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빵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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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karoff 2021/7/05 (월) 20:15:47 #72416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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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우크라이나의 초르노빌에 관광 갔을 때의 이야기다. 결국 뭘 본 건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들어줬으면 좋겠다. 언제쯤이었을까, 일에 익숙해져서 휴가 때 여행을 갈 만한 여유가 생겨서 좀 장난치고 다닐 무렵이다.

약간의 취미와 실익을 겸해서, 우크라이나에서 일하던 김에 여행을 다녀왔다. 사실 프리피야티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어서, 관광투어라던가, 허가를 받아내면 모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거든.

자기책임이라는 편리한 말과 간단한 사인이 더해지면, 꿈 같은 폐허의 거리가 펼쳐진다. 초르노빌의 오염으로 사람이 살지 않게 된 지 수십년, 오염이 다소 감쇠해서 안전범위에 들게 된 장소들은 전세계의 폐허덕후나 성지순례자에게 훌륭한 인기 스폿이 되었고, 가이드까지 딸린 탐험투어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나는 현지 출신의 지인을 가이드로 대동하고, 허가를 받아 창작 재료를 찾기 위해 이 동네를 방문했다.

karkaroff 2021/7/05 (월) 20:25:55 #72416532


지금의 프리피야티는 자연과 인공물이 뒤섞인, 천연의 테마파크 같은 곳이다.
기본적으로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동네에 녹색이 침식한 학교였던 것, 진료소였던 것 같은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이 남아있는 폐허군이 쭉 계속되어서, 포스트아포칼립스적으로 파격적인 분위기를 항상 즐길 수 있다.

들개나 소동물들이 있어서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하고, 무허가 스탈케르(Stalker)들과 트러블이 붙을 수도 있기 때문에, 안전한 관광지를 한가로이 둘러보고 싶다는 니즈에는 부응할 수 없지만, 호위 겸 가이드를 고용하고 대책을 세운 뒤 관광한다면 약간의 스릴에 모험심이 꿈틀거리는 멋진 여행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karkaroff 2021/7/05 (월) 20:35:13 #72416532


아무튼 간에.

그 날 나는 가이드를 데리고, 폐허와 녹색으로 덮인 노스탤지어의 거리를 방문했다. 들개 대책용 총을 등에 메고, 가이드를 데리고, 뭔가 창작의 씨앗을 찾아 모험을 한다는, 신바람이 나는 기분이었다.

거기는 여기는 이런 동네였다. 당시에는 이런 사람들이 살았다. 그런 이야기를 가이드에게 들으면서, 마치 인류가 사라진 후를 상징하는 것 같은 거리를 걸어다녔다. 무슨무슨 게임처럼 변칙성이라던가 초상현상이 일어나면 더 즐거운 일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거리에 들어서 얼마나 지났을 때였을까……

아마 최초의 예조는 2시간쯤 지난 무렵이었다. 익숙해진 가이드의 관광안내를 들으면서 동네를 거닐다가, 조금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짤랑짤랑 하는 방울소리와, 문을 여닫는 소리 같았는데, 곧이어 누군가들이 굉장히 사이좋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귀끝에 걸렸다.

「빵 하나 줘, 검은 빵으로!」

「이런 구두쇠 같으니, 술 말고 빵에 돈을 좀 쓰시죠」

그런 느낌의 러시아어 또는 우크라이나어 대화였다. 잘 생각해 보니, 사람이 더이상 살지 못하는 오염된 구역의 한복판, 베이스캠프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왜 그런 장소에서 빵가게 같은 걸 하고 있겠어?

karkaroff 2021/7/05 (월) 20:44:44 #72416532


위화감밖에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에 나는 마음이 동했는데, 가이드 놈은 그걸 눈치채는 기색은 전혀 없고, 점심을 먹기에 딱 좋은 주차장 폐허가 있다면서 껑충껑충 앞으로만 걸어갔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가이드가 걸어가는 방향과 반대쪽이었고, 정체를 확인하러 가려면 가이드를 두고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호기심을 이길 수가 없었다.

주머니에 넣어온 가이거 계수기를 손에 들고, 나는 느려진 척 가이드와 갈라졌다. 다행히 예전에 했던 게임이나, 가방에 넣어둔 지도 덕분에 그 주차장의 위치는 알고 있으니, 조금만 들여다 보고 합류하면 괜찮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담쟁이를 비롯한 녹색으로 뒤덮인 파편들과 무너지다 만 건물들을 억지로 헤쳐나가서 목소리를 되짚어 갔더니, 기묘한 모퉁이에 도달했다. 그곳은…… 기묘한 장소였다.

karkaroff 2021/7/05 (월) 20:55:44 #72416532


그곳만 마치 지금도 사람이 사는 것처럼 유리가 남아 있고, 나무문이 붙은 예쁜 건물들이 여러 채 늘어서 있는 곳이 나왔다. 그 모퉁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여전히 세계가 멸망한 것 같은 광경이 계속되어서, 마치 이계와도 같았다. 다행히 목소리는 계속 들리고 있었고, 늘어선 건물 중 하나에서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그만큼 시끄러운 목소리였다는 점도 있겠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나는 그 “점포”에 살그머니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건물 안은 카운터에 저울과 바구니가 늘어서서 마치 빵집 같았다.

다만 기묘한 것은, 가게와 같은 인테리어인데 상품은 일체 없고, 무표정하게 가게 카운터 너머에 서 있는 남녀 두 명만, 마치 마네킹처럼 무표정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푸콘 가족이었나? 마네킹들이 경쾌하게 말하는 코미디가 있었지 않아? 그것을 현실에서 보는 느낌이었다.

다만 푸콘 가족보다 몇 배는 기분나쁘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 무표정이 살아 있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데도, 입만은 웅변하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식은땀이 화끈하게 솟아나오고, 황급히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달리기 시작하고 뒤를 돌아봤더니, 주변의 건물, 폐허에서 마찬가지로 무표정인 사람의 그림자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거다.

아, 죽는다 이거는.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누구나 할 거 없이 지금과는 다른 소련 시절 복장을 하고 있었고, 탐험을 위해 전신장비를 감싸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를 모든 그늘에서, 가게 앞에서, 뒷골목에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한심한 비명을 지르고 무아지경으로 달아났다. 방사능 오염 따위 따질 여유도 없어서, 가이거 계수기에 눈길도 주지 않고 그저 달리는 대로 무작정 길을 휘저으며 달렸다.

karkaroff 2021/7/05 (월) 21:00:00 #72416532


결국, 어디를 어떻게 뛰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주위가 새까맣게 컴컴했고, 어둠 속에서 나 혼자 동네에 남겨져 있었다. 주변은 다시 인기척이라곤 없는 폐허의 거리가 되어 있었다. 구조요청을 위한 신호탄을 쏘고, 관리조합 사람들이 도와주러 올 때까지 덜덜 혼자 떨고 있었다.

그 후, 나는 관리조합에 보호되고 있다가, 가이드해준 지인에게 엄청 혼나고, 고생한 만큼 제대로 저녁식사를 얻어먹은 끝에 비싼 술을 실컷 마셨다,

결국, 휴가용으로 특별한 신(神)아 가득한 지갑을 가볍게 하면서 휴가를 마칠 판이었다.

결국, 나를 쳐다보던 그 무표정한 사람들이 무엇이었는지, 그 빵집이 있던 모퉁이가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아는 것이 몇 가지 있긴 하다.

첫째, 진로를 막아서는 놈 하나에게 22구경 총탄을 정면으로 박아 줬는데,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단지 가만히, 꼼짝 않고, 표정도 바꾸지 않고,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그 시커먼 눈으로, 나를 가만히, 그저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둘째, 그 동네에서는 지금도 정기적으로 돌아오지 않는 놈들이 생긴다. 스탈케르와의 실랑이에 연루되었거나, 범죄 피해를 당했거나, 사고를 당했다거나, 여러 가지 듣게 되기 마련이다. 개중에 몇몇은 놈들에게 쳐다봄 당하고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다.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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