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기다리는 밝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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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잡귀들이 감히 이곳을 범하려고 드느냐!

갑자기 들려오는 거대한 소리에, 둘은 불시에 얼어붙었다. 라원은 몇 초간 자신이 이름을 아는 모든 신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짓을 무효로 해 주십사 간절히 빌었다. 나라시 또한 창백한 얼굴이 더 핏기 없이 시허옇게 질린 모양이였다.

나는 이 산의 산신이며, 이 땅을 지키는 자이다. 잡귀에다 피를 먹고 태어난 기물이라니. 이 신령한 곳까지 들어왔으니 통탄을 금할 수 없구나.

"세상에나…"

나라시가 서라원을 한번 쏘아보고는 공손히 엎드렸다. 라원 또한 상황을 파악하고는 잽싸게 엎드려, 차마 앞을 보지도 못하고 혼나는 아이처럼 바닥만 바라보았다.

"당신이 정말 이곳의 산신이란 말입니까? 죄, 죄송합니다. 이 자의 심성과 덕이 모자란지라 이런 죄를 범하였나이다. 모쪼록 자비를 베푸시어……."

그 말에 라원은 자연히 몸을 움츠렸다. 라원이야 어쨌거나 나라시의 필사적인 사죄에 화가 풀렸는지, 알 수 없는 목소리의 노기(怒氣)가 조금이나마 가라앉은 듯이 보였다.

이곳까지 들어오다니 무슨 일인가? 만일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다음 기회는 없을 것이다.

"저는 하밀타국의 나라시, 생령의 검이온데 본국의 왕을 찾아 이곳에 왔나이다. 그러하니 청컨대 저를 가엾이 여겨 왕이 이곳에 있는지 알려주시옵소서."

목소리가 몇 초간 침묵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이곳에 왕은 없다.

"….예?"

나도 왕을 잘 알고는 있으나, 이곳에는 아주 오랫동안 오지를 않았지.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다.

나라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라원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그녀의 얼굴 표정을 살피려 했지만, 시야가 닿지를 않았다. 나라시의 천옷에 붙은 발광하는 것들이, 주인의 감정을 대변하듯이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다. 서라원은 아주 오랜만에, 무언가가 목끝에서 차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걱정, 그리움, 분노. 알 수 없었다. 라원은 나라시와 그 정도로 친숙하지도 않은데. 웬 불필요한 공감이란 말인가.

"…..왕이 여기에 없다고 하셨죠."

라원이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읊조렸다. 옆에 있던 나라시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잡귀가 참으로 맹랑하구나.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왕이 어디 계신지는 알고 계십니까?"

나라시가 뭐라 말하려고 했으나, 다시 큰 소리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라원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짐작 가는 곳은 몇 군데 있지.


고통. 걱정. 그리움.

몇십 년 동안 강령술사 잡배들에게 이용당했다. 누군가를 베고, 베고, 베고, 죽이라는 명령. 마법이 섞인 지령은 목에 겨누인 검처럼 도저히 거부할 수 없던 것이였다. 그렇게 말의 족쇄가 채워진 채로 머나먼 사막의 길을 건너고 이역만리까지 닿았다. 그곳에서 그를 만난 것이다.

왕은 대인(大人)이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풍채를 지닌 사람. 그 사람이 나를 나라시, 나라시라고 불렀다. 그러면 나는 참 기분이 좋았던 것만 같다. 바람이 나를 부르고, 나의 머리칼을 스치는 기분.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라시는 나를 지배하려 들었던 자들이 붙인 이름인데.

나는 어둔 곳에 들어갔고, 그동안 왕은 사라졌다. 잡귀들이 와서 나를 깨웠던 그 순간부터 나는 왕을 찾을 방법을 생각했다. 크리고 결론을 냈다. 나는 도저히 답을 모른다. 답을 깨달을 수 없었다.

누가 내게 답을 알려 다오.


해가 떠오르고 있었지만 울창한 숲은 여전히 음습했다. 도롱뇽이 바위 새로 지나갔고 밤새가 마지막 긴 울음을 울며 나무 사이사이를 스쳤다.

"그래도 다음 목적지가 있잖아요. 힘을 좀 내 보죠. 그 신이라는 양반, 되게 째째하게 구네요."

"그런 말 하지 마. 벌 받는다…"

다시 둘은 산을 걸었다. 이번에는 내려오는 길이였다. 나라시는 영 지쳤는지, 아니면 방금 일에 절망했는지 도통 올라올 때만큼의 힘을 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라원은 눈치를 살피며 어떻게든 기운을 좀 내 보려고 애썼다. 자신도 모르게, 나라시가 포기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생겨났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음은 물론, 다시 지워버리려 애썼다.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나라시. 왕은 어떤 사람이였어요?"

"야, 밤에 말했잖아! 키 크고….."

"그것 말고 됨됨이 말예요. 당신한테 얼마나 잘해줬기에 이렇게 찾으시나 싶어서."

나라시는 곰곰히 생각해보려는지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대인(大人)이였지. 왕에 걸맞는 사람. 따를 만한 사람. 내 주인에 걸맞는 사람."

라원은 곁눈질로 그 표정을 살폈다.

"나를 하늘 높이 들어올릴 때면 꿈길을 걷는 것 같았지."

"…..행복했겠네요."

"그렇지. 내 예전 삶은 잘 기억도 나지가 않거든. 이렇게 되고 나서 왕을 만나기 전엔 끔찍한 일들 뿐이였고.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내게 의미 있는 날들은 오직 왕과 함께 했던 날 같아."

그 말을 듣고도 라원은 알 수 없었다. 나라시는 대화 중 왕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해주었냐를 교묘하게 숨기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서라원을 속이려는 것은 아니였다. 굳이 따지자면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불운한 과거 속 유일하게 돋보이는 일들을 우상으로 삼는 것일까.

라원은 알 수가 없었다.

"나라시. 예전 삶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죠?"

"응. 거의…. 그렇지? 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기억은 난데없으니까. 어떤 곳에서, 어떤 계집아이가 흘린 피가 나에게 흘러들어가고…. 그 이전은 모르겠어."

"그 여자애는 누군데요?"

"몰라."

나라시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저 어디서 풀숲이 파도치는 소리만 고요하게 울었다. 나라시는 입술을 깨물었고, 아주 후에서야 입이 열렸다.

"…..서라원."

침묵을 뚫고 나라시가 말을 꺼냈다.

"넌 소중한 것을 잃어본 적이 없겠지? 어리니까."

"……저도 나이 깨나 먹었어요.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한 칠십 살은 먹었나?"

"완전 애네."

복잡함을 좀 잊었던지, 나라시는 가벼운 웃음을 키득거렸다.

"소중한 것을 잃었다라….. 제가 어렸을 때 큰형이 죽었어요."

라원은 나뭇가지로 뒤덮인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푸른 바람을 타고 이름 모를 짐승이 저 위에서 맴을 돌고 있었다. 휘파람 같은 소리가 길게 울었다.

"저는 펑펑 울었죠. 왜 형이 죽어야 했을까, 저는 정말 몰랐거든요. 고작 꼬마가 정치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냥 형이 살아나기를 빌면서 펑펑 울었어요."

라원은 걸었다.

"좀 머리가 커져야 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저항할 수가 없구나, 하고요. 제가 죽어 없어져도 세상은 매몰차게 돌아가더라고요."

이름 모를 짐승이 저 위에서 맴을 돌고 있었다. 휘파람 같은 소리가 길게 울었다. 소리가, 울리면서, 라원을 휘감았다. 라원의 상실감 찬 목소리가 휘었다.

"그러니까….. 나라시, 또 제 말 안 듣고 있죠."

"잠시만."

나라시의 두 눈이 어딘가를 맹렬히 쏘아보았다. 위였다. 위로부터 어떤 형체가 추락하는 듯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나라시가 옷을 털자 녹색 가루가 맹렬히 일어났다.

"서라원."

그리고 공간이 찢어졌다.

"도망가."


서라원.

서라원, 너는 왜 저 꼬마를 따라나선 거지?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않았잖아?

그것은….


—잡았다.

누군가가 킬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원은, 숲 한복판 공중에 떠 있었다. 공간 자체가 일그러져 거미줄처럼 그를 묶고 있었다. 유령이라고 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정교한 감옥. 라원은 슬며시 눈을 떴다. 언제 기절했던 걸까. 이 그물은 무엇일까. 나라시는 어디 있는 걸까. 라원은 도통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유령을 잡았다.

—신의 힘은?

—느껴지지 않아.

공간 위에서 거대한 거미 몇 마리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들의 면상은 하나같이 인간 노파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라시는 등산할 적 보았던 버러지들을 생각했다. 이 놈들도 동류구나. 제비꽃의 벌레들이야.

—머저리 같은 것들이!

그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금빛의 거미가 다른 것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호통을 들은 거미들은 라원을 스치고 밑으로 도망쳐 내려갔다. 금색 거미가 날선 앞다리를 들어, 그를 끌어올렸다.

—신의 힘은 녹색 가루를 단 계집이라고 몇 번 말하더냐! 쓸모없는 잡귀를 잡아 무엇하게!

거미가 큰 아가리를 벌렸다.

—이런 잡것은 마셔버린 후에 생각해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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