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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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흙바람이 몰아친다.

그 모든 것을 뚫고 나는 솟아오른다. 시퍼런 하늘을 단 한 번에 찌르는 나의 검신(劍身)이 금빛으로 번쩍인다. 나를 쥔 이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느껴진다. 쾌활한 음성이다. 왕, 이제 영영 사라져버린 나라의 위대한 왕.

왕을 찾아야 해.

이 잡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돌아가는 거야.


2022년 5월 15일

지리산

등산은 힘겨웠다.

단지 육체가 있고, 호흡하며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만 지치는 것이 아니다. 으레 산을 오르는 것이란 보편적 물리 법칙에 극복하려는 것이 첫째요, 흄 준위가 폭압적으로 높은 상황에 저항하는 것이 둘째다. 둘의 경우 두 번째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유령이란 의외로 환경에 민감하니까.

사실, 한 명만 힘들어 보이기는 했다만.

"……더 이상 못 가겠어요. 잠시만. 잠시만…."

서라원은 여간 힘들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몇 미터 움직이다 또 그늘에 기대 서기를 반복했다. 반면 나라시는 한번 쉬지도 않고 도시의 평지를 움직이는 것처럼 여유롭게 거친 산을 누볐다. 그만큼 그녀가 강력한 귀신인 건지, 아니면 거친 지리산의 환경에 특화된 존재인지는 그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목적지까지 가는데 한 달 걸리겠어. 어서 와!"

"등산로도 아니고……. 무슨 샛길에다 산길으로 다니니까 그렇죠… 한번 더 죽겠네."

"여기로 가자고 한 것은 너잖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감히 등산로를 돌아다녔다가는 순식간에 재단 같은 자들이 튀어나와 총을 쏘아대기 십상이니까. 이래서 일부러 외지고도 인적 없는 길을 통해 목적지로 가려고 계획했건만 결국은 또 다른 수난을 견뎌야 했던 것이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

"북동쪽으로 한 4리 정도."

"아직도 한참이네…"

라원은 이마를 짚으며 나무 그루터기에 기대어 섰다.

숲 속은 고요했다. 나무들이 햇빛을 가리며 울창한 가지를 드리웠고, 땅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꼈으며 이름 모를 짐승이 날카롭고 반복적으로 울고 있었다. 빌딩 숲과는 전혀 다른 세상, 혹은 어디 멀리 있다는 다른 나라처럼 느껴지는 정경이었다. 라원은 연신 색색거리면서도 자신을 둘러싼 검푸른 녹색으로 이루어진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거대한 자연 속에 있다는 것은 낯설고 두려운 느낌을 주었다. 그의 감정이 묘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대자연의 시선이 그에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시선?

…왜?

그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몸을 타거나 통과하여 흐르는 바람의 기척이 느껴졌고, 바람 소리에 알 수 없는 소음이 섞여 있었다. 설마 재단이나 연합이 매복했나? 그렇다면 굳이 지금 공격하지 않은 거지? 오만 가지 생각과 추측이 머릿속에서 요동쳤다. 그는 나라시 쪽으로 더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보지 못했는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라원은 돌 하나를 들어올린 채 사방을 경계했다.

그때. 일말의 찢어지는 듯한 괴성과 함께 무언가가 산 위쪽으로부터 구르듯이 달려왔다.

—키에에에!

대략 대형견 정도 되어 보이는 크기에 황록색 껍데기를 두른 딱정벌레. 놈은 세 쌍의 턱을 발작적으로 움직였다. 그 칼 같은 부속지가 요란히 금속성의 소리를 냈다. 그 짐승이 곧 나라시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서 피하세요!"

그러나 나라시는 도망치거나 숨으려 들지 않았다. 도리어 라원에게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라원은, 그쪽으로 뛰어가야 하나 물러서야 하나 두 갈림길의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의 뒤에서 아까와 똑같은 시선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어라.'

뒤로부터 또 다른 벌레의 턱이 그를 관통했다. 날카로운 것이 그의 등을 뚫고 배로 나왔다. 그는 잠시나마 까무러칠 듯이 놀랐지만 자신이 유령인 것을 자각하고는 다시금 냉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코웃음까지 쳐졌다. 이 벌레들은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별조차 하지 못하는 걸까. 라원은 뒤로 조용히 물러섰다. 그를 뚫었던 턱이 물을 베는 칼처럼 가볍게 뽑혀나갔다.

라원은 허둥대는 버러지를 뒤로하고 거리낄 것 없이 나라시 쪽으로 뛰어갔다. 혹시나 나라시는 자기 같은 유령과 다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혹시나 다르다면 얼마나 심각한 일이….

"…..뭐야."

벌레 두 마리가 눈에서 녹색 빛을 터뜨리며 쓰러졌다. 한 벌레는 쓰러지자마자 인력에 따라 가파른 산길 아래로 거칠게 추락하여, 흙먼지와 굉음으로 분해되었다. 언제였는지, 다른 버러지들 몇이 나타나 저편에서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난장판의 중심에 소녀가 있었다.

나라시의 옷감 말단에 달린 조각들이 녹색 빛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동안의 조용한 긴장 속에서 그녀의 손이 합장과 기도 어느 중간에 있는 기묘한 동작을 수행했으며, 그 손가락과 손아귀의 형태가 복잡한 녹색의 동작을 그려냈다. 그것을 본 버러지들마다 끓는 듯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거나, 몸을 질질 끌며 도망치려고 애썼다.

"아직도 이런 것들이 날뛰는구나."

나라시는 동작을 그만두고 손을 탈탈 털었다. 형광빛의 녹색 가루가 손에서 떨어져 수천의 날벌레처럼 멀리 흩어져 갔다. 라원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방금 뭘 한 거에요?"

"내 옷에 이 반짝이는 것들 있지. 신(神)의 힘을 담은 것들이라 생각해."

라원은 제 앞에 선 이가 과연 고대의 존재라는 것을 체감했다. 저 정도로 강대한 능력을 쓴다는 자들은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지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자신이 동행자이지 적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너는 이미 죽었으니, 이게 해를 끼치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아…. 네. 다행이네요."

나라시는 고개를 으쓱해 보였다. 그때, 그녀는 무언가를 감지하고는 목적지 쪽을 노려보았다. 검붉은 눈빛이 어느 쪽을 유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허공에 풀려난 가루의 빛들이, 춤추듯이 나풀거리면서 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목적지는, 곧 그들의 목적지 방향이었다.

"우와…"

반딧불들을 연상케 하는 우아한 광경에 라원은 나지막한 감탄사를 흘렸다. 저마다 곱거나 거친 가루가 바람에 따라 이래저래 흔들리면서도 단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

"저 가루, 우리 목적지로 가는 거 맞죠? 이거 신기하네… 진작에 이거 쓰지, 왜 안 썼어요?"

"어… 그…. 우리는 방향을 알고 있는데 이걸 왜 낭비하겠어? 굳이 쓸 필요가… 음, 없었던 거지."

자기도 몰랐겠구나, 라원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그렇게 말하려 들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서너 배로 피곤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이내 나라시는 신이 났는지 아까보다도 빠르게 걷기 시작했고 라원이 결국에 혼자 남겨지다시피 뒤쳐진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라원은 또다시 걸었다.

여전히 산길에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다행인 점은, 간혹 가다가 튀어나오는 괴이한 버러지들은 나라시가 족족 잡아낸다는 것이다. 물론 웬만한 벌레들은 그에게 어떠한 위협도 주지 못하겠지만, 최소한 등짝이 궤뚫리는 느낌을 받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길을 잃을 일도 없었다. 빛나는 가루며 희생당한 벌레들의 시체 따위가 길잡이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혹시 근방에 유령이 있을까 하며 감각을 통해 주위를 더듬거렸다. 그러나 포착되는 존재는 거의 없었다. 깊은 지리산 숲 속이니만큼 굳이 찾아와 죽은 이도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아무도 모르게 죽어서 이미 소멸되어버린 것일까?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라시가 어떤 지점에서 멈췄다. 이 산길에서도 제법 평탄한 모습을 갖춘 지형이였다. 나무며 덤불이 빽빽히도 자라, 저편에 있는 모든 것을 감추려는 듯이 보였다.

"여기네."

"여기 뭐가 있는데요? 풀 뿐인데."

나라시가 저 멀리의 산비탈을 가리켰다. 물론 그것도 잡초와 덩굴의 녹색에 덮여 형체를 완벽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나라시는 다가가 제 손으로 풀숲을 헤치고 감추어졌던 벽을 들추어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인간의 흔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굴에 붙은 인위적인 장식들. 라원은 그것이 꼭 어느 책에서나 보던 옛날 무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혹시… 이거 무덤 같은 거예요? 고분(古墳) 같은 거."

"정답이야. 이제 여기로 들어가야겠는데…."

문은 커녕 들어갈 수 있는 구멍도 덮였는지 아예 없는지, 전혀 보이지를 않았다. 라원이 다가가 어림잡아 문으로 보이는 곳마다 두드려도 보았지만 둔탁한 소리만이 울릴 따름이였다.

"그렇게 해서는 못 열 거라네. 잘 보게나."

나라시가 벽 앞에 바짝 다가서더니, 헛기침을 하며 목을 다듬었다. 그리고는 어떠한 말을 내뱉었다.

—지뵈 바회 ᄀᆞᅀᅢ 자ᄇᆞ온손 암쇼 노히시고, 나ᄅᆞᆯ 안디 붓그리샤ᄃᆞᆫ 고ᄌᆞᆯ 것거 바도림다.

라원으로서는 반의 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이 끝났다. 라원은 반쯤 웃으면서 예전에나 들었던 알리바바와 사십인의 도적 이야기를 떠올렸다. 무슨 토굴이 주문을 듣고 열린다는 말인가. 그 철저히 상식적인 생각은, 정말 진동과 함께 무덤의 문이 열리면서 끝이 났다.

"이…. 이게 뭐에요? 무슨 알리바바에요?"

"그건 또 뭔가?"

나라시가 그 안으로 발을 들이밀며 말했다.

"어쨌거나 따라오게. 여기 왕이 있을 가능성이 크니."

라원 또한 얼떨결에 무덤의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그 무덤은 돌을 쌓았던지 아니면 벽을 파냈는지, 소름끼치는 장소라기보다는 신비한 고대 유적의 한 종류와 더 닮아 있었다. 벽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을 묘사한 벽화들이며, 새겨넣은 한자와 알 수 없는 글들이 여럿 쓰여 있었다.

"왕은? 느껴져?"

"어… 아직요. 더 들어가볼게요."

"그래. 난 여기서 기다릴테니."

나라시는 쓰여 있는 글들을 읽으려는지 멈춰 섰고, 라원은 벽을 더듬으며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그의 발에 무언가 채였다. 그는 돌 조각일까 하고 집어들었다. 놀랍게도 손에 쥐인 것은 도자기 같은 유물 그릇이였다.


위대하신 왕이시여, 인간을 넘어선 이, 하밀타왕이시여. 뭇 신들이 보고 계시는 이 자리까지, 산신이 축복하시는 이곳까지 내려오시라.

산신이 굴을 지키시나니….


"오…. 이게 뭐야."

라원은 그릇을 두 손으로 쥐고 이곳저곳 훑어보았다. 낡디낡았지만 제법 고풍스러운 멋이 느껴지는 그야말로 유물이였다. 그의 눈에 탐심이 그림자처럼 어렸다.

'이거 마셜카터에 팔아 넘기면 돈깨나 받겠는데?'

라원은 그것을 어디다 숨기려 했지만, 자신이 정상적인 옷가지나 가방은 커녕 몸뚱아리조차 가지지 못했음을 깨닫고 잠시 절망했다. 그러던 그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쳤다. 그는 망령의 몸체를 일그러트리고, 작은 유물을 그 품 속에 넣었다.

"미쳤어? 왕을 찾으랬더니, 한다는 짓이 도적질이야?"

나라시가 달려와 그의 등짝을 후려갈김으로써, 그의 작은 일탈은 끝이 났다. 그는 두 번째 공격을 피하려고 손사래를 치려다가 그만 제 몸을 조작하는 것을 잊어버렸고, 유물은 수직으로 낙하하여 바닥과 충돌했다.

—쨍그랑.

투박하게 금이 가더니 완파되는 소리가 고요한 무덤을 울렸다. 나라시의 얼굴은 이내 창백해진 상태였다.

"….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그리고, 무덤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웅장하고도 거대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잡귀들이 감히 이곳을 범하려고 드느냐!


이곳은 당신조차도 꺼리던 곳이였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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