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십니다 모십니다

밤이다.

밤의 어둠이 대장간에서 나오는 빛과 주문에 막혀 들어가지 못한다. 뭇 사람이 둘러앉아 주문을 외운다. 금빛의 검이 보인다. 그 검, 보석이 영롱한 그 검이, 나이자 내가 봉인된 곳임을 모르지 않는다. 어디 높은 곳으로부터 피가 흘러 검을 적시고, 패인 곳에 흘러들어가 잠긴다. 그 위에, 어떤 이가 소녀를 안고 있다. 거기로부터 선혈이 떨어져내린다. 갈색 머리의 소녀다. 얼굴이 낯익은데, 누구인지 모르겠다.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


다시 2022년 5월 15일

경상도 ???

이렇게 하여 라원은 참된 신하의 여정에 동참하게 되었구나, 하고 그는 지난일을 곱씹고 있었다. 그동안 분노는 가라앉고 수용의 단계까지 와 버린 것일까. 그는 어느덧 그 일을 운명론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나라시가 그의 옷소매를 끌면서 라원의 생각이 끝났다. 나라시의 표정이 영 떨떠름한 것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였다.

"너, 왕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

한 번도 듣지를 않았는데, 당연히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라시는 서라원의 표정을 보고 대강 눈치를 챘는지 영 불만스럽다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잘 들어, 키가 한 8척에다 덩치도 컸고, 항상 뾰족한 투구를 썼는데 그 투구가 얼굴 전부를 가리는 가면 같은 거라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 했어. 또한 왼팔에도 항상 전쟁터에서나 쓸 갑주 같은 것을 두르고 있었고. 그리고… 팔은 약간 갈고리 같은 팔이랑 좀 더 사람에 가까운 팔로 변할 수 있었는데 나는 칼이니까, 날 쥘 때는 사람 팔이였지. 옷은 항상 검은색이나 황토색 옷을 입었고 거기에 금이나 초록 염료로 장식하는 것을 좋아했어."

나라시는 제 검은 옷에 새겨진 금빛과 녹색의 문양을 가리키며 설명을 끝냈다. 그 설명은 라원이 생각하던 왕이나 군주의 스테레오타입과는 전혀 달랐을 뿐 아니라…. 애총[. 인간이 맞는지조차 의심이 들었다. 대체 어떤 인간이 팔을 두 가지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 아니거나 인간이라면 변칙적 인간일 것이다.

"……사람 맞죠?"

"아닌데? 벌레야. 비앳 출신의."

비앳의 '벌레'라면 제비꽃을 말하는 것이리라. 라원은 대강 제비꽃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가 아는 제비꽃은 비밀 조직 놈들과 싸워대는, 지구 전체를 파먹을 듯이 날뛰는 외계의 벌레들이였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한 나라의 왕이 될 수 있다니, 혹은 그런 것들과는 아예 별개의 존재일까. 라원은 궁금하였으나 실례가 될 것만 같아 굳이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이해했지?"

"네."

"그럼 왕을 찾아보자.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어?"

나라시의 말에 라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답했다.

"제가 유령의 위치를 찾아내는 방식은 광역 레이더 같은 게 아니에요. 최대 100제곱미터 안에 있는 유령의 존재만 찾을 수 있다고요."

"내…이다가 뭔데? 미더는?"

"그…. 뭐라고 해야 하지. 거미 아시죠? 거미줄에 걸린 걸 느낄 수 있는 거미. 제가 거미라면 대충 여기부터 저어기 선 나무까지만 거미줄이 있어서, 걸린 걸 느낄 수 있는 거죠. 아시겠어요?"

"응. 그럼 거미줄을 늘리면 되잖아? 할 수 있지?"

"….못 해요."

나라시는 반쯤 토라진 채로 물끄러미 멀리 선 나무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라원에게 말했다.

"그럼 왕이 있는 곳 근처는 가야겠네. 그렇지?"

"그렇죠. 혹시 어디 있을 것 같은지 아세요?"

나라시는 잠시 생각하다가, 들고 있던 그릇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녹색으로 지도가 그려져 있는 검은 견직물이였다. 지도에는 라원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글씨며 문양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으며, 땅의 모양도 그가 알고 있는 것과는 꽤나 달랐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리라.

"그렇지."

나라시가 알아볼 수 없는 글씨가 무어라 날려쓰듯 새겨진 종이를 더듬거리더니 한 곳을 가리켰다.

"한가지촌으로 가자."

어쩌면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라원은 예상했다는 어투를 섞어 볼멘소리를 했다.

"그… 지금은 그때로부터 한 1400년은 지났어요. 그때 마을이나 언덕 같은 건 대부분 다 깎아나갔거나 했고, 나라들은 죄다 없어지거나 바뀌었고요."

"뭐…? 그럼 지금은 송다리국, 믈혜국, 뭐 이런 나라들도 없는 거야?"

"네. 다 없어요."

"백제는 있겠지?"

"아니요. 백제가 신라한테 망했던가."

"허….."

나라시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정류장 의자에 걸터앉았다. 라원도 눈치를 좀 보다가 그 옆에 앉았다. 나라시의 눈빛에서는 마치 시대에 뒤처진 노인이나 박물관에 놓여버인 어떤 유물과도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라원 또한 과거에 죽은 인간이라지만, 어찌 몇십 년과 천 년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쩐다."

라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낮은 건물들 저 멀리 어둠 사이에 산 하나가 보였다. 산… 산. 충분히 유명하고 거대한 산이나 강이라면 지금이든 그때든 어느 정도 일정할 것이 아닌가.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이건 속담일 뿐이라고 가정하면.

"그렇지, 그래도 그 때랑 지금이랑 여전히 똑같은 데 있는 건 있을 거 아녜요. 산이라던가 강이라던가."

"그렇지!"

나라시의 눈이 다시 생기를 띄었다.

"두류산이 있구나?"

"두류산…이요?"

"그래. 두류산은 예로부터 신비한 힘이 있어 기이한 존재들이 많이 이끌리는 곳이였으니 왕도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어."

라원은 기억을 더듬어 두류산이라는 단어를 헤집었다. 두류산,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어디 있는 산이라고는 알지 못했다. 북한에 있던가?

"이 산이 깎였을 리는 없는데. '지루산'이라고 하면 알겠어?"

"지루산? 지리산…이요?"

"그래. 그 산 맞는 것 같아."

라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 년의 세대차를 극복했다는 생각에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생각도 잠시, 그는 다시금 현실을 자각했다. 그럼 여기서 지리산까지 가야 할 상황이 아닌가. 이 정류장에서 버스를 잡아타고 다시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가서 지리산을 등반하는 여정이라니. 갈수록 태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거기까지 가면 되겠다. 지금 가면 중간에 비가 오거나 해도 한두 달 안에는 도착하겠지?"

"그… 하루 안에 도착할걸요."

"어떻게?"

"요즘은 말(馬) 같은 기계를 타고 달리면 먼 곳도 빨리 도착하거든요."

"세상에."

나라시가 갸웃거리며 도로 끝을 내다보았다. 라원은 그를 뒤로하고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그럼 지리산까지 가는 거죠?"

"그래, 어서어서 가자."

남자는 버스 시간표를 흘끗 보았다. 바야흐로 출발할 때가 오고 있었다.


2022년 5월 15일

심야클럽 회실

보름달 빛이 회실 전체를 은은하게 비추었다.

그 빛까지도 닿지 않는 곳에 지하층이 있다. 그 지하층 가장 끝에 인사부장실이 있었다. 그 속에 윤성재가 앉았다. 그는 볼펜을 쥐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서라원, 그 자에 대한 것이였다.

서라원이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는 알 수 없었다.

윤성재는 서라원이 처음 클럽에 들어왔던 때를 기억했다. 다른 수많은 회원들처럼 교통사고로 죽었고, 직접 그에게 인도되어 클럽까지 도달했던 남자. 그의 능력은 심야클럽에 유용했으나, 그는 바깥에 나가려 하거나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도우려고 하지를 않았다. 게으른 사람의 행동과 닮기는 했어도 완전히 닮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그리고 방금까지 심야클럽의 부장들은 그에게 무언가를 강제하려 들지 않았다. 회원의 자유가 곧 클럽의 행동원리였으니까. 그러나 윤성재는 언제나 그의 잠재력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게으름이 아니라 자신이 게으르거나 무능하다는 틀에 갇혀 있는 것 같았으니까.

회원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 수많은 회원들이 클럽을 스쳐 지나가고 더러는 머물렀다. 이 일도 그런 종류의 일이였고, 이런 인연의 일을 부탁하는 이들은 수십 수백이 넘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어렵다. 찾고자 하는 이가 살았다면 비밀 집단에게 걸릴 것이고 이 경우처럼 죽었다면 그 유령이 존재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윤성재가 이 일을 서라원에게 맡긴 이유가 그것이였다. 그가 알지도 못하는 자를 찾아 떠나서, 실패해도 성공해도 결국은 그가 찾아나서서 일궈낸 것이 아닌가. 인사부장은 서라원이든 나라시든 심야클럽의 일원으로 결속시킬 의무가 있었다.

나아간 이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더 강해진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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