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박사에 대한 징계 근거 보고서 부록01 (수정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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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월 ██일 ██시 ██분

멍청한 인간이다.

아, 여기서는 인간이다 뭐다 그런 표현을 쓰면 안 되지.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몇 십번이고 세뇌당한 이야기지만 여전히 재단이 격리하고 보호하는 개체들을 그저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하라는 말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적어도 내 앞의 모니터에서 상담을 받고 있는 저 선인장맨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느껴질 뿐이다.

다만 자신이 히어로물에 나오는 영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특이할 뿐이다. 얼마나 유치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인가? 그런 이야기는 5살쯤에 자기가 되고 싶은 직업이라며 유치원에 걸어놓는 장식물 같은 것이다. 유치찬란한 꿈을 저 나이 되도록 가지고 있어서 나온 결과물? 바로 저거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기록이 맞다면 저 사람은 누구 하나 제대로 구한 적도 없으며 오히려 민폐만 끼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의 불쌍한 영웅이시다. 적어도 스파이디나 로어셰크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지금도 그래, 자칭 선인장맨은 자신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악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며 입씨름을 하고 있겠지만 본인은 여전히 자각하지 못 하고 있는걸까? 자신이 여기서 절대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재단은 그러한 장소라는 것을…… 인류와 다른 당신은 누군가의 눈으로 봤을 땐 그저 설명할 수 없는 공포이기에 당신은 그 능력이 사라지거나 물을 마시지 못 해 죽을 때까지 여기서 온갖 실험을 당하겠지.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알고 있긴 한 건지, 상담을 마치고 나가는 박사에게 곤란한 일이 있으면 자신을 부르라는 징그러운 소리나 하고 앉아 있다.

20██년 ██월 █일 ██시 ██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오늘 오후까지의 일이었다. SCP-2800의 보고서를 작성하다가 문득 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5살까지 저런 유치한 꿈을 꿨던가? 내가 저런 유치한 영웅놀이가 이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며 어떤 영향도 주질 못 한다는 것을 언제 깨달았던가? 내 부모님은 그런 꿈을 얘기할 때 웃으셨던가? 아니, 입으로는 웃고 계셨어도 눈은 웃질 않았지. 친구들에게 말할 땐 어땠을까? 유치원에 다녔을 때까진 그럭저럭 아이들하고 대화는 할 수 있었지만 높은 학년의 학생이 되었을 때 그런 말을 꺼내자마자 날 등신 취급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아니, 잠깐 그렇게나 내가 영웅에 심취해 있었나? 그럼 그 영웅놀이를 그만둔게 언제였지? 아 그래, 고등학교 때의 일이었다. 참 나, 나도 저 선인장맨을 욕할 처지가 아니었나 보다. 저 인간보다는 못 하지만 그런 이상한 꿈을 그 나이 되도록 품에 안고 살았다니……. 정의로운 인간이 되자, TV속 영웅이 말하던 모토 그대로 난 정의로운 인간이 되길 원했다. 그 때의 나는 그게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세상을 괴롭히는 악의 무리로부터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자. 그 올곧은 마음가짐으로 학교에서 공부하다 집에 가는 길에 난 사람을 죽였다. 아니 죽인 것은 아니지만 뇌사시켰다. 정당방위였다. 칼로 위협하며 어느 여자에게서 돈을 갈취하려던 강도의 주의를 끌다가 머리를 옆에 있던 돌로 맞춘 것 말곤 없었다. 정말 그런 것뿐이었는데………

그리고 바로 그 때, B. ██████ 박사가 내 등을 후려치면서 내 생각을 멈추게 하더라. 젠장, 더럽게 아프네! 잘 보니 그 때 그 놈하고 닮은 것 같기도 하고…….

20██년 ██월 █일 ██시 ██분

갑작스런 이야기지만 난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아니, 좋지 않은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잊는다는 표현이 맞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안 하면 된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정말로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던가? 하지만 내 경우엔 그 정도가 심한 편이란 생각이 든다. 오죽하면 나보고 새로운 미스터 시리즈냐고 주변 동료들이 놀릴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그 때 있었던 일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보통 때라면 그런 싫은 기억 일부러 들춰내는 짓거리는 하지 않지만, 그 선인장맨의 활동기록 중 그나마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라고 보일 영상을 보게 되니 찾고 싶어졌다.

그의 만족스러워 하는 표정. 그에게 도움을 받은 여인의 안도하는 표정과 TV에서나 보던 영웅을 실제로 보게 되어 기쁜지 들뜬 표정의 아이. 그 당시의 나도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사적인 일로 이런 단순한 검색도 해선 안 되지만 오늘은 다행히도 그 망할 B. ██████ 박사가 보이질 않는다. 엉뚱한 핑계로 자리를 비운다고 했지만 또 어디 가서 변태짓거리를 하고 있겠지. 그 사람 약간 관음증이 있는 것 같으니깐.

20██년 ██월 ██일 ██시 ██분

기분이 좀 울적해져서 늘 쓰던 일기도 며칠 째 쓰질 않게 되었다.

글쎄, 그 때 찾았던 내가 일으킨 사건의 공판이…….. 누구라도 잊고 싶어할만한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래서 있는 힘껏 잊으려고 했던 거고 그걸 기억속에서 완전히 소거시킨 덕분에 이렇게 SCP재단의 연구원으로써 있던건데……. 왜 난 그 기록을 다시 보게 된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단순 살인범이 될 수도 있었다. 골목을 지나가다가 갑작스런 충동으로 인해 지나가던 사람의 둔부를 가격하여 뇌사시킨 정신나간 학생이라고 나온 신문 기사가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 그 때 분명 여자를 위협하던 악당을 때려눕혔으니깐 그 여자가 대신 증언해주면 됐잖아. 근데 내가 왜 이런 식으로 알려지게 된 걸까? 믿을 수 없기에 그 당시 공판기록을 찾아봤다. 거기엔 그 여자도 재판에 증인으로써 참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골목길에는 CCTV 같은 기기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유일한 증인으로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날 정신병자로 지목하였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악당의 가족으로부터 돈을 받은 건가? 아니면 저 악당이 중요한 사람인가?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기에 나는 그 여자의 증언에 대해 제대로 된 답변도 하지 못 하고 내려왔고 그 재판이 끝나고 나서 내 사생활에 대한 것부터 학교에서 어떤 학생인지 평소에 뭘 하는지 등 내 모든 것을 신문을 통해 대서특필로 나왔다. 그리고 저명하신 심리학자라는 사람이 내가 영웅으로 있고 싶어하던 심리가 만족을 못 하자 그 반대 심리가 강해져서 이와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는 지금 생각하면 개소리만도 못 한 말로 날 판단하고 있더라.

그리고 그 재판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증인으로 나온 여자가 누군지 알려지자마자 언론은 다시 의구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남자는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며 어느 정부 기관의 중요한 사람도 아니었다. 대기업의 사장도 아니며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다. 여자의 아들이었을 뿐이었다. 자기 부모가 돈을 잘 안 준다고 지 어머니한테 칼을 들이밀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짓거리지. 게다가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그 당시 현장증거에서도, 그 사람이 쓰던 흉기도 다 조사하면 나쁜 건 내가 아니라 그 놈이란 것은 명백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정의의 편에 섰던 내가 아닌 이 여자의 말만 듣고 그런 상황으로 몰아간 것일까? 사람들은 내 정의보다도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한 것일까? 평범한 강도보다는 더 독특한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일까? 더 악랄하고 더 잔인한……. 악당을 원한걸까?

그 후로 영웅이 되기를 포기했다. 영웅이 되어봐야 사람들은 알아주질 않는다. 그저 괴짜 아니면 공포의 대상으로 볼 뿐이다. 지금 내가 보고서로 쓰고 있는 그 선인장맨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젠 SCP-2800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건………….

20██년 ██월 ██일 ██시 ██분

오랜만에 다시 일기에 손을 대본다. 역시 모르는 게 약이라던 옛말이 틀린 게 없구나. 덕분에 어제까지 내야했던 보고서도 제대로 쓰지 못 하고 B.██████ 박사한테 엄청 뭐라고 들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나가든가 D계급 인원들하고 놀라나? 그 D계급 인원들을 훔쳐보는 사람이 누군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거지.

오늘 오전에 다시 그 선인장맨을 봤다. 여전히 그것은 얼빵한 표정으로 자신이 처리해야 할 악의 무리를 타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의 표정은 정말…….. 순진무구 그 자체인 것 같다. 나도 한 때는 저런 표정을 지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런 시시한 정의보다는 자극적인 악을 원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재단이 생겨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악을 미리 막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물론 모조리 다 악한 것들은 아니겠지만.

일 못 한다고 구박받고 자주 딴 생각을 한다고 뭐라 듣는 나에게도 휴가가 내려졌다. 이 재단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난 뒤에 받는 첫 휴가다. 며칠 전만해도 들뜨고 신났는데, 아무래도 저 선인장맨 때문에 기분이 많이 다운되었다. 다시 잊으면 된다. 인간이란 망각의 동물이며 나같은 경우에는 그 정도가 엄청 심한 사람이니깐.

내가 한 때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했던 것도, 그 정의를 행하다가 일어났던 사건도, 법정 앞에서 증인으로 나왔던 그 여자의 한이 서린 눈초리도 다 잊으면 될 뿐이다. 내일 모든 걸 다 잊고 평범한 사람이 되는거야.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지. 난 영웅따위가 아니야. 그렇게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아.

이상, 20██년 ██월 ██일에 교통사고로 사망1한 ██████ 연구원의 개인 일지에 나와있듯이 B.██████박사의 D계급 인원에 대한 희롱과 도촬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B.██████ 박사에겐 징계를 가할 것이며 해당 SCP-2800의 담당 연구원은 ███ ████ 박사로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쓸데없는 주석은 삭제하고 다시 작성하여 제출하십시오.” - █████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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