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

대충 빗은 티가 나는 헝클어진 검은 머리, 게슴츠레하게 반만 뜬 눈,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벽에 기대서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그 자세까지. 아무리 봐도 그것은 제이미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제이미는 우두커니 중앙 홀 맞은편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저 멍할 따름이었다. 또 다른 제이미가 고개를 천천히 이쪽으로 돌리더니 그와 눈이 마주쳤다. 상대방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더니 고개를 들고 그에게 무어라 말하려고…….

“제이미!”

화들짝 놀란 제이미가 뒤를 바라볼 틈도 없이, 묵직한 힘이 그를 앞으로 밀어냈다. 뒤를 돌아보자, 적갈색 머리를 한 쪽으로 땋아 내린 호리호리한 여성이 매달려서 허리를 한껏 졸라대고 있었다. '우리 기지의 자랑'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불려지는 웃음을 한껏 뽐내면서, 그녀는 군인이 경례라도 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우렁차게 외쳤다. 환영 인사치곤 과했다.

“임무는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까, 대장!”

“펠릭스, 잠깐, 잠깐만!”

제이미는 영문을 모르는 펠릭스를 어렵사리 떼어놓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자신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제이미가 뒤편을 계속해서 응시하자, 펠릭스가 고개를 빼고 중앙 홀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하는 거야? 뒤에 뭐가 있어?”

제이미는 자신이 피곤에 못 이겨 환상을 본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근래 들어 출동할 일이 잦았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그는 지금도 커피로 간신히 깨어있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도까지는…… 그는 방금 전에 본 것에 대해서는 펠릭스가 혹여 걱정할까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어…… 아냐. 아무 것도. 잘못 봤나 봐.”

“뭘 봤길래 환영 인사도 무시하고 그렇게 멍청한 표정으로─”

“환영 인사하는데 설마 아무 것도 빈손으로 온 건 아니겠지?”

제이미는 잽싸게 말을 돌렸다. 펠릭스가 제이미를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눈알을 굴리며 손을 들었다.

“날 너무 만만하게 보지 말아주셔, 아저씨. 이번에도, 자.”

펠릭스는 주머니에서 토마토 한 덩이를 꺼내 제이미에게 건넸다. 제이미는 반색하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토마토는 그의 손에서 회전하며 신속하게 평가된 뒤 잽싸게 주머니로 들어갔다. 펠릭스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매번 질리지도 않아? 저게 뭐가 그렇게 맛있다고.”

“먹어보지 못한 자 말하지도 말라.”

“네가 나한테 억지로 먹인 토마토 요리만 해도 수십 가지가 될 거다.”

펠릭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이죽거리자, 제이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둘은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지 못한 빠른 재회를 즐겼다. 걷는 내내 참는 기색을 보이던 펠릭스는 결국 제이미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현장직의 임무가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생각 외로 좀 일찍 돌아온 거네?"

"좀은 무슨. 세 시간 전에 한 삼 개월 나가있는 줄 알고 미친 듯이 놀려댔던 사람이 누군데."

펠릭스는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다.

"어디로 파견 됐어? 뭘 했길래 표정이 그렇게 개떡 같아? 총 쏴봤어? SCP는?"

제이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기지 앞에 파견돼서, 탈주한 D계급 인원들을 진압했는데, 총도 쏴봤고, SCP는 없었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펠릭스는 말문이 막혔다. 펠릭스는 잠시 제이미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사람…… 쐈어?"

제이미는 그녀를 불편하게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겐 이미 익숙한 일이었지만, 마법 지팡이와 유령의 집만 생각하던 신참에게는 너무 무거운 화제였다. 그들 사이에는 잠시 동안 아무 대화도 흐르지 않았다. 펠릭스는 사람을 쏘고 돌아온 소꿉친구와 재단에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 보안 요원 사이의 괴리감에 적잖이 당혹스러워 하는 듯 했다. 급격히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 그녀가 어쩔 줄 몰라하며 바닥만 쳐다보고 있자, 보다못한 제이미가 입을 열었다.

"이제 파견 나갈 때 마다 못 놀리겠지?"

펠릭스는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제이미는 그녀가 미안하다는 말을 눈빛으로 할 줄 아는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는 계속해서 얘기했다.

"괜찮아, 사과할 필요없어. 난 그걸 벌써 토마토로 받았잖아. 그래도 여전히 미안하다면, 벌이라고 생각하고 네가 내 토마토 요리 먹어주면 되지."

펠릭스는 그제야 제이미의 노력에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으웩."

두 사람은 바깥 소식을 들려주는 텔레비전 앞에서 자연스레 멈췄다. 그들은 천장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에서 여행비둘기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여행비둘기는 1914년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새로, 이번 발견으로 인해 이 지역에서 발견된 멸종 동물이 벌써 여섯 종류가……"

"저기, 우리 기지 근처 아니야?"

제이미는 혼자 팔짱을 꼈다.

"그러네, 우리 기지 근처야. 저기서 조금만 더 동쪽으로 가면 아마 네가 방금 내 정신 상태를 황폐케했던 그 사건의 참상이……."

"야, 그만해!"

펠릭스는 제이미가 능글맞게 웃고 있는 모습을 예상하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바로 1마일 옆에서는 저렇게 새 하나만 보고도 좋아하는데 말야……."

“…….”

제이미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이번 탈주자들을 제압하고 현장 정리할 때 말인데…… 아 물론, 뒤처리 팀은 따로 있지만, 생존자 확인이라던가 뭐 그런 기본적인 절차 진행 때를 말하는 건데. 그 때 본 시체들 중에, 한 덩치 큰 흑인이 목에 걸고 있던 커다란 은 십자가가 자꾸 생각나. 웃긴 게 뭔지 알아? 여기서 일하는 우리들은 벌써 신을 버렸는데, 그 사람들은 아직도 저녁마다 그런 걸 손에 꼭 쥐고 기도를 올린다는 거야.”

제이미는 문득 말을 멈추고 자신이 방금 펠릭스에게 어떻게 보였을 지 생각했다. 갑자기 너무 감상적으로 지껄였다, 방금 전에 가까스로 그 분위기를 타파했는데 이런 실수를……. 그는 펠릭스가 다시 우울해할 거라는 생각에 당황하여 뒤이을 말을 생각하며 허둥지둥 뒤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의 역할을 반사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뭐야, 그래서. 벌써 그만두려고? 약해빠진 녀석이."

제이미는 안도함과 동시에 어이가 없었다.

"뭐라고? 너는 갑자기 왜 그렇게 기가 살았냐."

펠릭스는 낄낄거렸다. 그녀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팔을 쭉 뻗으며 제이미에게 말했다.

"토마토 하나만 봐도 좋아죽는 소박한 사람이 할 소린 아니었잖아. 네가 버렸다고 하나님 아버지까지 널 버리시랴? 아무래도 잠을 못 자니까 네가 헛소리를 하는가 보다. 그만 자러 가라.“

“헛소리라니, 나름 진지하게 냉소주의 철학을 펼친건데 이 년이…….”

“힘들 때 서로 돕는 게 친구지, 안 그래?"

"방금 그게? 돕긴, 개뿔."

제이미는 정색을 하며 친구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는 척 하며 딴청을 부렸다. 항상 써먹는 레퍼토리다. 제이미는 일부러 티를 내며 눈치를 살피는 펠릭스의 모습을 보면서, 이 정신 나간 직장을 공유하는 친구의 존재가 얼마나 큰 것인지 새삼 느꼈다. 정신병자 취급받을 걱정 없이 괴물들에 대해 얘기할 수 있고, 상대방이 느끼는 충격과 괴로움을 송두리째 함께하는, 서로서로 밀어주고 받쳐주는 존재.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웩, 이것도 너무 감상적인 생각이잖아.

"제이미, 이때쯤 나와 줘야 하는 말 있지 않아?"

"뭐?"

펠릭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손바닥을 위로 하고 어깨까지 올리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 놈의 입버릇, 제이미는 한숨을 쉬고 그녀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쏘아준 뒤, 재킷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었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말했다.

"뭐, 언젠간 웃을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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