 풀려나려는 윤성재의 눈을 보았다. 꼭 그에게는 어떠한 종류의 배반자가 짓는 교활한 눈매처럼 보였다. 모든 것을 자각하는 순간 남의 운명을 대신 짊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아, 망했구나, 하고 그가 직후 독백했다. 이번에는 착실하게 쌓아올린 게으름이 그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서라원 회원님께서는 숨어있는 유령을 찾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아마 그 왕이라는 분도 찾아내실 수 있을 걸요?"

"정말이지! 정말,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참 잘생겼다 했어, 귀인이었구나 귀인!"

나라시가 라원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며 웃었다. 부담은 비물리적인 것이었다, 유령의 어깨를 이리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을 보니. 그가 가진 능력이 또 그를 업무의 손아귀에 내던진다. 라원은 자연스럽게 제 업무를 강제이관시킨 인사부장을 쏘아보았다. 인사부장은 여즉 그 특유의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원이 그에게 무어라도 따지려 할 때였다.

"잠시만요. 이쪽 회원님께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서요. 괜찮죠?"

"응! 빨리 와!"

윤성재가 서라원에게 조용히 손짓하고는 금세 사라졌다가 복도 저편네서 나타났다. 서라원은 머뭇거리다가 나라시가 안 가, 하고 한 마디 묻자 결국에는 복도까지 순순히 따라가게 되었다. 윤성재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라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라원 회원님. 혹시 화나신 건 아니죠?"

윤성재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와 닿았다. 어째 강하고 무거운 느낌이 든다 했더니 감정 조작, 혹은 영파(靈波)라고 하는 힘이었다. 흔히 보이지도 않는 유령들의 목소리만은 들린다는 힘이 있는 음성. 윤성재야 그 힘을 다룰 수 있다지만 그는 할 수 없다 보니, 이러다가는 윤성재의 페이스에 말려들 것이 당연지사였다.

"아니 그—"

"뭐, 1년만의 업무니까 도와주실 거죠?"

라원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서라원 회원님도 일단은 인사부서시니까요. 저는 예전에 장례식장까지 찾아갔다가 얻어맞고, 무진에선 소멸될 뻔도 했는데 회원님은—"

"아, 알겠어요."

서라원은 자신이 벼랑 끝에 몰려있음을 알았다. 게으름. 그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을때 윤성재가 그를 보아넘겨 준 의중이 예상되었다. 차라리 자잘한 일들이라도 열심히 했다면 업보가 이토록 커진 반향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을까. 후회가 막심했다. 그 벼랑 끝에서, 하나밖에 없는 탈출로는 제 무덤을 파야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았다.

"다행이네요. 그럼 좀 설명을 드릴게요. 나라시 회원님 아시죠?"

라원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떡이기는 했지만, 사실 복도에 나와서 떠들어대는 웬 코스프레한 꼬맹이 이상의 것을 알지는 못했다. 윤성재는 대충 그의 의중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라시 회원님은 1400년도 더 전의 국가인 그 뭐더라, 가락국 출신이세요. 사물에 붙어 계시는 분인데 그 사물이 바로 검(劍)이에요. 그러니 지적인 고대의 검 같은 거죠."

양산형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고대 무기며 지적인 검 운운하는 이야기에 라원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나라가 무너지고 수천 년을 무덤 속에 계시다가, 우리 쪽이 깨웠는데 재단이 나타났고… 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여기로 오게 되었거든요. 깬 직후로는 보시다시피… 그 국가의 왕을 찾아 다니고요. 서라원 회원님은 왕을 찾아다가 심야클럽으로 데려와주시면 되는거죠."

윤성재가 마지막이라는 듯 생긋 웃었다.

"잘 해내실 수 있죠? 전 서라원 회원님을 믿어요."

"잠깐만—"

라원이 뭐라 더 외치기도 전에, 윤성재는 새카만 빛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라원은 잠시 미간을 짚었지만, 그 동작도 그를 이리 끌고 저리 끌며 어서 왕을 찾으러 가자 외치는 나라시에 의해 완전히 해체되어버렸다. 자신도 짬이 낮은 누구에게 맡길까,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이미 복도에는 그와 나라시 둘 뿐이었다.

"왕 찾으러 갈 거지? 지금!"

나라시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라원은 뭐라 내뱉으려다가 상대가 천 살이 넘어가는 존재임을 깨닫고는, 존댓말으로 다시 답했다.

"지금은 낮이라서 못 가요. 그리고 저 같은 귀신들이 잘 돌아다니려면 보름달 비슷한 달이 떠야 해요."

"….그런가?"

라원은 대략 3일간의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알고, 그동안 어떻게든지 내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다시금 윤성재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설마 내뺄 생각은 아니시죠? 굳이 태음 아니여도 밤이면 상관없으니까, 그럴 생각은 마세요."

"너 거짓말한거야?"

대체 어디서 나불거리며 계획을 방해하는 것인지, 라원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제 내빼기는 커녕 해명까지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농담, 농담이에요."

나라시는 이미 불신임을 대표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원은 그날 최후의 한숨을 지었다. 이미 나라시가 알아버린 이상 물러설 곳은 없게 되었지 않는가. 답은 출발하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일단 나가보죠. 그 왕인가 하는 사람을 찾으러 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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